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를 거슬러 올라3(그랜드캐니언)
3.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장대한 그랜드캐니언
10/8, 오후 2시를 지나 네바다 주로 진입하니,
설산이 또 나타났다.
네바다 주의 대부분은 고원과 산지이다.
넓이는 캘리포니아의 2/3정도로, 남한의 3배나 되는데,
인구는 고작 2.8백만 명.
강수량 500미리 미만이지만, 눈이 많아 스키가 성행한다.
멕시코와의 전쟁이후 미국령이 되었고,
최대산업은 관광산업, 도박에 대한 세금이
정부기관의 주 수입원.
길 떠나 처음 만난 다운타운의 맥도널드에 들려
점심으로 햄버거를 들었다. “Four hamburg, please"하며
주문할 것을 ”Hamburg four"해서 못 알아들었는지,
예쁘장한 여종업원은 대꾸가 없었다.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길, 잿빛 산들이 계속 나타났고,
Ash Meadow 등 ash자가 붙은 지명들이 자주
나타났다. 잿빛은 네바다 주의 색인가 보다.
데스벨리를 떠난지 2시간 반, 라스베이거스에 도착,
룩스호텔에 자리를 잡은 후, 뷔페식 호텔 식사.
간이식 식사에 익숙해져서인지 내 입맛이 그래선지,
호텔음식은 차에서 먹은 자장밥보다 맛이 없었다.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들만큼.
식사를 마치고 밤거리로 나서기로 했는데,
호텔이 하도 커서 촌놈들이 도시에서 길을 찾듯이
호텔 안에서 헤매다보니 여섯 명이 모이는데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남북으로 6.8키로나 길게 뻗은 번화가인 스트립(Strip)은
다양한 테마호텔로 눈부시게 휘황찬란했다.
누구는 죄의 도시(Sin City)라고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넘쳐났다.
멋쟁이, 거지, 한량, 흰둥이, 검둥이 등.
벨라지오호텔로 가는 길은 멀기도 했다,
라스베이거스의 황제라 불리는 윈리조트 회장,
스티브 윈은 벨라지오호텔에서 고가 미술품을 전시,
라스베이거스 전체의 격을 높였다.
이 호텔 앞에서 벌어지는 분수 쇼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15분마다 쇼가 진행되고 음악과
분수의 형태도 그때마다 틀려졌다.
우리는 운집해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어깨 너머로 분수의 곡예를 보았다.
쇼는 곧 허망하게 끝났고 지친 발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와서 본 환타시(Fantasy) 쇼.
환상에 젖어보지도 못하고 1인당 65불의
입장료를 아까워했다.
옛날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쇼.
늦게 호텔방에 돌아와 오랜만에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것으로 만족.
다음날 10월 9일 아침, 눈을 떠보니 이국적 분위기.
라스베이거스는 모하비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도시.
이름 자체는 스페인어로 초원이라는 뜻.
1829년 라파엘 리베라가 미국 중부에서 LA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중에 오아시스를 발견했고,
라스베이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주민만 살던 이 오아시스에
한때 모르몬교도들이 정착촌을 세웠으나
인디언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고,
1905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LA로 이어지는
철도가 놓이자, 이 도시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1931년 주정부는 이곳의 도박을 합법화했는데,
때맞춰 1936년 후버댐이 완성되자
도박장들은 대박이 났다.
라스베이거스가 도박천국이 되도록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뉴욕의 마피아, 벅시 시걸.
60년대에 정부가 마피아를 단속하였고,
미국의 전설적 갑부, 하워드 휴즈가 호텔을 사들여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휴양시설을 만들고부터
라스베이거스는 건전한 도시가 되었다.
또 이곳은 방위산업과 쉬운 이혼절차로도 이름 났다.
라스베이거스 북쪽 사막에서 50년대부터
40여 년 간 핵무기 실험을 하였다.
최근 경기가 침체하자 이곳도 어려워져,
다양한 행사의 유치 등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으며,
도박장의 승률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유수종친구와 아침 산보를 나서니
사막의 아침은 청명하고 눈부셨다.
전날은 MGM 사거리에서 엄청 헤맸었는데,
파란 하늘과 선명한 거리의 색깔은
어제의 일들을 말끔히 쓸어버렸다.
데스벨리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190키로 미터.
엘에이에서 이곳에 오려면 모하비사막을
건너야 하는데, 교통요지, 바스토우(Barstow)를 거친다.
아침 이른 시각이라 거리는 한산했지만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쳤다.
날씬한 미녀도, 짧은 머리의 젊은 친구도 지나가고.
