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주머니 애첩(2007.12.30)

난해 2017. 8. 4. 14:43


  애첩이 손을 낳으면 그처럼 좋은 일이 없다고 옛 남자들은 말했다지만, 그로 인해 정작 나라가 뒤바뀌어진 일이 한 두 번이던가. 정철과 진옥 사이는 살 송곳이니 살 풀무니 하며, 희희낙락하기도 했지만, 조강지처는 남편의 흰 머리를 뽑고, 첩은 검은 머리를 뽑는다고 했다. 그러나 요즈음 남자들이야 감히 첩을 둘 수 있겠는가.


  나는 항시 주머니 애첩을 몸에서 떼어놓지를 않는다. 물론 집에 들어서면 멀리하지만, 필요하면 집에서 찾기도 한다.

애첩은 내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고, 내 가족관계 등 인간관계는 물론 재산관계도 훤히 꿰고 있다. 심지어는 나의 조상들도 기억하고 있다. 용인 모현면 능골, 정몽주 선생 옆에 나란히 묻혀 있는 이석형 선생(1415-1477, 화헌집, 역대병요, 치평요람 등을 지음)도 알고 있다.

   

  기억력이 흐려진 요즈음은 애첩의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다. 애첩은 예전에는 내가 좋아하던 시도 기억하고는 했다. 예를 들면 문 효치 시인의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라든지.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때로는 우스갯소리도 기억한다. '판단력 잃어 결혼, 인내력 잃어 이혼, 기억력 잃어 재혼하는 여자들'이라던가, ‘아뿔사의 조루스님, 복상사의 절정스님, 혼외정사의 불륜스님’ 등 지나가버린 헛소리 등도 말이다.

 그리고 심각한 말도 기억하고는 한다.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을

                   장한 듯이 무대 위서 떠들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조금 있으면 정해년도 가버리려 하고, 정해 년의 나의 애첩을 정리하려니, 스산하다할까? 올 십일월 초만 해도, 오십대라고 떠들었는데, 내년은 만으로 해도 육십대를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현실을 보면, 회갑연은 옛말이고,  세 아이 치다꺼리와 팔십 노모 모시기에 정신이 없으니. 연말 부부동반모임에서  몇 부부가 무교동에서 이차로 맥주 한잔할 자리를 찾다가, 몇 번이나 노년이라 문전박대 받던 일은 쉽게 잊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가장 허전한 일은 정해 년의  나의 애첩이 너무 단정하다는 것이다. 비에 젖고, 어떤 때는 투망질하다 물에 젖어, 잉크색이 번져 알아볼 수 없던 애첩들이 많았는데. 단정하다는 것은 그만큼  애첩이 기억하고 있는 추억들이 적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올해 삼 개월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 나이의 벽을 느껴 그만두기도 했지만, 올해는 여행의 횟수도 적었고, 그 즐거움도 적었던 것 같다.

  

  그나마 애첩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을 들추어낸다면, 이월 중순에 찾은 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의 단정한 풀밭과 곳곳에 널브러진 주춧돌, 국보로 지정된 삼층탑의 아름다움은 쉽게 못 잊을 것 같다. 오월 초하루 입산금지가 풀리자마자 찾았던 청송절골계곡과 가메봉(882m)은 얼러지 등 야생화의 보고였다. 의성 고운사와 봉화 청량정사, 소백산 희방사, 삼척 천은사는 처음 찾은 사찰이었고,  이나리강이 흐르는 봉화의 숯불돼지고기, 비오는 날 항구항의 대게(열 마리에 오 만원)맛은 그만이었다.

  

  유월, 팔월 말 양양 어성전의 천렵은 어획고가 상당했다. 팔월 빗속의 천렵은 소름 돋았지만, 마침 이곳을 찾은 둘째딸 일행에게 피라미 튀김과 회 대접을 한 것은 친구들 덕분에 모처럼 애비노릇을 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빗속의 양양 만월산 명주사의 부용화는 비에 젖은 애처로운 비구니였다.

  

  십이월 두 차례의 동해안 여행은 복 여행이라기보다는 고등어, 세꼬시, 히라시가 입맛을 돋우었던 여행이었다. 방태산 아침가리마을을 헤매다가 만난 키다리 참나무 꼭대기는 요즘 귀한 약재로 취급받고 있는 겨우살이가 지천이었다. 그리고 천불동 계곡을 거쳐 휘운각을 오를 때 식사대용으로 취한 설악산 깨엿은 꿀맛이었는데, 전형은 덕분에 치과신세를 지었다고 했다.  동해 휴게소와 삼척 용화언덕에서 바라본 온화한 겨울바다는 세상 모든 것을 끌어안을 만큼 인자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이나마 애첩에 여행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의 덕이 아닌가. 잠자리와 교통수단을 제공한 정형은 멕시코로 떠난 집사람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한 것 같다. 부친께서는 아드님의 홀아비 생활에 걱정이 대단하시어, 자주 전화하시는 모양이다. 여행안내와 맛있는 요리를 조리하는 전형은 백세 가까운 노모 봉양에 백발이 휘날린다. 분위기 메이커 민군은 갈수록 천사 표 신사가 되어가고, 위트가 넘쳐간다. 또 한밤중에 멀리서 떡과 반찬을 들치기하여 친구들을 찾는, 목이 짤려도 짤려도 목이 성한,  정군 또한 천사 아니겠나. 이제는 호랑나비 춤도 추기 힘든 이형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고.

  

  그나저나 여행에 취해, 술에 취해,  우리들이 무대 위에서 장한 듯이 떠들 날들이 많이 남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