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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경험과 치바이스와의 대화

난해 2019. 2. 1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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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와르의 머리를 땋는 소녀)


2월 달에 들어서 천단칭(陳丹靑)이 쓴 '낯선 경험'을

읽던 중에 고정민 선생님으로부터 예술의 전당의

특별전 '치바이스와의 대화'를 추천받았다.


천단칭(1953-)은 중국의 유명 화가이며 젊은

엘리트의 폭 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작가.


25살에 정상급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고

뉴욕으로 이주하여 전업화가로도 활동했으며

칭화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화가와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 1. 아직도 새로운 그림 이야기, 낯선 경험 >


중국화가들은 아직 우리에겐 낯설지만

이책은 서양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중국화와의 비교 설명으로 세계의 예술흐름에

대한 감을 갖게 한다.




북송, 왕시멍 (王希孟, 1096-1119)의 산수화는

18세에 그린 대작이라고.


왕실화가, 왕시멍의 12m길이의 두루마리

산수화는 원숙하고 우리의 기를 꺽어놓는다.


북송 산수화는 원숙하고, 치바이스, 황빈훙,

장다첸 등의 명, 청대 문인화는

산수화에 노인이미지를 입혔다고.


저자에 의하면 당,송 그림은 웅대, 풍성하고

원,명 그림은 우아, 화려하며

청 그림은 유약, 나른하다.




르네상스 초기 화가 부팔마코(1290-1340)의

죽음의 승리.


이탈리아 피사의 납골당 안에 있는

프레스코화. 저자는 유럽의 진정한 그림은

프레스코화이라며 돈황의 벽화와 비교를 했다.




장자오허(張兆和, 1904-1986)의

유민도(流民圖)


중일전쟁 승리의 결과는

수백만 인민의 죽음이었다.




고흐(1853-1890)의 해변의 어부,

고흐 초기의 습작품.


천단칭은 비천한 사람들을 즐겨 그렸던 고흐를

좋아한다. 습작품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인상파 초기 화가, 바지유(1841-1870)의

화실.

 


중산층 출신, 파리의 청년 바지유는 29살에

프랑스, 프러시아전쟁에서 사망했다.


마네, 드가, 세잔이 부잣집 아들이었던 반면

모네, 르누아르는 가난했다.

파리는 당시 젊은이들로 들끓었고. 




벨라스케스(1599-1660)의 말을 탄

펠리페 4세.


19세기 이전에는 화가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 왕실 귀족 등을 위해.


산업혁명,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인상파

시기보다 조금 앞서 자유직업 화가가 등장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1966-76) 이후.




마네(1832-1883)의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


2악장으로 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악이 있듯

미완성 그림도 있다.

'그림은 벽에 걸린 순간 죽음을 맞는다'

라고 피카소는 말했다.


19세기 이전에는 의뢰인의 충족을 위해

그림의 완성도가  있었으나

인상파 그림은 완성도에서 떨어짐.




피카소(1881-1973)의 거투르트 스타인의

초상. 오른쪽은 실제 인물.


그녀(1874-1946, 미국 작가)는 피카소를 비롯

 수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터준 위대한 작가.

수집한 미술품 덕분에 더 유명해졌고.




프로이드(1922-2011)의 잠든 보험수당 관리인.


미완성, 비정식의 작품에도 매력이 있고,

고흐 이후 화가들은 공동의 규칙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데서 자유로워졌다.


우쯔어런(吳作人, 1908-1997)은 그리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리지 않는 것도

 알아야한다고.


천년전 문인화가는 비전문적 화가로

지위가 높고 발언권이 셌다.

그림을 그리는 마음이 그림 자체보다 중요.

그림의 완성은 화공의 일(공필중채화).


그리려는 의도에 맞게 그리는 것이

회화의 참뜻. 그림은 붓, 먹, 종이, 물로

 이뤄지는 유희이며 즐거움이다.


서양은 19세기,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에서 이런 태도를 보여준다고.




르누와르(1841-1919)의 도시의 무도회.


모델은 수잔 발라동(1865-1938).  그녀는

사생아로  몽마르트언덕에 자리잡고. 르누

와르 등 예술가들의 모델, 공동여인이 되었다.


결국은 그녀도 파리화파의 화가가 되어,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라고 말했고, 여성 최초 프랑스

국립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발라동의 누드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는 덤덤한

시선으로 보았고, 그녀가 그린 남성누드에는

남성의 육체 위를 떠도는

여성시선이 머문다.