번화가 스트립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만다레이 베이(Mandalay Bay)호텔 바로 옆에는
우리가 하루 밤보낸 룩소르(Luxor)호텔이 있고,
정면에는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 식당 델리에서 주대감이 합세,
간단한 조식을 들었는데, 간단한 식사 3인분에 82불.
아직도 방에서 쉬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편의점에서 과일 봉지를 몇 개 사서 방마다 돌렸다.
사막의 과일 맛은 굿, 달콤 새콤.
그리고는 임목사가 차를 수리하는 동안
퇴실수속을 밟았는데,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 옷차림, 몸매,
각양각색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는 것도 심심치는 않았다.
차량수리가 끝나고 한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운암정에서 모처럼 뚝배기 음식을 들고,
슈퍼에서 여행 도중 필요한 식품,
술꾼들은 주류를 구매했다.
근육통 파스, 바이오후리즈(Biofreeze)를 구매했는데,
동네 한의원에서 파는 값은 그게 그거.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는 길에 들린
전망대에서는 블랙캐니언과 모하브 호수가 보였다.
이 호수의 물은 흘러 미드호(Lake Mead)로 흐르고
결국에는 후버댐에 갇히게 된다.
블랙캐니언은 콜로라도 주 서부의 로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콜로라도강의 지류, 거니슨 강이 흐르는 협곡.
길이는 80키로로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이 협곡만큼 폭이 좁고 양쪽 절벽이 가파른 곳이 없다.
햇빛이 잘 비치지 않아 블랙캐니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호가니, 폰데로사 소나무, 향나무 등이 자라고 있고,
암벽 등반, 카약, 래프팅 전문가들의 천국.
미드호는 1937년 그랜드캐니언을 흐르는 콜로라도강
하류에 건설된 후버댐의 완공으로 태어났으며
당시 공사감독관 엘우드 미드(Elwood Mead)였다,
드디어 콜로라도강을 거꾸로 오르는 여행은 시작되었다.
콜로라도는 스페인어로 ‘붉다’는 뜻.
홍하의 계곡을 흐르는 강, 계곡도 붉고, 강물도 붉고.
그 위를 비추는 해도 붉고, 황혼도 붉고.
차는 네바다에서 애리조나로 진입했다.
‘카우보이 애리조나 카우보이, 황야를 달려가는
애리조나 카우보이--’
애리조나는 인디언말로 작은 샘이라는 뜻.
이곳에 들어서니 풍광이 틀려졌다.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는 황량한 잿빛 산에서
아담한 산들이 어우러진 풍광으로 변했다.
산도적에서 잘생긴 사나이로의 변신.
주의 경계를 지날 때마다 변하는 풍광은
딴 세계로 들어선 느낌을 갖게 했다.
애리조나 주는 48번째 주. 중북부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고, 남부는 이들로부터 구입.
크기는 네바다와 비슷하지만, 인구는 두 배 이상.
네바다보다는 살기 좋다는 이야기다.
주의 대부분이 고원과 평지이며
관광, 광업, 농 목축업이 주요 산업.
나지막한 산과 황금벌판, 어디에선가 인디언의
북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저 멀리 인디언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 넘어 주막집에---’
명국환의 애리조나 카우보이는
외래 정서에 놀아난 노래라고 하지만,
서부영화를 즐겨볼 때 즐겨 부른 흥이 나는 노래.
우연히 인디언 출신 존 헐링(John Huling)의
산의 숨소리(Breath of the Mountain)란 인디언 풀룻
연주곡을 들었는데, 북소리, 풀룻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 음악이었다.
인디언의 북소리는 명국환의 애리조나 카우보이의
경쾌함과는 거리가 있는 소리였다.
요즈음의 카우보이들은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초기의 역사에서는 적수였던 그들은
길동무가 되어 서부신화의 황혼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축산업의 기계화, 자동화로 카우보이들은
실직 중이거나, 그 위험에 빠진지 오래다.
반면, 가짜 카우보이들은 밥상에 꾀는
파리 떼처럼 늘고 있다. 커다란 하얀
모자와 몸에 꼭 끼는 바지, 꽃무늬 셔츠,
굽이 높은 부추의 가짜 카우보이, 걸들이
미시시피 작은 도시들을 활보하고 있다.
애리조나는 인디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
‘16세기 유럽의 양심’이라고 평가받는
라스카사스(1474-1566)는 스페인 출신 신부로,
인디언의 열악한 처우에 분노했던 사람이다.
그는 인디언을 지상낙원에서 암소들처럼 온순하게
살던 꾸밈없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또 헨리 데비드 소로우는 땅에 경계선을 긋거나
나누지 않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인디언의 지혜라고 했고.
