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물가의 겨울연가 (2005.12.9-10)
한라선 백록담 등반이후, 허리 때문에 두 달 가까이 고전하다보니, 가는 12월이 정말 아쉬웠다. 조금 더 있으면, 대부분의 우리 친구들은 오십이란 숫자를 아쉬워할 게 아니겠는가? 이런저런 생각 속을 헤매다, 재혁군에게 전화를 했더니 너 잘 만났다하는 식의 반응이 왔다. 그래서 바로물가를 찾은 지 13개월이 되는 12월 9일(금요일), 우리는 그곳을 향했다. 작년 기록을 들추어보니 우리친구 여덟 명이 안규철군을 만난 날이 11월 9일이다.
1. 59세에 59번 도로를 타고 지리산 산중을 헤매다.
평촌역에서 대장 재혁군을 만난 때가 오후 2시, 같이 간다던 성익군과 지탄군이 보이질 않았다. 대장의 말을 들어보니, 요즈음 맛들인 돼지 껍데기를 사러 보냈더니 좀 늦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명식군의 모친상 때, 연대 영안실에서 잠시 나와 먹었던 소주 안주, 신촌의 돼지 껍데기 맛이 그만이었었다.
지탄의 애차와 함께 나타난 두 사나이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어제 전화해 보았더니 규철군이 현대 중앙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단다. 마의 아홉수인가? 부랴부랴 대장과 성익군이 역 앞의 월마트로 위문품을 사러갔다. 작년에 건강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교 졸업하고 두 번째의 만남이 이 웬일이고. 어쨌든 친구들을 가득 채우고 문병가지 못하는 썰렁한 차의 여석이 아쉽기만 했다.
이럭저럭 2시40분이 되어 출발을 하였는데 예상외로 도로가 막혔다. 경부를 타고 달리다 죽암 휴게소에서 호떡 하나씩 들었을 때가 4시 반이었다. 우리의 든든한 기사 성익군 어느새 마나님 줄 선물을 준비했다. 마늘 까는 조그마한 도구였다. “이 나이에 마나님 일 시킬 궁리냐?” 했지만, 마나님 챙기는 친구는 성익군 뿐인 것 같다. 대전에서 진주로 가는 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하동을 향했다. 여행 중 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였지만, 5시 멋진 일몰을 차 속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경제가 궁해졌는지, 차속에서는 소주도 없고 먹거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영호군이 주축이 되어 투석중인 최선군군을 도왔다는 얘기도 나왔다.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대목모임에서 여유 있는 친구들은 밥 한번사고, 참가한 친구들은 미의(微意)를 모아, 그때그때 어려운 친구들을 도왔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6시 15분 함양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지탄군과 안내 코너에 들려서 하동 가는 빠른 길을 물었더니, 예쁜 아가씨는 산청 IC에서 빠져 59번 도로를 타라고 했다. 지도상에서 보니 과연 59번 도로가 지름길이었다. 갸우뚱하는 대장을 앞좌석에 놓고, 성익군 “59세는 59번 도로로”하며, 산청IC를 빠져 칠흑 같은 산길로 들어섰다. 60세의 성익군 59번 도로를 탄다는 것이 60번 도로를 타고 있었다. “임마, 돌려!”, 대장의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대장의 말대로 진주까지 고속도로를 타고 하동을 갔으면, 길도 편하고 한 시간 이상이 절약되었을 것이다.
길을 다시 돌아 나와 산청 금서면 평촌에서 59번 도로를 한참 달리니, 대장의 말대로 삼장면 평촌에서 대원사입구가 나왔다. 평촌 친구가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가는 곳곳 평촌이 나왔다. 귀경길에도 하동 청암면 평촌을 지났다. 지도상의 직선도로가 왜 그리 꼬불꼬불한지. 거기다 지리산 산자락의 길은 곳곳이 얼어 있었다. 작년 지리산 계곡탐방 시 들렸던 대원사 계곡은, 지리산에서 사람이 사는 가장 깊은 곳으로, 상류에 조개골이 있고, 옛날 빨치산 경남도당이 있던 곳이다. 대원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도량의 하나이며, 세심(洗心)탕과 세신(洗身)탕이 있는, 멋이 숨쉬는 산행지이다. 대원사를 한 밤중에 들리자는 나의 말이 재혁의 심사를 한 번 더 그었는지도 모르겠다.
