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대마도 1박3일

난해 2018. 5. 2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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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화) 초파일날,  0시10분 집을 나섰다.

시청가는 막차를 타고 덕수궁쪽으로 내리니

돌담이 멋있었고.


 서소문파출소 화장실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경찰관 한쌍이 열심히 근무하고 있었다.

부산행버스가 있는 돌담쪽으로 되돌아 오려니,

주태백의 욕지거리 소리.


버스를 타고 밤을 보내자니

옛날  밤중에 노고단에서

시작한 지리산 종주가 생각나고.


이학균회원 사모님한테, KTX가 아닌 버스

여행이라 따님이 걱정되어 젼화를 했는데,

'재미로 하는 여행이니 걱정말라고-'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

아침은 부산명물 돼지국밥으로.

9:30 대마도가는 오션훌라워호 출항.


대마도는 제주도의 0.4배, 거제도 두배.

인구 31천명. 리아스식해안으로 일본 2위의

오징어 생산 등 해산물 풍부.


고려말 때부터 조공을 해왔고,

1389(고려 창왕), 1419(조선 세종)

두 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대마도 번주는 고려, 조선의 관직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땅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미군정은 동의치 않았다.




대한해협은 풍랑이 거세어

일부 여인네들 배멀미를 했고.


옆자리의 마산여인네들 배고프다 하여

연유를 물었더니

배멀미를 걱정, 아침을 걸렀다고 했다.


대마도는 한반도에서 49.5키로,

일본 사가현에선 82키로 거리.




배는 1시간 10분 정도 달려,

대마도 북부에 있는

나가사키현 쓰시마시 가미쓰시마초

시골동네 히타카츠항에 도착.


변방에 있는 외딴섬 북쪽 외곽에 있는

항구는 한국에서 제일 접근이 쉽고,

특히 윗섬은 한국관광객 천지.


휴일에는 하루 3-5천명의

한국관광객이 이곳에 온단다.



조그만 가옥들이 정겨웠다.

대마도의 어원은 고대 한국어 '두섬',

백제 대마리에서 왔다 하기도.


백제 근초고왕때 백제인들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위아랫섬이 두 마리 말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형상이라 하고.




千鶴이란 곳에서 점심으로

가락국수+회초밥 몇 덩어리.


일본의 커피맛은 정말 맛있었다.

일본이 유명산지의 커피농원을 지원하여

질좋은 원두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




(김재윤회원 사진)


첫 방문지는 미우따(三宇田)해수욕장.

에메랄드빛 100대 해변이라는데.




요번 여행 주체는 동네 퇴직동료모임,

'봉화산회' 네명과 두 부인이 참석.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그런지

참여 회원이 적었다.




(김재윤회원 사진)

다음은 꼬불길을 올라, 한국전망대.

섬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맑은 날이면 부산, 거제가 보이고.




내려다보면 우측엔 해상자위대 레이더기지.

멀리 일엽편주 떠가고 있고.



전망대 앞에는 1703(숙종) 조난당한

108명 조선통신사 일행을 기리는

조선국 역관사 조난 위령비가 있다.


임진왜란 전에도 통신사가 갔지만,

전쟁 후 1607(선조40년)-1811(순조11년), 막부

요청으로 12회에 걸쳐 통신사절이 파견되었다.


정치 외교 현안 해결, 취임축하를 위해

갔으며, 상당한 문화교류가 이뤄졌고,

규모는 사오백명, 소요기간은

왕복 6개월 내지 1년 걸렸다.



(대마도지도)




중부지방으로 이동, 가파른 산길을 올라,

에보시다께(鳥帽子)전망대(164미터)로.




이곳에 서면 아소만의 절경이

펼쳐진다. 하롱베이같다고 하지만,

그와는 다른 풍경.




올 때와는 다른 급경사를 내려가

와따쯔미(和多都美)신사로.




좁은 산길을 큰 버스들은 얼마나

잘 오르는지. 마주오는 차량과

충돌없이 양보하고, 때로는 후진하며.




와따쯔미신사의 첫 도리이(鳥居)를 통과.


아소만 입구에 위치한

이 신사는 일본에서 유일한 용왕신사로

일본기원신화가 깃든 곳.


천신의 아들이 낚시바늘을 찾다가

용왕의 딸을 만나 결혼, 아들을 낳게되고,

이들의 아들은 이모와 결혼,


아들을 낳게되니, 초대 천황,

진무텐노(神武天皇)가 되었다고.


천신 부계와 해신 모계의 결합.




5개의 도리이 중 2개는 바다쪽에

2개는 육지에, 하나는 중간지점에 위치.

한반도도래설을 암시하기도.




