잡문

아줌마무리 중의 아저씨 (2012.3.9)

난해 2015. 9. 28. 16:55



  ‘아줌마들 사진과 바람나다’라는 책이 나와 친구들이 책 속의 제 글과 사진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할까요? “너도 아줌마냐? 혹시 늘그막에 그녀들과 바람난 것은 아니냐? 네가 아줌마가 아니라도 남자 체면은 어디 갔냐? 저런 난해한 녀석, 쯧쯧쯧”할 것입니다.


  허나 책이 나오기까지 젊고 예쁜 두 여선생님, 열 두 세 명의 아줌마들과 같이 지낸 즐거움을 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종종 그녀들과 식사한 후, 왼손은 왼쪽 옆구리에 대고 오른손으로는 커피 잔을 그득 실은 쟁반을 들고 오는 꾸부정한 저의 모습을 그들이 보았겠습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 저는 여자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형제는 여자만 열둘이었으니까요. 저는 이종사촌 중 남자로선 제일 맏이였고, 공부도 잘 하고 착실해서 기대주였죠.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모들 덕인지 모릅니다. 처음 글이라고 쓴 것은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습니다. 우리 집은 태재고개 아래, 분당 열병합처리장 자리에 있었던 초가집 세 채 중 맨 위에 있던 집이었고, 밤에는 그 뒤로 여우 늑대가 울며 지나가고는 했죠. 맨 아랫집에는 우리 담임, 박경순 선생님 하숙집이었고, 그 집에는 제가 좋아하는 풍금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산골에 이모들이 왔다 간 후, 조그마했던 제 가슴이 얼마나 허전했겠습니까? 헤어짐과 아쉬움을 써 보낸 저의 편지는 이모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죠.


  또한 중학교 시절 사진을 찍게 된 것도 이모들 덕분이었습니다. 이모들이 쓰던 독일제 래티나(Retina) 카메라를 빌려와선 제 것으로 만들고 말았죠. 중학교 때 친구들과 신설동에서 길렀던 토끼들 사진. 고등학교 시절 남산, 덕수궁에서 이모들과 찍었던 사진. 백운대 가는 길에 폼 잡고 있는 사진 등. 찾아보면 집안 어디에 있을 것입니다. 주름상자가 있어 렌즈가 들락날락하던 고급제품이었는데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아쉽기만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모들한테 예쁨도 받은 만큼이나 시달림도 받았습니다. 기대를 받는다는 것 자체도 시달림이니까요. 한의사이셨다는 외할아버지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분이었습니다. 의술에 도통한 분이 어째 딸 열둘을 가졌으며 그럼에도 왜 양아들 한 명을 들이셨는지 말이지요. 외삼촌 돌아가시고 용인 외대분교 인근에 있는 노른자위 땅이 다 외사촌들에게 돌아갔으니 어머니 형제들 어떠셨겠습니까. 미국에 사시는 이모들, 특히 아홉 번째 영구(九)이모께서는 저보고 그들과 담판을 지어 재산을 찾아오라고 성화 독촉하셨습니다. 다행히 맘씨 제일 좋으셨던 그 이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종중재산을 처분한 대금 중 일부를 찾아 그녀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삼십년 넘게 한 직장 다니며 많은 시간을 여직원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들과 잘 지냈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그녀들을 위해 노력도 무진장 했죠. 때로는 아줌마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했고, 아줌마 조직들과 관련 있는 일도 했습니다.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도 많이 썼고요. 퇴직을 하고는 글 쓴다고 아줌마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그녀들 중에는 사진을 잘 찍는 한 아줌마가 있었는데, 그녀가 찍은 사진들을 보니 사진이 찍고 싶어지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그만 사진에 바람난 여자들에게 걸려들었죠. 이 아줌마들, 골치 아픈 아줌마들입니다. 같이 사진 찍으러 가면 여름 겨울도 없고, 눈비도 관계없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날 새는 줄도 모르니 남의 사정은 조금도 상관치 않습니다. 그녀들과 수없이 만났지만, 노래방을 갔다든가 고스톱을 했던 일은 한 번도 없었지요.


