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여강길 걷기(세종대왕릉역-신륵사)

난해 2020. 4. 17. 21:55



4/15(수) 9:40 판교역에서 아홉친구(이세혁친구

부인 포함)모여,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서

하차, 여강길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여강길 4코스 는 세종대왕릉역에서

신륵사까지 15키로가 넘는 길.

천병헌친구의 기록으로는 6시간, 19km.


여강은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의 이름,

영월의 동강과 같은 개념이죠.


월간 山이 4월에 걷기 좋은 길 넷중의

하나로 선정한 여강길입니다.





세종대왕릉역 소변기에는 파리 한마리가

그려 있죠.


탈러와 선스타인이 지은 넛지(Nudge,

팔꿈치로 살짝 찔러 주의를 끌거나 행동을

유도하는 행위) 처음 부분에 나오는 얘기.


남자들은 볼일 볼 때 조준하는 방향에 크게

신경을 안쓰기 때문에 주변을 어지럽히지만

파리를 목표물로 조준하게 되어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을 80%감소시킨다고.





세종대왕이 안내하는 토끼굴을 통과하고





봄동도 꽃을 피웠습니다.

봄동은 겨울에 노지에서 재배된 배추.





복사꽃도 화사하고요.





내가 좋아하는 마가목도

잎을 피웠네요.


평지, 높은 산은 물론 시베리아에도 잘

자란다는 마가목, 톱니같은 잎이 말의 잇발

모양이라고 마가목이란 이름이 생겼고요.


늦봄의 수많은 하얀 꽃, 늦여름의 빨간 열매는

이쁘기 짝이 없고, 열매 효능도 대단하죠.

풍증, 어혈, 성기능 등에 널리 알려진 약재.


울릉도에 가시면, 성인봉 꼭대기에 있는

꺽다리 마가목 군락을 꼭 보세요.





여주의 전원마을은 옛모습이 그대로 있고,

집들도 양평의 도시민이 이주하여 지은

멋쟁이 집들과는 다르죠.





길가에 있는 국사봉  봉국사 앞에서

잠시 쉬면서 한장.


우리들이 왁자지껄하니 이절의 주인장,

사람이 그리운지 불편한 몸을 끌고 나왔습니다.


작년에 허리수술을 했는데

수술은 하지말아야 한다고.


물리치료 봉사 등 좋은 일을 했지만

너무 무리해 허리를 다쳤다고.

당연히 본인 몸이 우선이죠.





절 주위에는 양귀비꽃처럼 새빨간 튜립,

노란 괴불꽃도 있고 제비꽃도 있네요.


타계한 우리친구 조동진의 제비꽃이란

노래도 있죠.



'내가 널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에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였고

이마엔 땀 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영릉 배치도. 왼쪽엔 세종대왕 부부가 합장된

영릉(英陵), 오른쪽엔 효종대왕 부부능이

따로 있는 영릉(寧陵).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은 코로나로

문이 닫혔고요.






효종대왕릉 가는 예쁜 길,

서울, 서울 근교의 왕릉에서는 느낄 수

없는 차분한 분위기.


길가에는 할미꽃, 금낭화, 양지꽃도 피어있고,

백송도 있습니다.





멧돼지, 뱀 주의.

뱀의 천적은 멧돼지.


물려도 두꺼운 비게 때문에 꺼떡없겠죠.

돼지는 뱀고기를 좋아하죠.





벚꽃과 산수유가 잘 어울립니다.

여주의 벚꽃은 양평보다 좀 늦은 것 같고요.





많이변형되고 훼손된 두 영릉을 2014년부터

자연친화적으로 복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세종대왕문화관이 건립되고 효종대왕릉

입구가 정비되었고 세종대왕릉은 복원 중이고요.

대신 능의 멋진 사계절 사진이 전시되어 있죠.





여름의  왕의 숲길.





왕릉의 겨울.





재실입구에 있는 300살 넘은 회양목, 천연기념물.