발라동 자화상.


그녀는 순수한 야성을 갖고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가난한 아가씨.

아들, 위트릴로 친구의 부인이 되기도.


그녀는 가난한 음악가 에릭 사티가

평생 사랑한 여자. 그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난다.


인상파에 이어 온갖 기법, 방식이 우후죽순 처럼

솟았는데, 세잔 고흐의 영향이었다.




발라동의 아들 위트릴로(1883-1955)의

테르트르광장.


그는 그림엽서를 보고 생생한

 도시의 초상화를 그렸다.




관쯔란(1903-1986)의 소녀상.


추티(丘提)와 더불어 대표 중국 여성화가.

상하이 출신으로 양갓집 규수출신. 대담하고

과감한 손놀림이 특징.




쉬양(徐揚)의 건륭남순도.


건륭남순도는 청나라의 태평성대시절,

건륭제 행렬을 그린 154m 두루마리 그림.

정조의 화성행차도를 생각나게 한다.


쉬양은 18세기 청나라 궁정화가.


중국인의 그림 보는 방식은 양손으로

두루마리를 천천히 펼치고 말면서

 한 부분씩 감상한다고.




수리코프(1848-1916)의 대규모 역사화,

근위병 처형날 아침.


표트르대제(1672-1725) 개혁에 반대해

여동생 소피아가 근위대를 이끌고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


수리코프의 역사화는 실패자

입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러시아는 음악, 문학에 비해 미술은 별로다.

간딘스키, 샤갈 등이 있지만.

미국이 자신들의 화가를 미술사 안으로

끌어들인 결과.


중국도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저자는

문화패권주의를 힐난 하는 것 같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아시아인이고,

아시아에서 유럽인이다.'라고 표현.


요즈음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어떻게

처신하는지는 생각을 해보았나?




수리코프의 여귀족 모로조바.

모로조바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회

개혁시 처형되었다.




레핀(1844-1930)의 술탄에게 답신을

쓰는 코사크.


터키(오스만 제국)와 러시아의 전쟁은

끊임이 없었다.




안젤리코(1387-1455)의 수태고지.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 2층에

안젤리코의 프레스코벽화들이 있다.


우리는 피렌체하면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의 거장들만 생각하는데-


성직자보다 화가의 길을 택한 안젤리코는

옅은 색을 좋아하고, 순수예술을 추구했다고.

천사같이 소박, 강직했다.


저자는 그의 그림을 천진하고

정성스럽다고 극찬.


종교예술사 천년에 있어 13세기 이전은

신성이 너무 강하고, 15세기 중반 이후는

인성이 강해진다. 그 중간에는 뒤섞이고.




독일 베를린에 있는 페르가몬 박물관.


페르가몬은 알랙산더대왕 사후

부하가 BC 133년에 세운 도시.

터키에 있다.


독일은 이곳의 고대 그리스, 로마 유물

중동지역 출토된 이슬람 유물을

베를린으로 옮겼다.


저자는 페르가몬 제단과 같은 시기의

진시황 병마용을 비교했고.


대영박물관, 페르가몬박물관 등을

거인들 싸움의 전리품으로 표현.



뒤상과 누드모델  이브 바비츠가

체스를 두고 있다.


뒤상(1887-1968,프랑스)은 1912년 회화와

작별했고, 뒤상이 세계에 남긴 것은

 작품이 아니라 태도.


예술과 예술을 하는 태도는 별개의

일이고, 회화의 모더니즘은

 1906년 세잔 사망이 기점이다.


여러나라 문명에는 각기 좋은 그림이 있다.

저자는 안젤리코, 수리코프, 바지유,

 발라동, 부팔마코, 왕시멍, 장자오허 등


미술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천재들의 이야기,

고흐 등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둘러보았고

예술사가 아니고, 예술가가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주장했다.




<  2. 치바이스와의 대화  >



1. 전시 첫부문은 '형신을 다시 빚다' 라는 제목하에

치바이스를 모델로 유화, 채색화, 수묵, 조소를

보여준다.



우웨이산(吳爲山,1962-)의 치바이스

(齊白石, 1864-1957)상.


치바이스는 중국회화의 전통을 계승한 화가.

농민 출신으로 목수일을 하다 서른이 넘어

글과 그림을 배웠고,


커다란 산수화보다 작은 일상의 모습으로

다양한 흥미와 경험을 반영했다.