암수 두 마리의 고마이누(고려견)가

지키고 있다.


신사 입구에 있는 테즈미야(手水舍)의

물은 먹는 물이 아니고 손씻는 물.




신사 안은 빈 공간 뿐.




우리는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서

인공으로 판 운하에 세워진 현수교,

만제키바시(万關橋)를 걸어갔다.


운하건설로 섬은 둘로 나뉘고.

 북방진출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고.


만제키운하의 서쪽은 아소만,

동쪽은 미우라만으로, 일본쪽에서

대한해협을 최단거리로 건널 수 있다.




1904년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희망봉을 돌아 이곳에서 일본군에 대패,

한일합방의 디딤돌이 되었다.


또 대마도가 임진왜란의 거점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말을 하기 전에, 대마도는 우리에게

통한의 땅이라 할까.


한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밀입국,

밀수의 땅으로 얼룩졌었고.


대마도에 김성일시비가 있는데,

일본에서 의도를 갖고  세운 것은 아닌지.


임진왜란 전에 이곳을 방문하고도,

전쟁의 염려가 없다고 보고하여

조선은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신창근회장 사진)


메고시마(女護島)는 만제키운하를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들었다고.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에 오니

파출소 앞에는 경찰관 모집공고가 있고,

일본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즈하라(厳原)에는 대마도인구의 절반,

16천명이 살고 있고.


거리에는 한글로 '이즈하라우체국'이라고

 쓴 우체국 간판 등, 한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의 숙소, 토요코인.

새로 지은 숙소라 깨끗했고.


일부는 딴 숙소에서 잤는데,

불평이 많았다. 지저분하고 불편했다고.

젊은 사람들이 적고, 노인들이 객실관리를

하는데, 그나마 일손이 부족하다고.




지온(祗園)에서 저녁, 맛있었다.

숙주, 버섯이 곁들인 고기구이,


그리고 대마도 삵이 그려진

쓰시마 야마네코 25도짜리 소주.

대마도물은 수도물을 그대로

먹을 정도로 깨끗.


야마네코, 삵은 본토에도 없는

대마도의 천연기념물.




(김재윤회원 사진)

식후 가요주점으로 옮겨

흥겨웠던 자리.

1인당 3천엔.




다음날(5/23,수) 궂은 비는 나렸고.




정갈한 숙소 방에 있는 '자신을 알라', '영어 일어로

된 불교성전', '마음의 보석을 꺼내는 책' 등.




호텔식당에서 간단한 부페식 식사.


서일본신문을 보았는데

아베수상이 곤혹에 빠져있다는 보도 등,

별 내용이 없었다.


일본언론은 엉터리 정치 중심

우리 보도와는 달리,

국제, 경제 중심 보도라고.




아침 여행길,

비구름이 잔뜩 끼었다.


버스가 출발하려니 우리팀이 아닌 노인네

둘이 타고 있어 웃었는데,


오후에, 시내에서 우리팀 둘이 딴 여행팀을

줄줄 따라가고 있었다.

이젠 남의 일이 아니다.




비내리는 이즈하라항.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가는 길,

힘든 언덕길 오르며 버스는 헐떡헐떡.




(신창근회장 사진)


물살이 거칠어 은어가 되돌아간다는

아유모도시공원에 도착,

세가와세리류바시 흔들다리를 건넜다.




물살이 얼마나 쎄던지.




산골의 논, 모내기가 끝났다.




(이학균회원 사진)

이즈하라 시내로 돌아와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를 찾았고.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 난 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일본에 간 뒤 1931년 대마도 번주의 아들,

소다케유키와 정략결혼, 희생물이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낙선재에서 사망.


기념비는 덕혜옹주의 시댁,

가네이시(金石)성에 있다.


한국관광객이 늘자, 2001년 일본인들은

없애버린 결혼기념비를 다시 세웠고.


이러한 가식적인 한국관계 기념물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이학균회원 사진)


덕혜옹주 시댁에서


가네이시성 뒷쪽에는

아리아케(有明)산(558미터)이 있고,


성의 정원은 붉게 익어가는 매실,

 산딸나무꽃 등으로 이름다웠다.




다음은 인근에 있는 하찌만구(八幡宮)신사로.


일본 무인의 수호신이며 어부를 보호하는

신사인데, 의병장 최익현이 압송되어

구금되었던 장소.



신사 뒤의 울창한 숲.

키다리 녹나무의 줄기를 볼 수 있다.




하치만구신사 옆에 있는 이마미야(今宮)

와카미야(若宮)신사.


임진왜란때 선봉장 고시니유키나가(小西行長)

딸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을 모시는 신사.