반면에 홀름버그는 인디언을 행위의 주체가
결여된 야만인이라고 했고, 밴크로프트는
이들을 게으름의 결과라고 비하했다.
이들의 조상은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3천 년 전에 베링해협을 건너 왔다고 한다.
칠레 남부에는 12천 년 전 사람이 살았으며,
칠레에 33천 년 전의 인공물이 있다는 점을 보면
신석기 이전에 이들의 조상이
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이 정설.
인디언들의 눈에 서양인들은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수족 인디언으로 태어나 성장했으나,
백인사회에 입문하여 의사이며 작가가 된
오히예사가 쓴 자서전, ‘인디언의 영혼
(The Soul of Indian)'에 나오는 글이다.
“얼굴 흰 사람들은 노예를 부린다.
하인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그들의 몸에 검댕이 칠을 해놓은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따지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전투할 때도 졸병들만
영양 떼처럼 내몰아 전투를 벌인다. 졸병들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싸움터에 나온다.
그래서 우리 인디언들은 그들을 물리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우리 인디언들과 사뭇 다르다.
얼굴 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진리에 대해
말하고, 진리가 적혀있는 책을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세상에 그들만큼 진리와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자들도 없다.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진 삶은 곧 죽음이다.”
글의 내용을 보니, 우리의 행동거지도 영락없는
얼굴 흰 사람들이다.
애리조나 산하에 어둠이 슬슬 밀려왔다.
우리는 7시에 애쉬 훠크(Ash Fork)근처
개인 캠핑장에 도착하여 자리를 폈다.
이날 자릿세는 50불. 국립은 보통 20-25불이고,
사립은 보통 150불이라니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새벽의 땅, 뉴잉글랜드 해안에
서구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
인디언은 신비로운 존재이면서 위험한 적이었다.
당시 신대륙의 지원자들의 지원동기를 보면,
원시림과 아름답고 재빠른 인디언 아가씨,
출세해보려는 욕망이 지원동기였다고.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 당도했지만,
1614년이 되어서야 유럽인들은 인디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620년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마사추세츠에 도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10월 10일, 보기 좋게 노란색으로 물들은
애리조나의 아침이 찾아왔다.
애리조나 인디언들은 아나사지, 호호켐,
모골론 문명을 개발하며 살았는데,
역사는 10천년으로 본다.
아파치, 나바호족은 이곳의 토박이들이 아니라
1540년 스페인들이 오기 바로 전에
애리조나로 이주한 인디언들이다.
아파치족의 치열한 공격으로 스페인 이주자들은
애리조나 남부와 멕시코 북부를 흐르는
산타크루즈 강(River Santa Cruz)유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75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페인 군사주둔지가
진출했고 진흙에 식물섬유를 이겨 만든
어도비 벽돌로 된 요새를 지었다.
아파치족은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하고,
1846년 미국과 멕시코와의 전쟁이 끝난 후인
1886년에서야 항복을 한 대단한 인디언들이다.
우리는 역마차나 말을 타는 대신 RV를 타고
뻥 뚫린 애리조나의 하이웨이를 달렸다.
상상의 말채찍을 말아들고.
드디어 애리조나 주의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450키로, 5시간 거리.
길 찾기는 내비를 이용하면 쉬울 것 같지만,
잘못하여 길을 지나치면 수십 키로 돌 수도 있고.
사전에 지도를 보면서 계획을 세우고
꼼꼼히 도로표지판을 살피며 운전해야 한다.
그랜드캐니언은 20억년 형성된 지구의 역사이다.
망망대해에 바닷물에 밀려온 침전물 등이
사암, 석회암으로 변하고, 해저가 솟으면서
콜로라도 고원이 만들어졌고, 또 콜로라도 강이
그 표면을 깎고 고원이 잘리는 등 오랜 동안
자연이 만든 결과물이 그랜드캐니언이다.
그랜드캐니언은 445키로 미터의 협곡이며
깊이는 1,500미터, 아열대부터 한대까지의
기후 권을 갖고 있다.
공원 넓이는 요세미티와 비슷하다.
이곳의 사우스 림(South Rim)과
노우스 림(North Rim)과의 직선거리는
16키로 미터도 안 되지만,
돌아가려면 900키로 미터도 넘는다.
그랜드캐니언은 1869년에 포웰(John Wesley
Powell)소령의 탐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고전적 탐험기, ‘콜로라도 강과 그 협곡
탐험’에서 그는 그랜드 캐니언을 극찬하였다.
마침 아버츠 다람쥐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공원에는 두 종류의 다람쥐가 있다.