무덤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이 재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처럼 큰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죠.


회양목은 늘 푸른 나무로 늦게 자람이 서러운 나무.

대신 나무질이 곱고 균일하며 단단해 나무활자,

다리니경 등에 쓰이는 목판나무로 쓰였고,


우리는 흔히 도장나무라고 부릅니다.

(박상진교수)





멀리 거제도에서 올라온 이세혁친구 부부.

닭살부부는 아니지만 금슬이 좋은 부부.


활달한 마님은 친구보다 동창이름을

더 많이 알고있어, 누가 동창인지 모를 정도.





왕의 숲길.


숙종, 영조, 정조임금이 먼저 효종대왕릉을

참배한 후, 이 숲길을 통해

세종대왕릉으로 행차했다고.





능길을 오르는 사람들의 여유.

모처럼 볼 수 있는 정경.


초중고시절 능으로 소풍가면 우리는

능을 놀이터 삼아 뒹굴었었죠.





위에 있는 능이 효종대왕릉, 아래 능이

효종대왕비 인선왕후의 능.


효종은 북벌계획을 세워 추진하였기에

대왕이라 한답니다.


세종대왕릉은 1469년 서초구 내곡동 헌릉에

있던 것을, 효종대왕릉은 1673년 구리 동구능에

있던 것을 이장.


효종대왕릉과 왕비릉이 따로 있는 것은

금슬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풍수지리를 따랐기 때문이라네요.





효종대왕릉.

문인상이 좌우 한 쌍인데, 무인상은 홀로이네요.





효종대왕릉을 떠나 포장길 따라

화장품기업, 한국콜마 여주아카데미를 지나

세종산림욕장으로.





산을 넘어 다시 포장길을 걸어 여주시내로.

신영우친구, 포기를 모르고 완주 중.

천병헌친구 앞장을 서고.





하리(여주시 하동) 보도교 건너고, 또 걸어

남한강변 진입.






3년전 4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윤동주 탄생 100주년 전시회에서 본

그의 자필 시,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그날 세종회관 밖은

세월호 시위로 시끌했었는데

2020. 4. 15일도 세월호 영향으로 시끌했죠.





길가에 핀 장미과의 황매화.





그리고 잎이 황매화와 똑같지만

꽃잎이 이중으로 나는 죽단화 또는 겹황매화.

죽단화는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고 하네요.


내눈엔 황매화가 더 예뻐보여요.







오랜만에 열린 5일 여주시장을 잠간 보고,

다시 강변길로 나오니 대로사(大老祠).

여주읍 하리(하동) 소재.


대로는 서인의 분파 노론의 입장을 대변한

송시열(1607-1689)의 존칭. 그는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세웠죠.


대로사는 정조의 명에 따라 세운 송시열 사당.

대로사 안에는 정조가  비문을 쓴 대로사비,

대로서원, 송시열 영정이 있죠.


그는 대학자이기도 했지만 당쟁을

격화시킨 소인배란 평도 듣고 있다 해요.





강변에 있는 여주시청 앞에서 본 자전거길.


여주(驪州)는 거리가 멀어 성장이 느린 도시로

인구는 111천 명. 태종원경왕후 민씨,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등 여성의 덕을 본 고장?


남한강이 시 중앙부를 남동에서 북서방향으로

흐르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계획을 세운

이완장군(1602-1674) 묘,


고려 최고의 지장, 서희장군(942-998) 묘가 있고

무학대사(1327-1405)  탄생설화가 있는 곳.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과부가 아들을 낳아

버렸더니 학들이 아이를 보호했는데

그 아이가 무학대사라는 이야기.


이웃 이천시 인구는 여주의 두배. 이천에

밀려 여주 시장권이 쇠퇴하고 있다고 하고요.


대한민국 건달, 이정재의 고향, 이천사람들은

거세고 배타성이 강한 반면 여주사람들은

순박한 농촌사람이라고 할까요.





