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친구 찾아 뉴질랜드로
2017년 6월,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오길수친구의 귀국으로 고교수학여행 당시 같은 방을 썼던 5명의 모임이 열렸고, 뉴질랜드는 트래킹의 천국이라는 친구의 권유와 초청으로 발 빠르게 뉴질랜드여행이 진행되었다.
길수친구가 대충 짜준 계획에 맞춰 2018년 2/19일부터 3/12일까지 뉴질랜드 남섬, 북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계획을 세웠다. 뉴질랜드 관광청 자료를 참고하여 산을 좋아하는 만큼 트래킹 위주로 가볼 곳을 선정했고, 패키지여행 시 돌아보았던 밀 포드 등 모든 곳을 제외했다. 시기는 피서객이 철수하기 시작하는 2월말(우리나라의 8월말)부터 3월초로 정했다. 최고 성수기는 아무래도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가격이 비쌀 터이니.
우선 남, 북섬을 오가는 훼리를 일정에 맞춰 예약했고, 숙소는 남섬에서 가장 붐비는 관광지, 아벨테즈먼국립공원 내에 있는 모두에카의 모텔에 2박 만을 예약했다. 자유여행이라 일정을 확정해도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항공편은 비용을 절감하려고, 도쿄에서 한번 에어뉴질랜드로 갈아타는 비행기를 잡았고.
2018년 2월19일, 대망의 뉴질랜드 여행은 시작되었다. 일찍 김포공항에 나간 우리들은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부칠 수 있는 짐의 한계중량은 23키로인데, 류흥구친구의 짐을 재보니, 27키로. 6인용 전기밥솥과 팩소주 25개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초과된 분량을 내짐으로 옮겨 실어서 해결. 6인용 밥솥은 여행 내내 큰 효자였다. 하루에 한번 밥을 하면 족했으니까.
15:50 이륙한 아시아나 비행기가 하네다공항에 가까워지니 후지산이 보였고, 이곳에서 네 시간을 대기했다. 맥주도 한 잔 하고. 뉴질랜드에 집이 있다는 방원익친구에게 연락을 했더니, 인도네시아에 휴양하고 있다하는데, 곧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갈 예정이라고. 목소리가 신통치 않았다. 쾌유를 빌 수밖에.
2월20일 화요일 12:40분, 10시간 이상 날아, 마오리의 나라에 도착했다. 뉴질랜드 국토는 우리의 2.7배이고 인구 450만 명. 마오리어로는 Aotearoa, 길고 하얀 구름의 나라란 뜻. 시차는 3시간(여름은 4시간) 빠르다.
천 년 전 마오리족이 이주했고, 서양인으로는 1642년 화란인 아벨 타스만이 첫 상륙했으며, 그의 고향 Zeeland(네델란드 남서부주)의 이름을 따서 뉴질랜드라 명명했고, 1769년 영국인 제임스 쿡선장이 이곳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860년 마오리 유럽인 간의 전쟁을 거쳐 1947년에서야 비로서 자치국으로 인정받았다. 우리들의 나이와 뉴질랜드 나이가 같은 셈,
입국수속 시 식품검열이 까다로워, 준비해온 식품들을 신고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에어뉴질랜드 한국인 승무원의 신고 안하다 걸리면 벌금이 세다는 말에 자진 신고하였더니, 여승무원의 검사가 얼마나 까다로웠던지. 멸치, 장류, 김치, 찌개꺼리, 장아찌 등 일일이 짐을 풀고 자세히도 검사했고, 심지어 등산화의 흙도 문제시했다. 멸치 등은 이곳 친구에게 선물할 것이라고 애교를 떨어도 소용이 없었고. 다행이도 팩소주를 쥬스라고 했더니 무사통과되었다.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검사를 하는 여직원, 인상적이었다. 전통적 농업국 보호를 위한 당연한 조치였고.
입국수속을 마치고 오클랜드공항에 마중 나온 오길수친구와 반가운 재회가 있었고, 여행기간 중 우리의 애마가 될, 복스바겐 DKL603도 첫 대면하였다. 이차는 호주에 있는 아들의 차라고. 우리는 짐을 싣고 바로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여 친구의 집 정원에 서니, 남쪽 바다건너 오른쪽이 오클랜드시의 중심가이다. 아침엔 일출도 볼 수 있는 해안가에 위치한 고급 단독주택, 집값이 많이 올랐단다. 요즈음 오클랜드도 주택난에 처해 있다니, 우리에겐 이해가 안가는 일. 성공적 이민생활(24년)을 하고 있는 친구는 모텔 등에 투자하고 있고, 세계여행, 등산 등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고 있다니 부럽기만 했다. 여유 있는 그의 행동과 말투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겠지.
시원한 맥주가 겻들인 점심식사 후, 시내로 나가 첫 번째 한일은 SIM카드 구입. 이로서 뉴질랜드 전화번호를 부여받아, 여행 중 길수친구와의 소통 내지는 우리들 간이라도 불의의 사고시를 대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대형마트에서 식량, 취사도구를 구입. 모텔에는 대부분 취사시설이 구비되어 있지만, 야외취사에 대비, 길수친구가 브루스타 등을 준비해주었다. 친구는 소고기 상추, 포도주 구입, 교통 등에 대한 참고말도 들려주었고.
데본포트
쇼핑 후 우리는 1870-1996 육해군이 주둔했으며 오클랜드근교 Waitemata항 인근의 주요 해군기지였으나, 지금은 보전국(Dep. of Conservation)지역사무소가 있는 데본포트(Devonport)를 방문했다. 데본포트 언덕(빅토리아산)에서 보면 남쪽에 오클랜드 시내가 보이며, 언덕은 친구 집에서 오른쪽 방향에 있다. 1908-11 영국정부 요청에 의해 이곳에 6인치 Mark 7 포대가 설치되었고, 1차 세계대전(1914-1918)이후 1941년까지 군의 북쪽본부(North Head Office)였다. 7.4톤이나 되는 포 하나에 11명이 배치되었고 사거리는 11키로. 1차 대전까지는 영국은 해가지지 않던 제국으로 식민지제국을 유지, 팽창시키려고 발빠르게 움직였다. 뉴질랜드는 영국군 소속으로 1,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자립의식이 커졌다.
(데본포트)
오클랜드는 북섬의 최북쪽, 노스랜드 아래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 태평양과 이어지며, 서쪽의 테즈먼해와도 멀지않다. 이곳은 뉴질랜드 인구의 1/3인 160만 명이 사는 뉴질랜드 최대 도시이며 1865년까지 뉴질랜드수도였고, 영국 초대 해군장관 오클랜드백작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데본포트 건너에는 생긴지 600년이 된 화산이 보였는데, 오래된 대륙인 호주와는 달리 뉴질랜드는 역사가 얼마 안 되는 화산섬이다. 데본포트 아래는 비치도 있고, 데본포트 인근에 위치한 웨이터마타항과 오클랜드 훼리터미널 간에는 훼리가 오간다. 웨이터마타는 오클랜드의 가장 큰 항구. 우리는 포대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는데, 태극기가 휘날리는 집이 있어 가보려 했지만, 여의치 못했다.
후카폭포, Spa Thermal Park와 타우포호수
다음날 2월21일 수요일, 아침 6:30 도시의 러시아워를 피해 남쪽으로 향했다. 앞차에는 길수와 하태욱친구, 뒤차에는 흥구친구와 나, 무선전화기로 연락해가며 달렸다. 하루만 길수친구가 동행하기로 했고. 난생 처음,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는 차를 왼쪽 차로로 운행하자니, 흥구친구, 바짝 긴장할 수 밖에. 하루 동안의 운전연습이기도 했고.
첫 방문지는 마타마타의 호빗마을 입구. 마타마타는 해밀톤 와이카토지방에 있는 인구 12천명의 소도시. 오클랜드 동남쪽 160키로 지점에 위치한다. 판타지문학의 금자탑인 호빗, 반지의 제왕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우리는 남섬으로 가는 배 시간에 맞추다 보니 이곳을 자세히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다. 7학년의 실수이랄까, 배편 예약 시 착오로 하루를 앞당기는 바람에 서두를 수밖에. 덕분에 남섬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항공편 예약 시 영문자 이름의 스펠링을 잘못 쓰는 바람에 32만원의 페널티를 무는 실수도 있었고. 예약 시에는 반드시 여권에 의거 조심스럽게 기재해야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 방문지는 와이카토(통가리로)강의 후카폭포. 직하하는 폭포만 보아온 우리에겐 길게 누워 쏟아지는 폭포는 이색적이었다. 타우포호에서 시작된 강이 15미터 협곡으로 접어들며 높이 20미터의 폭포를 형성한다. 타우포호수는 북섬 중심에 위치하며 둘레길이가 46키로에 달하고, 해발 357미터에 있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 마오리전설에 따르면 북섬은 물고기, 남섬은 고깃배, 배에서 쏜 작살이 꽂힌 곳이 북섬의 한가운데, 타우포호수이다. 타우포읍은 화산여행의 전진기지. 폭포에서 즐기는 보트, 때 묻지 않은 자연에서의 번지점프, 카약 등 각종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뉴질랜드의 매력이다.
그리고는 와이카토(통가리로)강 옆에 있고, 폭포에서 멀지않은 Spa Thermal Park를 찾았다. 강가 벤치에는 노부부가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절실히 느껴지는 부부애, 아름다웠다. 아직도 툭탁거리는 우리는 젊은이랄까. 뉴질랜드에는 어느 곳에나 걸을만한 트랙이 있다. 나름대로 특색이 있고, 우리의 둘레길과 비교하면 얼마나 자연친화적인지. 계곡 입구에서 벌거벗고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 특히 서양여성들은 때, 곳을 가리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 역시 자연친화적이랄까.
(Spa Thermal Park)
우리는 길수친구가 찜해놓은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골짜기에서 온천욕을 즐겼는데, 수온이 40도 훨씬 웃돌아 한 번에 입수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독일처녀들, 물속에 귀중품을 빠뜨렸는데. 선녀가 나무꾼에게 전하는 메시지인가. 우리는 너무 좋다고 입수를 권유했지만, 그녀들은 너무 뜨겁다고 사양했고. 주위에는 메꽃이 피어 있었다. 뉴질랜드의 자연은 우리와 너무 닮은 것이 많다, 늦여름에 빨간 열매를 맺는 마가목도 도처에서 볼 수 있었고. 광활한 목초지는 틀리지만.
우리는 타우포 호수가로 이동, 불을 피우고, 고기를 자르고. 길수친구가 좋아하는 스커트살(치마살)가격은 600그람 한 근에 8천원이 안되지만, 쫄깃한 그 감칠맛, 잊을 수가 없다. 여행 중 대형마트에서 스커트살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어 대신 비싼 스커치살을 구입했다. 치마살은 소 뒷다리에 인접한 복부 뒷쪽 부위로, 농부가 채찍을 휘두를 때, 채찍을 맞는 부분으로 채받이살이라고도 한다. 고기의 모양이 주름치마처럼 생겼고 소 한 마리에 2.6키로 정도 생산된다고. 길수친구가 좋아하는 상치, cos. 또한 마트에서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양송이도 우리의 필수 식재료가 되었고. 호수 한쪽에는 카약을 타고 온 한 무리의 젊은이들로 시끌시끌하였다. 얼마나 젊음이 부러웠던지.
타라나키폭포트랙
타우포호수가에서의 바비큐파티 후, 길수친구는 훌훌 떠나버리고, 우리는 친구에게서 독립한 여행길에 들어섰다. 선도차가 없어지자 흥구친구, 바짝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아니나 다를까 한 대의 자동차도 없는 도로에 진입하자, 반대 차선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수인 내가 지적을 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냐 하는 투였으나, 한참 후에야 알아차렸다. 회전교차로도 하나의 장애물인데 출구가 서너 개 이상이 되니, 잘못하단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버리고 만다. 내비에서 몇 번 출구로 나가라고 영어로 지껄이면, 우리 셋은 모두 긴장하여 출구1, 출구2, 출구3하고 소리 내어 합창을 했다.
흥을 아홉 번이나 내는 친구는 베스트 드라이버이며 문제 해결사였다. 취사 시 태욱친구가 노상 무엇이 안 된다고 흥구친구를 부르면, 간단히 해결했다. 또 운전을 내가 한다고 나서면 둘이 극구 말렸다. 허기야 틀린 운전환경에서 이사람, 저사람 하다보면 더 헷갈렸겠지. 한사람이 익숙해지는 것이 낫지. 우리는 고국에서 준비해온 8장짜리 일정표대로 움직였는데, 조금 변동은 있었지만 차질 없이 진행이 되었고, 다만 시간제약으로 이름난 트래킹 코스를 지나칠 때는 정말 아쉬웠다.
통가리로국립공원 인근에 있는 어드벤처 롯지엔 모텔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두 시간짜리 첫 트래킹에 나섰다. 우리의 계획서에 나와 있는 트랙이고 모텔직원이 서슴없이 추천한 코스였다. 출발점인 Whakapapa마을까지의 길을 물어 차를 몰았는데,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말았고, 숙소에 되돌아와, 길을 다시 물어 간신히 마을에 도착했다. 이일이 있은 후에는 길을 물을 때는 되도록이면 지도, 종이와 연필을 준비하여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도상에 가는 길을 표시하도록 했다. Turn left and turn right 어쩌구 저쩌구 말로만 하면 헷갈리기 마련이니.
타라나키 폭포 트랙은 평탄해서 이어 펼쳐지는 숲과 능선으로 마음이 탁 트이고 편해지는 느낌이었고, 사람들도 별로 없어 고요함과 신선한 자연바람이 있을 뿐. 폭포가 멀리 보이더니, 가까이 가자 물이 산지사방으로 튀고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타라나키폭포 가는 길)
반환점부터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온몸을 때리기 시작했고 저녁의 냉기도 엄습했다. 조금 지나 홀로 폭포를 향하는 아프가니스탄 젊은 처자를 만났는데, 지고 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고난의 역경을 헤쳐가는 아프가니스탄사람들과 우리나라의 역사보다 더 처참한 그들의 역사.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바쁜 일정에 그녀를 뒤로 하고 비속을 달렸다.
차를 타고 숙소를 향하자니, 구름이 걷혀지기 시작했고, 구름사이로 비치는 햇살로 멋진 비경이 펼쳐졌다. 뉴질랜드의 날씨는 무척이나 변덕스럽다. 여름이지만 그늘에 있으면 그리 덥지도 않고. 이구동성으로 첫 트래킹은 기억에 남을 만하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하태욱쉐프가 처음 선보인 첫 저녁과 이튿날 아침,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여행 전에 마나님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았나 보다. 쉐프 교육 뿐 아니라, 마나님은 찌개거리, 장류, 울외 장아찌 등을 여행이 끝나기까지 먹을 만큼 바리바리 싸주셨다. 황공무지로소이다. 친구의 음식조리, 설거지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감탄할 정도. 대신 우리가 음식재료나 조리기구에 손을 못 대게 했다. 자기가 정리한대로 놔두어야 진도가 빠르니까.
남섬 가는 배를 타러 웰링톤으로
2월22일 목요일 아침, 남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웰링톤으로 가는 길, 빗속을 달렸다. 날씨도 서서히 개였고, 다리도 건너고 쉬엄쉬엄 쉬기도 하고, 뉴질랜드 특유의 소목장도 지나쳤고. 전원풍경이 그림 같았다.