2. 꿈에 그리던 바로물가, 바로 거기
하동이 가까워지자 지탄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바로물가 전화번호를 114에 물어 전화를 넣었다. 다행이도 전의 이씨 이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겨울철이라 공사 중이라고요?” 지탄군만 힘이 빠졌을까? “손님받자고 방 하나 덥히려니, 기름보일러를 때야하고, 그러려니 배꼽이 더 커지는 것 아니겠냐고?”, 머리 회전이 빠른 성익군의 말이 딱 맞았다.
정각사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길을 물었더니, 59번 도로를 계속 타는 것보다, 우회전하여 청학동(하동군 청암면 소재) 쪽으로 가서 묵계저수지, 악양, 화개장터를 거쳐 가는 것이 빠른 길이라 일러줬다. 그러고 보니 작년 바로물가를 갔던 바로 그 길이다. 작년 이 길을 가며 틀어놓았던 한무의 음담패설 테이프 소리가 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였다. 성익군은 그때 당시 개별 출발하여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한무가 성익군하고 꼭 닮았다고 떠들었었다. 그리고 청학동에서 엿 안산다고 “엿 먹어라!” 소리 들었던 일들도 기억났다.
하여튼 어디에서 돼지 껍데기 구울까하며 심란해 있을 때, 반갑게도 이여사의 초정 전화가 왔다. 숙소는 근처에 예약해 놓을 터이니, 바로물가에서 한잔하자는 얘기였다. 차내에는 금방 활기가 넘쳤고, 멀리 섬진강을 질러 하동과 광양을 잇는 남도대교의 야경이 왜 그렇게 휘황찬란했던지. 화개(花開)장터 길을 들어서자, 세 친구들 거리 구석구석을 기억하고 있었다.
8시 45분 쌍계사계곡의 얼어붙을 듯 찬 밤공기를 뚫고 바로물가 카페로 들어서니, 난로는 불타고 있었고, 이여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실내는 깔끔하게 가꾸어져 있어 세련미가 넘쳐흘렀다. 포옹이라도 할 것 같았던 지탄군은 멀쑥한 모습 만 보일 뿐, 작년의 술기운이 그리웠다. 이여사한테 잘 보이려고 서로 설거지하겠다고 법석이던 일, 재혁군이 이여사를 툭 건드렸드니 지탄군에게 쓰러졌다는 추억 등이 새삼스러웠다. 이여사가 틀어놓은 기기는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를 흘리고 있었다.
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난
이렇게 무너져 버리고 마니까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써도
잊을 수 없게 하니까
기억을 되살려보니 겨울연가의 노래 ‘처음부터 지금까지’였다.
작년에 고기 구웠던 부엌이 아니라, 이여사의 내실에 자리를 잡았다. 한구석의 이부자리는 썰렁해 보였지만, 차려놓은 상 밑이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준비해온 돼지 껍데기와 갈비를 굽고, 소주잔을 돌렸다. 지난해의 추억, 안암동의 처녀시절, 규철이 얘기, 대장의 돼지껍데기 홍보 등. 아무튼 이여사는 대목회 회원들을 차마 거절 못하고, 손님을 맞은 것 같았다. 작년 우리와 술 먹던 날 밤, 자동차 사고가 있어서 불일폭포 등반에 동행을 못했었다고 했다. 그녀가 해놓은 따뜻한 밥을 먹고, 홀(hall)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들었다. 우리의 주인 대접이었다. 왠지 술을 삼가는 이수민여사, 우리들도 술이 취하질 않았다. 때로는 흐트러짐이 좋지 않은가?
23시 50분 쌍계사 앞 온천모텔에 짐을 풀었다. 방도 뜨듯하고 코골이들도 없었는데도 잠들을 설쳤다. 성익군의 술버릇은 나아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마나님 품이 그리웠던 것 같았고, 육십을 앞둔 셋도 새삼 객지를 타는 것 같았다.
3. 에로스적 여인네의 몸짓, 불일(佛日)폭포
화개장터로 다시 나가, 아침으로 재첩국을 든 때는 8시 반 쯤 되었다. 올갱이를 재첩으로 알고 있었던 나를 빼놓고는 전부 입맛을 다셨다. 털이 난 섬진강 참게장 맛이 특이 했고, 아주머니가 타주는 커피 맛은 아주머니 얼굴과는 달리 일품이었다.
