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진도, 달마고도와 해남

난해 2018. 9. 2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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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일) 목포 가는 길,

김제평야가 마음을 트이게 했다.

색도 다양했고.


해남 갈 때마다 오르고 싶었던 달마산,

능선 산행 대신에 달마고도(達摩古道)

트래킹을 요번 여행의 중점으로 하고.




12:10 여섯명이 약속대로 정확히 모였다.

구례에서 온  친구, SRT로 온 친구, 

서울에서 짐차 타고 온 네 친구들.


그 정확함에 혀를 내두르고.

짐차는 과속을 좀 했지만.




우선 민생고 해결이 급했고,

목포시 만호동에 있는 영란회집으로.


민어회와 매운탕, 그리고 잎새주.

민어회 한 접시에 45천원,

매운탕은 1인당 5천원.





팽목항에서 이동완료된 세월호.

어린 영혼을 빌미로 야단법석하는 운동권.

진도의 경제도 덕분에 침체되었다고.




제2진도대교를 건너 진도로.


신비의 바닷길, 진돗개를 운운하기 전에

이곳에선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삼별초의 용맹한 기상이 있었고.


진도문화는 도서문화, 남도문화,

육지 사대부 문화가 섞인 복합문화.

 진도아리랑, 운림산방이 있고.

그래서 진도에서는 글씨, 그림, 노래를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진도에 볼거리가 없다

하고, 진도개 명성도 덜하고,

진도 경제도 침체되었다 하고.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찾았더니,

옛날 조용했던 산방이 시끌시끌.


전라남도 주최로 국제수묵비엔날레가

목포, 진도에서 열리고 있었다.


목포에서는 1, 2, 3관에서 수묵의 경계,

수묵의 숲, 전남종가전을 주제로.


진도는 4, 5, 6관에서 요산요수,

산산수수, 산수를 주제로,

15개국 271명 작가가 참여.




이승연의 산음.




김인선의 산영.




4, 5관 관람을 끝내고 운림산방으로.


운림산방은 남종화의 산실.

사실적 외형 위주의 북종화(명, 청시대 전성)

와 달리 남종화는 작가의 심경을 표출한다.


소치 허련(1808-1893)은 1857년 고향,

진도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485미터) 아래

 운림산방을 짓고 그림에 몰두.


그는 초의선사 지도 아래 윤두서 화첩으로

그림공부를 시작, 1840년 추사를 만나

본격적으로 서화수업을 했다.




소치 허련을 모시는 사당.




그의 초상화.


그는 대원군, 민영익 등과 교류했고

헌종(1827-1849)의 총애를 받았으며,


소치의 손자 남농 허건(1907-1987)은

 조선미술전람회 특선을 한 후,

20세기 한국화의 중심이 되었다.




운치가 있는 연못.




소치 허련의 운림각도(雲林閣圖).

운림각은 운림산방의 옛이름.




남농 허건의 양유춘색(楊柳春色, 1984)




소치의 증손, 허문의 포풀러가

 있는 풍경(2011).




가을빛의 운림산방.


우리는 근처에 있는 비엔날레 5관으로.





정명돈의 기다림.



'항상 바람 같은 그대

그렇게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지만

바람이 불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느끼고 싶었다

만남은 어딘가

깊은 곳에 숨어 있었지만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벅찬

저녁 무렵 먼 곳에서 기뻐하는

황홀한 노을빛을 닮은

기다림의 시


그대가 원한다면

항상 그대를 기다리는 시가 되고 싶다'

(이용채 '기다림의 시')




강지주의 골지천 추경.




우리는 이웃해 있는 진도역사관으로.


1231년 몽골이 침략하자, 이듬해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 항쟁한 결과, 1258년까지

 몽골의 6차에 걸친  침입을 초래.


삼별초는 1232년 창설된 최씨정권의

사병이며 관군이었으며, 경찰 전투임무를

부여받은 부대. 이들은 날쌔고 용맹했다.


1270년 무신정권이 몰락,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이에 항거, 강화도를

장악했으나, 토벌이 두려워 진도로 진출.