  경주로 제주로, 먼데 가까운 데로 사진 찍으러 다니다 보니 방이 딱 하나 있는 콘도에서 열 명 가까이 되는 아줌마들과 같이(?) 잔적도 있습니다. 저를 대우해 그녀들은 거실에서 잤고 저는 방에서 잤습니다. 화장실을 가려면 방안의 잠금장치를 풀고 방안에서 밖으로 노크를 한 후에야, 거실로 나와 다시 실외 화장실을 찾아야 했죠.


  그렇게 사진에 바람난 아줌마들과 허구한 날 나다니니 집사람은 저를 바람난 남자로만 생각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더 하였습니다. 삼십대 말, 제가 지방에서 서울발령을 받은 후에 지방 정보과형사가 저를 바람난 사람으로 조사한다는 헛소문에 집사람은 한참 걱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십대 초 비오고 벚꽃이 애잔히 떨어지는 봄날, 도쿄 한 공원에서 중국 연수생 란차이와 같이 우산을 쓰고 거니는 현장이, 우리아파트 앞집 기환이 고모한테 목격이 되어 난리를 친 사건도 있었습니다. 사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우연한 일이었고, 당시 중국과는 정식외교관계가 없었던 시절이라, 그녀의 한국 입국을 도와주려고 같이 한국영사관에 갔다가, 시간도 남고하여 공원을 거닌 것뿐이었는데 말입니다. 너무 예민해졌던 그녀는 아파트 위층 교장선생님 막내따님, 한국일보 다니는 처녀를 직장 가는 길에 전철역까지 태워줬다고 심한 잔소리를 해댔었습니다.


  다행히 요즈음은 제가 성실한 남자인줄 인식했는지, 사진에 바람난 남자를 포기 했는지, 관심을 끊었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사진 작업하는 제 뒤에서 “사진 정말 좋아졌네.”라며 칭찬까지 합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제 친구, 말없이 친구들을 위했으며 일생동안 성실히 살아왔고 부인에게 충실했던 그는 저더러 난해한 놈이라고 했죠. 사진과 바람난 아줌마들과 그렇게 싸다녀도 집사람과 사이가 좋다고 말입니다. 마지막 숨 거두기 전날 그의 부인이 그에게 들려준 애절한 사랑의 말이 기억납니다.


  “나 몰래 빼돌린 비자금, 칠백만원도 써보지도 못하고 간다고? 에이, 못난 사람아!”  몇 번이고 그녀는 중얼거렸죠. 출상 전날 그의 사위와 그에 대한 얘기를 정감 있게 나누었습니다. 사위를 시켜 그녀 몰래 비자금을 마련했던 일. 혼자서는 365코너에서 현금인출도 못했던 일. 외손자를 극진히 사랑했던 얘기 등. 집사람으로부터 자유롭다하면 자유로운 저의 생활과 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그의 생활과 어느 편이 좋은 가는 비교할 수 없겠죠?


  저의 요즈음생활은 혼자 유유자적하는 생활, 친구들과 노니는 생활 그리고 아줌마들과 사진 찍는 생활로 채워집니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과의 생활이 빠졌네요. 그러나 그것은 기본 아니겠습니까? 중국어를 비롯하여 외국어 회화를 조금 연습하고, 도서관에서 여행기, 문학 작품 등을 빌려 읽고, 인터넷 바둑을 두는 즐거움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 좋지요. 정기적으로 등산을 하고, 틈나는 대로 여행하는 일은 몸을 단련할 수 있는 외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 할 수 있어 좋지요. 사진에 미친 아줌마들과 어울려 출사하는 것도 이젠 중요한 생활의 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글공부도 해야 하고 사진공부도 해야 하니 생활에 긴장감을 줄 수 있고, 그녀들과의 여행은 친구들과의 여행과는 다른 맛이 있죠.


  어쨌든 저의 요즈음생활은 글쓰기, 사진 찍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그것들을 저장하고 밖으로 끄집어 내놓고 생각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인생은 살찌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사진에 미친 아줌마들한테 잘 걸려들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