도중 마너와투 황가누이 지역의 서해안 작은 마을, 불스에 들려 섭웨이에서 점심. 이 마을은 수도 웰링톤 북쪽 160키로에 위치한다. 영국인 제임스 불이 처음으로 상점을 열었다는 이 마을엔 재미있는 이름들이 많다. Unforgettable, Constable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마을인데, 교회이름은 Forgive a bull, 병원이름은 Cure a bull이다. 뉴질랜드에는 북섬에 오클랜드 등 15개, 남섬에 넬슨 등 12개, 도서지역 2개, 도합 29개의 자치지역이 있다. 여행자정보센타에 들려 걸을만한 곳을 물었지만, 신통치 않아 바로 출발하였다.
다시 평탄한 지역을 달려, 웰링턴 자치지역의 항구도시, 포리루아에 있는 마리나 모터 롯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웰링턴까지는 20키로. 마나기차역이 있고, 윈드셔핑, 카이트셔핑의 명소이다. 이곳에 오는 도중, 6차선 이상의 큰 길이 뻥 뚫려 있었는데, 내비가 업데이트가 안 되어선지, 내비와 우리는 한참 방황한 후, 물어물어 겨우 숙소를 찾았다. 길을 찾을 때는 부동산사무실이 최고이다. 젊은이들이 일하는 점포에 물어봐도 소용이 없었고, 나이든 부동산사무실 직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친절히 잘 가르쳐주었다. 숙소를 정할 때는 보통 2-3일 전에 예약했고, 숙소비용을 절약하려고 대도시 보다는 인근의 모텔을 예약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흥구친구와 장보러 근처 마트에 들렸다. 식재료를 산 후, 태욱친구가 사달라는 그릇 닦는 쑤세미를 손짓발짓하여 종업원에게 찾아 달라 했더니 한참 만에 이해한 듯 "loofa?"하며 찾아주었다. 그릇 닦는 sponge라고 했으면 간단할 것을.
동네 한 바퀴 돌았더니 숙소 뒤는 바로 체육시설. 넓은 구장에서 젊은 처자가 청년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커다란 체육관련 시설에는 테니스, 스쿼시, 럭비, 크루즈클럽 사무실이 있고 sea scoute사무실도 있고. 그들의 생활체육은 어릴 때부터 친숙하고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어, 우리처럼 뛰어난 선수 만이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여행 중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만나면 평창동계올림픽에 관심을 보였는데, 뉴질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 대회에서 동메달 두개를 획득하였다.
체육시설에서 얼마 안가면 항구인지라 여기도 한 바퀴 돌고 숙소로 오는 길, 마나기차역에는 기차가 들어오고, 역 한편에 정차된 열차 외부에는 재미있는 그라휘티(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유럽의 담장에는 온통 이런 낙서투성인데.
우리가 하루 유숙할 모텔엔 개별 취사시설이 없어 공동취사장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자 부부가 여행 중이라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친절한 이곳 젊은 여직원과 백포도주 한잔씩 나누었고. 식당에 붙어있는 그림들도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2월23일,금요일)에는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 9시 남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차를 탄 채 부두에서 장시간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기다릴 때는 느긋했지만 웰링턴시내에서 승선장을 찾을 때는 내비가 정확히 안내를 못하여 무척 당황했는데, 다행히 친절한 노신사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여행 내내 차에 장착된 내비에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보통 하루 전날 갈 목적지를 미리 입력하였는데, 훼리터미널이 입력되지 않아 배표 계약서상의 주소를 입력했었다. 미로 같은 웰링톤 항구를 헤맬 때의 심정을 그 누가 알랴.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내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 것인지도 실감했고.
2. 남섬의 최남단을 향하여
아벨타즈만트래킹
배는 정시에 떠나고, 승객들은 뭔지 모르지만 바빴고. 길수친구도 타보지 못한 배이다. 친구는 이민생활 중 네 번 남섬을 갔다 왔는데, 모두 비행기를 탔다 한다. 왕복 배 삯은 자동차를 포함 모두 70만원. 꽤 비싼 편 아닌가.
남섬 북섬 사이의 쿡해협은 고요하기만 했다. 제임스 쿡선장의 이름을 딴 해협. 항해시간 3시간은 무료했고, 뉴질랜드산 맥주를 한 잔 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솔직한 것을 모토로 삼는 것 같다. 맥주병에도 'frank'라 쓰여 있고. 맥주 파는 종업원 ‘감사합니다.’ 하더니 ‘경치가 좋습니다.’ 라고 한국말을 했다. 한 노부부 말이 없고 심각했는데, 이곳도 저런 부부가 있네.
배가 남섬에 가까워 오자, 배를 하루 일찍 타게 되어 못 들리게 된, 북섬 서부에 있는 타라나키산(에그먼트산)에 대한 미련이 끝내 남았다. 에그먼트국립공원의 거대화산, 타라나키산(2,518미터) 당일치기 하이킹이 그렇게 좋다는데. 남섬의 일정을 끝내고 북섬으로 다시 가면 우리일정은 동해안쪽으로 돌게 되어 있다.
12시, 드디어 대망의 남섬에 도착했고, 하늘도 쾌청했다. 우리는 숙소가 있는 카이테리테리로 꼬불꼬불 해안 길을 달렸다. 이 길을 달려, 넬슨, 리치몬드를 거쳐 타즈만베이를 한 바퀴 돌아가게 된다. 넬슨자치지역은 뉴질랜드 행복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지역으로 날씨가 온화하고 일조량이 제일 많은 곳.
픽턴항에서 내린 우리는 6번, 60번 도로를 타고 모투에카로 가는 중. 이곳에서 아벨타즈만 국립공원 트래킹이 끝나면 콜링우드를 거쳐 남섬 최북단으로 간다. 문제는 타카하지역이 이번 태풍에 피해가 커서 이곳 도로가 보수되었는지가 문제. 기나긴 산길을 내려오니 모모랑이캠프장. 이곳 캠프사무소겸 카페에서 간단한 점심을 들었다. 해변의 풍치가 멋졌는데 산하는 오수에 빠져 있었다.
(모모랑이 캠프장)
다시 길을 달려 그래함 스트림 피크닉 캠프에서 우리의 애마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옆의 캠프밴에선 길게 줄을 늘어뜨리고 빨래를 말리고 있었고. 이곳 입구에는 1963년에 세운 저스틴 메카시 추념비가 서있다. 1963년이면 우리가 고1 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김병만의 프로그램에 이곳이 나왔다나. 늦여름인데도 이곳은 한 여름이라 바닷가는 피서객들로 초만원.
드디어 아벨타즈만 베이에 도착. 화란인 아벨타즈만이 서양인으론 처음 이곳에 도착했는데 파도가 없는 곳이다. 뉴질랜드 사람은 bay를 바이라고 하고 save를 사브라고 발음하는 등 영 알아먹을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 우리가 국내에서 유일하게 더구나 이틀씩이나 예약했던 숙소, 톱텐 할로데이 파크에 도착.
체크인하려니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이라 창구는 붐볐다. 여직원은 우리차례를 외면하고 코큰 사람부터 일을 처리해줬다. 우리를 중국인으로 알아서 그러나. 물론 더듬거리는 영어 때문에 일처리가 늦을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화가 나던지. 와중에 딴 곳의 톱텐 할로데이 파크를 이용하면 10%를 할인해 준다고. 하여튼 머리를 디밀고 다음날 이곳에서 떠나는 아벨타즈만트래킹을 예약했다. 세 사람에 211불이니 1인당 56천원 꼴. 이 모텔은 캠퍼밴 등을 위한 캠핑장도 운영하고 있고 여기저기 영업장이 많았다. 배정된 방에 갔더니, 침대는 넷인데 한 사람 침구가 없어, 항의하였더니, 돈을 더 내란다. 취사장, 화장실, 샤워실도 공동으로 써야 하고. 다시는 이 모텔은 이용하지 말자고 우리는 결의했다.
다음날(2월24일 토요일) 아침 모텔 앞에서 예약된 버스를 타고 카이테리테리로 이동했다. 출발전 배표를 어디에 두었는지 한참 헤맸는데, 흥구친구가 내 지갑 속에서 발견했다. 몇번이고 뒤져도 안 나왔는데. 나뿐 아니라 방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없다고 하는 등 우리들은 7학년의 티를 수시로 나타냈다. 선착장에 내리니, 인산인해. 배도 여러 척 대기하고 있어 잘못하면 딴 배를 타기가 십상이었다. 9시 배는 출발했다. 옆에는 Aqua Taxi가 신나게 달리고 있었고. 돈만 있으면 이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우리의 일정은 해안 최 남쪽에 있는 카이테리테리에서 배를 타고 북쪽에 있는 메드랜즈 비치에서 내려, 남쪽에 있는 앤커레지까지 4시간 이상 트래킹한 후, 다시 배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카이테리테리로 귀환한 후, 버스로 숙소로 오게 되어 있었다. 배는 도중에 마라하우, 토런트베이 등을 들렸다 갔는데,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아침 해수욕장은 썰렁했다. 쪼개진 사과 모양의 Split Apple Rock도 지나고.
(아쿠아택시)
10시, Medlands비치에서 하선했다. 국립공원의 해안 길을 따라 전 해안을 걸으려면 3박4일이 필요하다고. 입구에는 마오리 조각상이 있었고, 늦여름의 조용한 바다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셨다. 트래킹을 하며 Pokarekare Ana(연가)를 흥얼대 보았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한국전 참여시 뉴질랜드 젊은 군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 북섬 로토루아호수의 한복판에 있는 섬, 모코이아에 살았던 마오이족 젊은 남녀의 사랑을 노래했다. 족장의 딸과 미천한 신분의 젊은이의 결혼이 족장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두 남녀의 노력으로 결국 사랑을 성취했다고.
우리가 지나는 숲 속에는 높이 10미터까지 자라고 잎 뒷면이 은빛인 은빛 고사리(silver fern)가 지천. 이 고사리는 마오리들에게 밤길을 안내했던 나무. 2016년에 뉴질랜드 정체성을 찾자며, 현 국기를 은빛 고사리가 들어있는 국기로 교체하자는 프로젝트가 진행됐으나 경제 불황으로 실패했다고. 이곳 사람들은 유니온잭의 영국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
숲 속 트래킹은 신선했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이들을 데려온 엄마도 있어 우리는 태극기가 들어있는 기념품을 주며 '안녕'이라는 인사말도 가르쳐주기도 했다. 흥구친구는 계속 안녕, 안녕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고. 출렁다리도 건너고, 요지경 속 같은 시냇물도 드려다 보고. 산사태 방지를 위해 이들은 무척 신경을 썼다. 곳곳에 물받이 홈통을 만드는 등.
중간 기착지, Torrent Bay에 도착하니 이곳의 농부는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지만,
아낙네는 흔들의자에서 독서 중이었다. 냇가에 자리피고 준비해온 음식으로 점심. 진한 보라색 자두를 지나가는 여인에게 주었더니, 입이 함지박 만해졌다. 애를 하나씩 업고 가는 부부도 있었는데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가는 건장함을 보였다. 중간 중간에 쉬면서 스트레칭을 하였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흉내를 내기도 하였고. 날지 못하지만, 뉴질랜드인의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새, 웨카도 보았다. 병만선생 이새를 잡아먹었다는데 정말인지. 뉴질랜드사람들은 키위, 웨카 등 걷지 못하는 새를 좋아한다. 키위는 큰 알을 낳다가 자주 죽기도 한다고.
앤커레지에 도착하여 뜨거운 검은 모래에 발을 지졌다. 바로 옆의 흰모래 속과는 완연한 차이가 있었다. 옆의 체코부부와 말을 나눴는데, 이들은 카약을 타고 이곳에 와서 돌아갈 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나는 체코, 체코인을 좋아한다. 오랜 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들에 저항하여 독일보다 먼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나라이다. 겉으로는 오스트리아 군인들에게 복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엿 먹어라 하며 골탕을 먹이는 체코병사, 슈베이크도 좋아한다. 이 바닷가에서 회수한 카약을 배에 실으며 땀 흘리는 두 여인을 보았다. 젊은 남자가 하기도 벅찬 일일 텐데. 이곳 바다는 풍랑이 적기 때문에 카약킹이 인기인가 보다. 이곳에는 안내인이 있는 카약투어와 카약대여가 있다. full day 가이드투어는 135불, 11만 원 정도.
우리는 5시쯤 숙소로 돌아와 숙소 뒤 해안가를 산책했다. 이곳에는 개를 데려와선 안 되는 지역과 개를 데려오되 주의를 해야 하는 지역이 나누어져 있다. 뉴질랜드 관련 여행책자를 보면 흑 전복, 홍합 등을 쉽게 딸 수 있었다고 했지만 그 시대는 지난 것 같다. 해안가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장을 보고나니 멋진 하루였고, 오늘 일정은 크게 만족할 만 했다.
저녁 식사 후 방에 있으려니 서양처녀 둘이 와서는 후라이팬을 찾았다. 우리는 못 보았다고 대답했고. 나중에 보니 태욱친구가 자기도 모르게 후라이팬을 가져왔나보다. 날이 갈수록 취사도구가 늘어났다. 얻기도 하고 모르고 가져오기도 하고.
푸퐁가, 그레이마우스
2월25일 일요일 새벽, 정든 모투에카 숙소를 떠났다. 물론 처음에는 여직원들과의 다툼이 있었지만, 이틀씩이나 시장도 보고 해안가도 구경하느라 들락거리다보니 정이 들었다. 숙소 마당, 공동취사장, 식당 등도 눈에 익혀졌고. 전날 오후 트래킹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들은 미안했던지 잘 다녀왔냐고 새새덕거렸다.
한산한 월요일, 숙소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요번 큰 수해로 피해를 입은 타카카힐의 교통통제로, 우리는 되돌아와야 했다. 모투에카는 넬슨 자치구, 인구 8천의 소도시. 과거에는 담배가 주 작물이었으나, 최근 과수원이 성행하고, 와인이 명성을 얻고 있다. 마오리어로는 웨카섬. 웨카새가 많이 서식하기 때문이다.
남섬에서의 우리 일정은 타카카힐을 넘어 푸퐁가를 구경한 다음, 넬슨지역에서 남하하여 그레이 마우스, 프란츠조셉 빙하, 와나카, 퀸스타운, 마운트쿡, 인버카길을 방문한 다음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더니든, 아카로아, 크라이스트처치, 카이코우라 그리고 픽턴, 이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북섬으로 가게 된다.
25일은 넬슨의 북서쪽 끝에 있는 푸퐁가를 보고 그레이마우스로 가는 빡빡한 일정. 숙소의 나이 먹은 여직원은 여행자문의 달인답게 먼저 NZTA(교통국)에 심각한 도로사정을 알아봐주었다. 조금 전 길수친구와의 통화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그리고 다음날 숙소로 예약한 폭스빙하 숙소에 전화를 걸어, 취소할 수 있는지 물어봐주었고. 우리는 마운트쿡을 여유 있게 관람하려고, 그곳에 숙소를 잡은 것인데, 폭스빙하에서 마운트쿡을 가려면 가로막힌 산맥 때문에 바로 갈수가 없고, 빙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대답은 NO. 취소하면 하루 숙박비 87불(7만원) 환불이 어렵다 했다. 예약당시에도 숙소가 없어 젊은이들이 자는 호스텔을 예약한 것이고, 다른 곳의 숙소예약도 만만치 않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9시에 맞추어 타카카고개를 넘으려 했지만 이미,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고 있는 차량행렬이 만만치 않았다. 길수친구는 도로가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다닐 수 있을 뿐더러 긴급한 차량만 통과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우리는 새벽에 왔다가 9시에 오라해서 다시 왔고, 푸퐁가를 가려고 머나먼 한국에서 왔으니 긴급차량이 아니냐고 답변하려 맘먹었다. 다행히 통과되어 고갯길을 넘었지만, 일반통행이 되어, 가는 차, 오는 차를 교대로 보내려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 2018.2.20일자(우리 여행출발일은 2.19.)로 보도된 이곳 모두에카강의 범람 사진을 보았는데, 무섭기까지 했다. 자연의 재해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나 보다.
