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운무산행(2009.5.23)

난해 2015. 9. 28. 16:33


  때 이른 태백산 철쭉구경을 한다고, 아침 일찍 잠실역에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더니, 박수세례가 쏟아졌다. 얼마 늦지도 않았지만 겸연쩍었다. 재작년 회갑여행 때는 30분 이상 늦어 빈축을 샀던 박 진영 회장은, 우리부부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지 않는가. 선출직 의원들이 우리 회장만 같다면, 나라정치가 크게 발전할 텐데.


  그러고 보니 직장을 떠난 지 6년차. 아직도 직장을 다니는 친구도 있지만, 나름대로 노후에 대한 생각과 생활의 틀이 잡혀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과연 잘 살아왔는가? 남은 생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가?’라는 명제에 항상 번민을 하며 지내지만.


  버스와 기사가 여행 당일에 갑자기 바뀌어서, 우리가 제천, 영월을 헤매고 있을 때, 노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둥, 실족사 했다는 둥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러더니 그가 농협에 합격하였다면 이러한 개인적, 국가적 불행은 없었을 것 아니냐, 농협생활을 무사히 마친 허 태권 친구의 삶이 그의 것보다 훨씬 낫지 않느냐 는 둥, 버스 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정작 허군 부부는 무슨 얘기인지 모르지만, 도란도란 예기가 한창이었는데 말이다.


  노대통령이 받아 개인 빚 갚는데 썼다는 백만 불과 박대통령이 받은 백만 불을 비교한 글이 생각났다. M16소총 수출업체 사장이었던 데이비드 심프슨이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그가 전달한 무기구매 사례비를 받으면서, 박대통령은 “당신이 준 100만 달러는 이미 내 돈도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내 형제, 내 자식들이 멀리 월남 땅에서 피와 땀을 흘리고 바꾼 돈이오. 내 배를 채우는 일에는 결코 쓸 수 없소. 그러니 빨리 100만 달러어치 총을 더 보내주시오.”라고 말했고, 또 말대로 이행이 되었다고 한다.


  태백산 도립공원에 도착한 우리는, 반재까지 오른 후, 두 조로 갈라졌다. 여섯 명은 바로 백단사로 하산하였고, 열세 명은 망경사, 단종비각을 거쳐 천제단에 오른 후, 주목 군락지를 거쳐 유일사로 하산하였다.


  정상 가까이 가자, 야생화의 군락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얼레지, 광대수염, 피나물, 괴불주머니, 병 꽃, 줄딸기 꽃, 벌깨덩굴 등. 이들을 보고 예쁜 이름들을 되새겨 보는 것도 심산을 찾는 기쁨의 하나이다. 기쁨이 있으면 고통도 있는 법. 망경사 인근부터 짙은 운무에 쌓이자, 동행한 아내의 기운이 안개에 스며들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심상찮았다. 옛날 지리산 등반 시는 내 배낭 짊어주던 그 아내가.......


  건장한 이들이 가는 산길을

  몸과 마음이 성치 못하여도 가는 줄

  아느냐 남편 네가


  올려다 보이는 단종비각은 단종의 혼이 떠도는지 운무가 더욱 짙었다. 추 익한 전 한성부윤이 영월에 계신 단종에게 다래를 진상하러 이곳을 지나던 중, 백마를 타고 무심히 지나가는 단종을 뵈웠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하니 단종은 사약을 받은 후였다고 한다.


  천제단에 도착한 우리는 나 종갑 부부가 준비한 족발과 소주를 마음껏 즐겼다. 옆에선 젊은이들이 제를 지내고 있었고, 장군봉에선 흰 옷의 무녀가 춤을 추고 있었다. 운무에 취해, 소주에 취해 주목 군락지를 지나자니, 각 가지 형태의 죽은 주목들이 운무 속을 유령처럼 지나갔다. 주목이 지나가는지, 운무가 지나가는지, 내가 지나가는지. 가끔 주목과 주목 사이에 철쭉 봉오리들이 수줍게 숨어 있었고. 회갑여행 때 올렸던 주 요한의 시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철쭉이 만개하려면 두 주는 걸리겠다.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안개 속에 돛 달고 가던 배

  바람도 없는 아침 물결에

  소리도 없이 가버린 배

  배도 가고 세월도 갔건마는

  안개 속 같은 어릴 적 꿈은

  옛날의 돛 달고 가던 배같이____________

  안개 속에 가고 오지 않는 배같이_________


  내려오는 길, 이 근방 유일의 비구니 절, 유일사는 정적에 쌓여 있었고, 저녁을 준비하는 아궁이에는 시뻘건 불심이, 굴뚝에는 안개보다 더 하얀 연기가 길게 달려 있었다.


  유일사 매표소에서 두 개조가 합류한 후, 상경하는 버스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단종의 혼 때문인지 태백산 주위를 한참 헤매다, 영월 주천 다하누촌에서 한우고기 먹고 정신 차리고는 서울로 냅다 달렸다, 주말의 정체도 없이. 멋지고, 회원 간의 대화가 그칠 줄 몰랐던 하루였다.


 행사를 매끈하게 준비하고 치룬 임원진, 특히 나 종갑 총무 내외분께 감사를 드린다. 아내에게 등산지팡이를 빌려주신 총무대신께는 두 번 감사를 드리고.


(09. 5. 23. 사친회 태백산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