9시 반 이수민여사와 다시 합세하여 불일폭포 등반을 시작했다. 작년에 했던 약속을 일 년 만에 실행하는 셈이었다. 겨울 산은 역시 쓸쓸했다. 초입의 딱따구리 한 마리 구멍을 뚫고 있었고, 얼마 안가서 산과 길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쌍계사에서 3키로의 길이지만 눈길은 만만치 않았다. 이여사의 등반 솜씨는 보통은 넘었다.
눈 쌓인 불일평전 오두막집 앞에서 재혁군 담배 한 대 피우는데, 겨울 초가집에서 흰 연기가 나는 듯 했다. 내가 잔소리 좀 했더니, 평전의 도사님, 이런 곳일수록 더욱 음미하며 피워야한다고 편을 들고 나섰다. 드디어 높은 산 깊은 계곡이 나타났다. 좁은 새가슴이 다 넓어지는 것 같았다. 겨울의 불일폭포는 누가 말한 대로 에로스적 여인네의 몸짓을 하고 있었다. 얼은 얼음 위로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폭포는 여름 같지는 않았지만 쏟아지고 있었고, 물줄기 옆의 얼음장식이 검은 바위 빛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섯 명의 선남선녀는 환호하며, 심호흡을 하였다. 불일은 폭포 근처에서 수도하다 입적하였던 고려 지눌국사의 시호라고 한다.
이여사가 준비해온 과일 등을 음미한 후, 지리산 10경의 하나인 불일폭포를 뒤로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언젠가는 삼신봉(1284미터)으로 하여 세석평전을 찾으리라. 돌아오는 길 산을 오르는 아낙네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12시 쯤 쌍계사에서 불공을 드리겠다는 이여사와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무슨 소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부처님께서 다 들어주시겠지.
4. 규철이네 집 찾기, 그리고 마무리
사전에 전화 걸고 문병을 하는 것이 규철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하산 후 전화를 하였더니 공교롭게 서울 중앙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점심 전에 그의 집을 찾아 준비해온 위문품을 전달하기로 하고 집을 찾아 나섰다.
어제 밤에 본 남도대교를 건너서, 우리의 성익군은 홍쌍리 청매실농원으로 차를 냅다 몰았다. 생각보다는 큰 농장이었고 장독의 행렬도 대단했다. 홍사장을 찾으니 외유 중이라고 했다. 여자는 남자가 먼저 뜨면 모두 제 세상이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섬진강 강가를 음미하며 하동읍을 향했다, 눈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강은 겨울철이라 그 몸매가 날씬해져 있고, 흰 속살 같은 백사장이 넓어져 있어 시원해 보였다.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 생각났다.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뒤안으로 김치를 내려가다가/
눈이 가득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내리는 집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의 뜰 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그/여/자/네집
하동읍에 들어서서, 돌아가신 규철의 아버님, 안약사님까지 들먹거리며, 묻고 또 묻고 하여 그의 집을 찾았다. 읍내인데도 물어 볼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요행이도 친척 되는 분을 만나 물건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전화로 듣는 규철의 목소리가 너무 힘이 빠져 있어, 좀 회복이 된 후, 치료차 상경했을 때, 그를 만나보기로 하였다.
지탄이 보다 더 고생이 많았던 그의 애차는 겨우 3살 밖에 안 먹었는데도, 중환자처럼 소리를 내었다. 하동읍의 현대 서비스에 차를 맡겨놓고, 자장면이 유명한 하동반점을 찾았다. 가다보니 하동역이 있어, 하동에 웬 기차 하였더니, 밀양 삼랑진과 광주 송정동을 연결하는 경전선이 이곳을 지난다.
이름이 거창한 황금 쟁반자장에 이과두주를 시켰는데, 그냥 자장 맛만도 못했다. 현대 서비스 여사장이 주는 따끈한 모과차 한잔씩 마시고 오후 2시 반 하동을 떴다. 진주에서 올해의 마무리 여행, 천리 길을 되돌아 나왔다. 천안부터 상경길이 막히자, 버스 전용선을 달려
수원에서 빠져, 수원 강서면옥에서 재혁군이 산 냉면을 먹을 때는 밤8시 가까이 되었다. 친구들은 헛소리로 내년에 육순잔치 어쩌고 하는데, 내년부터 나이는 만으로 세자고. 그리고 내년에는 더욱 건강해서 즐거운 여행 또 많이 하자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