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럼

도상탈출, 바야흐로 사진 2(2017.9.23)

난해 2017. 9. 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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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이 살았던 강화읍 관청리 용흥궁 입구,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였던

심도직물(1947-2005)의 굴뚝이 남아있다.

 

심도는 강화 옛이름의 하나.

 

 

그 옆에는 김상용선생의 (1561-1637) 순절비.

 

문인이며 정치가였던 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자폭하였다.

 

몽고침입시 수난을 당한 강화도는

병자호란때도 화를 입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떠나 강화로 피신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고,

세자빈, 두 대군 만 피신했었다.

 

남한산성을 함락한 청군은

강화도로 들이닥쳤다.

 

 

용흥궁 건너편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는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탄생.

당시 헨리8세(1491-1547)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천일의 앤'의 앤과 결혼하려했으나

 교황이 반대한 것이 성공회 설립의 촉매가 됨.

 

성공회는 중용의 길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고.

 

1900년 축성된 성당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의미로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건물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이고

배치와 내부구조는 바실리카건축양식.

 

당시 신도들에게 친밀감을 주려고.

 

 

1900년 선교사가 인도에서 가져와 심은

보리수나무.

 

 

성당이 역사적 건물인 만큼

내부에는 당시 신도들, 주교등의 사진

등이 걸려있다.

 

 

수양하고 마음을 정결히 하면

악을 물리치고 선하게 될 수 있다.

 

바실리카양식은 초기교회 건축양식으로

일반적으로 장방형 건축.

 

 

용흥궁은 원래는 민가였으나 철종이 등극하자,

당시 강화유수가 궁을 세웠다.

소박한 느낌이 든다.

 

철종(1831-1863)은 14년 재위기간 중

안동김씨에 휘둘렸고, 민란이 많았으나

탐관오리 징벌, 빈민구호에 적극적이었다.

 

강화도령시절엔 양순이라는

결혼상대자가 있었고.

 

 

지붕 위로 뭉게구름이 일고,

 

 

담장 위엔 예쁜 능소화,

양순이의 혼인가?

 

 

고려궁지 가는 길엔 강화문학관이 있고

강화관련 문인, 이규보, 함허대사, 정철,

강화학파 정제두 등의 자료가 전시됨.

 

또 1906년 고재현선비가 쓴 기행문,

'심도기행'이 소개되고 있다.

내용이 궁금하다.

 

 

2층은 조경희(1918-2005)수필문학관.

 

강화출신으로 정무장관을 지낸 그녀의

작품, 소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강화나들길 1코스엔 강화산성 남문, 김구고택,

용흥궁, 성공회성당, 고려궁지 등이

안내되고 .

 

 

길거리 담장에는 병인양요, 고려자기,

팔만대장경 등 역사적 사건이 그려져 있고.

 

독일 뉘른베르크의 역사가 있는

벽화가 생각난다.

 

 

강화초등학교 정문에는 조봉암선생

(1898-1959)의 존함이 새겨져 있다.

 

선생은 이 학교 출신으로 2대 국회부의장과

농림장관을 했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낙선.

 

일찌기 박헌영과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진보당 사건으로 교수형을 당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권력투쟁의 희생양?

 

농림장관시절에는 농지개혁을 주도.

 

 

이어 고려궁지로 발길을 옮겨

강화유수부 동헌, 명위헌(明威軒)을 들렸다.

말발을 세우려면 위엄을 밝혀야겠지.

 

유수부는 고려시대는 옛도읍지, 군사요지에

조선시대는 개성, 전주, 강화, 경기광주,

수원에 두었으며, 수도외곽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행정이 주임무.

 

1627년에 강화유수부로 승격되었고,

건물은 2003년 복원.

 

 

동헌 앞 느티나무, 1631년(인조9년)에 심었다.

 

고려는 1232년 개성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긴 후, 1270년에 환도하였는데,

고려궁지는 그동안의 궁궐터.

 

39년 긴세월동안 고려는 몽고와의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다.

 

이자리에 조선이 행궁, 유수부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

 

 

1782년 정조때 왕실관련 의궤, 족보,

도장 등을 보관하려고 외규장각을 건립.

