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배기 맛
이 윤 희
설가와 뚝배기는 고등학교, 대학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별명이다. 나를 빼고, 두 친구의 인연은 미국 디트로이트까지 끈질기게 이어 지고 있는데, 둘 다 고국에 대한 한이 있는지, 좀처럼 서울을 찾지 않았다.
Y군(설가)은 오년 전인가 연락이 되어, 서울에서 만났다. 소식도 없이 그가 떠난 후, 그와 연결이 된 것도 우연이었다. 부평에 근무하던 시절, 나는 귓속의 곰팡이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다행이 고교 후배였던 윤 원장을 만나, 그의 특별 배려로, 매일 그의 병원에 출근한 결과, 끈질긴 곰팡이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너스로, 같은 의대 동문인 Y군의 주소를 알 수 있었다. Y군은 본업 이외 미국교포들의 대북한 의료봉사활동을 이끌어 나가느라 정신없는 것 같았고, 그렇게 좋아했던 소주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은 재작년에 이루어졌고, 그의 부인과 함께였다. 저녁식사 후 분위기 살리려고, 함께 한 친구들과 가요주점을 찾았지만, 부부는 분위기가 싫었는지, 조금 앉아 있다가는 우리와 작별을 고하였다. 중후한 분위기의 부인은 그가 대학시절 무척 좋아했던 여인이었다고 했다. Y군이 공수부대 의무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었다. 물론 공수부대에 지원한 사유도 일종의 도피였고. 그때 그의 편지를 읽고, 조인트 까려는 공수부대장의 워커 발을 피하려고 도망가던, 꺼벙하고 꾸부정한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얼마나 웃었던지. 아마도 부유했던 부인의 가정과 홍제동 산동네의 Y군의 가정은 두 남녀를 갈등하게 하였나보다.
금년 오월, Y군과 같이 디트로이트에 사는 B군(뚝배기)이 고국을 떠난 지 삼십오 년 만에 부인과 함께 서울에 나타났다. 그와 단짝이던 T군(별명이 제비)도 그를 보러 B군만큼이나 오랜만에 나타났다. 무엇을 먹을까하다 그와 분위기에 맞는 감자탕으로 정했다. 감자탕에 소주는 뚝배기에 장맛이라 할까. 구수한 그의 목소리는 그동안의 고된 이민생활에도 변하지 않았다. 자동차 정비공, 엑스레이 기사, 세탁소 주인 등 그의 다채로웠던 경력을 B군은 자랑스러워하듯 늘어놓았다.
고등학교 때 그를 만나 결혼까지 끌고 가고, 이국의 고된 간호사로서 가정을 꾸려가며, 의사 아들 만들어 분가시킨, B군 부인의 활달한 모습도 옛 그대로였다. 단지, 그동안의 부인의 내조를 기려, 부인보고 존대하기로 했다며, B군이 부인에게 하는 존대말투는 나에게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녀석이 이제 사람이 되었구나. “저 친구와 오랜 동안 함께 사는 게 지겹지도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빙그레 웃기만하고, “그녀를 운전하는 데는 내가 제일이지.” 하며, 예전에도 그렇듯이 B군은 기세부렸다. 노래방을 가서도 B군의 구수한 ‘열아홉 순이’와 그녀의 경쾌한 ‘사랑해,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도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Y군과 내가 대학교 이학년 때 겨울, 부산에서 Y군이 보낸 엽서를 받았다. 이 친구 웬일로 설설거리며 부산엘 다 갔을까 하며 엽서를 읽었다. 쓸쓸한 겨울바다와 남포동, 광복동 거리를 혼자 거닐고 있다며, B군의 대학 합격여부를 묻고 있었다. 사실을 확인해보았더니, 합격자명단에 B군은 없고 Y군만 있었다. 일전에 B군이 나를 찾아와 입학시험 부탁을 했을 때, 거절하였던 기억도 나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에게 미안했던 감정도 남아 있었던 터라, 내 마음은 Y군의 마음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무척 찹찹했었다. 그 당시 B군은 상당한 그의 실력에도 불구, 연거푸 입시에 낙방하고 풀이 죽었었다. 둘이 앞뒤로 나란히 앉아 시험을 보았으나, 정작 붙기를 원했던 사람이 떨어졌으니.
이 사건을 계기로 B군은 이민을 가게 되었고, 좋아하던 사람과 갈등 속에 방황하던 Y군도, 몇 년 뒤 미국으로 탈출하였는데, Y군이 자리 잡기까지 B군 부부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B군의 전화를 받았다. 자리를 같이 해주어서 고마웠다고, 디트로이트에 와서 Y군과 함께 술 한 잔 하자고. 얼마나 정겨운 목소리였던지.
특히나 친하고 재미났던 두 친구의 최근의 모습은 천양지판이었다. Y군은 옛 모습은 전연 없고, 고생을 해서인지, 70대 백발노인이었다. 그토록 재미있었던 그는 어디로 가고, 근엄한 교회 장로이고 의사가 되었는지. 더욱이나 그토록 원하던 여인과 결혼하였는데도 전연 재미없이 보이는 부부가 되었는지. 대학시절 한겨울, 북한산 입구에서 만나자는 Y군의 제의에 나는 또 한 친구와 급히 출동을 하였는데, 같이 간 친구는 구두에 오버코트 차림이었다. 가보니, 예쁜 여학생 넷에 남자는 Y군 혼자였다. 아마 우리 둘은 대타였던 것 같다. 신사구두에 코트차림의 친구는 보기에도 그렇지만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여자만 보면 절절맸던 나는, 그만 혼을 잃고 일행을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Y군과 비교하면, B군은 과거의 그 그대로였다. 면허 없이 부친의 자동차를 몰래 끌어내어 드라이브 하던 일, 스물다섯에 장가들고 한 없이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여동생을 Y군에게서 인계받아 내가 과외공부를 시켰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그녀도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고 한다. 새침하면서도 활달한 그의 부인도 자주 만났던 것처럼 거리감이 없었다.
B군의 제의대로 미국에 가서 셋이 같이 한 잔 하면, (내 생각에) Y군이 옛날의 Y군이 될 수 있을까? B군이 있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뚝배기의 구수한 분위기 연출로. 끝.
(2008.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