이세혁친구 마님의 수고로 찾은 맛집,

강변막국수. 쭈꾸미정식에 수육과 빨간 딱지.


패를 잡은 김도원친구 오랫만에 잘먹었다고

만족해 했죠.

3시 넘어 식사를 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여튼 오랜만에 이영욱 대목산악회장도

참석했고, 거제에서 온 부부도 있고, 거의 한

시간 반 동안의 화기애애한 대화시간이었습니다.





식사후 신륵사 가는 길,

벚꽃의 낙화.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시인, 1933-2005,  '낙화')





벌써 여름인가요.


유인희친구의 아버님, 노령에도 불구하고

수상스키를 타셨는데-


그분도 타계하신지 오래되었고.





가는 길 오른쪽 언덕에 달을 맞이한다는

영월루(迎月樓)가 보였구요.


누마루에 오르면 강건너 신륵사 등

여주팔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18세기 건물로 여주시청 정문이었는데

1925년 이곳에 옮겼다고 합니다.


누각 아래 암혈에서 황마(黃馬) 여마(驪馬)가

승천하는 것을 본 이가 있어, 여주 군명이

황려(黃驪)가 되었고


다시 여흥(驪興) 그리고 여주(驪州)로

바뀌었다고요.





여주교를 건너니





강 건너 황포돛대 나루도 보였습니다.

강변엔 수양버들.  비교를 한다면 양평의 강변 

버드나무(뚝버들)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는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1939년생 마종기의 '우화의 강',

시인은 마해송선생의 자제)




다리 입구의 꽃복숭아꽃(남경화),

아름답죠?


유흥구친구는 만물박사,

남경화란 이름도 기억하고.





여주도서관, 박물관, 황포돛대 나루,

2019 경기도자비엔날레 행사장 지나니

 봉미산(鳳尾山) 신륵사(神勒寺) 일주문.


하태욱친구,  말없이 잘 걷고 있었고요.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신륵사 다층전탑.

전탑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


신라 전탑과 달리 몸통에 비해 지붕이

얇아 독특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신륵사는 신라때 원효가 창건했고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 절이 유명하게 됨. 그의 부도,

보제존자 석종은 고려말 대표 부도양식.


신륵은 미륵,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하네요.


신륵사는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이었으나

한때는 사대부의 풍류장소였다고 하고요.





대장각기비.

이색,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대장각 안에 봉안했죠.




이절의 주불전, 극락보전.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


정문 위에 나옹화상이 썼다는 '천추만세'

현판이 있죠.





극락보전 앞의 다층석탑.

고려시대 석탑특징이 일부 들어났다 하네요.





조사당에는 무학대사, 지공화상(-1383),

나옹화상(1320-1376)의 초상화가 있고요.


지공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고승.





신륵사 은행나무에 오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현신으로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보살,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구제하는 보살.





강변의 육각정자 강월헌(江月軒, 나옹의 당호).

나옹화상의 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마음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강월헌에서 한 장.


대학교때 영릉을 찾아 입장료 안내려고

뒷구멍 찾다 발이 물에 빠졌었고.


밤중에 강월헌에서 술취해 희희낙락하다

스님들이 와선 주의를 하면 조용하였다가

다시 고성방가했던 기억.


그때의 나무 밑바닥이었던 정자는 홍수에

 떠내려갔고 지금의 정자는 바닥부터 튼튼하죠.





화강암을 깍아 만든 삼층석탑은

강변 암반에 세워졌습니다.

탑자리는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


그래서 고려말의 탑으로

추정해요.






우리가 불이문을 나올 때가 5:45.   

20분 이상 버스를 기다려

여주역에 도착한 시각이 6:45.


여주역에서 전철을 타고보니

나 혼자. 친구들에게 무척 미안했죠.

집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고요.


하루 친구들과 잘 어울려 걷기를 했는데,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

우리가 너무 무심했는지 모르겠어요.

사전투표를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