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젊은 날의 흔적 (2004.1월 퇴직)

난해 2015. 9. 28. 17:03

 

 

  정년을 하면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일이 제일 큰 일 이라고 하였다. 나의 경우도 이들을 정리하는데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정리 중에 쾌쾌한 냄새가 나는 편지 한 보따리가 나왔다. 고교 졸업이후 결혼 전까지 내가 받은 편지류의 묶음인데, 말하자면 젊은 날의 흔적이다. 하나하나 읽다보니 편지를 쓴 주인공들의 모습과 함께 잃어버린 날들이 그리워진다.


  굳이 받은 편지를 분류하여 보면, 대학 입학 후 서로의 근황을 전하는 글, 여행 또는 방학 중에 보낸 엽서와 글, 군 생활을 전하는 글, 그리고 화란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받은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밖에 모임이나 행사를 알리는 통지 등도 있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을 보면, 둘은 벌써 고인이 되었고, 전혀 연락두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만나고 있는 사람은 겨우 열 명 남짓하다. 삼십년을 넘긴 직장생활의 탓이 아닐까? 시간에 쫓겨, 이해관계에 얽혀, 꼭 필요한 사람만 만났을 터이니까 말이다.

하여튼 젊은 날은 미래의 꿈을 구체화하는 기간이므로, 모두들 정해진 목표를 향해 매진하거나, 열병에 든 환자처럼 방황하고 고뇌하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툭하면 휴교령이 내려졌고, 월남파병, 광부 간호원의 서독 취업 등 경제적 발 돋음이 시작된 때이었으므로 그 정도가 더하지 안했나 생각된다.


  내 퇴임식에 참석하여 색스폰을 불어준 류인희의 편지는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였다. 내가 의대를 포기하고 농대 누에과에 간 것이 잘되었고, 장가갈 때 신부한테 바지 저고리는 비단으로 맞추게 하겠다는 둥. 고독이 뭔지 알 것 같고, 죽음이 요즈음처럼 가까이 있어본 적은 없다네 하고 넉살을 떨었다. 인수봉에서 자일을 타다 떨어진 후, 요양하면서 보내온 이덕훈의 글도 있다. 사고 당시 류인희가 우연히 사고현장을 지나게 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수원 푸른 지대에 딸기 먹으러 온다는 장지우의 개발 새발 편지가 있는데, 글씨 모양 뿐 아니라, 내용도 횡설수설이다. 재수하려니, 무척 지겨웠던 모양이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공전(工專) 장학생으로 입학한 장억근은 “나는 망망대해에 흔들리는 돛단배이며 나의 기개는 거품이 되었다.”라고 엽서를 빼곡하게 채웠다. 그는 한때 잘나가던 기업을 일구어 내더니 부도이후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설의철이 일학년 때 미팅을 하였는데, 파트너가 누님 같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수생이었다고 한다. 그가 부산에서 보내온 편지도 있다. 유병기(졸업을 못하였음)대리 시험을 친후 부산에 바람 쏘이려 내려가서, 병기가 고대에 합격했는지 궁금해 하는 편지이다. 알바이트 때문에 걱정하는 안병희, 이덕훈의 편지를 보면 우리들의 대학시절이 꽤 어려웠던 생각이 든다. 안병희는 이민을 갔다는데, 어디에 사는지 보고 싶은 얼굴이다.


  고인이 된 김일중은 중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일년 후배이다. 또한 홍민표의 조카이기도 하다. ‘67년 대학교 2학년 때 가을 셋이서 비포장된 대관령을 넘어 설악동을 같이 찾았었다. 방바닥이 뜨거워 엉덩이를 댈 수 없는 설악동 초가집에서 싱싱한 전복을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행을 즐겨했던 그는 제주도등 여행지에서 엽서를 주고는 했다. 그가 제주대학교 재직 중에 타계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아들 하나 남아있고 부인은 재혼했다고 한다. 직장생활 중 그의 제자를 둘이나 만났다. 법원의 형사과장으로 근무하던 한 친구와 제주도 농업경영인 회장으로 농사를 열심히 짓는 또 한 친구였는데, 그들과 술 한 잔하며 그를 그리워했었다.


