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바호족의 한이 서린 모뉴멘트벨리
나바호족자치공원 안에 있는 모뉴멘트벨리
(Monument Valley)에 들어서자 외로운 독메,
벙어리 버트(Mitten Butte)가 눈에 들어왔다.
나바호족 자치구역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알코올도 허용되지 않는다.
서양인들의 도래에 따라 위스키가 들어왔고,
인디안 사회에 악영향을 주어온 까닭이다.
공원입구에 놓여있는 붉은 돌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바호족의 자화상 같은 느낌을 주었고,
공원 사무실 안에 전시된 이들의 모습도
어느 하나 밝고 쾌활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모뉴멘트벨리는 나바호족자치공원의 일부이다.
자치공원은 애리조나 동북부, 유타남부,
뉴멕시코 서쪽에 걸쳐있고,
넓이는 남한의 2/3에 달한다.
나바호족은 1400년경 캐나다 북부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강인한 인디언.
남북전쟁(1861-5) 때 미국군에 의해
이들의 대부대가 붕괴되고, 8천5백 명이
포로가 되어 뉴멕시코의 섬너(Sumner)요새로
끌려갔던 비운의 부족으로 전락했지만,
1868년 셔먼장군이 이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비옥한 땅을 준다고 했어도 이들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 땅을 고수했었다.
나바호족의 즐겨 부르는 노래에도
이 땅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영국에서의 첫 이민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해가 1620년이니, 1492년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한 후 128년이 되는 해이다.
초기 이들과 인디언은 평화를 유지했다하나,
남북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인, 1890년 까지
인디언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고 본다.
270년간의 전쟁에서 이 땅의 주인 인디언은
땅을 뺏기고 핍박받고 학살을 당했으며,
명목상 보호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디언들은 1800년 이전에 미시시피강
동쪽에서 쫓겨나더니, 그 이후 미국의 영토가
서부로 확대됨에 따라 서양인들과의 전쟁은
서부로 확산되었고, 드디어는 영원한
패배자가 되었다. 미국정부가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인정한 것은 1920년.
일부 인디언들은 “나를 미국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시오. 나도 당신들한테
그렇게 강요하지 않을 테니.”라고 항의도 했다고.
이민 초기에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아서 바론이
인디언을 표현한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인디언은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성격이
유순하며, 유럽인들 못지않게 예절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쁨과 환영의 표시로
머리와 가슴을 치고, 한 형제임을 강조하며,
스스럼없이 애정과 친밀함을
표현함으로써 영국인을 맞이했다.”
또한 휘트먼의 시 또한 마음에 와 닿는다.
“신대륙 주민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구대륙 인간들은 기세등등하구나,
잔학무도한 구대륙 인간들아!”
카옌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선조들이
이차대전 때 큰 공을 세웠다고 홍보하지만,
서양인들에게 짓밟힌 그들에게는 공허한 얘기.
나바호족은 B. I. A.(Bureau of Indian Affairs,
인디언관리청)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어린 인디언들은 학교에 보내지고 미국말을 배우며
기본적인 의료서비스,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고,
그나마 그들의 고향, 보호구역을 가지고 있다.
보호구역은 그들 종족의 공동재산이며,
비록 땅은 메말라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바호족의 굳건한 토대이다.
이 땅에는 얼마 안 되는 석유,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등이 있고 관광에서 나오는 수입도 있다.
이 돈으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대주고,
커뮤니티 센터를 짓고, 매년 열리는 나바호 축제의
비용을 충당하며, 축산농가에게 우물도 파준다.
그리고 자치기구와 자체 경찰을 운영하고 있다.
자치기구의 최고 직은 대통령.
허나 저소득, 높은 문맹률, 빈약한 주거시설 등
너무나 개선할 것들이 많은데
돈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자치구역의
앞날은 험난하며, 장기적으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나바호의 생활방식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온통 붉은 천지에 어둠의 그늘이 길어지자,
나바호족의 성지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성지라고 하지만
불행한 역사의 그늘이 있는 곳.
그들이 사랑하는 황야의 아름다움은
온통 사방에 뿌려져 있었다.
여기저기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이 넋을 잃고 있고.
사진애호가들, 특히 일본사람들이
사진기를 들고 어디선지 쏟아져 나왔다.
나도 그 틈새를 비집고 삼각대를 펴고는
한자리를 계속 고수했다.
그리고 이들이 썰물처럼 물러가자
나는 외로움에 물들기 시작했다.
계곡에는 나바호족 가이드들이
안내하는 차량투어가 있다.
비포장도로를 먼지 피우며 계곡에 들어가면
옛 인디언들이 거주했던 절벽주택,
현존하는 절벽중턱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큰
키트씰(Keet Seel) 등을 돌아볼 수가 있다.
미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다섯 개가
인디언이 건설한 유적이다.
유타,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가 맞물리는
경계지역(Four Corners)에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시작된 인디언 문명이 있었다.
아나사지(Anasazi)문명이라고 한다.
아나사지는 나바호족 인디언 말로 옛사람들,
옛 푸에블로(Pueblo) 사람들이란 뜻이다.
아나사지족은 푸에블로, 호피, 주니족의 선조다.
푸에블로는 인디언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사는 부락 또는 부족의 명칭을 말한다.