(파괴된 도로)
모두에카는 이 강의 입구에 위치한다. 고개를 넘자 도로는 말짱했다. 모두에카에서 푸퐁가(Puponga)까지는 106키로, 2시간 거리. 다시 오려면 도로가 정상적일 때도 4시간이상이 소요된다. 모두에카에서 숙소가 있는 그레이마우스까지는 390키로, 6시간 거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무모했던지. 뉴질랜드의 길은 꼬불꼬불 산길이라 키로 수 대비 시간이 엄청 걸린다. 도로 속도제한은 1시간에 100키로로 되어있지만.
중간기점인 말끔하고 아담한 도시, 콜링우드에 도착했다. 빵집에 들려 점심거리를 샀는데, 식당에 들려 식사할 여유가 없었다. 푸퐁가는 남섬의 최북단으로 넬슨자치구역 소속. 황새부리처럼 길쭉하게 나온 곳이 Farewell spit(곳), 돌출한 사구, 모래톱이다. 콜링우드, 타카카를 잇는 둥근 바다는 멋진 풍치를 자랑하는 Golden bay(만). 큰 태풍이 불면 고래들이 떼로 밀려와 수백 마리가 죽는 곳이 훼어웰곳이다. ‘잘 가시오, 고래들’하는 곳. 훼어웰곳을 받치고 있는 근저, 북쪽 둥근 곳에 멋진 화라리키비치가 있는데, 우리가 푸퐁가에 닿으면 이곳까지 트래킹하고 싶던 곳이다.
푸퐁가에 가면 길을 잘 찾으려니 했더니, 내비도 먹통이고. 물론 우리가 정확한 지명을 입력하지 못한 탓인 지도 모르지만. 비포장 길이 나오고, 비포장 길을 달리다, 지나가는 차량을 세워 물어보니, 우리가 잘못 온 것 같은 느낌. 날씨는 시커먼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가운데 우왕좌왕하고 서로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 길이 맞다, 저 길이 맞다 하고. 길수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받지를 않고.
우리는 길을 되돌려 i-site(여행자정보센타)를 겸하고 있는 카페를 제대로 찾아, 목적지 가는 길은 알게 되었지만, 시간은 없고 Hilltop Walk를 택할 수밖에. 푸퐁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오르려면, 고개를 넘고 철조망을 통과한 후 양 목장에 들어가 양 똥을 밟아야 한다. 언덕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훼어웰곳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침 썰물 때이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광활한 바다와 해안을 조망할 수 있었고, 이것으로 자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들은 알 수 있을까, 우리의 아쉬움을. 뉴질랜드 와서 두 번째 큰 아쉬움. 그나마나 이삼일 코스를 단숨에 해치우려니 애초 무리한 계획이었다. 다시 와서 훼어웰곳, 화라리키해변을 걷고, 북쪽의 가까지른 절벽을 봐야지. 그러나 마음뿐이겠지.
(푸퐁가 훼어웰곳)
이곳은 옛날에 석탄광산이었나 보다. 이곳에 쓰여 있는 이들의 표현이 시적이다.
파도의 리듬-
물개들 뛰놀고
100종이 넘는 새들이 지저귀는 곳.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리다 언덕을 내려왔다.
Here I stand,
watching the tides go out ___
모투에카로 돌아오는 길, 골든베이 전망대에서 콜링우드에서 산 빵으로 점심을 들었다. 드넓은 골든베이의 황금모래사장과 산하, Golden bay의 풍치는 끝내주었다. 이곳에 '블루베리 $6', '돈은 이 통에 넣으시오'라고 쓰인, 빈 농산물 판매대가 있었다.
돌아오는 길, 타카카고개 정상에는 조지 마일즈의 추념비도 있었고. 마침 용변이 보고 싶어 으슥한 곳을 찾았더니, 청결한 야외화장실이 보였다. 뉴질랜드사람의 사람됨을 알 것 같았다. 모투에카지역에는 동굴들이 많았고, 공사 중으로 외길이 된 내려오자니 선도차량이 차량을 인도하여 가서는,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차량을 이끌고 왔다. 미국횡단여행 시 보았던 풍경. 제복을 입은 경찰이 기다리다 수고했노라고, 찬 물병 한 병씩 차 속으로 넘겨주었다. 그 인간미와 그 시원한 물맛.
그레이마우스 가는 길, 대로를 따라 갔어야 하는데, 빨리 간다고 내비 말을 듣고 산길을 갔더니 산사태로 통행금지. 가뜩이나 바쁜데 24키로 더 가서 되돌아와야 했다. 풍수해 현장을 바로 전에 보고와선 험한 산길을 가다니. 바쁜 길은 돌아서 가라 했는데. 날씨가 심상찮았다. 뉴질랜드 날씨는 이랬다, 저랬다. 우리는 주유소가 보이면 기름을 넣었는데, 한 주유소에 가스 스테이숀이라 쓰여 있었다. 태욱친구가 차에서 내려 물었다. "기름 넣는 데가 여기서 얼마나 되나요?" 직원은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고. 미국을 자주 가는 친구, 7학년이라오.
운전시간만 10시간 넘게 걸려 그레이마우스의 Apostle View Motel에 안착했다. 다행스럽게 직원도 붙임성이 있었고 시설도 좋았고, 주위도 맘에 들었다. 방 침대 위에는 검은색 브레지어가 놓여있어, 태욱친구가 기념품으로 접수했는데, 나중에 어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매일 길수친구에게 카톡으로 보고하고, 사진도 보냈다. 그는 당일의 우리 행로를 보고 받고 안심을 했다고. 여행기 제목을 '7학년의 죽자 살자 여행'이라 정한 것도 그이다.
그레이마우스는 웨스트코스트 자치지역의 가장 큰 타운으로 인구는 14천명, 자치지역인구의 42%이라하니 이 지방은 얼마나 넓은 지역이냐. 이 타운은 서던알프스 어귀의 평원 위, 그레이강 입구에 위치한다. 맑은 날이면 남쪽으로 마운트 쿡이 보인다고. 탄광지대로 알려졌고, 포우나무라는 옥이 생산되며, 북쪽 45키로 지점에 펜케익이라는 명물바위가 있다, 시간관계상 우리는 찾지 못했지만. 점심을 빵 쪼가리로 때워서인지 이날의 저녁은 얼마나 맛있었던지. 하쉐프, 새벽부터 수고한 기사님을 잘 모셨다.
2월26일 월요일은 이곳을 떠나는 날, 태욱친구 이곳 숙소아줌마와 친해져 이별이 아쉬운 듯 기념사진도 찍었고. 시골사람들이 인심이 좋듯 격의가 없었다, 사무실의 여인도 그렇고. 숙소 밑에 무엇을 깔았는지 바닥이 쿨렁쿨렁한 숙소였지만. 숙소를 떠나, 타운 중심에 있는 카운트다운에 들려 시장도 보았다.
이안테호수, Franz Josef빙하
우리는 남섬 서해안을 계속 달리고 고개도 넘어, 프란츠죠셉그래셜 가는 길에 이안테(Ianthe)호수에 들렸다. 이 호수는 왕가누이강으로 흐르는데, 보트타기, 수영, 송어낚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고, 일일어획량, 낚시시기 등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다시 길을 달리니 좋은 날씨에 풍경도 좋았고. 대로 옆 캠핑장에 자리피고, 그레이마우스에서 장보아 온 음식으로 점심을 해먹었다. 이곳을 떠나 다시 달리니, 가는 길 곳곳의 도로는 파손되어, 복구공사로 인해 교통이 정체되는 등 남섬 전체가 이번 풍수해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프란체죠셉그래셜에 도착해보니, 헬리콥터 관광이 성행 중이고 이들 영업장은 여행자정보센타(i-site) 역할을 겸하고 있다. 정보센타를 방문하고 오늘의 숙소가 있는 훡스그래셜(Fox Gracial)에 들렸더니, 빙하입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우리는 Franz Josef빙하로 되돌아와 1시간 반짜리 트래킹을 했다.
빙하는 계속 녹고 토사는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4년 동안의 빙하의 변화는 놀라웠다. 토사가 붉은 색을 띄고 있는 것은 망간이 함유되어 있다는 표시. 미국 서부 데스벨리의 다양한 색깔들이 연상되었다, 그곳보다는 다양한 색깔은 아니었지만. 빙하트래킹의 종점에 오니 안내원이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지 않았다. 하늘에는 관광 헬리콥터가 왔다 갔다 하고. 저 험한 산맥을 바로 넘을 수 있다면, 마운틴 쿡에 쉽게 닿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란츠 죠셉 빙하)
빙하트래킹을 마치고 훡스빙하에 있는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호스텔은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어 종업원을 보기는 하늘에 별 따기. 짐을 숙소로 옮기는 중에 작은 카메라 렌즈뚜껑을 잃었다. 남섬으로 오는 배 갑판에서는 큰 렌즈뚜껑을 잃었었는데, 7학년의 품행은 어쩔 수 없지.
침실에 들어서니 방안에는 2층 침대가 두 개. 이부자리는 갈은 지 오래된 것 같고, 배정받은 내 침대 아래에선 프랑스 젊은 친구가 피곤한지 누워있었다. 길수친구는 이, 빈대가 들끓는 호스텔에서 자지 말라고 했는데. 숙소는 구하기 힘들었고,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데서도 자보아야지 않겠어. 호스텔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은 없었다.
호스텔 이층에 있는 식당에 올라가보니, 하셰프가 이층을 오르내리며 식사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포도주 곁들인 저녁식사도 맛있게 하고. 여행 내내 끼니때마다 빵으로 때울 때를 제외하고 포도주를 생략한 적이 없었다. 한구석 소파에서 책을 보고 있었던 한 처자, 식사가 끝날 때까지 미동도 안했다. 식사를 끝내고 이미 어두워진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니, 이런 산골동네에 1929년 개교한 학교가 있었다. 산보 후에는 꿀잠, 이부자리가 더럽거나 말거나, 이층 잠자리거나 말거나.
마운틴 쿡 트래킹
2월27일 화요일, 새벽 5시에 기상하여 프랑스 젊은 친구가 깰까 조심하며 방을 나와, 2층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한국에서 갖고 온 김치가 벌써 식초가 되었다. 얼마나 신지 오만상을 찡그리고 먹을 수밖에. 이날의 일정은 마운트 쿡 트래킹. 마운트 쿡은 훡스빙하의 옆 동네인데 큰 산맥이 가로막혀 반나절 이상 달려야 했다. 우리는 서해안의 하스트를 거쳐, 와나카, 크롬웰까지 6번 도로를 타고 가서는, 오마라마, 트위젤을 거쳐 갔다. 남섬 북동연안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마운트 쿡에 접근하는 길도 있다.
잠이 덜 깼는지, 흥구친구 숙소에서 나와선 다시 북상하여 후란츠죠셉빙하 쪽으로 차를 모는 게 아닌가. 차를 돌려보니 차 지붕 위에는 젖은 지도책이 있었다. 어제 바삐 숙소로 짐을 나르다 보니 그대로 지붕에 놓아두었던 모양. 커다란 한 장짜리 지도며 여행계획서는 날라 가 버리고, 두꺼운 지도책 만 남았다. 길수친구가 여행 떠날 때 주었던 책이다.
여행 중 수많은 다리를 건넜다. 다리는 대부분 원웨이. 반대쪽에서 오는 상대방이 먼저 반대편 다리 끝에 도착하면 길을 양보해야 한다. 양보심도 기르고, 차의 속도도 늦추고, 1석2조.
긴 다리에는 중간에 상대방을 위해 비켜주는 공간이 있다. 가는 길, 바닷가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반대편은 첩첩산중. 여행 내내 우리는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끽했다.
지도의 남섬 동남쪽 연두색부분은 테 와히포우나무 유네스코 세계유산지역. 밀포드사운드가 속해 있는 피오르드국립공원, 훡스 프란츠죠셉빙하가 있는 웨스트랜드국립공원, 마운틴 쿡(3,754m)국립공원, 아스파이어링산(3,027m)국립공원이 이 지역 안에 있다. 우리는 웨스트랜드국립공원에 속하는 해안의 멋진 풍경이 펼쳐진 휴게소에서 잠간 쉬며 심호흡을 했다. 웨스트코스트 자치지역, 해안가에 있는 하스트(Hasst)를 지나 내륙으로 들어서면 시원히 뚫린 도로가 나오고, 내륙에 들어서면 곧 아스파이어링산 국립공원이 펼쳐진다. 물 색갈이 환상적인 Blue Pools를 지날 때는 구름이 낮게 깔리어 있었다.
(아스피어링산 국립공원)
호수의 도시, 와나카를 가는 길에는 오른쪽에 와나카호수가 보이고, 이어 하웨(Hawea)호수를 지나게 된다. 구름이 산중턱을 휘감았고, 수없이 많은 자전거 여행자들과 조우했다. 드디어 와나카에 입성했으나, 도시 초입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헛바퀴를 몇 번이나 돌았다. 한참 달리다 보니, 길이 낯익어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온 길로 다시 가고 있는 것. 내비도 혼란스럽게도 거꾸로 길을 안내하여, 온 길을 한참이나 북상하여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가는 코스로 유도했다.
제대로 길을 찾아 와나카 중심을 벗어나 마운틴 쿡으로 신나게 달리자니, 미국에서 보았던 기다란 스프링쿨러도 보였고, 목장지대로 들어섰다. 이어 오타고자치지역과 크라이스트처치 캔터베리자치지역의 경계에 있는 와이타키의 바람 부는 언덕에서 초라한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 후부터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었다. 마운틴 쿡은 마오리어로 아오라키. 구름을 뚫은 산이라는 뜻이고, 마운틴 쿡은 뉴질랜드가 영국령이 되게 기초를 닦은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을 기린 이름.
마운틴 쿡 마을이 가까워오자 기다란 푸카키호수가 나타났다. 해발 520미터에 있고, 면적은 179제곱키로. 빙하호 특유의 아름다운 파란색(milky blue)은 빙하로 나온 미세입자 때문이라고. 이 호수의 발원지는 마운트 쿡이며, 푸카키호수는 테카포, 오하우호수와 평행으로 놓여있다. 호수를 오른쪽으로 두고 달리는 길가에는 앙증맞은 해당화 열매가 지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조용한 아름다움을 깨트리고, 커다란 화물을 수송 중인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드디어 마운트 쿡 빌리지 도착, 타운 중심에 있는 여행자정보센타를 찾아, 처음으로 2불을 주고 트래킹 지도를 샀다. 여행 중에 얻은 좋고 두터운 지도들도 모두 공짜였는데.