 

 

어람용 의궤는 주요왕실행사를 기록.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에 약탈당했다,

2011년 귀환.

 

 

강화부 궁전도.

 

1695년 장녕전, 그이후 만녕전이 건립되어,

숙종, 영조의 영정이 각기 봉안되었다.

 

이 시설들은 병자호란, 병인양요때

모두 소실되었다.

 

 

우리는 강화읍 고려궁지를 떠나

석모대교를 거쳐 석모도에 입성.

 

석모도 미네랄온천에서 세족.

얼마나 뜨거웠던지,

발들이 빨갛게 익었다.

 

모두들 효과가 있었다고 한마디씩.

공짜라서 그런건 아니겠지.

 

 

이곳을 온천지로 개발, 건축이 한창.

모델하우스를 지어넣고 분양 중.

 

 

이어 온천에서 멀지않은 어류정항으로 이동.

 

트레일러에 텐트를 치는 등

가족단위 젊은 캠핑족들이 많았다.

 

조그만 포구에 어류정이란 정자 하나

지어놓고 어류정항이라고.

 

석모대교건설에 따른 투기붐,

엉성한 관광지 개발 등이 느껴졌다.

 

 

선착장에는 닻이 두세 개.

 

석모도는 22번째 큰 섬으로,

강화도의 1/7크기. 주민은 2,300명.

 

강화도는 4번째 큰 섬으로 인구는 6만명.

 

 

늦은 오후의 바다는 작열하고.

 

 

꼬마도 낚시한다고.

낚시하는 젊은이들 낚시대만 넣다 뺐다,

잡는 것을 못보았다.

 

 

부식된 철주.

조그만 따개비만 잔득.

 

 

놀러온 가족들, 왔다갔다.

 

 

어류정 건너 바다도 작열하고.

 

 

전망대 끝에서도 서성거려보았다.

 

 

빛바랜 항구풍경.

 

 

상가로 나가 생새우 맛보려했더니,

5만원 이하는 안판다고.

한 마리 2천원꼴.

 

서울 하계역 근처에서 팔팔뛰는 틈실한 새우

한 마리에 천원이었는데. 

 

 

육지로 나오는 길,

해안엔 칠면초가 꽃을 피웠다.

 

명아주과 칠면초는 1년생 초본.

8-9월 홍자색 꽃을 피우고,

나물, 볶음, 국, 찌개용으로도 쓰인다.

 

 

세 척의 고깃배,

그물을 드리웠다.

 

 

석모도를 오가는 배들은 폐선이 되고,

갈매기 새우깡주던 일은 추억 속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시간이 길었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은 것같다.

 

 

쓸쓸하기 그지없는 선착장.

 

 

뒤돌아본 석모대교.

길이는 2.5키로. 올해 6월 개통되었다.

 

외포리를 지나쳤는데, 여전히 붐볐다.

회는 역시 외포리.

 

 

반짝이는 바다와 외로운 나그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정지용의 바다)

 

 

바다엔 태고적  정적만이 남고.

 

 

해변의 집들도 저녁을 맞는다.

 

 

화도면 동막리의 해수욕장, 여전했다.

길이 200미터의 강화도 유일의 해수욕장,

 

 

동막해수욕장을 내려다 볼 수있는 분오리돈대,

 

1676(숙종5년)에 설치한 초지진 외각 포대.

동,서,남벽 모두 바다에 면한 절벽요새.

 

 

일몰이 가까워졌다.

 

 

쾌속정은 달리고,

 

 

해가 왜 이리 빨리 지나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

 

 

만족하셨나요?

 

'도상탈출, 바야흐로 사진'을 이끌어가는 친구,

여행이 사진보다는 역사, 문화를

알아가는 행사가 되도록 고전분투.

 

 

해수욕장 쪽의 '전망 좋은 집'에서

매운탕에 소주 한 잔 걸치고,

신미양요때 격전을 벌였던 초지진에서

행사 마무리.

 

김포에선 통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고,

강화에선 격동기마다 수난을 당했던

아픈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요즈음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화도 역사기행을 강추한다.

 

집행진에게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고.

