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아비가 무식하여 (2008.3.10)

난해 2015. 9. 28. 16:22

 

 

  막내가 신병훈련을 마치고 공군사관학교에 배치된 후 얼마 안 되어 면회를 갔다. 입대할 때는 진주까지 배웅하지 않았다고, 집사람의 비난이 거세었다. “당신 졸병 때, 면회 온 아버님 붙들고 울었다면서요. 그러면서 애한테 너무 하는 것 아니에요?”라는 비난이 또 쏟아질까봐, 절친한 친구, 명식 내외와 도시락 싸들고 나들이를 나섰다. 공사 후문 뒤 호젓하게 자리 잡은 면회실 근처 잔디에는, 일찌감치 면회 온 가족들이, 아직 군인이기엔 엉성한 폼의 이등병을 둘러싸고 편한 자세로 담소하고 있었다.


  면회실의 둥그런 탁자 건너편에 앉았던 집사람의 얼굴이 환해지는가 싶었더니 어는 새 막내가 나타나, 큰 소리로 “아버님, 어머님 오셨습니까?”하며 경례를 턱 붙였다. 어깨에는 다른 이등병에겐 없는 노란 견장이 붙어있었다. 새로 배치 받아온 신병들에게 표시를 하여, 이들이 자살이나 탈영을 하지 않도록 특별 취급하는 모양이었다. 노란 표지 때문에 병아리 이등병이라 했다. 점심 보따리를 풀었는데, 아들은 먹기보다는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기에 정신이 없었다. 엄마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녀석은 위로 누이만 둘인데, 엄마와 누이들로부터 편지를 자주 받는 것 같았다. 소외감 느낀 명식과 나는 자리를 빠져나와, 잔디 위에 앉았다가 걷다가 하였지만, 면회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막내는 83년 1월 6일생이다. 집사람이 아이를 가졌을 때는 아버님은 위암투병 중이셨다. 유산을 하려고 집을 나서도 보았지만, 아버님을 생각하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명색이 장남인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넉 달이 안 되어 녀석이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아이 셋을 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는 가족계획 운동이 절정에 달한 때였다. 83년 이후 출생자에 대하여는 분만 비용, 의료보험은 물론 학자금 지원도 안 하겠다는 정부의 시책 발표가 있었다. 집사람과 내가 처갓집 친척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출산하기로 모의를 한 결과, 아이의 호적상 생일이 82년 12월 30일이 되었다. 집사람은 내심 반대하였지만, 내 고집을 못 이길 것 같아서인지 일지감치 포기를 한 것 같았다. 옛 어른들은 애기 때 사망률이 높아, 온전히 애가 큰 다음에 늦게 신고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출산비용 10만원을 받기위해 출생일을 당겨 신고하다니.


  어쨌든 막내의 생일은 실제대로 지켜져 왔다. 그러더니 하필이면 애가 만 18세가 되어 신검할 나이되니까, 집사람은 애 생일을 찾아주어야 된다고 나를 들볶기 시작했다. 짠돌이가 분만 비용 10만원 때문에 애 나이 한 살 더 먹게 하였다고 하면서. 내 어리석음도 후회되고, 아이에게 제 생일을 찾아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리저리 궁리를 하였다. 우선 서초동 가정법원 근처의 법무사를 소개받아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지방법원장으로 있는 친구에게 가능성을 물었다. 시골 교장선생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는 가능성이 없다고 대답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관련된 소장은 기각되어 반려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람의 요구가 끈질겼는지, 법무사는 다시 한 번해보자고 하며, 그때 당시의 정황을 써오라고 했다. 나는 사실대로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아버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잘못 된 아이의 생일을 바로 잡아주려고 한다는 요지의 글을 써주었다. 그리고 출산 당시 미역 값이 적혀진 가계부와 출생병원의 사실 확인서를 첨부했다. 법무사는 그 글을 보고는 내 어리석음을 비웃더니, 법원이 그렇게 할 일이 없는 곳인 줄 아느냐 하면서, 애 아버지가 신고할 때 무식하여 출생일을 잘못 적었다는 내용으로 고쳤다고 했다.


  법원의 처리가 어떻게 될까하고 기다리던 중에, 법원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집사람은 처음으로 법원이라는 곳에 불려나갔다. 그날 열린 재판은 우리아이의 생일 건 말고는 거의 이혼사건이었으며, 옆에 앉았던 사람이 무슨 사유로 이혼하게 되었냐며 측은한 눈빛으로 보는 바람에 아내는 창피했다고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판사는 아내에게 징병과 관련된 질문만 간단히 하였다고 했다.


  얼마 후 서울가정법원의 생일 정정허가 판결문이 송달되어 왔다. 모자가 얼마나 기뻐했던지 모른다. 집사람의 선한 눈이 판사의 마음을 감동시키었는지, 판사가 애아버지에게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달을 기회를 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네 시 반 가까이 되니, 면회실 주변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졸병들의 마음은 아쉬웠을 것이고, 가족들의 마음은 언제나 제대를 할까하고 걱정이 태산이었으리라. 면회 나온 중에 대표 격인 일병은, 면회 온 애인이 보는 앞이라 그런지, 폼을 재면서 이등병들을 집합시켜 줄을 세웠다. 병아리 이등병 둘은 그룹과는 따로 떨어져, 두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부대를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겼다. 한 친구는 자꾸 뒤를 보았는데, 우리아이는 마음은 간절했겠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집사람은 아들 녀석이 꼭 지 애비를 닮아, 장가들이면 밥 한술 얻어먹겠냐는 투정을 가끔 하지만, 애비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안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