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망우의 봄기운이군 (2006.1.24)
농협의 품을 떠난 지 만 두해가 되니, 동년배 동인끼리 한 달에 두 번하는 산행에 동참하는 친구가 두 셋에 불과하다. 겨울의 추위가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나이 육십에 들어서서 몸이 갑자기 늙어서일까? 돈 벌기에 바쁘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새해 들어 두 번째 산행에도 세 명이 참가했다. 47년 산악대장 임 동욱 동인과 합천 산 사나이 허 태곤 동인, 그리고 허리가 신통치 않은 꺼벙이 나. 광나루 전철역에서 시작한 산행은 몇 번 길을 물어 헤매다가, 장로회 신학대학교 정문 후문을 거쳐 아차산성 쪽으로 들어섰다. 오늘 참가하기로 한 조 성수 동인은 장모 상을 당하여 발인 중이고, 이 명노 동인은 모친이 의자에서 떨어지셔 간호중이라 했다. 예전 같으면 육십 노인네라고 자식들에게 봉양 받을 나이인데, 실제는 팔십 이상 된 부모를 모시는 동인들이 한 둘이 아니다.
아차산 곳곳은 산성 복구 및 유물 발굴로 흐트러져 있었다. 우리민족의 기가 한참 셀 때, 삼국의 세가 팽팽하게 부딪쳤던 곳이고, 그 와중에 온달장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요즈음 tv드라마에서 바보온달과 평강공주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딱 부러진 사람보다 좀 모자란 사람이 그 때나 지금이나 호감이 가는가보다.
산성을 지나, 대성암 방향으로 강변 쪽 길을 따라 휘돌아 가자니, 부드럽게 휘어 흐르는 한강 위로는 봄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대성암은 아직 동안거 중이었고, 스님의 경전 읽는 소리가 리듬 있게 멀리까지 들렸다. 암자 옆 체력장에서는 남의 입장은 모르는 듯 목소리 큰 사나이들이 음담패설 중이었다.
대성암 뒷길로 가파르고 너른 바위를 올라, 과일과 커피 한 잔 즐기려니, 옹기종기 모여 한강의 운치를 즐기는 팀들이 몇이 되었다. 앞서 내려간 팀이 앉았던 자리를 보니, 나무에 걸어놓은 등산 스틱이 홀로 남아 있었다. 봄기운이 돌면 사람들의 정신이 나른해지겠지.
아차산 정상에서 용마산 줄기로 갈아타고는 바로 망우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헬기장에서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허형의 점심 보따리는 신혼 새댁이 싸준 것처럼 얌전하고 다양했다. 부침개 하나도 모양이 있고 맛있었다. 산행을 자주하는 임형은 자연산 더덕장아찌와 느릅나무, 더덕, 오가피로 만든 술을 내 놓았다. 술의 색깔이 느릅나무 액이 들어간 까닭에 불그스름한 것이 보기 좋았다. 컵 라면과 뜨거운 물만 내놓는 나는, “장가들 잘 갔네.”하면서 부러워했지만, 치매든 어머님을 모시는 집사람에게 사실 할 말은 없는 몸이다.
다시 망우공원 산줄기를 타려니, 한 잔의 술이 셋을 동지로 묶었다. 자연, 역사, 문학 등에 관심들이 많은지라 이런저런 얘깃거리들이 많았다. 아차산 망우산 산행은 작년 봄에 이어 두 번째였다. 봄의 화사했던 망우공원의 산길도 아름다웠었지만, 겨울의 공원길도 그 못지않게 운치가 있었다. 비록 망우공원의 시초가 미아리 공동묘지였다고 하지만, 용인 등의 묘지공원이나 규모 큰 개인의 묘지와는 달리, 오밀조밀 잘 가꾸어져 있어 정감이 갔다. 북향의 묘지들도 잔디가 깨끗한 것을 보니, 이곳의 겨울바람이 그리 매섭지 않은가보았다.
산줄기 끝부분에 가서 작년과는 달리 산길 대신 아스팔트길로 들어서니, 언론인이며 정치가였던 설산 장 덕수 선생의 묘가 있다는 표지석이 있었다. 돌아가신 해가 우리가 태어났던 1947년이다. 해방 즈음에 친일을 했다고 하지만,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던 선생은 좌익계 형사에게 암살되셨다. 인터넷에는 민족반역자처단협회라는 거창한 단체에서 선생을 비방하는 글이 올라와 있다. 무엇이 무엇인지?
허형과 임형이 묘를 찾아 참배한 후 조금 내려오니, 소설가 서해 최 학송 선생의 표지석이 나왔다. 빈궁문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선생은 홍염, 탈출기, 혈흔, 박 돌의 죽음, 금붕어 등 소설을 쓰셨지만, 주인공이 빚으로 딸을 빼앗기고, 방화 살인을 하는 내용의 ‘홍염’ 만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이어 독립운동가 오 재영, 서 동일 선생의 표지석이 나온 후, 내가 좋아하는 박 인환 시인(1926-1956)의 표지석이 있었다. 30년을 꿈처럼 살다간 시인은 6. 25 종전 후, 폐허가 된 도시 서울의 명동에서 다방, 술집을 헤매던 멋쟁이였었다. 타계하기 일주일전 명동 경상도집에서 시인이 즉석에서 지은 시가 ‘세월이 가면’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이 진섭 선생이 작곡을 하였고, 나 애심 씨가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래하였다고 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인의 서늘한 가슴이 망우공원에 있지만, 뜨거운 가슴을 느끼는 것은 웬일인지. 서쪽으로 기울어진 햇볕을 받으며 내려오는 길, 산보를 즐기는 동네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다. 그러고 보니 해가 많이 길어졌다. 시간도 남고 망우동 육교 건너 기원이 보이기에, 허형을 먼저 보내고, 임형과 둘이 기원에 들어섰다. 둘이 두면 지기만하는 바둑인데, 2승 1무가 웬일? 시인의 기를 받아서였을까? 임형의 가슴은 말은 안하였지만, 열이 났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