동호회회원들, 만날 때마다

정이 도타와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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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이 살았던 강화읍 관청리 용흥궁 입구,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였던

심도직물(1947-2005)의 굴뚝이 남아있다.

 

심도는 강화 옛이름의 하나.

 

 

그 옆에는 김상용선생의 (1561-1637) 순절비.

 

문인이며 정치가였던 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자폭하였다.

 

몽고침입시 수난을 당한 강화도는

병자호란때도 화를 입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떠나 강화로 피신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고,

세자빈, 두 대군 만 피신했었다.

 

남한산성을 함락한 청군은

강화도로 들이닥쳤다.

 

 

용흥궁 건너편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

 

성공회는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탄생.

당시 헨리8세(1491-1547)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천일의 앤'의 앤과 결혼하려했으나

 교황이 반대한 것이 성공회 설립의 촉매가 됨.

 

성공회는 중용의 길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고.

 

1900년 축성된 성당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의미로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건물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이고

배치와 내부구조는 바실리카건축양식.

 

당시 신도들에게 친밀감을 주려고.

 

 

1900년 선교사가 인도에서 가져와 심은

보리수나무.

 

 

성당이 역사적 건물인 만큼

내부에는 당시 신도들, 주교등의 사진

등이 걸려있다.

 

 

수양하고 마음을 정결히 하면

악을 물리치고 선하게 될 수 있다.

 

바실리카양식은 초기교회 건축양식으로

일반적으로 장방형 건축.

 

 

용흥궁은 원래는 민가였으나 철종이 등극하자,

당시 강화유수가 궁을 세웠다.

소박한 느낌이 든다.

 

철종(1831-1863)은 14년 재위기간 중

안동김씨에 휘둘렸고, 민란이 많았으나

탐관오리 징벌, 빈민구호에 적극적이었다.

 

강화도령시절엔 양순이라는

결혼상대자가 있었고.

 

 

지붕 위로 뭉게구름이 일고,

 

 

담장 위엔 예쁜 능소화,

양순이의 혼인가?

 

 

고려궁지 가는 길엔 강화문학관이 있고

강화관련 문인, 이규보, 함허대사, 정철,

강화학파 정제두 등의 자료가 전시됨.

 

또 1906년 고재현선비가 쓴 기행문,

'심도기행'이 소개되고 있다.

내용이 궁금하다.

 

 

2층은 조경희(1918-2005)수필문학관.

 

강화출신으로 정무장관을 지낸 그녀의

작품, 소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강화나들길 1코스엔 강화산성 남문, 김구고택,

용흥궁, 성공회성당, 고려궁지 등이

안내되고 .

 

 

길거리 담장에는 병인양요, 고려자기,

팔만대장경 등 역사적 사건이 그려져 있고.

 

독일 뉘른베르크의 역사가 있는

벽화가 생각난다.

 

 

강화초등학교 정문에는 조봉암선생

(1898-1959)의 존함이 새겨져 있다.

 

선생은 이 학교 출신으로 2대 국회부의장과

농림장관을 했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낙선.

 

일찌기 박헌영과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진보당 사건으로 교수형을 당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권력투쟁의 희생양?

 

농림장관시절에는 농지개혁을 주도.

 

 

이어 고려궁지로 발길을 옮겨

강화유수부 동헌, 명위헌(明威軒)을 들렸다.

말발을 세우려면 위엄을 밝혀야겠지.

 

유수부는 고려시대는 옛도읍지, 군사요지에

조선시대는 개성, 전주, 강화, 경기광주,

수원에 두었으며, 수도외곽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행정이 주임무.

 

1627년에 강화유수부로 승격되었고,

건물은 2003년 복원.

 

 

동헌 앞 느티나무, 1631년(인조9년)에 심었다.

 

고려는 1232년 개성에서 강화로

도읍을 옮긴 후, 1270년에 환도하였는데,

고려궁지는 그동안의 궁궐터.

 

39년 긴세월동안 고려는 몽고와의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다.

 

이자리에 조선이 행궁, 유수부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

 

 

1782년 정조때 왕실관련 의궤, 족보,

도장 등을 보관하려고 외규장각을 건립.