팔대산인 주따(朱耷, 1626- 1705),

우창숴(吳昌碩, 1844-1927)의 영향을 받았고,

진단칭은 문인화에 노인을 입혔다고 묘사.


중국 미술가협회 주석을 했고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세계의 비싼 그림 35위.


우웨이산은 중국의 대표적 인물 조각가.

난징대학 교수이며 중국조각원 원장.

전세계 역사적 인물, 공헌도 높은 인물

흉상 400여점을 만들었다.




리후(李斛, 1919-1975)의 치바이스상.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지,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는 않는다. 필묵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며 외형이 닮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를 배우는 사람은 살지만,

 나를 닮는 사람은 죽는다.' 라고

치바이스는 말했다.




진상이(靳尙菹, 1934-)가 그린 팔대산인.


팔대산인은 명청 교체기의 한족 유민의

정서를 표현한 대표적 화가. 산수, 화훼, 영모

(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를 그린 남종 문인화가로,

남송시대 선종화가의 영향을 받음.


한때 승려였고 떠돌이 생활을 해서,

그림을 통해 회한을 노래하고

깨우침도 얻고.




우웨이산의 우창숴 두상.


우창숴는 시, 그림, 글씨, 전각 모두 조예가 깊고,

글씨는 호쾌 중후 분방. 석고문(중국의 오래된

석각문자) 금석문을 연구하며 글씨를 배움.


팔대산인 등의 영향을 받았고, 매화 국화 그림은

맑고 도도하다.




쉬베이홍(徐悲鴻, 1895-1953)의 그림에는

사자가 자주 등장한다.


중국에서 최초로 서양 유학을 했고

중국적 소재로 유화, 소묘, 중국화에

두루 능하다. 20세기 근대 중국회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


중앙미술학원 원장, 중국미술협회

주석을 역임함. 학력이 없는

치바이스를 교수로 초빙하여, 오늘의

치바이스를 있게 했다.




우쭈어런(吳作人, 1908-1997)의 낙타 그림.

우쭈어런은 낯선 경험의 저자, 진단칭의 스승.




2. 두번째 부문은 옛 것을 배워 통달하다.



팔대산인 주따의 산수도.


'수웨이(徐謂, 1521-1593, 명 화가), 주따는

범인과  거리가 멀고, 우창숴는 노년에

새로운 재능을 펼쳤다.


나는 구천에서 그들의 개가 되어 세 분의

문하에서 그들의 개가 되어 수레바퀴를

돌리련다.' 라고 치바이스는 말했다.




팔대산인 주따의 산수도.




팔대산인의 팔팔조도.


팔대산인은 한족 유민의 정서를 표현했다는

말과 같이 산수화나 새그림에도 회한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느낌.





우창숴의 자색등나무와 석고문.




우창숴의 연꽃




우창숴의 갈매기.

팔대산인의 새와는 전연 다른 느낌.




3. 세번째 부문은 나의 그림을 그린다.

(치바이스 그림)



두손으로 조롱박을 받쳐 든 도인.




농부




득재(得財)


그의 사람 그림은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오뚝이




강 위의 범선들

고운 색채가 마음에 든다.




시냇물과 다리

그 위에 새끼를 데리고 어미돼지가

다리를 건넌다.


동양화에 돼지가 나오던가?




치바이스는 게, 새우 그림을

자주 그렸다.


한 마리에 1억원이 넘는다 하던가.




게 한 마리




잉어 그림도 독특하다.




난초




모란




조롱박과 곤충




붉은 여뀌와 나비




치바이스는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외할아버지의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영상으로 치바이스가 그림그리는 모습을

보니, 밑 그림을 그리고 붓을 들었으며,


붓을 수평에 근접하게 눕혀 그림을 그렸다.

물론 그림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치바이스 등의 작품들은 문화혁명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중국

공산당총리 덕에 살아 남았다고.


도슨트는 끝말에서 치바이스는 피카소와

 세가지 점에서 닮았다고 설명.


살아서 유명해졌고, 그림가격이 만만치

않으며, 여자가 많았다고.


치바이스는 네 명의 여자와 살았는데,

97세때 22세 간호원 출신 아내를

맞았다고.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내가 치바이스처럼 늙었다.


하여튼 두 명 중국작가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중국그림에 접하는 좋은 기회를 만났다.

부자나라 중국이 예술부문에서도

막강한 힘을 내세우는 느낌도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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