  군복무하면서 열심히 편지를 보내왔던 친구는 꽤 여럿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가 군에 있을 때 편지 한통 주었던 친구들도 아니다. 군대로는 선배인 내가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답장을 그럴싸하게 써주었더니, 열심히 편지를 썼던 모양이다. 대학 졸업 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입대한 친구들은 더욱 고심을 했다. 어쨌든 다들 진로 문제도 컸지만, 여자문제로 꽤 방황했던 것 같다.


  제일 먼저 공군에 입대한 유원대의 편지가 있다. 고민하지 말고 빨리 입대하라는 그의 편지를 받고는, 그 추운 날 대방동을 찾은 기억이 있는데, 신검에 그만 불합격하고 말았다. 맹호부대로 월남에 간 민경희는 “늦게 입대를 하여 다음 만날 때 제일 초라한 모습이 될까 걱정된다.”고 걱정했다.


  교장 승진을 앞둔 조영권은 군대시절 명숙이란 아가씨한테 바람맞았던 모양이다. “절대 결혼할 수 없고, 영원한 친구로 남는다는 것이 우롱이 아니냐?”하며 편지 속에 씩씩거리는 모양이 눈에 선하다. 설의철은 예비 군의관 시절 애인이 돌아 섰는지 크게 상심하였다. 임관식 때는 친하지도 않은 여자가 참석한 것 같고, 배신감이 원인이 되었는지 공수부대를 자원하여 고생을 자초했다. 시간이 나면 내게 편지를 썼는데, “호롱불 밖에 없는 하숙집에서 옆방에 찾아온 술집 아가씨를 방으로 끌어들였다.”는 둥 군 생활이 자유 분망하였다.


  '78년 초에는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네델란드의 조그만 도시 디벤터에 있는 농과대학에서 협동조합 경영관계 연수를 받고 있었다. 이영선이가 런던에서 박사과정을 받고 있는 줄 알고, 한번 만나보려고 그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사실은 영선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그 편지가 어떻게 그에게 전달이 되어, 반갑다는 편지가 왔다.


  당시 민경희는 이민 초기시절을 지내고 있었는데, 고생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귀국길에 꼭 미국에 들리라는 편지를 몇 번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경희의 이민 환송식 생각이 난다. 환송식은 추운 겨울날 시청 근처에서 하였는데, 꽤 많은 친구들이 나왔고, 전부들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지금은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한 친구가 술이 꼭지까지 올라서는 “우리 오늘 왜 모였지?”하는 것이 아닌가. 옆에 성질 급한 석명식이 씩씩거리며 들러붙는데, 이를 말리려고 혼난 기억이 있다.


  ‘68년도에 덕수제과에서 소 동창회를 연다는 변동걸이로부터의 소식이 있었는데, 회비가 150원으로 되어있다. 참석했는지 기억이 없다. 또 고등학교 시절 다른 학교 학생들과 결성한 문학모임 참억새의 소집통보가 있었다. “이제까지 무수한 화살이 날았지만, 아직도 새들은 노래하고 주장합니다.-------” 모임의 이름과 견주어보면 좀 어처구니가 없다.


  하여튼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독일시인 플라텐의 시 ‘인생’의 마지막 구절 “별로 생각도 못하고 하는 일도 없이 건들건들 놀다가 죽는 것이라 하네.”를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탁번의 폭설  (0) 2017.08.04
주머니 애첩(2007.12.30)  (0) 2017.08.04
들꽃수목원 출사 (2012.6.13)  (0) 2015.09.28
뒤척이는 아줌마, 흔드는 아저씨 (2012.9.5)  (0) 2015.09.28
아줌마무리 중의 아저씨 (2012.3.9)  (0)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