아버츠 (Abert's Squirrel)다람쥐는
몸의 색이 회색과 갈색이 섞이어 있는 반면,
카이밥 다람쥐(Kaibab Squirrel)는
갈색 몸통에 꼬리가 희다.
안규철친구가 절벽에서 폼을 잡았다.
하동에서 과수원을 경영한다.
배농사를 때려치우고, 뉴칠랜드 원산
앤비(envy)사과를 키운다.
늙으면 큰 것보다 작고 맛있는 것이 좋지.
해병출신이라 술잡수시면 거칠어지신다.
자연을 사랑했던 영국태생의 미국화가,
토마스 모란(Thomas Moran, 1837-1926)의
그랜드캐니언 그림을 보면,
당시에는 강물이 풍부했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
보기드문 풍경.
모란은 주로 그랜드캐니언과 서부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로키산맥에서 발원한 콜로라도 강은
수많은 계곡, 특히 장대한 그랜드캐니언을
침식시켜 온 힘의 대명사인 동시에 미국인들에겐
향수에 젖어 부르는 노래의 주제이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은 마음 그리워 저 하늘--’,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길을 홀로 걷는
나그네의 쓸쓸함을 잘 표현한 곡이다.
미국인들 사이에 그랜드캐니언은 일생에 꼭 한번은
찾아보아야 하는 경이로운 세상이며,
매년 3백만 명 이상이 찾는 그랜드캐니언은
애리조나주의 큰 수입원이며 보물이다.
이곳에는 기차, 비행기, 버스는 물론 노새,
콜로라도 강을 헤치고 나가는 고무보트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 와서 두 시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처음으로 트래킹다운 트래킹을 했다.
빛나는 천사 트레일(Bright Angel Trail)의 길이는
12키로 미터, 위에서 밑바닥까지의 높이는
1,360미터나 된다, 내려가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린다.
8백여 년 전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하바수파이(Havasupai)부족이 물을 찾아
강가로 내려간 것이 이 트레일의 유래이다.
경사가 만만치 않아 모두들 힘들어 했다.
올라오는 길목에서 한 무리의 앙케이트 조사자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트레킹을 하는데
얼마의 물이 필요한 지 등을 묻고 있었다.
장난삼아 응했다가, 질문이 얼마나 세밀한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문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얼떨결에 임목사에게 역할을 넘겨버렸다.
길 곳곳에는 나귀 똥이 무대기로 쌓여 있었다.
짐을 나를 때나 힘들 때는 나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전에 중국의 차마고도(車馬高道)를 갔을 때
나귀 신세를 한번 졌었는데, 힘들어 하는
나귀한테 미안했을 뿐 아니라, 나귀를 타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엉덩이는 아팠고 몸의 균형을
잡기가 보통 어렵지가 않았다.
데저트 뷰를 가는 도중, 진흙 목욕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순록들을 만났다.
북미에 사는 순록은 캐리부(Caribou)라 불린다.
일부 주에서는 늑대 때문에 순록 개체수가 줄어들자,
늑대 소탕 작전을 폈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가 보았다.
데저트 뷰에 도착하여 전망대(Desert View
Watchtower)에서 내려다보니, 애리조나 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아담한 산이 보였다.
시다 산(Cedar Mountain)이라고 하는데
전망대 안을 들어가니 인디언들의 작품들이
수수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페이지로 향하여 가는 길,
그랜드캐니언을 흘러내리는 콜로라도 강은 비록
계속된 가뭄으로 형편없이 메말라 있었지만.
원시의 황색을 보이며 흐르고 있었다.
콜로라도의 본색, 본래의 모양을 보이며.
콜로라도 강의 협곡지대는 강에 가까워질수록
더 건조해지고 더 황량해져서 사람 살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모여드는 도시가 강가에
자리를 잡기 마련인데, 유타 주 모압에서
캘리포니아주 니들스까지 1,600키로 미터
흐르는 동안 강가에 도시가 하나도 없다.
도시만 없는 것이 아니라
식물도 잘 살 수가 없다.
저지대가 고지대 보다 강우량이 적고,
많은 양의 물이 가파른 협곡을 통해 단시간에
빠른 속도로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계곡의 황금색 단층은 너무 눈부셨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이런 장대한 황금색
홍하의 골짜기를 볼 수 있을까.
이곳의 자연은 황홀하기 까지 한데
그 주인들이 사는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이곳에 있는 기념품 가게를 한 군데 들렸지만,
물건은 초라하고 인사조차 없는 그들에게서
친근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일전 친구 아들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는
젊은 목사가 인디언의 아름답고 긴 시구를
읊어주었을 때 하객들과 함께 얼마나 감
명 깊게 들었는지 모른다.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아서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