그녀는 대마도번주와 정략결혼했는데,

고시니유키나가가 권력싸움에서 패하자,

이혼 당하고 추방되었다.

이후 독실한 캐돌릭 신앙생활을 했고.


신사하면 도쿄의 야스쿠니신사가 생각난다.

벗꽃피면 더욱 아름다운.


1988년인가, 중국과 외교수립전 중국인의

한국입국허가증을 받으러 중국여자와

영사관에 갔다가, 벗꽃 핀 야스쿠니

신사를 둘이 우산받고 걸었었는데, 공교롭게

이현장이 마나님귀에 들어가 혼이 난 일.


하여튼 2차대전 전범을 비롯 250만명의

혼을 모신다는 이 신사는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많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당이나 국립묘지

같은 것인데, 일본의 수상이 신사를 참배

했다고 신경쓰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

가짐을 바로 잡는 게 보다 현명하지 않을까.


임진왜란, 일본 지배의 원인은

당파싸움 등 우리내부의 분열에 있는데도,


요즈음 우리나라의 위기상황에도

똑같은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 못하고,


내부 싸움에 골몰하고, 남 탓하고

주위 강국의 놀음에 놀아나고.

또 인권을 무시하는 이북에 동조하여

그들의 놀음에 끌려가고.





다음으로 나카라이도스이(半井桃水,1860-

1926)생가를 찾았다.


그는 일본 개방기 여류작가

히구치이치요의 스승.


그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개업한 의사. 

따라서 한국어에 능통했고, 생명의 존엄성,

반전사상을 가졌고 조선인에 우호적이었다.


아사히신문기자였고, 춘향전을 번안했으며

히구치이치요와 사제지간에서

연인으로 발전.




히구치이치요(1872-1896)는 하급무사의 딸로

불행하게 살다가 24세로 생을 마감.


메이지시대 다양한 여성들의 삶과

고뇌를 언어화했다.


14개월 작가생활에도 불구하고,

2004년부터 발행된 일본 5천원권의 주인공.


2009년부터 발권된 우리 5만원권의

주인공 신사임당과 좋은 대비가 된다.




생가가 있는 마을의 예쁜 담장.

화제에 대비 이 마을은 돌담을 쌓았다고.


대마도 중심지 나카무라(中村)에

있는 대마도 번주의 저택과 성,

사무라이주택은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백제후기 656년 백제 비구니 법묘가

세운 슈센지(修善寺).


1906년 의병장 최익현(1833-1906)선생의

시신이 이곳에 5일 안치되었었다.

1986년 선생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고.


구한말 호조참판까지 오른 선생은

을사보호조약 무효를 선언했고

국권회복에 힘쓴 무신.


74세 고령에도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제에 의해 대마도에 끌려왔고

이곳에서 사망, 주검은 부산으로 이송됨.


수선사는 입장 금지되어 있었고

주변 인가는 떠들지 말고

지나가라는 주의문을 붙여놓았다.


장사 속에 열중인 그들에게

최익현비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제 저녁을 든 지온에서 점심도시락.


식당의 게이샤인형이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거리의 장례전문업체 心和堂 앞의 상주들.




면세점 앞 아이스크림기계에 남은 동전

써버리려고 동전을 넣었더니,

계속 뱉어내고.


옆의 일본 젊은 친구 해보고는 안되니, 

스마트폰을 계속눌러

주인과 연락하나 했더니,


'기계가 안되어 미안합니다'라고

쓰여있는 폰의 화면을 보여줬다.

번역앱을 활용한 모양.


결국은 가게에서 맛없는 녹차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기계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맛이 못한.



우리는 귀국을 위해

이즈하라항으로.



올때와 같은 배로 귀항할 때는

좌석도 똑같고, 이웃도 똑같고.


파도만은 올 때와 달리 잔잔했다.

나당연합군이 일본을 갈 때는 거센 파도가,

그들이 쳐들어 올 때는 조용했구나.


마나님보고 남은 동전으로 맥주사오라

했더니 들은 척도 안하니, 옆의 마산여인

맥주사서 한 캔 권했다.


그래 마시려니, 마나님 뒤돌아보더니

'그사람, 술 마시면 안되요'했다.

측은해 하는 그녀들의 눈빛.




오륙도를 지나 귀항,

오후 네시 출항하여 2시간 정도 걸려.


다시 버스타고 칠곡휴게소에서

김밥으로 저녁 때우고,

5/24(목) 0시 넘어 잠실도착.


버스기사는 손님 싣고 다시 부산으로

간다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지하철 막차 타고 집에 오니

1시가 훨씬 넘었다.


동행한 여러분들 고마웠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대마도풍경,

그리고 이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