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봄을 찾아7(빈,Wien)
Canada Hotel Budapest
카나다의 맛은 전연 안났다.
안녕, 부다페스트.
출근길은 노랑색 일색.
빈(Wien)까지는 243키로,
이곳 농부들 벌써 밭을 가는지,
부지런하다.
도중 쇼핑센타를 들렸는데,
승용차에 큰 앞날이 달렸다.
다시 알프스쪽으로 회귀하였나 보다.
봄이 휘날렸다.
우리의 마음도 휘날리고-
빈의 도나우강도 흐르고.
오랜만에 맡는 공업의 냄새.
빈은 인구 180만이나 되는 오스트리아의
행정, 금융, 산업의 중심지이며
동유럽과 서유럽의 관문.
이 나라도 최근 난민 덕분에
국민소득이 48천불에서 43천불로 낙하.
로마시대부터 2천년 역사를 가진
Wien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으며,
합스부르크왕가 650년의 도읍지.
판노니아분지가 서쪽 알프스고산지역을
향해 높아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도나우강과 접한다.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음악의 도시이지만,
2차대전 후반에는 27만채가옥과
건물, 대공장의 1/4이 파괴되었다.
Asia Food 음식점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일본식 도시락이 5유로 수준.
식당은 전차도 오가는
번화가에 있었다.
식후 첫 방문지는 쉔부른 궁전,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궁전.
입구에는 멋진 소녀가
자전거박물관을 안내했다.
궁전 앞의 인파.
중국 자금성 앞의 인파보다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의
쉔부른.
1619년 마티아스황제가 사냥 도중
이곳에서 샘을 발견했다.
야심 많았던 황제(1557-1619)는 형제간의
불화도 불사, 형 루돌프2세의 모든 작위와
권력을 쟁취하여 55세에 황제가
되었지만, 구신교간의 갈등을 막지못해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야기했다.
쉔부른궁전은 바르세유궁전과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
1569년 막시밀리안2세가 건축한
프랑스풍 바로크식 건물.
내부는 로코코식.
1400여개의 방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여왕의 막내딸,
마리앙투아네트(16세에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나 30세에 국고를 낭비했다는
죄목으로 단두대이슬이 되었던
외로웠던 여인)가 15세까지 살았던 곳.
그리고 철모르는 어린 모짜르트가
그녀에게 청혼했었다는 곳.
모른다, 박근혜대통령도 무지한 군중들에
의해 처형되는 외로운 여인이 될지
자녀 16명에 120키로나 나갔던
마리아테레지아여왕(1717-1780)
아버지 카를6세가 아들이 없자
남편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즉위시키고, 자신은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에 오른 여장부.
헝가리, 보헤미아도 차지하고,
18세기 열강이 각축을 하는 중에
나라를 견고히 지켜간 대단한 여인.
궁전 뒤에 있는 프랑스식 정원.
이 또한 세계문화유산.
합스부르크왕가(1273-1918)는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진 왕가.
처음은 스위스 북부지역에 근거를 둔
작은 봉건영주였으나,
1273년 백작 루돌프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이후,
460년간 황제를 배출했다.
도중에 스페인 계보가 갈라져
해외 식민지 개척에 공헌했다.
마리아테레지아 이후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에 반대,
유럽 보수정치세력의 보루이었으나,
1차대전 이후 몰락.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널폈고,
가톨릭을 신봉하였으며
빈고전파 음악 등 예술을 진흥시켰다.
근친 결혼으로 결함도 있었지만.
언덕 위 글로리에테(Gloriette)전망대.
1747년 마리아테레지아여왕이
프러시아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여 건립한 것.
그 아래는 분수대.
19세기중반 프란츠요제프1세(1830-1916)의
반세기 넘는 통치의 노력에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결과는 비참했다.
프로이젠전쟁에서 패했고,
엘리자베트 시시황후는 암살당했으며
황태자 루돌프는 연인 마리 베체라와의
비극적 사랑으로 동반자살했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의 주인공.
1차대전 패망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벨베데레궁으로 이동.
아름다운 전망대라는 뜻의 궁은
빈 중심가 남쪽 언덕 위에 있다.