(푸카키호수)
우리는 두 개의 트래킹 코스를 선택했고, 첫 번째 1시간 코스의 Kea Point 트레일을 걸었다. 완경사의 정다운 길이 이어졌고, 빙하를 바로 벗어난 잿빛 물이 우리의 마음을 적셨다. 이 길에서 처음으로 한 떼의 한국 사람들을 만나, 반가움을 표시한 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답게 걸었다, 비록 고생된 여행길이지만 몇 번이고 여행을 잘 왔다고 얘기하며. 산과 들이 잘 어울렸고, 우리도 산 위부터 녹아내리는 느낌이랄까. 나무로 만든 길도 운치가 있었고. 드디어 키아포인트에 도착하니, 청회색의 물은 꾸역꾸역 흘렀다, 더디게, 더디게. 우리는 Mt. Sefton(3,158미터)을 배경으로 우의를 다지며 사진 한 장. 고국에 돌아와 Charles Howorth가 Sefton산을 그린 수채화를 보았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Sefton산을 배경으로)
원점으로 되돌아와선 마운트 쿡을 보려고, 자동차로 다리를 건너 깊은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우리의 여행계획서에 들어있는 Tasman Viewpoint를 오르려니 흥구친구가 헉헉대는 가파른 언덕길도 있었고. 언덕에 올라 온 길을 돌아보니, 여기저기 잔잔한 물을 안고 있는 조그만 웅덩이들이 산재해 있고 타스만 호수가 발밑에 있었다. 푸른빛이 아닌 완연한 잿빛의 물. 그러고 보니 뉴질랜드 도처에는 타스만과 쿡이 있다.
구름을 뚫은 산들 중에 멀리 쿡산(3,724미터, 뉴질랜드 최고봉)이 보였다. 이것을 보려고 멀리 왔던가. 이들 산으로부터 빙하는 계속 녹아 꾸역꾸역 흘러내린다. 아오라키 마운트 쿡 국립공원은 40%가 빙하이고, 면적은 700제곱키로. 뉴질랜드의 3천 미터 넘는 산 20개중에 19개가 이곳에 위치한다. 쿡산 동쪽의 타스만빙하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큰 빙하. 역사가 100만년 미만인 서던 알프스 빙하는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것이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한다.
(마운틴 쿡)
마운틴 쿡과 이별하고 내려가는 길도 정다웠다. 돌아오는 길, 마운트 쿡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연어횟집에 들렸으나, 6시까지 영업이라 해서 입맛만 다시고 돌아섰다. 그때가 벌써 7시 가까이 됐었다. 10년 전 맛있었던 연어와 백포도주가 생각나서 들렸는데.
오마카우에 있는 숙소, Hawks View B&B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다 되어 컴컴했다. 와나카, 퀸스타운 근처에 숙소를 구하다 못해 정한 숙소였다. B&B는 Bed & Breakfast. 잠자리와 아침을 주는 곳이다. 와나카에서 105키로, 퀸스타운에서 112키로 떨어진 곳. 이곳에선 100키로 정도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오마카우는 인근에 있던 족장 이름을 딴 센트럴오타고의 시골지역 조그만 마을. 1900년대 골드러시 때 기차가 놓였고, 한때 번영을 누렸던 마을이나 지금 철도는 폐쇄되었다. 내비가 인도하는 대로 컴컴한 마을에서 내렸는데, 숙소의 간판이 아무 곳에도 안보였다. 호스텔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 하며 거리를 기웃거리던 중, 마침 지나는 노인부부가 있어 숙소를 물었더니 그 집에 묵고 있다했다.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간판도 없는 B&B의 문을 들어섰더니 주인 할머니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질책을 했다. 숙소광고엔 10시까지 체크인 시간이었는데. 때가 늦어 뱃가죽이 붙어있던 우리들, 취사를 하겠다고 했더니 완강히 거절하기에 집밖에서라도 저녁준비를 하겠다고 하니,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옆의 방의 손님들이나 동네사람들에게 방해된다고 조용히 하란다. 우리는 포기하고, 남은 찬밥 덩어리에 김 그리고 장아찌로 저녁을 해결했다. 숙소는 퇴직한 늙은 부부가 개인주택을 활용한 B&B였다.
'여행은 무턱대고 시작되고 멋대로 요동을 한다.'
와나카 트래킹
2월28일 수요일 아침이 밝아 숙소 밖을 나와 보니, 우리가 잔 곳은 전연 영업집 냄새가 안 나는 한가한 시골동네의 아담한 개인집이었다. 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잘 가꾸어진 뜰에 방이 서너 개인 민박집. 정원 한 구석에는 Hawks View B&B라고 쓴 조그만 표시가 있었고. 아침은 공짜라지만, 계란을 부치는 등 식당에 있는 음식재료로 조반을 채려먹었다. 미국 모텔의 공짜 아침보다는 훨씬 나았다.
와나카 가는 길, 지나는 Dunstan호수는 비취색의 아름다운 인공호수. 한 해전 20세 독일출신 과수원 인부가 한 여인과 함께 호수로 돌진했다는데, 그만 미수에 그쳤다고. 교통요지인 그림 같은 마을, 크롬웰도 지났다. 처음에는 마오리족이 사람 키의 두 배나 되는 모아새를 잡기 위해 크롬웰에 정착했었는데, 이 새는 멸종상태이다. 그 다음에는 금을 찾아, 댐을 건설하기 위해, 최근에는 체리 포도 등을 재배하려고 사람들이 이곳에 왔다고. 크롬웰(1599-1658)은 정치가이자 군인. 17세기 중반, 영국 청교도혁명 당시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국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Dunstan호수)
마운틴 쿡 가는 길에 정신없이 헤맸던 와나카에 도착했다. Wanaka는 남 알프스에 둘러싸인 와나카호수 남단의 호반도시이며 하웨아호수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마운트 어스파이어링 국립공원의 입구이기도 한 이 도시는 인구 7천명의 도시로 퀸스타운의 동북부에 있다. 우리는 i-site에 들려 좋은 트래킹코스를 소개받은 후, 점심으로 먹을 빵을 샀고 잃어버린 렌즈뚜껑도 구입했다. i-site앞 주차장에서 미국교포여인을 만났는데, 차의 트렁크를 열고,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마일리지로 이곳에 왔고, 필요한 물품은 미국에서 다 가져와 돈 들일이 없다고 자랑했다. 검게 그을린 교포 여인의 얼굴에는 강인함이 묻어 있었고.
호수길 트래킹을 시작하는 호수입구에는 큰 버드나무가 서있었고, 뛰노는 아이들, 개와 산보하는 여인,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우리가 끼어들었다. 호수에는 오리들과 카약 타는 사람들이 있고, 하늘에는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 햇볕이 따가워지자 우리는 호수 곁의 숲길을 걸었다. 사람들의 폼은 제각기였고 자유 분망했다. 연인들도 노는 모양이 제각기였고.
(와나카호수)
우리는 우연하게 Rippon 와인농장 가는 길을 발견했고, 바로 이 길로 들어섰다. 농장까지 가는 데는 15분정도. 잘 익어가는 과수원 편안한 길을 걸어가니 언덕에 와이너리가 편안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와이너리 앞의 못생긴 의자의 이름이 우주를 응시하는 의자(Chair for contemplating the Universe). 여기에 앉아보니 주위는 온통 포도밭.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와이너리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고. 버스로 온 관광객에 섞여 다섯 가지 와인을 시음했는데,
문외한인 우리도 미묘한 차를 느꼈다. 그리고 오클랜드로 돌아가면 우리를 반길 길수친구에게
줄 와인 한 병도 샀다. 나중에 서울에서 전문가인 병헌친구한테 들어보니, 이곳 와인은 죽기 전에 꼭 마셔봐야 할 와인 중에 하나라고. Ribbon Pinot Noir. 우리는 종류가 다른 것을 다섯 잔이나 마셨다.
(Rippon 와이너리)
밖에 나오니 새끼돼지들이 재롱을 부렸고, 포도밭 건너편에는 승마하는 남녀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호수가로 내려오기 전, 풀섶에서 간단한 점심. ‘우리는 결코 돈을 아끼려 빵을 먹는 게 아니고 시간을 아끼려고 그러는 것이다.’라고 씨부렁거리며. 호수로 내려오니 한 신랑이 열심히 예쁜 신부를 사진에 담고 있었다. 한 쌍의 옆에는 와나카의 자랑, Willow Tree(버드나무) 한 그루가 물속에서 바람에 가지를 휘날리고 있었는데, 청송 주산지의 것만 훨씬 못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려니 배터리가 아웃되었다. 사고방지를 위해 항상 라이트를 키고 다녔는데, 그만 라이트를 켜놓고 가버렸던 모양. 우리 옆의 날씬한 여자가 얘기 끝나기를 기다려 정비소를 물었더니, 이곳 사람이라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자기 차를 타라고 했다. 정비소에서 그녀의 차를 내려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기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와서 점프케이블로 충전하니 비용이 30불(2.4만원). 다급했던 마음에 예쁜 그녀에게 가지고 다녔던 기념품도 못주고, 사진도 찍어놓지 못했으니. 뉴질랜드 젊은 여성이 수상이 된 이유를 알듯했다.
다음은 아이언산 트래킹. 우리계획서에 기재되어 있는 4.5키로, 1시간 반짜리이다. 입구에 있는 눈부신 마가목의 빨간 열매가 우리의 눈을 부시게 했다. 그처럼 화사할 수가 없었다. 길이 개인 땅으로 났는지 정해진 길로만 가라는 보전당국의 안내문이 붙어있었고. 지나가는 길, 키우고 있는 묘목의 형태가 특이했다. 네 개 지지대 밑동에 엷은 붉은색 포장을 해놓았다. 날씨가 더워 셋이 웃통을 훌러덩 벗었다. 서양 사람들이 벗으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리가 벗으면 왜 그렇게 쑥스럽던지. 드디어 아이언산 정상을 탈환하고 조용한 와나카마을을 내려다보았다. 8만 년 전에는 빙하, 2천 년 전은 산림, 5백 년 전에 사람들이 오고, 백 년 전에 아름다운 마을이 되었다는 역사가 설명되어 있었고. 하산하는 길, 시원한 솔솔바람이 불었다.
(아이언산에서 내려다본 와나카)
와나카 시내에 다시 돌아와, 터키인이 운영하는 케밥집에 들렸다. 식당가는 젊은이들로 꽉 차있었고. 터키인 사장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하니, 당장 '브라더'하며 쇼를 했다. 푸짐한 케밥, 맛도 괜찮았고. 오랜만의 외식, 그것도 저녁으로. 숙소로 돌아오는 길, Dunstan 호숫가에서 잠시 휴식을 했다. 다시 돌아온 오마카우마을의 입구는 하루 전과는 달리 정겨웠다. 또 좋은 하루가 갔다. 다음날 아침, 이틀 숙비 320불(26만원)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두 번 씩이나 할머니가 현금지불을 부탁하기에. 영수증을 부탁했더니, 할머니 글씨가 명필이었다.
퀸스타운
3월1일 목요일 아침, 정든(?) 숙소에 이별을 하고 퀸스타운으로 달렸다. 오랜만에 큰 도심에 들어가 i-site를 찾았더니 주차장도 없고,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유료주차장에 주차했다. 주차료 계산기 사용방법을 몰라 동전을 넣으며 헤매고 있으니, 지나는 젊은 친구 친절히 가르쳐 주며, 영수증을 받아 차창에 끼워주기까지 했다. i-site에서 케이블카티켓(105불,84천원)을 사고, 뒷동네에 있는 케이블카 주차장으로 가는 길, 복잡한 길을 헤매다 역주행을 했더니, 한 친구 무어라 잔소리해대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흥구친구는 경찰이라고, 겁도 먹고. 어찌어찌하여 만원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
겨우 인구 14천명인 퀸스타운이 오타고지역에서 더니든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도시이다. 마오리들이 비취호수라고 하는 와카티프호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호수의 길이는 84키로. 1863년 빅토리아여왕과 어울리는 곳이라고 퀸스타운이라고 명명했는데, 빅토리아여왕(1837-1901)시절은 자본주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전성기였다. 그녀는 양당제도를 확립했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수립했다. 엘리자베스여왕도 이 도시를 사랑한다. 마오리들이 옥을 찾으려 이곳을 찾았고, 1960년에는 골드러시가 있었다고. 삐노누아와인 산지이기도 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번지점프대를 지나, 전망대에서 퀸스타운을 내려다보았다. 6개의 강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뉴질랜드 4번째 호수, 와카티프도 보고, 점프해서 스윙하는 여인의 날렵한 자태도 보았고. 안개는 스믈스믈 몰려오고, 전망대 바로 아래는 Luge 타는 청년이 신이 나있었다. 케이블카 관람을 끝내고 길수친구가 코치한대로 퀸스타운에서 와카티프호수를 따라 작은 마을 Glenorky로 향하여 드라이브하다가는 호수가로 나가는 샛길로 빠졌다. 아무도 없는 호수가에서 취사도구를 꺼내, 상한다고 걱정했던 두터운 돼지고기에 김치와 두부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먹으니, 그 맛을 무엇에 비하랴. 빗방울은 떨어지고, 구름도 지나가고, 보트가 지난 자리에 물결이 몰려오고.
(케이블카 전망대에서 본 퀸스타운)
다시 길을 달리는 가운데 35라고 쓴 도로표지판을 보고 흥구친구는 길의 기울기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우기고, 나는 속도를 얘기한다 하고 설전을 벌였다. 나중에 길수친구한테 속도표시라고 판정받았지만. 커브 길의 속도규제는 35, 45, 55-- 꼭 5자가 붙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경치 좋은 쉼터에서 두 애와 아빠를 만났는데, 마나님은 집나갔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고. 뉴질랜드에서는 가정적인 남편을 키위 허즈번드라고 부른다. 키위는 몸의 1/3크기의 알을 낳다 죽기도 한다는데 수컷이 부화한다고 한다. 이때 영역을 침범당하면, 수놈은 사투를 벌린다고. 뉴질랜드는 여성투표권을 제일 먼저 인정한 여성천국의 나라이다. 아이에게 가져온 기념품을 주었더니 좋아하며 만지작거렸다.
파라다이스에 이르는 길, 그래노키. 조그만 마을의 조그만 가게에서 저녁거리를 살까했더니, 변변치 않아 돌아섰다. 이 마을에도 마가목나무들이 보기 좋게 빨간 열매를 달고 있었다. z보트 선착장에 이르러 길수친구가 이곳에 오면 z보트도 타고, 조그만 카페에서 차 한잔하라는 말을 기억했는데, 시간도 없었고 선착장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록스버그, 인버카길
마을을 떠나, 오늘의 숙소가 있는 알랙산드라로 향했다. 도중에 카와라우강 다리의 번지점프대에 들렸는데, 10년 전에 들렸던 기억이 났다. 카와라우강은 와카티프호수에서 흘러나온다. 이강은 카와라우협곡을 통해 크롬웰에서 던스턴호수에 합류하고. 번지점프는 남태평양 팬타코스트섬 원주민이 성인식에서 치르던 통과의례로, A.J.Hackett이 개발하여 이곳에서 1988년 처음으로 시도했다. 높이 43미터 점프대에서 젊은 여인이 뛰어내렸다. 요즈음 겁 없이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거의 여인들인 것 같다.
(번지점프하는 여인)
또 비가 내렸고, 크롬웰에 들려 저녁 장을 본 후, 할머니 b&b에 들려, 아침에 두고 온 태욱친구의 베개를 찾아왔다. 할머니와의 인연이 끈질겼다. 크롬웰 지나는 길을 세 번이나 왕복한 셈. Alexandra에 있는 Garden Court Motel도착하니 정원이 예쁘고, 여종업원도 상냥했고, 제일 맘에 들었던 숙소였다. 삼일을 내리 이곳에 잤으면 좋았었는데 하는 생각. 거리도 할머니 B&B와 별로 차이가 안 나고. 오마카우보다 알랙산드라에서 와나카, 퀸스타운이 더 가까웠다. 가격도 하루에 165불(13만원)로 저렴한 편이었고.
