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럼

도상탈출, 바야흐로 사진(익산 나들이)

난해 2018. 4. 24. 00:10

 

모처럼 도상탈출하는 아침길(4/21,토)은

 앞을 예측할 수 없고, 온통 잿빛.

 

우리의 화사한 봄하늘은

언제부터인지 실종된 것같다,

우리나라의 앞길이 그러하듯이.

 

 

600년 고도는 어둠에 묻혀있었고.

 

 

봄비가 자주 온 탓인지

익산 서북을 흐르는 금강은 물이 가득했다.

 

방문할 익산시 인구는 30만 명.

 

 

익산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미륵사지에

도착하니 4월의 색시가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간지선생님과의 재회도 있었고.

 

문화해설사의 마음가짐이

옛절터의 쓸쓸함 을 쓸어버렸다.

 

 

폐사지하면 강원도 양양 서면 미천골의

선림원폐사지(禪林院址)의

쓸쓸한 절터가 생각난다.

 

이런 곳을  배회하는 그 맛을 보려면,

가을이 좋겠지.

 

 

미륵사를 품고있는 미륵산(430미터).

원래는 용화산의 일부였고, 미륵산을 제외한

산줄기는 아직도 용화산.

 

 

신록은 한참이었고.

 

 

미륵사는 의자왕의 아버지, 백제 무왕

(600-641재위)때 건축된 절.

 

선화공주의 청으로 지명스님이 건립하였다

했으나, 유물의 출토로 무왕의 비는 백제명문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라는게 밝혀졌다.

 

미륵사지 석탑은 미륵사, 백제의 심볼이며

석탑은 얼마 안남은 백제유적의 하나.

 

백제(기원전 18-660)는 부여인들이 마한지역에

진출,  4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았고

성왕(523-554재위)때 사비(부여)천도를 했으며

 

법왕의 아들, 무왕때 왕권이 확립되고

국력이 신장되었으나,

무왕 이전 혜왕, 법왕때는 1-2년 사이

왕권이 바뀌었던 불안정한 시기.

 

1990년대 미륵사지

 

 

미륵사지 두 개 당간지주 중의 하나.

뒤에 보이는 9층탑은 근래에 세워진 동원석탑.

 

미륵사에는 동원, 중원, 서원이 있었고

중원에 목탑, 동서원에 석탑이 있었는데

목탑과 동원석탑은 완전 멸실되었다고.

 

 

복원중인 미륵사 석탑.

 

7세기에 세워진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목탑형식의 석탑.

 

   

석탑의 돌들은 알고 있겠지, 무왕 당시의 미륵사 정황을.

 

 

닳고 닳도록 의리있게

주인을 지키고 있는 석상.

 

 

복원중인 석탑 위에 설치된

가설물에서 본 석탑.

 

 

석탑의 유물출토 상황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금제사리봉영기.

 

 

가설물에서 석탑을 내려다 보고

이곳에서 미륵사 전경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의 행운이랄까.

 

 

 꼭대기부분 가설물에서 본

정돈된 절터.

 

 

폐사지의 배회, 뒷짐을 지고.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서

관련유물을 볼 수 있었다.

 

 

꽃무늬가 섬세했고.

 

 

암막새.

백제 당시의 유물은 아닌듯.

 

 

전시관을 나오니,

호수가엔 고독한 여인.

 

서동요에 나오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생각하나?

 

우리 고유의 시가, 향가는

삼국유사 14수, 균여전 11수가 전해지는데,

최초작품은 신라 진평왕때 서동요가 최초작품.

 

서정적이지만 불교적 주사적 의미가 크다.

서동요는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합을

노래를 통해 먼저 기술함으로써

목적을 성취한 사랑의 주가(呪歌).

 

서동요의 주인공이 백제 동성왕,

원효대사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에는 당간지주와 파편들.

폐사지엔 적막이 흘렀다.

 

 

황토쌈밥집에서 모두들 만족해 하는 점심 후

성당면에 있는 교도소세트장으로 이동.

 

성당이 있는 곳에 교도소가 있어야겠지.

 

 

환한 미소의 죄수와 경찰,

우리나라가 밝아지겠구먼.

 

 

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된 것을 보면,

주인공들이 교도소와 인연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 찾기를 즐겨하나 보다.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고.

 

 

나 또한 그중의 하나.

 

 

'희망이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즈음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 중,

과거 이곳과 인연이 있었고

또 앞으로 인연이 있을 수도.

 

 

한편엔 고백커피 파는 곳도 있고.

 

 

이곳 빼놓고는

사실 교도소분위기가 있는 곳이 없었다.

 

 

사랑의 수갑을 원하는 여인.

 

 

교도소 정문 앞 포장마차에는

두부가 품절.

 

 

복사꽃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교도소에도 봄날이 왔나보다.

 

 

다음은 함열읍 석매리에 있는

고스락 전통장 방문.

 

2만평에 3,500개의 항아리가 있는 곳.

고스락은 최고라는 뜻이라고.

 

 

황토에도 봄이 왔고,

 

 

연산홍의 계절 4월이 찾아왔다.

 

꽃의 향기는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행복한 미소로 덮어놓고

우리네 삶에 새 생명을 주는

4월, 그대는 희망을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다.

 

(안성란의 4월의 노래)

 

 

봄날은 고민의 계절이기도 하고,

 

 

살랑살랑 흔들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왕궁면 왕궁리 유적.

 

유적전시관은 겉만 으리으리하고.

 

 

왕궁리 유적은 1998년 사적으로 지정.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또는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확증은 없고 설이 많은 곳.

 

5층 석탑 주변 구릉지에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유적, 절터 배치 유적이 발견되었다.

 

1989년부터 20년간의 조사 결과,

무왕 당시 건설되어 경영되다, 이후

사찰이 건립되었다고.

 

건물지, 공방지, 대형화장실자리가 있고,

금 유리제품, 수막새, 토기류 등이

발견되었다고.

 

 

유적지의 5층 석탑.

 

1965,66년 해체 복원시 금강경판,

금동제 사리함, 사리장엄구가 나왔다고.

획실한 축조시기는 알 수 없고.

 

 

건물터 등 설명문 만 있고

 

 

정리된 잔디 조형물만 있다.

 

 

정형화된 건물터.

 

 

아직도 발굴 중

 

익산시 석왕동에는 쌍릉인 대왕묘 소왕묘가 있다.

마한의 무강왕릉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무왕과 왕비의 능일 가능성도 있다고.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버스를 타려니,

연두색 지붕의 한옥이 눈에 띄었다.

 

뚜부카페에서 저녁식사하고

간지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귀경하는 길은 토요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백제왕국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요번 나들이의 주안점.

 

부족한 유물 유적으로 한계가 있는 역사탐방에

상상의 나래를 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지만,

 

부여의 백제문화단지의 고증없이 지어진 

거창한 궁궐 등에서 느낀 허전함을

이곳에서도 맛보았다.

 

폐사지나  왕궁리 유적의 잘 정돈된 모양,

거창한 유물전시관보다는  원형에 가까운

유적보전이 낫지않을까 하는 생각.

 

아무튼 도상탈출팀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