18세기 투르크와의 승리를 거둔 사보이왕가
오이겐(Prinz von Savoyen, 1663-1730)을
위해 지은 여름별궁. 오이겐사후에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매각되었고.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살았던 곳.
바로크양식이며, 상궁과 하궁이 있고,
프랑스식 정원이 있다.
상궁은 미술전시관, 하궁은
특별전시관으로 사용.
연못 주위에는 닭 등
십이지신 동물상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상궁에 입실하여 클림트 등의
그림을 감상하고, 키스 앞에서 기념촬영.
남자는 클림트 본인, 여인은 그의 정신적
애인, 플뢰게이라고.
플뢰게는 화가의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우측 긴 부분은 남자의 성기?
첫번째 방에 걸린 한스 마카르트(1840-1884)
의 오감. 사랑은 오감으로 해야겠지.
잘쯔부르크 태생 역사화가 마카르트는
역사적 주제 우의적인 내용을
자유로운 구도와 화려한 색채, 호사한
장식을 구사하여 마카르트양식을 확립.
네오바로크풍의 양식은 실내장식, 의상,
가구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20살 이상 어린 클림트를 동료로
인정했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클림트의 유디트.
유디트는 아시리아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고
조국 이스라엘을 구한 여인.
오른쪽 아래 장군의 목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금세공업자의
아들. 상징주의 인상파의 오스트리아 화가.
결혼않고 죽자 14명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아루누보계열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했고,
전통미술에 대항, 빈분리파를 결성.
관능적 여성이미지, 황금빛 화려한 색채
그리고 성과 사랑,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를 특징으로 했다.
아루누보는 19세기말 유행했던 장식적 스타일.
동식물을 주제로 했던 프린트기법.
클림트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부인,
알마 밀러의 첫사랑.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
사망하기전 그린 미완성의 그림.
아담보다는 화사한 이브가 부각되었다.
클림트의 물뱀.
꽃뱀보다 더 화려?
클림트의 해바라기.
그는 반고흐를 좋아했으며
풍경화도 그렸다.
찰즈캄머굿 아터호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
쉴레는 그에게 헌신적이었던 발리에게
떠나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에곤 쉴레(1890-1918)는 클림트의 수제자.
표현주의 화가이다.
어둡고 우울한 화풍이 특징.
5살때부터 식탁보에 스케치를 하였으며
어린 소녀와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소문으로 교도소 신세도 졌다.
누이동생을 포함,
네명의 뮤즈가 있었다고.
부인이 죽자 며칠 뒤 세상을 떴다.
에곤 쉴레의 포옹.
애로틱한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에곤 쉴레의 엄마와 두 아이들.
모정이 느껴지는지.
요즈음 젊은이들은 크림트보다
에곤 쉴레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의 짧지만 강렬했던 인생을 그린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Egon Schiele: Death and the Maiden)도
영향이 있겠지.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의
바람의 신부.
코코슈카는 화가이며 극작가.
표현주의화가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
그 역시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의 애정행각 대상이었다.
명화감성을 하고 나오니
궁전 내부의 아름다운 장식이
돋보였다.
프랑스식 정원과 하궁을 보며
쉬고 있는 젊은이들.
붉은 지붕이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때마침 건각이 지나가고.
번화가 식당가로 가는 길,
750년(1234-1984) 비엔나 연관공?
모짜르트 교향곡 35번도 아닐테고--
사람 얼굴도 있는데--
우리는 그라피티 그려진
골목을 올라,
성당도 보였고,
1435년 영업을 시작한 린덴켈러
식당에서 현지식 식사를 했다.
최고(最古)의 식당?
식후 복잡한 전차를 타고,
빈 콘체르트하우스에 도착하였다.
공연장 내부는 그리 크진 않았지만,
앞사람 머리에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사진 한 장 짝다가, 예의없다고
마나님한테 혼나고.
주로 요한스트라우스의 곡이 많았고.
독창, 듀엣이 있었으며
간간히 가수 둘의 코미디도 있었고.
두 시간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들은 콘서트보다도
못한 느낌.
언제 유럽 야외에서 하는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
이날 하루는 온전한
예술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