당시 진도는 경상 전라에서 걷은

세곡을 서울로 운송하는 군사적 요충지.


1271년 진압군의 토벌로 삼별초는

제주도로 후퇴했고, 1273년 토벌군의

제주상륙으로 4년 항쟁의 끝을 맞았다.

(몽골이 침입한지 43년)


고려의 끈질긴 저항의 결과, 다른 피점령

국가와는 달리 고려는

부마국이 되고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삼별초의 배중손(1233-1271)장군은

원종의 6촌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독립왕권 수립 3일 후 진도로 건너 가,


진도 동북쪽, 군내면 용장리에

13키로의 용장산성을 쌓았다.


1271년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패퇴,

왕온은 진도읍인근 의신면에서 홍다구에게

살해당해 이곳에 묻혔고(왕온의 묘),


배중손장군도 진도 최남단 임회면

남동리 남도석성(南挑石城)에서 전사.



명량해전



진도도 옛날 유배지 중 한 곳.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안에

죄인을 가두는 위리안치.




진도아리랑은 정선, 밀양아리랑과 함께

3대 전통민요 아리랑.


욕, 상소리, 한탄, 익살이 섞여

부인네 야성을 노출시키는 돌림노래.


혼자 부르면 유장하고 슬프고,

함께 부르면 신명이 나는.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진도씻김굿,

진도다시래기 등의 무형문화재가

이곳에 있다.




운림산방을 떠나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용장산성으로.


용장산성 홍보관은 문이 닫혀있고,

고려시대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는

용장사를 먼저 방문.


이쁜 비구니승이 지나가기에

용장산성 가는 길을 물었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요.




잘 정리해놓은 용장산성 행궁터.

산성은 산 위에 있으니 가볼 시간은 없고.


행궁터는 옛 그대로 놔두었으면 삼별초군의

 외로운 투쟁이 더 피부에 느껴졌을텐데.


그들의 불굴의 정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용장산성 행궁터에 아쉬움을 남기고,

진도읍 진도수산시장 근처에 있는

청담골에서 저녁.


갈치조림+병어조림+울금막걸리.


맛은 좋았지만, 주인마님은 까칠.

진도아녀자의 특성은 아닐텐데.


울금은 생강과 다년생 초본식물.

덩이뿌리를 이용하며 카레원료로 사용.

술과 섞으면 금처럼 된다고, 울금.


착색제, 건강식품(간기능 회복, 혈액순환,

기순환 등)으로도 사용.

진도에서 80% 생산된다고.




농협하나로에서 장을 보고,

임회면 굴포리에 있는

국립진도자연휴양림으로.


2017년 7월 산림청 최초로 섬에

조성된 자연휴양림.


시설도 좋았고

무엇보다 신선한 공기가 맘에 들었고.


판 벌리고 사온 울금막걸리

동을 냈다. 막걸리 맛도 그만.




다음날 9/17(월) 동이 텄다.

이날의 해뜨는 시각 6:10.




숙소 앞 바다풍경.


이곳 바로 옆 남동리에

남도석성이 있다.




거북선 모양의 우리 숙소.




우리는 한시간 가량 '경치좋은 곳'

팻말이 달린 쪽으로 아침산책.

산책길엔 흰 버섯이 무성했고.


보이는 섬은 업생이 바위.

썰물때 드러난 바위가 물에 잠기자

어머니는 아들 업생이를 불렀다.


아들은 자고 있었고, 어머니는 익사했다.

업생이가 엄마생각에 어머니를 부르면

'업생아' 하고 부르는 소리 들렸다고.


고려때 남도석성 마지막 전투에서 삼별초의

 울부짖는 소리, 이곳에서도 들렸겠고.





진도읍으로 해장하러 가는 길,

굴포리에 배중손(裵仲孫)장군사당이 있다.

장군은 이웃 남도석성에서 전사.


220년된 소나무가 지키고 서있고.

현판은 내려져 있었고

처마밑에는 진돗개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장군에게 경배하고.