좋은 정원을 바라보며 차린 저녁상, 분위기가 최고였다. 창밖에는 글라디올라스와 백송줄기가 어울렸고, 비에 떨어진 과일들이 지천이었으며 잘 가꾸어진 채소밭도 있었다. 알랙산드라는 오타고자치지역에 속하고, 기온이 온화하고 쾌적하다. 1863년 웨일스왕자와 덴마크 공주 알랙산드라의 결혼을 기념, 명명했다고. 19세기말 계곡근처에서 금이 발견됐다. 식사 후에 어두운 밤거리를 나서 선술집을 찾았는데, 불 켜진 건물의 창을 들여다보니, 교회에는 드럼 치는 사나이와 여인이 있었다. 오마카우에서 숙소를 찾아 헤맬 때 선술집에 들렸었는데, 그곳 분위기가 좋았다는 태욱친구의 말을 듣고 나섰던 길이었다.
(분위기 좋았던 Garden Court Motel 저녁상)
3월2일 금요일 아침, 인버카길을 향해 남쪽으로 가는 길, 긴 구름의 나라에는 구름이 길게 일고 있었는데, 차의 엔진오일 표시 등이 갑자기 깜박 깜박거렸다. 당황해서 과수원에 들려 정비소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지게차 운전하던 수더분한 농부가 조금 아래 타운 중심에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고맙다는 뜻으로 흥구친구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체리 한 상자를 구입했다. 큰 슈퍼 들릴 때마다 없었던 체리가 그곳에는 있었다.
농장주인이 가르쳐준 대로 오타고 자치지역의 소도시 록스버그에 있는 차량정비소를 찾아 그 앞에 정차했다. 록스버그는 알랙산드라 남쪽, 클러서강 기슭 테비엇계곡에 있는 1860년대의 골드러시의 주요 중심 타운. 가축사육, 사과 살구 체리가 주작목이고, 옛 기차 종착역의 흔적이 있으며 록스버그댐, 갈탄노천광이 있다. 차량의 본넷을 여니 먼지투성이, 한 번도 청소를 안 했는지. 엔진오일과 워셔액을 보충하고, 타이어 공기도 조정했다. 최종적으로 오일탱크 마개를 구입했다. 주유할 때 줄이 없는 연료구 마개를 차 지붕 위에 놓고 깜박하고 달리다보니 날려버리고 말았다. 다행이도 일찍 마개가 없는 것을 알아차려 휴지로 막았었다. 그 이후로는 마개뚜껑을 열어 호주머니에 넣고 주유했었고. 수리비 총합계는 51불(41천원),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았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보고 시종 웃는 마을의 구경꾼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를 향해 이차는 우리차가 아니고 친구차라고 강조했다. 정비소 옆에는 한국타이어 가게, 반가웠다. 정비사는 보아하니 키위 허즈번드, 얌전하게 생겼다. 다시 달리니 양목장이 계속되었다. 뉴질랜드 양 사육두수는 4천만. 인구의 10배는 안 된다. 수익성에서 보면, 양과 비육우 사육은 낙농보다 떨어진다고.
인버카길에 도착, i-site를 찾았는데, 같은 건물에 사우스랜드박물관, 갤러리와 같이 있었다. 인버카길은 사우스랜드자치지역의 상업중심지로 뉴질랜드의 최남단 도시인 동시에, 전 세계 최남단 도시들 중의 하나. 19세기 초 고래잡이 항구로, 인구는 55천 명. 19세기 중반 식민지개척에 공이 큰 윌리엄 카길 대위에서 이름을 땄다. 스코틀랜드인들이 정착했고 시원스런 사우스랜드평원의 중심이며 빅토리아시대 건축물이 많다. 가장 흐린 날이 많은 도시 중 하나로 제재, 식품가공, 모직물, 주물 기계, 목축업이 성행한다.
갤러리에 걸린 작품을 감상했고, 박물관에선 뉴질랜드 초기의 유물들, 당시의 개구리 소년과 마오리 후손들의 눈이 초롱초롱한 모습, 마오리족이 백인들에 항거하여 시위하는 장면, 우습게 생긴 복어 등의 해양 동물, 멸종 위기에 있는 키위, 남섬의 남해안 및 남동해안에 서식하는 몸집이 작은 블루 펭귄, 당시의 포경하는 모습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키위, 블루 펭귄, 고래 등은 여행기간 동안 그토록 보기를 원했지만 보지를 못했다.
(마오리족 어린이)
큐리오베이, 오와카
인버카길을 떠나 미국 서부가 생각나는 사우스랜드평원을 동으로 90키로 달려 캐틀린스해안으로 향했다. 인버카길 i-site에서는 남섬 최남단, 캐틀린스해안에 있는 땅끝 마을, Slope point와 Curio Bay를 추천해주었다. 이 해안에는 돌고래, 노랑눈펭긴, 바다사자, 알바트로스가 서식하고 있다. 알바트로스는 날개 길이가 3-4미터나 되어 날개를 질질 끌고 다닌다는 바보 새. 하루에 500마일을 달린다는 새로 가장 효율적 여행자이다. 골프에서도 이글보다 한수 위. 최남단에 있는 스로프포인트와 큐리오베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태평양해안으로 달리면 더니든에 이른다.
Slope Point 가는 길을 잘못 들어,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지 못하고 바로 Curio Bay로 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얌전한 비포장길이었지만 나중에는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덕분에 땅끝마을을 못보았고. 최남단곶이 있는 Curio Bay에는 유난히 바람이 셌고 넓은 비치가 펼쳐있었다. 땅끝마을이나 진배없는 이곳 Head Land는 바다로 불쑥 나와 있고. 큐리오베이에는 180백만 년이 된 쥬라기시대 나무 화석이 있다. 파도는 얼마나 세던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펭귄, 바다사자, 고래, 알바트로스도 못보고,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굴, 맛도 보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는데. 1791년 이곳에 포경선이 처음 도착했는데, 1840년까지는 뉴질랜드 근해에는 천 마리의 고래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떠나 더니든 가는 길은 동북쪽으로 180키로.
(큐리오베이의 헤드랜드)
강한 바람을 맞으며 카누의 고장 오와카에 오니 관광객을 태운 역마차, 틈실한 말들이 지천이었다. 승마를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나 보다. Owaka는 평원지대가 끝나고 울퉁불퉁 구릉지대에 있는 오타고지역의 소읍으로 인구는 겨우 3백 명. 이곳에서 주유를 했는데 22불 어치 넣으니 주유를 스톱했고, 150불이 결제됐다고 통보가 왔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어 묻지도 못했고. 귀국하여 국민카드사에 이의를 제기하여 겨우 해결했는데 누가 잘못한 것인지. 뉴질랜드는 주유소 결제방법이 각양각색이다. 전액 현금결제, 우리와 같이 주유기 옆에서 하는 카드 결제, 먼저 주유하고 사무실에서 결제하는 등. 남섬에서는 카드결제 시 우선 150불로 결제되고, 사후에 다시 취소되고 정상금액으로 결제되는 곳이 많았는데, 이해가 안 되었다.
3. 다시 동쪽해안을 북상하여 픽턴항으로
더니든
우리는 다시 길을 달려 뉴질랜드 남쪽에서 태평양 해안에 위치한 더니든으로 향했다. 더니든, 아카로아 거쳐 크라이스트처치로 갈 예정. 한가로운 풍경이 계속 펼쳐졌다. 북섬에는 소가, 남섬에는 양이 많은데, 사육환경이 그렇겠지만, 소고기가 북섬에서 많이 소비되어서 그런지. 더니든의 비탈진 동네, 터널비치가 보이는 언덕에서 오늘의 숙소를 찾았다. 숙소잡기가 어려운 동네는 지나갔고, 예약 없이 가면 헐하게 숙소를 구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사전에 후보지 모텔을 두 군데 물색하고 찾아간 것인데, 첫 번째 점 찍은 숙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비에 주소를 잘못 입력했는지, 민박집이었는데 깜박하고 모텔간판만 찾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터널비치는 알려지지 않은 명소인데, 그곳을 떠나가기가 아쉬웠다.
터널비치를 떠나, 다도해에 길게 누운 오타고반도의 산동네를 거쳐 고생 끝에 두 번째 예비숙소 포토벨로숙소에 간신히 도착했다. 내비가 인도하는 대로 낭떠러지 끝의 꼬부랑 산길을 얼마를 갔는지. 남섬 북단 푸퐁가로 간 날 이후 흥구친구가 제일 힘들었던 날이다. i-site가 있는 더니든 도심에서 동쪽 Portobello까지는 18키로, 도심에서 서쪽 끝 터널비치까지는 8키로. 숙소 문제로 꼬부랑길 26키로를 헛되이 헤맨 셈이다. 현지에서 계약하여 치룬 숙박비는 하루 전 부킹닷컴에서 제시된 금액보다 20불 더 비싼 160불. 왜 더 비싼 것이냐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해외여행 시에는 하루 전이라도 예약하는 것이 옳은 방법임을 몸으로 깨달았고. 하여튼 날은 어둑해져 딴 곳을 찾을 수도 없었고, 비싼 등록금을 냈다. 포토벨로숙소는 캠프벤으로 가득찼고, 늦게 서둘러 저녁을 해먹으니 맛은 꿀맛이었다.
(다도해에 누운 오타고반도)
3월3일 토요일, 안개가 자욱한 안개 속을 뚫고 산길을 가자니, 흥구친구는 신경이 곤두섰고, 애증이 많은 내비도 흔들렸다. 목적지 입력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도시이름 쳐도 안 되고, 유명한 명소 이름을 넣어도 안 되고. 어떤 때는 주소 넣어도 안 되고. 우리나라의 내비와는 틀려, 간단한 길만 표시되고, 좌회전, 우회전, 2nd exit으로 나가라 등 단순한 명령만 내렸다. 목적지가 얼마 남았는지,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통 알 수 없었다. 주위에 있어봐야 산야뿐이겠지만. 그렇지만 내비라도 없었으면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심카드를 꽂았는데도 일부 구간 빼고, 구글맵이 거의 안 되었으니 더욱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안개가 좀 걷히더니, 쉬었다 가고 싶은 벤치, 아침을 걷는 사람들도 시야에 보였다.
드디어 더니든 도심을 지났다. 남섬의 태평양연안에 있고 남섬에서 두 번째 큰 도시이며 오타고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 인구 13만 명에 남반구의 에든버러라고 불릴 만큼 스코틀랜드 문화에 젖어있다. 뉴질랜드 제일 오래된 대학, 오타고대학교가 있다. 울고 있는 강, 와이타키강이 도시를 흐르고. 자유로운 영혼의 외로운 여행자, 백패커가 앞과 뒤에 배낭을 메고 우리의 앞을 지나갔다. 우리는 주유 카드사건 이후 주유는 샐프지만, 종업원이 있는 칼텍스를 선호하게 되었다. 우리의 눈이 편파적인지 칼텍스의 아가씨들은 예뻐 보였고. 더니든 시내구경은 생략하고 태평양연안 따라 북상하는 길, 아직도 안개가 자욱했다.
아카로아
아침햇살이 눈부시고, 우리는 뽕짝을 틀었다. ‘청춘아, 내 청춘아’, 지탄친구의 18번. '여보, 마누라. 뒤뜰에 매어놓은 송아지 한 마리 어쨌소?' 보나마나 친정집 갔겠지. 길수친구가 길 떠날 때 넣어준 뽕짝이 수록된 라디오. 기사양반 졸릴 때, 신날 때, 우울할 때, 심심할 때면 틀어놓았다. 뒷좌석의 태욱친구, 어깨 들썩이며 박수치고. 안개가 길을 또 막았다. “속도 줄이라고. 2년에 벌점 백점이면, 길수친구 면허정지야.” 지나는 길에는 음지와 양지가 교차하고, 차타고 지나가는 견공이 차창에 머리를 내놓고,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여행 중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신경을 끊고 사니 얼마나 좋았던지.
(아침햇살)
Herbert를 지나 Oamaru로 들어섰다. 오마루는 인구 14천명으로 더니든, 퀸스타운에 이어 오타고자치지역에서 세 번째 큰 도시로 뉴질랜드의 작은 유럽이라 불린다. 시내에 진입하니 남섬 전체가 태풍, 지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곳곳이 피해복구현장이고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다. 오마루에서 한 시간 가량 달려 티마루에 들어서니 기아자동차 큰 간판이 보였고. 티마루는 인구 47천명의 캔터베리자치지역 항구도시로 뉴질랜드 두 번째 큰 어항이다. 19세기 중반 포경기지였고 더니든의 북쪽 196키로 지점에 위치한다. 앞을 보니 흥구친구가 무서워하는 트럭이며 큰 캠프벤, 트레일러 달은 차량들이 어찌나 꼬불꼬불 산길을 잘만 가는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크라이스트처치 입구에서 남동으로 뻗은 Banks반도에 있는 아카로아로 샜다. 힐톱을 넘으니 산과 내와 모래사장이 우리와 같이 달렸고. 아카로아 다 가서는 왼편으로 꺽지 못하고 바로 직진하는 바람에 산으로 오르고 말았다. 내려다보니 바다가 깊숙이 내륙으로 뻗어 있었고, 놀잇배가 아카로아 앞바다에 그득했다. 아카로아는 길수친구가 적극 추천한 곳. 길을 잘못 들어서기는 했지만, 산위에서 아름다운 마을전경도 감상하며 점심식사도 하고,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다시 아카로아에 진입, 중심지에 주차하고 i-site에 들려, 찾아갈만한 곳을 물어보기는 했지만, 오전 내내 안개가 낀 만큼 무척이나 더운 날씨였다. 트래킹하기에는 너무 덥고 시간도 넉넉치 못해,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아카로아 앞바다에서 유유히 뱃놀이하는 사람들, 어린이들이 물놀이 하는 광경 등을 구경하다가, 다시 출발하여 마을 입구 조용한 해변의 숲에서 휴식을 취했다. 잠간동안 마음의 돛단배에 돛을 달고 멋진 항해를 한 셈.
(아카로아 앞바다)
크라이스트처치, 보웬베일 트래킹
더운 날씨와 알렉산드라를 떠난 후 이틀간의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감안하여, 아카로아를 일찍 떠나서 크라이스트처치파크 옆에 있는 모텔에 도착하니, 아직도 해가 남아있고 여유가 있었다. 모텔 여주인은 태욱친구에게 숙박료를 받고 열쇠와 와이파이 이용권 세장을 주더니 어디론가 바로 사라졌다. 주인이 상주하지 않는 모텔 같았다. 이곳을 떠난 다음날인가 용도가 불분명한 25불이 카드 결제되었다고 통보가 왔다. 며칠간 알아본 끝에 이 모텔의 와이파이 이용료 25불이 청구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곳에선 와이파이가 잘 안 터져 우리가 불평을 했었고, 여행 중 와이파이 사용료를 별도 카드로 지불한 일은 없었다. 대도시의 얄팍한 상혼이랄까. 부킹닷컴이 제공한 카드번호를 불법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여유 있게 저녁식탁을 차렸고, 햇볕이 드는 식탁에서 처음으로 붉은 포도주를 겻 들인 식사를 하였다. 우리 입맛엔 역시 백포도주가 맞았다. 그리고 모텔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아직도 축구장에선 젊은이 몇이서 볼을 차고 있었고, 주변은 한국의 일반주택가 같은 분위기. 풋볼, 스쿼시클럽 사무실, 그리고 물리치료실도 있었다. 이들 사무실표시는 마오리어로도 쓰여 있었고. 뉴질랜드인의 1/7이 마오리족으로, 마오리어도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3월4일 일요일 8:30, 숙소를 출발하여 시내로 향했는데, 충전중인 폰이 숙소 의자 밑에 있는 것을 깜빡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헛바퀴 돌기 시작하였다. 크라이스트처치 시내는 아직 지진피해 복구 중으로 여기저기 공사표시가 있었다. 2010.4-2011.2 사이 캔터베리, 크라이스트처치 일원에 대지진이 있었는데, 최고 강도는 6.3이었다. 1931년 네이피어 지진 후 처음이라고. 지진강도는 12단계로 구분되는데, 6이면 모든 사람이 느끼고 일부 무거운 가구가 움직이며 벽의 석회가 떨어지는 정도. 7이면 일반건물의 약간의 피해, 부실건물에는 상당한 피해가 온다고. 지진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복구 중이라니, 이해가 안가는 일.
