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맞은 봄바람(2007.3.14)
봄은 늘 변덕스럽고 쌀쌀맞은 것인데도, 늘 잊어버리고 있다가, 화창한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봄비가 휘몰아치면, 올해는 왜 이리 봄이 요란스러운가 한다.
지난 주초, 은행에서 환전을 하며, 이번 주 떠나기로 되어있던 중국여행은 정작 출발해야 출발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김 대리에게 농담으로 말했었다. 왜냐하면 작년에 계획된 여행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연기되어, 올봄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스추안(四川)성과 관련된 기행문과 역사책을 찾아 읽어보았더니, 그런대로 흥미가 있었다. 위치우이(余秋雨)가 쓴 중국문화답사기에는 싼샤(三峽)의 션뉘훵(神女峰)을 노래한 시가 실려 있었다.
강가 언덕을 따라
금빛 찬란한 지조와 여인의 정절을 요구하는 큰 물길은
새로운 배반을 부채질하고
낭떠러지에서 천년을 지켜보느니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서 하루 저녁을 통곡하는 것만 못하니
지난주 목요일, 종합병원에 간 집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담당과장이 당장 입원하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동네 병원을 찾았고, 일주일 지나 검사 결과를 받자마자 종합병원을 찾았던 집사람이었다. 어찌할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결국 여행 떠나기로 되어 있던 날에 입원하여 다음날 자궁 및 난소를 들어내는 수술 일정이 잡혔다.
여행사에 취소통보를 하자니 처음에는 아까운 생각뿐이었다. 직장의 고향 후배들이 생각하여 마련한 공짜 여행이며, 그것도 일 년이나 연기된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집사람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니, 내 마음도 따라서 한 없이 가라앉았다. 주말에는 봄날이 얼마나 험악해졌는지, 눈발까지 휘몰아치고. 집사람은 처형들이 같이 식사하자고하여도, 명식 군 내외가 바람 쏘이러 나가자해도 차갑게 거절해버렸다.
입원하던 날, 월요일 아침은 전주(前週)와는 달리 화창한 봄날 그대로였다. 베란다의 관음죽 꽃대는 분홍색을 띠기 시작했고, 바닥에 떨어진 동백 꽃잎은 너무 선명하여 눈이 부셨다. 서둘러 중랑 수필모임에 참가하였더니, 창백한 얼굴의 박 선생님이 반갑게 악수를 청하셨다. 여행을 떠났다면, 한 달 간 뵙지 못하였을 터인데.
모임의 점심시간이 늦어지자, 선생님께 먼저 가겠다고 인사까지 하였지만, 한 회장님의 만류도 있고 하여 마음을 바꾸었다. 명태전골에 소주 한잔 곁들여, 이 국장님의 ‘혼자 사는 즐거움에 대하여’를 듣자니, 그날따라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리고 병중이지만, 소주 한 잔 받아놓는 선생님의 모습이 좋아보였다.
점심 후 시간을 보니, 집사람 입원 예약시간에 맞추기가 빠듯할 것 같았다. 집 전화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도 한참 받지를 않으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노닥대는 남편 모습에 화가 나서 혼자 떠난 것은 아닐까하고.
다행이도 집에 도착하여 입원준비를 끝낸 집사람을 태우고 운전을 하려니, 집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술 생각에 겁이 잔뜩 들은 사람 생각은 하나도 않고, 거기다 음주 운전이라니.” 자기가 운전한다고 차를 멈추라는 것을 못들은 척하고 달리려니, 차라리 중국이나 가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호통을 쳤다. 병원에 도착하였더니 처형들은 벌써 도착하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 여덟시, 시작하는 수술시간에 맞추어 병실에 도착하였더니, 병실은 텅 비어있었다. 큰일 났다하며 수술실로 뛰어 올라갔더니, 두 처형과 큰 딸이 수술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수술실로 돌진하였더니, 푸른 가운의 사나이들이 두 줄로 도열해 있고, 한 귀퉁이 침대위에서 겁먹은 집사람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첫 번째 수술환자인 집사람의 침대가 안쪽으로 끌려가는 것이 보이자, 수술실 밖의 큰 딸이 “힘내 엄마!”하고 소리쳤다.
네 시간의 기다림은 정말 길었다. 집사람은 몇 년 전 육종연골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것과 관련이 되어, 온몸에 암이 퍼져 수술이 중도에 중단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병동 환자 휴게실에는 분만을 기다리는 젊은 친구가 초조히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나도 참다못해, 처형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 밖 시가지를 한 시간 가량 걸었다.
병실로 옮겨진 집사람은 오후 네 시 지나, 집도의의 수술경과 얘기를 듣고서야, 창백한 얼굴이나마 안도의 숨을 쉬었다. 확실한 결과는 일주일 후에 알겠지만, 다행이 악성 암의 징후는 안보였고, 난소의 혹은 무른 것이었으며, 복강경(腹腔鏡)에 의한 수술이었다고 했다.
수술 다음날 아침 병실에 들르니 집사람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소변이 안 나오니 물을 자주 달라했고, 방귀가 안 나온다고 성화를 해대었다. 예쁜 간호사에게 둘 다 안 나오면 죽느냐고 물었더니, 그저 웃기만 했다. 집사람의 수분 섭취량과 소변 배출량을 적기도 하고,
누운 집사람의 거칠어진 손을 만져주기도 하고, 링거를 매단 틀을 끌고 집사람과 병실 복도를 거닐자니, 여유가 그렇게 많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자니 집사람의 쌀쌀한 봄바람도 따뜻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애들 셋이나 분만할 때도, 그 아픈 육종연골암 수술할 때도 한 번도 곁에 없더니.”하더니, “이렇게 간단한 수술인데, 당신 중국 그냥 갈 걸.”했다.
( 2007. 3.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