사당 앞은 쓸쓸하기 짝이 없는 굴포.




읍내에 진입하려니, 5일장이 열려 교통체증.

추석대목이 가까워 더 붐볐다.

이장은 2, 7일장.


옛날에는 5일장이 여러곳에서 열렸으나

서너 곳으로 줄은 듯.


고군면 고성리에 오일시리가 있다.

고성(古城)리가 옛날 진도읍이었을 때

번창했던 시장이었는데

5, 15, 25일 열흘에 한 번 장이 선다.


임회면 석교리에는 십일시가 있는데,

옛날에는 가장 컸던 장.

지금은 4, 10일에 열리고.


옛날 인근 장날을 고려, 장날을 조정한

 것이 상례화 되었다고.




음식점골목을 지나 고향해장국에서

북어해장국과 추어탕.

좋은 선택이었고.


이곳 아줌마는 하루 전 저녁의 청담골

아줌마와는 달리, 얌전하고 서비스 최고.


추어탕을 기웃거리니, 조금 퍼다 주고,

커피를 조용히 타다 주었다.

추어탕, 산초향이 진했고.


오일시리 십일시에 대해

조용히 설명을 해주기도 하고.




진도자연휴양림은 좌측 아래

남도석성 옆 굴포에 위치.


보배섬 진도(珍島)를 포함하는

진도군은 256개 섬에, 인구는 3만2천.

진도는 제주, 거제 다음으로 큰 섬.




진도를 벗어나 미황사 가는 길,

달마산 자락이 펼쳐졌다.


옛날에는 능선이 날카로웠는데,

그동안 부드러워진 것 같다.




달마산(489미터)자락,

미황사 입구의 목백일홍, 화려했고.


해남 송지면 서정리에 있는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때(749년) 의조화상이 창건.


불경과 불상을 실은 배를 금의인이 노를 저어

사자포구에 도착, 소로 운반했는데,

마지막 멈춘 곳이 미황사.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웠고,

금의인(金衣人)의 옷이 황금으로 번쩍거려

절의 이름이 미황사라나.




달마산이 절을 포근히 감싼다.

미황사는 육지사찰 중 가장 남쪽에 위치.

산 정상까지는 1시간.


1989년까지만 해도 비워있던 절을

현공, 금강스님이 아름다운 사찰로 가꿈.


1966년 해남에서 출생한 금강스님은

2000년부터 주지를 맡아, 절을 가꿔왔고,

지역민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상사화(꽃무릇)가 자태를 뽐내고.




고색창연한 대웅보전.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중수한

조선 후기 목조건물.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 모심.




스님의 독경소리 낭낭하고, 쉬지않고

절하는 젊은 보살의 마음, 절실했다.




부처님 제자, 16 아라한을 모신 응진당.


산스크리트어 아라한은 참다운 실상을

환히 깨닫고 해탈에 이른 이들.




대웅전 앞쪽.




갑자기 나타난 헐리우드 마녀.




달마고도(達摩古道) 안내도.


우리는 현위치에서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 도솔암에 올랐다 용담굴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해서 원점회귀.

끝부분은 자연적으로 생략할 예정.


큰바람재, 노시랑골, 편백나무숲에서

몰고리재를 돌지않고 도솔암으로.


이길은 고려때 달마산 암자 12개를

연결하는 수행길이었으며,

산길 걸어 장에 갔던 삶의 길이기도.




우리도 수행길을 시작.



곳곳에 너덜지대가 나타났지만,

길을 잘 닦아 편히 갈 수가 있었고.


달마고도는 금강스님이 제안했고

총감독이 되어, 2017년 250일간 연인원

1만명을 투입, 17.7키로의 길을 완공.


자연보전을 고려, 나무, 돌만을 이용했고

 나무테크, 출렁다리는 일체 만들지 않았다.




진도읍에서 사온 치즈, 계란말이

김밥으로 점심. 벤치 등 일체의 시설이

없어 불편했지만, 다 자연을 위한 것.




1키로마다 안내판이 있다.

이제 겨우 3키로 왔고,

갈길이 14.7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