(피해복구 중인 크라이스트처치)
시내에는 여기저기 벽에 그린 그림들이 눈에 띄었고, 은빛 고사리와 마오리인도 그려져 있고, 높지는 않지만 영국식 건물과 현대식 건물, 아담한 교회건물, 그리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 어우러져 있었다. 거리엔 시티투어 전차도 달리고 있었고. 시의회 건물 앞에는 마오리 조각이 있는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곳을 조금 지나니 1층에 i-site가 있는 고풍스런 건물이 나타났다. 크라이스트처치는 평원에 세워진 정원도시. 인구는 368천명으로 남섬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아본강이 흐르고 있고, 양모, 고기, 낙농제품 등을 수출하고, 석유, 비료, 철강제품 등을 수입하는 뉴질랜드 제2 산업중심지. 시내 중심에 John Robert Golley의 동상이 있는데 그는 영국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보전할 수 있는 영국사회를 이곳에 구현하려 했다. 이도시의 이름을 따온 크라이스트처치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귀족적인 전통이 있는 대학. 16세기에 헨리8세가 세웠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학 겸 성당이며 십여 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i-site에 들렸더니 여직원은 빅토리아파크를 트래킹코스로 추천했다. 빅토리아파크와 인근에 보웬베일(Bowenwale)파크가 함께 나타나있는 지도를 얻고 나오려니, 이층에 화인아트갤러리가 있고, 마침 김 민 한국작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의 제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것저것 물어보며 작품을 구경했다. 헤어포드, 홀스타인, 수탉, 마오리여인, 크라이스트처치 거리 풍경,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 등. 작가는 뉴질랜드와 자연을 무척 사랑하는가 보았다.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길, 한 아트갤러리도 전시회를 광고하고 있었다. 역시 마오리말로도 쓰여 있었고. 들려볼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 뿐. 마침 일요일이라 주차료는 공짜였다.
(김민의 크라이스트처치 거리풍경)
내비에 다음 목적지, 빅토리아공원을 찍고 달렸는데, 가는 방향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25키로나 달려 되돌아왔는데, 빅토리아공원이 한 두 곳이 아닌가보았다. 이곳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영국문화가 닿은 곳이면 같은 이름이 많으리라. 그래서 목적지를 조금 바꾸어 인근의 보웬베일파크를 찍고 달렸더니, 시내를 벗어나 그곳으로 가는 넓지않은 언덕길은 심한 정체상태였다. 우리가 가고 있는 보웬베일파크는 리틀턴항구가 멀지않은 곳으로, 이공원의 바다 건너는 Banks 반도이고, 하루 전 우리가 들렸던 프랑스풍 마을 아카로아가 있는 곳이다.
(바다 건너는 뱅크스반도)
트래킹을 시작하여 처음으로 들린 입구의 버넌산 파크는 보웬베일 보호지역의 일부였다. 보웬베일 옆에 빅토리아파크가 있지만, 시간도 많지 않아 이곳을 걷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 같았다. 바다 건너의 뱅크스반도를 바라보며 하루 전 우리가 갔던 언덕이 어딜까 가늠 해보자니, 바위 사이에 예쁜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어느 청년이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했나? 완만한 능선을 내려와 언덕을 넘어 또 하나의 높은 봉우리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우리는 시의회에서 발행한 지도가 있는 팸플릿, 'Port Hills Walks'를 보고 이곳을 찾았는데, 여기저기 세운 안내문에도 의회 이름이 나와 있다. 이곳 의회에서는 이런 일도 하고 있고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정상에서 아이를 셋 데리고 온 여인을 만났는데, 가지고온 선물 하나를 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잘 한다는 표시를 했다. 이들은 학교 앞 교통안내도 학부형이 하지 않고, 애들로 하여금 하게 한다, 자립심을 키우려고. 하산하려니 길이 예쁘고, 크라이스트처치 시내가 내려다 보였다. 통행 금지된 길도 있고, MTB(Mountain Bike) 타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각종의 행사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세 시간은 족히 걸은, 멋진 도시 위의 야산 트래킹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 시내에 들어서니 인버카길 트램이라고 크게 써 붙인 전차가 지나가고, 짧은 여름옷차림의 젊은 여인들이 건널목을 건너갔다. 인버카길까지는 560키로가 넘는 거리인데 그곳까지 전차가 정말 운행될까?
(언덕 너머는 크라이스트처치)
햄머스프링, 카이코우라
이곳을 떠나 햄머스프링 가는 길, 아시안 마켓을 들렸더니 주인은 마침 한국 여인이라 반갑기도 했고. 김치도 팔고 있어, 얼씨구나 잘 되었구나하며 큰 봉지로 하나를 샀다. 김치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라 적시 구매라 할까.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햄머스프링까지는 130키로, 남섬 동해안에서 잠시 내륙으로 들어섰다. 햄머스프링은 서던알프스 언덕에 자리잡은 조용한 마을로 온천이 있는 동네이다. 우리의 숙소 카카포 롯지에 도착하니 주인이 한국인이다. lodge는 뉴질랜드에서는 모텔을 말한다. 손주를 안고 있는 여주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는데 남편은 상을 당해서 귀국하여 부재중이었고, 며느리는 중국인이었다. 가족경영 형태의 운영이다. 짐을 풀자말자 우리는 야외온천장으로 향하니, 이곳에서도 마가목은 빨간 열매를 뽐내고 있었다. 언젠가는 8월말에 울릉도 성인봉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키다리 마가목 군락을 보아야 할 텐데. 햄머스프링 온천은 온도계는 41도를 넘게 가리키고 있었지만, 야외 온천이라서 그런지 실제로는 그렇게 뜨겁지가 않았다. 제일 온도가 높은 탕에서 호주에서 온 팀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처가집 식구가 호주대사로 있다는 얘기도 하며. 옷을 락카에 넣고 나온 뒤에 핀 넘버도 조작하지 않고 나온 덕에, 온천욕을 마치고 락카를 열 때는 종업원을 부르는 촌극을 벌렸다. 실은 귀중품도 없었고 락카를 빌릴 필요가 없었는데. 락카를 열고 보았더니 흥구친구는 팬티를 신발에 꼬깃꼬깃 접어서 넣어두었다.
3월5일 월요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코니얼언덕 트래킹에 나섰다. 먼동이 터오더니 주위가 온통 황금빛으로 변했다. 좀 더 일찍 일어났더라면 일출을 볼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아담한 시골동네의 해가 뜨는 쪽을 바라보니 나무 한 그루가 멋쟁이였고. 트래킹 종점에 도착하니 정자 아래는 이 동네 발전에 기여했던 던컨 루서훠드(1853-1917)씨의 공로를 기리는 패가 있었다. 이들의 사람을 기리는 모습들은 참 보기가 좋다. 우리는 잘한 사람의 약점을 들추고 남을 비하하는데 너무 열심인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동네로 가는 지름길을 찾다가 다른 산보 길로 들어서서 한참이나 헤맸다. 동네로 못 내려올까 걱정까지 했고. 걷다보니 희한한 솔방울도 있고 개활지에 엎드려 굽혀 펴기 하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로 프랙틱, 마사지하는 곳도 있었고. 한 시간 잡았던 산보가 두 시간이나 걸렸다. 숙소에 돌아오니 커다란 밥통위에 널어놓았던 양말이 다 말랐다. 집사람 보았다면 더럽게 무엇 하는 짓이냐고 기절초풍했을 터인데.
(아담한 동네, 햄머스프링)
아침 식사 후 또 길을 떠나, 카이코우라로 향했다. 카이코우라까지는 125키로. 여행 떠날 때 길수친구가 심심할 때 마시라고 뉴질랜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아라나 에너지드링크를 넣어주었는데, 나 빼고 두 친구 모두가 싫어했다. Guarana는 아마존에서 나는 커피콩 크기의 열매로, 이 열매로 만든 음료수는 아마존 전사가 먹었던 브라질의 코카콜라라고 한다. 조수석에서 혼자 홀짝거리는 맛도 괜찮았고. 공사 중인 도로가에는 이동 신호등이 신호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 보는 것이다. 다시 태평양 바다, 카이코우라의 바다로 나왔다. 전형적인 어촌의 풍경을 보여주었고. 카이코우라는 마오리어로 가재를 먹는다는 뜻. 남섬 북동부해안의 카이코우라반도에 위치하는 이 어촌 도시의 인구는 4천명. 1843 최초의 포경기지였으며 난류 한류가교차하는 곳으로 해산물이 풍부하다. 고래체험,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으나 지진으로 그 흔하던 흑전복은 이제 구경하기 힘들다고. 도시 주위에는 마나카우산(2,608미터)과 파이프산(1,602미터)이 있다.
먼저 i-site를 찾아서 카이코우라 Walkway도 알아보고, 좋은 식당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카이코우라시후드BBQ를 맛있는 식당으로 추천해주었다. 도시 이름이 가재를 먹는 곳이니 바다가재, 랍스타를 먹어야지. 여직원은 너무 늦으면 브레넘으로 가는 길이 홍수피해로 통제되어 갈 수가 없으니 길을 서둘라고 참고말도 해주었다. 식당을 가서 보니 우리가 트래킹할 코스의 해안 초입에 자리를 잡은 음식점으로, 포장마차 분위기였다. 보스 같은 여주인이 현금만 받는다고 하여, 시내로 돌아가 시내중심에 있는 CD기에서 처음으로 현금을 뽑아보았다. 여행 중 현금으로 크게 지불한 곳은 주유소 한 곳, 할머니 b&b, 이곳 등 세 곳뿐으로 전부 남섬에 위치한다. 북섬보다는 남섬이 관광지 냄새가 더 나고, 인심도 별로인 것 같았다. 바다가재 2인분, 오늘의 메뉴 2인분에 홍합 1인분 추가로 시키고 보았더니 시킨 메뉴마다 밥과 빵, 그리고 채소가 나왔다. 결국 5인분 음식을 시킨 셈. 주위 테이블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대식가라 흉보는지 몰랐지만, 옆의 프랑스청년은 확실히 우리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지불한 금액은 107불(86천원). 영수증엔 With Thanks라는 말이 있고. 하여튼 남긴 음식 없이 적당한 가격에 자-알 먹었다.
(푸짐한 점심식사)
식후 트래킹 코스를 걷기 시작하니 해변에는 조개류 해초 채취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바다로 가면 당신책임이라고, 바다표범에 물리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또 새의 산란장소에는 가지 말고, 파도에 주의하라는 주의문도 있었고. 해변으로 나아갔더니 들기조차 힘든 다시마 줄기가 많았다. 해변을 따라 오솔길을 걷다, 육지 쪽의 가파른 절벽을 힘겹게 올라, 시내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절벽 위, 걷기 좋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세웠던 계획서대로 카이코우라 Walkway를 착실하게 걸은 것이다. 주의하라는 바다표범은 어디에도 없었고. 언덕 위의 정감 나는 길을 걷는 것은 마치 천당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아찔한 낭떠러지 위에서 보니 해안에는 풀과 나무기둥으로 만든, 아메리칸 인디언이 사는 집 같은 것이 보였고, 낭떠러지 위에서 연인들은 포옹을 하고 있었다. 해안가를 내려다보며 얼마라도 걸을 것 같은 길, 바다의 앙금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앙금을 걷어내는 카이코우라둘레길이었다.
(카이코우라 Walkway)
블레넘(브렌하임)
다시 북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블레넘으로 출발했다. 태풍으로 인한 해안 길 통제가 있어, 통행시간을 못 맞추면 두 시간이면 족할 길을 6시간 이상 산을 넘어 돌아가야 했다. 군데군데 산사태가 나있었는데 자연의 재해는 어쩔 수 없는 모양. 또 풍랑이 세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블레넘의 숙소 도착하니, 해가 지기 전이라, 날씨는 너무 더웠고, 뉴질랜드에 온 이후 처음으로 선풍기를 켰다. 저녁 식사 후 동네 산보를 시작했다.
(블레넘 가는 길)
1704년 영국의 말버러공작, 존 처칠이 독일 바이에른 블레넘에서 벌어진 스페인 왕위계승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는데, 이후 영불 간의 투쟁에서 우위를 지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기념 영국에 블레넘궁전을 세웠는데 윈스턴 처칠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산보를 하는 말버러자치지역의 블레넘도 이를 기념하여 명명된 것. 블레넘은 오마카강, 오파와강이 합류하는 와이라우평원에 자리잡은 인구 3만 명의 타운. 여름이 건조하고 고래관광, 낚시의 도시이다. 우리는 어두운 강가를 거닐다 숙소로 귀가. 어두운 시골동네에는 가끔 불 켜진 집이 드문드문 있었다. 내일 픽턴으로 가서 북섬으로 가는 배를 타면, 남섬의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셈이다.
4. 북섬 동해안을 북상하여, 오클랜드로
케이프팰리저, 캐슬포인트
3월6일 화요일 5시에 일어나 서둘러 픽턴항 선착장으로 달렸다. 남섬으로 올 때 웰링톤에서 길을 헤맸던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행히 작은 도시라 별 문제없이 무난히 안착했다. 배의 출발이 30분 늦어져 8:30출발했다. 하늘은 잔득 흐렸고. 올 때와는 달리 맥주 한잔하며 차분히 선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다를 보니 흐린 날의 돛단배, 돛이 없어도 잘 가고 있었다. 도착도 30분이 지연되어 귀한 한 시간이 도망가 버렸다. 웰링톤에 도착하니 산 위에는 집들이 빼곡했고. 남섬의 최북단과 최남단을 갔으니 이제는 북섬의 최남단을 가자는 흥구친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당초 캐슬포인트로 바로 가려던 것을 북섬의 남쪽 끝, 캐이프팰리저로 가기로. 웰링톤에서 캐이프팰리저까지는 141km이다.
(웰링턴으로 가는 훼리)
차는 웰링턴 언덕을 넘어 북섬 남동쪽의 자치지역, 와이라라파에 들어섰다. 인구 4만의 이지역의 서쪽에는 리무타카, 타라루아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일찍이 18세기 중엽에 유럽인들이 정착했고. 오늘 머무르기로 한 북쪽의 마스터톤이 이지역의 중심지이다. 리무타카산맥을 넘는 쉼터에는 Rimutaka Crossing 기념비가 있다. 세계1차대전당시 영국군 뉴질랜드 사단, 수천 명의 보병들이 서부전선으로 출발하려고 이 고개를 넘어 웰링톤항으로 갔다고. 두 명의 헌병이 우리와 같이 쉬고 있었는데, 한명은 마오리병사였다. 헌병들은 어느 나라나 훤칠하고 폼이 좋다.