 

 

어람용 의궤는 주요왕실행사를 기록.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에 약탈당했다,

2011년 귀환.

 

 

강화부 궁전도.

 

1695년 장녕전, 그이후 만녕전이 건립되어,

숙종, 영조의 영정이 각기 봉안되었다.

 

이 시설들은 병자호란, 병인양요때

모두 소실되었다.

 

 

우리는 강화읍 고려궁지를 떠나

석모대교를 거쳐 석모도에 입성.

 

석모도 미네랄온천에서 세족.

얼마나 뜨거웠던지,

발들이 빨갛게 익었다.

 

모두들 효과가 있었다고 한마디씩.

공짜라서 그런건 아니겠지.

 

 

이곳을 온천지로 개발, 건축이 한창.

모델하우스를 지어넣고 분양 중.

 

 

이어 온천에서 멀지않은 어류정항으로 이동.

 

트레일러에 텐트를 치는 등

가족단위 젊은 캠핑족들이 많았다.

 

조그만 포구에 어류정이란 정자 하나

지어놓고 어류정항이라고.

 

석모대교건설에 따른 투기붐,

엉성한 관광지 개발 등이 느껴졌다.

 

 

선착장에는 닻이 두세 개.

 

석모도는 22번째 큰 섬으로,

강화도의 1/7크기. 주민은 2,300명.

 

강화도는 4번째 큰 섬으로 인구는 6만명.

 

 

늦은 오후의 바다는 작열하고.

 

 

꼬마도 낚시한다고.

낚시하는 젊은이들 낚시대만 넣다 뺐다,

잡는 것을 못보았다.

 

 

부식된 철주.

조그만 따개비만 잔득.

 

 

놀러온 가족들, 왔다갔다.

 

 

어류정 건너 바다도 작열하고.

 

 

전망대 끝에서도 서성거려보았다.

 

 

빛바랜 항구풍경.

 

 

상가로 나가 생새우 맛보려했더니,

5만원 이하는 안판다고.

한 마리 2천원꼴.

 

서울 하계역 근처에서 팔팔뛰는 틈실한 새우

한 마리에 천원이었는데. 

 

 

육지로 나오는 길,

해안엔 칠면초가 꽃을 피웠다.

 

명아주과 칠면초는 1년생 초본.

8-9월 홍자색 꽃을 피우고,

나물, 볶음, 국, 찌개용으로도 쓰인다.

 

 

세 척의 고깃배,

그물을 드리웠다.

 

 

석모도를 오가는 배들은 폐선이 되고,

갈매기 새우깡주던 일은 추억 속으로.

 

배를 타고 건너는 시간이 길었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은 것같다.

 

 

쓸쓸하기 그지없는 선착장.

 

 

뒤돌아본 석모대교.

길이는 2.5키로. 올해 6월 개통되었다.

 

외포리를 지나쳤는데, 여전히 붐볐다.

회는 역시 외포리.

 

 

반짝이는 바다와 외로운 나그네.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정지용의 바다)

 

 

바다엔 태고적  정적만이 남고.

 

 

해변의 집들도 저녁을 맞는다.

 

 

화도면 동막리의 해수욕장, 여전했다.

길이 200미터의 강화도 유일의 해수욕장,

 

 

동막해수욕장을 내려다 볼 수있는 분오리돈대,

 

1676(숙종5년)에 설치한 초지진 외각 포대.

동,서,남벽 모두 바다에 면한 절벽요새.

 

 

일몰이 가까워졌다.

 

 

쾌속정은 달리고,

 

 

해가 왜 이리 빨리 지나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들.

 

 

만족하셨나요?

 

'도상탈출, 바야흐로 사진'을 이끌어가는 친구,

여행이 사진보다는 역사, 문화를

알아가는 행사가 되도록 고전분투.

 

 

해수욕장 쪽의 '전망 좋은 집'에서

매운탕에 소주 한 잔 걸치고,

신미양요때 격전을 벌였던 초지진에서

행사 마무리.

 

김포에선 통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고,

강화에선 격동기마다 수난을 당했던

아픈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요즈음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화도 역사기행을 강추한다.

 

집행진에게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고.

동호회회원들, 만날 때마다

정이 도타와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