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뒤척이는 아줌마, 흔드는 아저씨 (2012.9.5)

난해 2015. 9. 28. 16:57


  팔베개하고 잠시 잠들어 뒤척이고 있는 집사람을 보면, 집안의 평화를 느끼기도 하지만 미안한 느낌이 많이 든다. 요즈음은 심한 코골이까지 하니 더욱 그렇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옛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꿈꾸고 있는지, 아니면 말 안 듣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영감태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지겨워하고 있지는 않는지.


  집사람은 오천 석 대종가의 셋째 증손녀로 태어난 탓인지, 올바른 것을 따르는 편이고 융통성은 적지만, 마음 씀은 크고 너그러운 편이다. 그녀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절은 초등학교 때라는데, 당시 면장을 하셨던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셋째 증손녀를 귀여워하시어 동네를 돌아보실 때는 그녀를 대동하시곤 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조그만 배를 내밀고 거드럭거리면 마을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부반장 나으리, 어디 가십니까?”하며 굽실거렸다던가. 증조할아버지께서는 그녀에게 남자이름을 지어주셨고 팽이, 썰매, 연 등을 만들어주시며 남자아이 취급을 하셨다 했다. 그러했던 그녀가 시부모 봉양에 시들었고 별 볼 일 없는 남편에 시달리다보니 반백이 되었다. 최근 십년간 몰라보게 늙어버린 그녀를 보고 잘해줘야 하겠다고 맘먹지만 마음은 마음 뿐, 요즈음도 싸움질 잘하는 부부라고 아이들에게 핀잔먹는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사건을 들라하면 내 나이 사십 초반 때, 육 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국제워크숍에서 중국아줌마 란차이와의 만남을 들 수 있겠다.


  87년 시월 하순부터 88년 초까지 인도와 태국에서 전반기 코스를 마치고, 귀국하여 프로젝트를 준비한 다음, 88년 이월에 일본에서 준비물을 발표한 후, 오월 초 한국에서 마무리 모임을 가졌던 워크숍이었다. 열두 명의 참가자 중 여성은 단 둘로, 란차이와 필리핀 노처녀 바나리타가 있었다. 그녀는 란차이보다 일곱 살 위로 나와 동갑이었는데, 영어실력은 제일이었지만 골초에다 가무잡잡한 얼굴로 늘 외톨이었다. 반면에 란차이는 중화전국공소(供銷:마케팅)합작총사 국제협력과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활달하고 모든 일에 앞장서는 타입이었고, 온화한 얼굴에 가냘픈 몸매로 남자들의 인기를 끌 만했다.


  뉴델리에서 인도 남쪽 뱅갈로까지 삼천 킬로 버스여행을 하였는데, 중부지방은 끝없이 지평선만 보일 뿐 여자들은 소피할 곳이 없었다. 버스의 한편에서 남자들이, 반대편에서 여자들이 용무를 볼 때 버스 밑으로 머리를 디밀었다가 란차이에게 혼났던 일도 있었다. 또 그녀가 병이 나 그녀의 숙소를 찾았더니, 감추지 못했던 그녀의 가늘고 흰 허벅지에 연민의 정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일본에서는 눈사람을 만들며 눈싸움을 했던 기억도 있었지만 어느 일요일인가 그녀를 꾀어, 전철 로만스카 등산열차 버스 등을 타고 하코네를 찾았던 일도 쉽게 잊을 수가 없다. 여행 후, 비용을 정산하였더니 일인당 이만 엔 가까이 되어 놀라는 그녀를 보고, 내가 부담한다고 하였다 완강히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러했던 그녀와의 동료애가 일본에서 귀국하고서 시작된 우리 부부의 냉전의 원인이 될 줄이야. 전반기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인화한 사진 중에 그녀와 둘이 찍은 사진이 유독 많았던 것이 시발이 되었던 것 같다. 일행이 서린호텔에 머물 때 집사람을 한복으로 곱게 단장시켜 인사시키기도 했지만, 냉전은 육 개월 이상 끌었고, 한 겨울 독감처럼 지독했다.


  오해의 결정적인 계기는 일본 체류 당시의 사건 때문이었다. 사월 초 봄비 내리던 날 란차이와 나는 도쿄의 한국영사관을 찾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정식 외교관계가 없었기에 중국 참가자 두 명의 입국허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친절한 영사관 여직원에게 서류를 내밀자 얼마 안 되어 입국허가서가 발급되자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한국 입국을 포기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신속하게 처리될 줄이야. 물론 우리 본부직원들의 사전 조치가 있었겠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사람은 일을 마치고 바로 워크숍 장소로 가기엔 너무 무미건조하고, 이차대전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이 묻혀있는 공동묘지를 찾아 마침 만개된 벚꽃을 구경하였다. 둘이 한 우산을 쓰고 흩어진 벚꽃 잎을 밟았던 현장이, 우연이도 우리 앞집 기환이네 고모 눈에 띄어 나도 모르는 사이 집사람에게 보고되었다. 세상이 그렇게 좁은 것인지.


  공교롭게 연이어 냉전의 촉매 역할을 했던 조그만 사건이 터졌다. 일본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다 보니 뒷주머니에서 포장이 헤어진 콘돔이 하나 나왔다. 끝 부분이 도톨도톨한 것으로, 같이 행사에 참가했던 심군이 준 것이었다. 출국 당시 약국을 하는 친구가 준 것이라며 나에게 하나를 건네주었었다. 그냥 버렸으면 그만인 것을, 장롱 위에 올려놓았고, 어머님의 총채질로 방바닥에 내버려졌다가 집사람 눈에 띄게 되었다. 오죽 착실했으면 포장이 너덜너덜 헤지도록 갖고만 다녔겠냐고 변명했지만 집사람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그 다음해인가 냉전의 망령이 되살아날 뻔했다. 직장에서 술 한 잔하고 밤 열한시 쯤 귀가했더니, 란차이가 강남의 한 호텔에서 전화하였다고 말하는 집사람의 심사가 벌써 비비 꼬여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에게 전화를 하니, 회사의 부회장 수행원으로 방문을 하였고, 부회장은 다음날 입국할 예정이라고 했다. 오케이 바로 가마하며 양복저고리를 다시 걸치고 나섰더니, 나가기만 하면 끝장이라는 집사람의 선전포고가 바로 발령되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다음날 사무실에서 그녀와의 짤막한 만남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행사에 참가하고 있던 아베 등과 동행인데다 시간 여유가 없었고, 캠퍼스 잔디에서 사진 한 장 찍고 그만이었다.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에 있는 남편과 합류하였다는 소식 뿐, 연락할 길이 없다. 워크숍에 같이 참석했었던 중국인 미스터 쉬가 2003년 아들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하였었는데, 그녀와 연락할 길이 없냐고 오히려 나에게 물어왔다.


  지금은 집사람도 이일을 지나간 이야기로 접고 있지만 당시는 잠 못 자고 꽤나 뒤척였을 것이다. 가만히 내가 요즈음 하고 있는 일을 보면 혼자 생각해보아도 우스꽝스럽다. ‘아줌마들 사진과 바람나다’라는 책을 준비를 한다며 아줌마들 사진을 찍고 있으니, 카메라를 흔들며, 장노출을 하며. 물론 두 여선생님이 나에겐 그 주제가 좋겠다고 했으며 나도 그렇게 따른 것이지만, 집사람이 이일로 또 잠 못 자고 뒤척이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