(리무타카고개 기념비)
산맥을 넘으면, 평평한 땅 내지는 저지대이다. 점심때도 되고, 조그만 고을의 식당에 들렸는데 문이 닫혔다. 식당이름은 The Land Girl. 촌색시 얼굴 한번 보려했더니 마음대로 안 되었다. 메뉴판에는 와이파이도 적혀있었고. 시골 촌에도 이제는 와이파이가 연결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구릉지대도 나왔고, 확실히 북섬에는 양목장보다는 소목장이 많다. 팰리저만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고, 빗줄기가 세어졌다. 등대는 맑은 날보다 이런 날이 제격이리라. 북섬 최남단에 있는 케이프팰리저의 등대(1897년 건축)로 오르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수는 250개. 병만선생의 북섬 종단의 시발점이었다고 한다. 이곳 해안은 북섬 최대의 물개서식지. 날씨 탓인지 한산했고 물개도 안 보이고 캠핑족도 적었고. 등대 앞에는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해안 비포장길이 있고, 이를 통과하는 허술한 문이 있었다. 이문을 열고 동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오르면 캐슬포인트에 닿을 텐데. 길도 다시 돌아갈 필요도 없고. 그러나 두 친구 모두 머리를 흔들었고, 길도 비포장도로라 가자고 강하게 주장할 수가 없었다.
(케이프팰리저 등대)
등대를 올라갔다 돌아와서는 주섬주섬 취사도구를 꺼내어 등대 앞 바닷가, 우산 속에서 끓여먹었던 라면, 정말 꿀맛이었다. 비바람 속에 차가워진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도 했고. 다시 온 길로 돌아가자니 바다는 칠흑바다가 되어갔고, 거인바위는 괴물로 다가왔다. 곧 이어 길에서 처음 만난 순한 양떼는 우리차를 보고 당황해했고, 목동은 경운기에 양몰이 개를 싣고 양을 몰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이 피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날이 좀 개는 것 같더니 다시 폭우가 내렸고, 차장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유리에 부딪치는 빗물을 통해 예술이 되었다. Featherston 삼거리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는 마스터톤으로 달렸다. 케이프팰린저에서 이곳까지는 107키로.
드디어 마스터톤 모터롯지 도착하여 체크인하고 숙소의 키를 받았다. 숙소에 들어가 보니 취사시설이 완전치 못했고 태욱친구가 모텔이 이럴 수 있냐고 항의하였더니, 마음씨 좋은 주인은 마나님의 눈치를 보더니 시설이 완비된 큰방으로 바꿔줬다. 그리고 주인은 save를 사브라고 하는 등 알아먹기 힘든 영어를 구사하며, 숙박 관련 센서스에 응해달라고 설문지를 주었다. 방을 옮기는 과정에서 열쇠를 두고 방문을 잠그며, 와이파이 번호를 적은 쪽지를 잃어버리는 등 주인을 귀찮게 하다가 영어해독이 어렵다고 센서스용지를 반납해버렸다. 큰 방으로 옮겨주는 대신 돈을 더 받을 눈치더니 그 뒤 아무 말이 없었다. 짐 정리하고 파킨세이브, 대형마트에 들려 저녁거리를 사면서 부탄가스를 찾으니, 그곳에는 없고 웨어하우스에서 판단다. 물어물어 웨어하우스를 찾긴 찾았는데 영업시간이 지났다. 건축자재 등을 파는 곳에서 가스를 팔다니. 아마 화재염려 때문인가 보았다. 인구 21천명의 마스터톤은 와이라라파강 지류에 위치하며, 옛 농장조합장, 조지프 매스터스에서 이름을 땄다고. 이곳은 와이라라파자치지역의 중심지이며 목장, 농장지역이다.
3월7일 수요일, 마스터톤에서 65km 떨어진 캐슬포인트로 출발했다. 이날도 억세게 비가 뿌렸는데 좀처럼 비가 그치지 않았다. 캐슬포인트에는 1913년 세워졌고 ‘The Holiday Light’라고 불리는 마지막이었던 유인등대가 있다. 뉴질랜드는 1988년 전 등대를 자동화하여 웰링톤에 있는 중앙관제실에서 집중관리하고 있다고. 캐슬포인트는 마스터톤 행정구 소속의 와이라라파해안에 있는 작은 휴양지 마을, 물개, 고래가 많다. 등대가 서있는 곳은 캐슬록(Castle Rock), 성과 같이 생긴 바위의 위이다. 비바람 속의 등대하면, 영화'The Light between Oceans(파도가 지나간 자리)'가 생각난다. 등대지기부부는 비바람 속에서 임신한 아이를 잃고 상심하던 중, 파도에 밀려온 보트 안에서 한 남자의 시신과 살아있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이 아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간다. 그러던 중에 아이의 친모가 나타남으로 불행은 시작된다. 강한 비속을 뚫고 얕은 바다를 건너 등대에 올랐는데 어찌나 비바람이 세던지. 등대에서 내려오던 중 남녀 한 쌍을 만났는데, 이곳에서 마주친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쓸쓸한 휴양지엔 그래도 몇 대의 차가 있었지만.
(캐슬록 위의 등대)
우드빌, 네이피어
빗줄기가 더욱 세어지는 가운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293km 떨어진 네이피어로 출발했다. 만만치 않은 거리. 도중에 점심식사를 위해 우드빌에 잠간 들렸다. 이곳은 파머스톤 노스, 네이피어, 웰링톤가는 세 길이 모인 삼거리, 사시사철 바람이 불어 풍력발전기가 많은 곳. 아담한 규모의 공원이 있었고, 날이 궂어서인지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거리의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만원이었고, 휘시엔칩스를 한번은 맛보아야지 하며 Best Fish & Chips in Town이라고 간판을 붙인 음식점을 들렸다. 음식을 시켰더니 중국인 같이 생긴 뚱한 아줌마가 테이크아웃인지 알았다며 튀긴 감자만 많은 음식을 모조지 같은 큰 종이에 싸가지고 와서 테이블에 펴놓았다. 그나마 맛이라도 있어야지.
그 맛없는 점심 후, 오만상을 지으며 길을 떠나 혹스베이 지방자치지역에 들어섰다. 이지역의 인구는 16만 명, 일조량이 많아 겨울휴양지이며 은퇴지역으로도 이름이 있고, 중심지는 네이피어. 네이피어는 항구이기도 하지만, 국제공항도 있다. 일조량이 많은 관계로 대규모 포도단지도 많아, 끝이 안 보이는 포도밭이 지나갔다. 채석장도 보였고. 네이피어에 있는 숙소(Pania Lodge Motel)에 도착하여 장을 보고 주택가를 잠간 산책하였다. 네이피어는 북섬 호크베이 남서쪽해안에 자리를 잡고 있고, 인구는 5.7만명. 따뜻한 지중해성기후로 겨울휴양지이다. 19세기 인도주둔 영국사령관, 찰스 네이피어에서 도시이름을 따왔다. 저녁식사 때는 새로 사온 샤세르 백포도주를 개봉했다. 이포도주는 두터운 비닐봉지에 넣어져 박스로 포장이 되어 있고, 밑 부분에 술을 따르는 수도꼭지가 달려있어 딸아 마시기도 간편하다. 3리터짜리가 26불(21천원). 맛과 저렴한 가격에 중독이 되어 여행 중에 항시 이 것을 구입하여 끼니때마다 거르지 않았다. 비도 그쳤고 숙소 옆이 바로 공원이라 저녁 후에 산책을 했다. 마침 시각이 매직 아워(magic hour)이라 하늘이 파랗고 보기가 좋았다. 해변까지 가보려고 했지만, 길도 복잡하고 너무 멀었다. 이날 집에 처음으로 전화를 했는데, 집에 두고 온 걱정거리가 되살아났다. 역시 카톡으로 마나님한테 보고하는 것이 최상이다.
3월8일 목요일 아침, 네이피어해변으로 출발했더니 또 폭우가 쏟아졌다. 3일째 빗속 행군이었고, 요번 여행 중에 이날이 폭우가 제일 심하게 내린 날이었다. 길수친구와 하루를 더 보내기 위해 여행일정을 하루 단축하다보니 바빠졌고, 세계에서 가장 일찍 해가 뜨는 이스트케이프 방문도 어려워졌다. 멋진 네이피어해변을 보려고 차에서 내리기는 했지만, 험한 비바람에 몸을 가눌 수 없어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차로 돌아왔고, 어제 보았을 걸 하는 마음 뿐. 네이피어가 위치한 곳은 Hawkes Bay, 그 매서운 이름을 알만했다.
(폭풍우 치는 네이피어해변)
타우랑가
우리는 타우랑가로 출발했다. 그곳에는 길수친구가 소유한 모텔이 있는데, 곧 인수하여 직접 운영할 계획 중이었다. 세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이스트케이프는 지도의 오른쪽 상단, 힉스베이 오른쪽 끝에 위치한다. 우리는 타우포, 로토루아를 거쳐 타우랑가로 가려했지만 입구부터 막혔다. 이날 내린 비로 산사태가 났고 길이 붕괴되었다는 말을 나중에 길수친구로부터 들었다. 차를 돌려 우회도로로 나와서 다시 한 번 더 시도했지만, 여전히 그 길은 막혀있어, 결국 기즈본, 리어, 오포티키를 경유하는 먼 길을 택했다. 돌아서 가는 길도 폭우는 계속 쏟아져, 산사태가 나서 흙이 도로 위로 쏟아지고, 도로는 반 이상이 물에 잠기자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폭우가 더 계속되었다면 다시 네이피어로 돌아와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날 하루 내린 비는 300mm.
(타우랑가 가는 길)
조금 달리다보니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운전이 익숙해진 흥구친구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조수는 졸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걱정이 사라졌으니. 뒷좌석의 태욱친구가 음악을 틀었다. '떠나간 그대는 어디로 갔소.' 자신보다 더 큰 차량을 실은 큰 차가 우리의 앞을 막고 갔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안전을 위해서 꼭 선도차량을 앞세우고 간다. 와이로아를 지나 쉼터에서 점심을 들었다. 조금 전만해도 폭우가 쏟아지더니 맑은 하늘에 내려쬐는 햇볕이 따가웠다. 다시 길을 달려 기즈본의 외각을 돌아 인근의 유명한 캠핑장소, 와이오에카 조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는 망가누쿠 나무다리가 고풍스럽게 남아있는데, 뉴질랜드에서 몇 개 안되는 나무다리 중의 하나. 10인 이상 지나가면 안 된다고 쓰여 있었다. 인구 36천 명의 기즈본은 쿡선장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으로 일조량이 많고 세계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이며, 와이파오강이 흐른다. 이곳에선 토종물고기, 송어낚시를 할 수 있다. 망가누쿠다리의 위치는 기즈본을 지나 타우랑가로 가는 2번 도로상에 있다.
험한 길을 장시간 운전하는 흥구친구를 위해 두 군데 쉼터를 더 들렸다. 내륙을 지나 오포티키 근처의 해안가에 이르니 마음이 트이고 햇빛에 반사된 태평양 바다가 눈을 부시게 했다. 이곳은 Bay of Plenty, 풍요의 만이다. 이곳도 폭우가 심했는지 산사태 복구 작업이 한창. 얼마 안 있으니 타우랑가에 들어섰다. 인구 101천명의 상업항구와 자연리조트가 병존하는 북섬의 북동부 중심도시, 최대의 목재 적출항이며 꽃게잡이도 유명하다. 마오리전쟁의 무대였고 마웅가누이산(232미터)과 해수온천이 있다. 길수친구가 꼭 오르라고 한 마웅가누이산은 연말이 되면 젊은이들로 도시가 마비된다고 한다. 뭉게구름 이는 이곳의 하늘, 젊은 꿈이 아름다워라 하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나가는 열차, 키위레일을 달리는 열차에 그려진 그림도 주위와 어울렸고. 네이피어에서 타우랑가까지는 287키로, 8시간가량 걸렸다. 이날 폭우로 고생했던 8시간의 운전은 남섬 서북단의 훼어웰곳 가던 날, 남섬의 더니든 산길을 달렸던 날과 함께 흥구친구에게 가장 힘든 날 중의 하루였다. 타우랑가의 숙소 레인보우모텔에 도착하니, 모텔주인은 중국인, 부인은 일본여자. 여주인은 친절이 지나칠 정도였지만, 전기레인지, 커피포트 등 시설이 엉망이었다. 저녁을 하려니 태욱친구의 속이 끓었고, 흥구친구는 고된 운전 후 이것들을 고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수온천을 가려고 서둘렀는데, 저녁이 늦어지다 보니 10시 마감인 온천을 가지 못했다. 잠자리에 누우니 귀뚜라미소리, 이곳도 가을이 오나보다. 이곳의 귀뚜라미는 생각보다 아주 작다.
(타우랑가 숙소 주변)
코로만델반도 동쪽 해안
3월9일 금요일 아침, 코로만델반도를 향하여 가는 길, 기독교계통 사립 베들레햄칼리지가 있는 베들레햄을 지나도, 타우랑가로 들어오는 길은 차량의 정체가 심했다. 인구 10만 명의 타우랑가도 러시아워가 있을 만큼 큰 도시인가 보다. 허기야 편도 1차선 도로 뿐이니. 타우랑가에서 오클랜드까지는 187키로, 크게 먼 거리는 아니다. 카티카티를 지나 코로만델반도 입구에 있는 와이히비치 도착하니 파도는 거셌다. 해수욕장은 철이 지나 썰렁했고, 파도만 처얼썩 처얼썩. 이곳 바닷가를 둘러보고 왕가마타 가는 길에 들린 과일가게는 벌써 가을이란 프랑카드를 내걸었다. 꺽다리 주인여자는 쌀쌀맞았지만, 그림, 공예품 등으로 내부를 잘 꾸며놓았다. 이곳에서 노화예방에 좋고, 백가지 향이 있다는 패션후루트를 사먹었는데, 맛은 별로였고. 한 선교사가 이과일의 꽃을 보고, 패션후루트라고 작명했다 한다.
썰렁한 왕가마타비치의 청명한 하늘아래는 파도를 타는 몇 사람들이 신이 났고, 덩달아 주위의 아이들도 신이 나있었다. 몇 년이나 신은 내 르까프 샌달의 오른쪽 밑바닥이 이곳에서 반 이상 나갔는데 그래도 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강릉 어성전에서 어항 놓을 때 즐겨 신던 신발로, 여행이 끝난 후 길수친구네 집에 남겨 놓았다. 정적이 흐르는 초가을바다를 떠나 i-site직원이 추천한 Opoutere해변에 도착하니, 새가 많고 왕가마타보다 더 조용한 곳. 새 보호지역이며, 어패류 채취를 제한한다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해변으로 나아갔더니, 적막강산. 한 사나이, 아이 둘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더니 조그만 아들 녀석을 손으로 잡고 앞으로 내쳤다. 마음에 드는 해변이었다. 해변의 해맑은 미소와 나는 새들을 뒤로 하고 핫워터비치로 가는 길의 전망대에서 본 바다와 섬, 그림과 같았다. 이곳에는 키위가 사는지 키위 생태에 관한 설명문이 붙어 있었고. 핫워터비치에는 거세고 큰 파도와 물속의 험한 바위, 그리고 절벽을 조심하라고 경고문이 있었다. 이곳에도 셔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옆 사람들과 같이 삽으로 바닷가 모래를 팠지만, 물은 미지근했다. 나중에 길수친구의 말을 들었는데 아무데나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때와 장소가 있다고 했다.
(Opoutere해변)
(타우랑가에서 휘티앙가까지)
황가마타와 휘티앙가 사이에 위쪽으로 오포우티어해변, 핫워터비치, 하헤이비치, 커시드럴코브가 순서대로 있다. 우리는 휘티앙가에서 반도의 서쪽, 코로만델타운으로 넘어가, 세임스거쳐 오클랜드로 귀대할 예정이다.
Cathedral Cove
Hot Water Beach를 떠나 이곳에서 가까이 있는 숙소, Sea Breeze Holiday Park를 찾아 나섰다. 하루 전 숙소를 내비에 입력할 때 모텔의 번지수가 입력이 안 되어, 그냥 타이루아 휘티앙가 로드만 쳤었다. 웬걸 촌구석의 타이루아 휘팅가 로드가 얼마나 긴지, 숙소를 못 찾고 헤매다가, 선술집 색시, 유치원 교사, 동네아줌마 등에게 정신없이 물어본 후에야 간신히 모텔을 찾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온 길을 되돌아 나와 조금 더 북상하여, 하헤이비치 위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놓고, Cathedral Cove가는 트래킹을 시작했다. 초장에 햇볕 내려쬐는 언덕길을 오르자니 얼마나 더웠던지, 아이스케키도 사먹었고. 커시드럴코브 워킹웨이(Cathedral Cove Walking Way)는 천천히 음미하여 가면 왕복 2시간. 북섬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코스 중의 하나이다. 만(bay)은 비교적 넓고 깊은 곳이고 작은 만은 cove라고 부른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마음이 파랗게 잠기는 바다. 이곳 바다의 색은 뉴질랜드에서 본 바다의 색 중 가장 파랗고 마음에 들었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빨아들이는 깊은 색이었다. 가까이는 비치가 보이고 멀리 자그마한 섬들이 보였다. 언덕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 내내 절경이 계속되고. 흰 거품을 남기고 가는 배들은 ‘저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라는 가사를 떠올리게 했다. 사자가 누워있는 형상의 섬도 보였고.
도중에 세계1차대전 갈리폴리전투(1915년)에서의 전사자를 위한 기념의 숲이 있다. 영국 프랑스연합군과 독일 터키연합군 간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에서 영국 프랑스군이 패퇴했다. 일련의 전투과정에서 윈스턴 처칠이 물러났고, 이어 해밀턴장군의 지휘 아래 뉴질랜드 호주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 7만 명이 터키 갈리폴리반도에 상륙했으나, 결국은 패퇴하여 철수했다.
해안으로 내려가니 양지가 음지로 바뀌었고, 드디어 커시드럴코브 동굴에 도착. 테-황가누이-아-헤이 해양보호구역의 해식동굴이다. 바위에 구멍이 뚫려 이런 동굴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겠지. 이곳 앞바다에서도 카약은 인기 만점이었다. 이 해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의 하나, 해식동굴과 여러 형상의 바위, 바다와 섬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바위에 선 벌거벗은 아줌마는 물새를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는 추워 보이는 수영복의 처녀들, 배낭을 메고 바다 곁을 걷는 아가씨들, 날 잡아봐라 하고 뒤를 보며 뛰어가는 한 아가씨, 홀로 해변을 걷는 아가씨, 그 옆에는 한 쌍의 갈매기가 쫑긋거리고. 모래에 도드라져 나온 마주보는 발자국 한 쌍도 보였다. 침몰하는 타이타닉 바위 위에는 뒤틀린 소나무 한 그루 살고 있고, 색스피어 바위도 있고.
(커시드럴코브 앞의 바위가 성당?)
트래킹을 끝내고 숙소로 가는 길, 헤맸던 길은 눈에 익은 길 되어, 쉽게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해는 기울고 넓은 잔디밭 사이에 드문드문 있는 숙소에는 긴 빨랫줄도 매여 있었고. 이곳은 인기가 있는 모텔의 하나. 우리 숙소의 이름은 튜이, 뉴질랜드사람들이 사랑하는 새. 이새는 꿀을 먹는 새로, 몸길이가 30센티 정도이며 뉴질랜드에서만 산다. 목에 하얀 장식이 있어 검은 색의 사제복을 입은 목사 같다 하여 Parson Bird라 불리기도 한다. 저녁을 마친 후 빨래를 하여 널고 난 뒤, 뜰에 나오니 별 천지,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별들, 특히 북두칠성을 볼 수 없었다. 뉴질랜드 국기의 별 네 개 는 남십자성으로 북반구의 북극성처럼 남쪽의 길잡이다. 우리나라에선 보이지 않는 별인데, 왜 우리 가요에 나오는지.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눈에 익은 너의 모습 꿈속에 보면'. 남쪽에 끌려갔던 우리 동포들의 눈물이 서린 십자성이며, 옛날 월남에 파병을 했던 시절에 십자성부대도 있었다.
3월10일 토요일 숙소에서 더 북쪽에 있는 마타랑이비치 가는 길, 버팔로우비치, 심슨비치도 지나갔고, 해변의 바위 위에는 가마우지 떼가 보였다. 그 옆에선 한 사람이 차에 실린 보트를 끌어내려 진수시키고 있었고. 마타랑이비치에 도착해서는 비치를 옆에 두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며 한참 헤맸다. 길수친구가 이곳에 사구가 있다하여 사구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찾은 결과였다. 길을 찾는 도중에 도테렐(Dotterel)이라는 작은 물떼새를 보호하자는 안내판도 보았고, 담이 없는 별장지에서 쉬고 있는 여자피서객에게 마타랑이 비치를 물었더니, 무단히 불쑥 나타난 무뢰한 취급하며 모른다고 했다, 비치를 바로 옆에 두고. 정작 바다에 나가서 보니 사구는 없었고, 나중에 길수친구에게 물었더니 사구가 골프장이 되었다고 했다.
다음은 마타랑이 건너편에 있는 황가푸아비치. 백사장에는 셔핑에 지쳐버린 친구 일행, 개를 데리고 산보하는 부부 등 몇 사람이 전부였다. 우리의 9월초 한산해진 동해안의 해수욕장과 같다고나 할까. 이곳 가게에서는 엘피지가스도 팔고 있고 운치 있는 비치쉼터도 있었다. 해변 언덕에는 한 여인이 멋진 폼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길가에 주차해놓은 미니밴의 주인공. 백미러며 앞 유리창에는 브라자, 팬티 등 말리고 있는 여자속옷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길을 다시 달려 고개 위에 있는 쉼터에서 내려다보니, 아담한 코로만델 타운이 보였다. 이제까지는 코로만델반도의 동쪽해안을 타고 올라왔지만 이제는 반도의 서해안쪽. 오클랜드와의 거리는 168km이다. 쉼터는 왕복 1시간 반짜리, 카이파와 트릭 트랙의 출발점이었고, 우리는 잠간이나마 이 트랙의 숲을 잠간 맛보았다.
(황가푸아비치)
이곳에서 언덕을 내려가니 코로만델반도 서해안. 입구에는 아담한 동네, 인구 1,500명의 코로만델 타운이 자리하고 있고.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금광이 개발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울창한 산림의 벌목이 이루어졌으며, 사계절 관광지로 개발된 것은 최근이다. 코로만델반도는 뉴질랜드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관광지. 물론 오클랜드에서 비교적 가까운 탓도 있겠지만. 따라서 이지역의 토지가격도 최근 급상승했다고 한다. 이곳 i-site에 들려 트래킹코스를 알아보았고. 사무실 앞에 있는 예쁘장한 돌문은 사무엘이 세웠다는 것인지, 내용을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빠져나와 캠핑카가 그득한 해변에서 트래킹을 시작했다. 이곳 산에는 카우리소나무가 산재해 있는데, 중생대 주라기때 공룡과 함께 살았던 이들 소나무는 50미터 까지 자란다. 최근 토양으로 전파되는 질병으로 심한 피해를 입고 있어, 이 산 출입구에는 신발을 세척하도록 장치가 되어 있다. 오클랜드공항에서 놀랐지만, 입국 신고 시 흙 묻은 등산화 등을 신고토록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바다가 펼쳐 있고, 해변에는 그물 던지는 피서객들도 있었다. 쥬브를 이용한 그네를 지나, 앞서가는 산보객들을 따라가니 다시 주차장. 산도 타고, 바닷길도 걷는 좋은 코스였다. 코로만델해안을 돌 때는 내비에 비치이름이 입력이 안되어 구글지도를 켜놓고 길 안내를 받았다. 남섬에는 구글지도가 안되었는데, 이곳은 대도시, 오클랜드가 가까워서인지 모르겠다.
(코로만델타운 해안)
코로만델 시내로 돌아와 케밥집을 찾았더니 현금만 받는다 하여, 길가에 있는 아담한 레스토랑, Success카페를 다시 찾았다. 좀 전에 손님이 많아 케밥집을 찾은 것인데,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한산했다. Curry Thai Green Chicken을 주문했다. 1인당 15불,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맛있게 먹으며 닭고기가 별로 들어있지 않다고 예쁜 여종업원에게 얘기했더니 웃기만 했다.
오클랜드, 그리고 귀국
식사를 마치고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귀로에 들어섰다. 이번 여행의 가장 아쉬웠던 점은 20일 여행기간은 너무 짧았다는 것.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뉴질랜드의 가장 북쪽 노스랜드를 갔다 왔을 텐데 말이다.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교통표지판은'Expect the Unexpected', 예기치 않은 일을 조심하라는 말. 인생살이에도 적용할 만한데, 예기치 못한 일이 있어야 인생은 재미있는 게 아닌가. 요번 여행에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 많았고, 나중에 좋은 추억거리가 되었다. 이곳의 전형적인 부드러운 연초록 언덕과 바다가 연속으로 지나갔다. 길옆 쉼터에서 잠간 쉬자니, 여행하던 한 부부가 차를 세우고 훌훌 옷을 벗고는 헤엄을 쳤다. 그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고. 코로만델의 중심지 세임스타운 입구에 KITCHENS라고 쓴 조그만 가게가 있어, 부엌이 관심사인 태욱 친구가 내려 주인에게 부엌에 관해 물었는데, 무심코 kitchen 대신에 chicken이란 단어가 튀어 나왔다. 주인은 영문을 몰라 당황한 눈치.
길수친구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세임스타운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클랜드로 냅다 달렸다. 오클랜드입구의 하버브릿지를 건너 첫 갈림길에서, 이곳 운전에 익숙해진 흥구친구는 조수의 말을 잘 안 들었다. 다른 출구로 나갔더라면 엉뚱한 데로 빠질 뻔했다. 조수 덕분에 한 번도 딴 길로 빠지지 않고 대도시에 입성하여, 눈에 익은 길수친구네 골목으로 들어서니 마음이 푹 놓였다. 놀러 갔다던 친구는 벌써 집에 와있었고. 우리가 자동차로 여행한 거리는 6,406키로, 2015년 미국 횡단여행 때 기록했던 8,128키로 보다는 짧은 거리였지만, 미국은 시원하게 뻥 뚫린 도로였고 뉴질랜드는 대부분 편도 1차선 곡선 도로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거리이다. 정든 정원과 앞에 펼쳐진 바다, 바다에 떠있는 요트들, 그리고 오클랜드 시내, 하늘엔 기다란 흰 구름이 흘렀다. 정원 오른쪽의 큰 나무는 포후트카와, 크리스마스 때 실처럼 가늘고 붉은 꽃이 나무를 덮어 분위기를 돋우는 크리스마스트리이다. 시원한 맥주로 입가심한 후, 생선회와 포도주. 뉴질랜드 산 생선이라 주인은 맛없다 했지만 정원에서 따온 깻잎에 싸먹는 회는 일품이었다.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포도주는 남섬 말버러 산 Villa Maria와 Vidal. 아, 우리가 말버러지역 블레넘에서 하루 잤지. 어떻게 보면 오랜만의 해후였고. 흥구친구의 입에선 그동안에 일어났던 사건, 사고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어느덧 어둠이 찾아왔고, 정원 앞의 해안가는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색색가지 파라솔로 가득했다. 우리의 얘기는 끊임없이 흘렀고.
3월11일 일요일 아침, 길수친구는 우리를 사구가 있는 와이나무호수로 안내했다. 코로만델 반도 북쪽 마타랑이비치에서 우리가 골프장으로 바뀐 사구를 찾다가 헤맨 것이 맘에 걸린 모양이다. 와이나무호수는 오클랜드에서 서쪽으로 36km 떨어진 테즈만해 연안의 베델스비치 인근에 있다. 주차장에서 호수까지 걷는 와아나무호수 트랙은 왕복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규모는 작았지만 모래언덕의 검은 모래 위를 맨발로 걷는 맛은 색달랐다. 와이나무 호수를 앞에 두고 정담은 익어갔고, 검은 모래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았다. 없어지고, 또 생기고. 검은 모래가 어데서 오는지 근원이 있을 텐데, 이곳에만 쌓이는 것은 재미있지 않은가. 사구 옆의 작은 내의 물 흐름은 둥글게 휘어서 흘러나간다. 하회마을이나, 동강이나 이곳이나 속성이 같은 것 아닌가. 우리의 족적을 남기고 입구로 나오니 소나무군락. 인간과 마찬가지로 곧바르고 굵은 소나무가 있는 반면, 꼬부라지고 배배꼬인 소나무도 있다.
(와이나무호수)
다음은 Te Henga Walkway 걷기. 똑같이 여기서 시작하는 힐러리 트레일은 6-7시간이나 소요된다. 언덕 입구에서 만난 말들은 생기가 있고 윤기가 반지르르 흘렀다. 언덕에서 베델스비치를 내려다보니, 깊숙이 들어온 해변을 걷는 사람들, 일요일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베델스 비치에서는 학생들의 행사가 있는 모양으로 이들의 모습이 마치 개미들의 집단 같았다. 산에서 내려와 인근의 테 행가 리크리에이숀 보호지역의 철새 도래지로 이동하니, 드라마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화산의 용암이 분출하던 지역이 철새도래지가 되었으니. 이미 많은 철새, 개닛은 이동했고, 아기 새가 어리든가 사정이 있는 새들만 남아 있었다. 머리 부분만 황색인 개닛(Gannet)은 부비새의 일종. 부비새는 휘파람샛과의 하나. 우리가 방문한 세 곳은 모두 베델스 비치 인근에 위치한다.
뉴질랜드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정원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다. 불로 고기의 겉을 지져 육즙이 속에 남게 했고, 그리고 뚜껑을 덮어 더 익혔다. 우린 이제 같이 있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하며 술잔을 기울였고. 이번 여행경비는 총 840만원(1인당 280만원) 들었다. 그중 비행기와 배 값이 44%이고 (비행기 300만원, 남섬 오가는 배 값 70만원) 하루당 숙박비 10만원, 기름 값과 식비(외식비포함) 각각 5만원, 그리고 부대 관광비용 등이 3.5만원. 차량 렌트비(1일 135불, 11만원), 친구네 머문 3박4일 숙박비를 감안하면 1인당 90만원을 길수친구 덕분에 감면받은 셈이다. 사실, 여행의 계획단계부터 실행까지 길수친구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지만. 고맙다, 길수야. 정원에 피어있었던 예쁜 빨간 꽃, 우리의 우정이랄까. 정원에 나와 또 한 잔. 새침 떼기 고양이는 아는 척 모르는 척.
(다음을 기약하며)
3월12일 월요일 아침, 일찍 공항에 나가 길수친구와 이별한 후, 짐 수속하느라 어릿삐릿했다. 오클랜드공항은 짐 부치는 것도 기계화되어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었기에. 에어뉴질랜드 비행기는 11시간가량 비행한 후, 일본 나리타에 도착했다. 인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자니 황혼이 물들어 왔다. 때 묻지 않은 뉴질랜드의 자연과 사람들, 바위 없고 편안한 트래킹 길, 그리고 친구의 손길이 그리워질 것이다. 다시 한 번 길수친구에게 감사하고, 열심히 셰프 역할을 해준 태욱친구, 한시도 운전대를 놓지 않았던 흥구친구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무난히 멋진 여행을 끝맺을 수 있어서.
Ma te wa(See You Again), New Zea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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