캠핑족들은 황홀한 이곳 풍경 속에서 자리를 잡고,
사진 찍기 등 황혼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계곡의 삼인방, 벙어리장갑 한 켤레와
메릭버트(Merrick Butte).
벙어리장갑(Mitten Butte)은 짝짝이이고,
메릭버트는 셜록홈즈의 모자를 닮았다.
버트(Butte)는 작은 언덕이라는 뜻.
어둠이 짙어질수록 지평선의 에머랄드빛
부분이 점점 커져갔다. 나바호족의 푸른 신령이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모뉴멘트벨리를 무대로 한 영화는
황야의 무법자(My Darling Clementine), 역마차,
포레스트 검프 등 한 둘이 아니다.
1946년에 나온 황야의 무법자 주제곡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백성들의 슬픈 감정을 위로했던 노래다.
클레멘타인은 1849년 미국에 황금 러쉬가 일어나
사람들이 금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진출했을
당시 한 광부의 딸이었다.
원래의 가사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골짜기에서 금을 찾아 헤매던 1849년 즈음
한 광부와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았어요.
요정처럼 빛나고 청어상자로 된 샌들을
신은 클레멘타인은 그만 급류에 빠져,
루비 같은 그녀의 입술만 물위에 뜬 채로,
수영을 못한 그녀는 생명을 잃고 말았죠.
아버지인 광부는 여위어간 나머지
딸의 뒤를 따랐고요.
교회 묘지 언덕 위에는 클레멘타인의 시신이
비료가 되어 장미가 자라고 있죠.
이제 그녀의 동생과 키스까지 했으니,
그녀는 잊어야겠죠.
꿈속에 바닷물에 젖은 그녀가 보이는군요.
생전에 그녀를 안아주곤 했지만,
이젠 선을 그어야겠네요,
그녀를 사랑했던 한 사내의 노래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와이어트가
의사 할리데이의 애인이었던 클레멘타인을
좋아했다는 의미에서 이곡을
주제곡으로 선정한 모양이다.
푸른 기운이 하늘을 채우도록 계속
지켜보아야 했는데, 차는 떠난다고 하고,
아쉬움 속에 삼각대를 접었다.
우리는 모뉴멘트 계곡 뒤에 텐트를 치고,
베이콘을 굽고 인스턴트 육개장을 끓였다.
임목사 덕분에 간단한 식사라도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다고 할까.
같은 간이식 식사라 해도 자장밥, 우동,
카레밥 등 매끼가 달랐으며,
햄버거집을 들려도 킹버거, 피자헛, 캔터키치킨
서브웨이등 여러 집을 들려 다양한 맛을 즐겼다.
10월 12일, 여행을 떠난 지 열흘 째,
여행 일정의 거의 절반을 소화했다.
캠프장의 아침은 금빛 찬란했다.
나바호족의 이곳에 대한 애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아름다웠던 아침이었던지.
전날에는 어둠 속에서 텐트를 치랴, 저녁지어
먹으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아침에 주위를 돌아보니 바위 뒤로는 낯익은
모뉴멘트벨리의 풍경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다시 길을 떠나니, 버트 등 모뉴멘트들은
우리를 앞서서 안내했고,
눈앞에 펼쳐진 역광의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었다.
어제 보았던 이들의 뒷모습을 한번 다시
쭉 훑어보고는 길을 되돌아 달렸다.
여기서도 광대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도로는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한쪽 도로의 통행을 막고는
아스팔트를 한 층 더 깔고 있었다.
우리는 공사장의 선도 차량을 앞세우고 신나게
달렸다. 뒤창에 ‘FALLOW ME,란 표시를 붙인
선도차는 반대편에 도착하자,
그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다시 이끌고
되돌아가는 식으로 차량들을 안내했다.
기다릴 때는 좀 답답했지만
친절한 공사장의 안내는 호감을 갖게 했다.
도로가 한가함을 틈타 한 무리의 동구
젊은이들이 도로를 넘나들며,
사진도 촬영하며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잠깐 내려 시원한 공기도
들이마시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뻥 뚫린 내리막길, 이런 풍경은 미국 서부 아니면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이 길이 코미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길이다.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뛰어 다닌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능은 떨어지지만 열심히 사는,
그리고 제니를 끝까지 사랑하는 포레스트 검프를
젊은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다.
월남전을 전후로 해서 그때의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했다는 영화이기도 한데,
월남전에 참여했었던
우리세대와도 무관하지가 않다.
미 대륙에 처음 길을 만든 것은 들소 떼들이었다.
이 길은 인디언의 통로가 되었으며,
유럽 상인들이 드나들게 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태어나자,
포장도로가 되었다. 이어 철도가 놓였고,
이와 더불어 인디언 부락, 교역시장은
요새가 되고 서양인들이 사는
타운, 나아가 도시로 변모했다.
손재완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고
중간에는 유수종친구, 그옆에는 임목사.
운전은 주로 임목사가 했지만,
중간 중간에 손사장과 유교감이 했다.
우리 모두 사전에 경찰서에서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지만, 선뜻 나서기가 겁이 났다.
사고라도 나면 친구들한테 피해를 줄 수 있고.
그래서 운전 베테랑인 손사장과 유교감이 나섰다.
허지만 미국도로에서는 베테랑에게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역시 미국에서 몰아본 경험이 중요하다.
운전석 위에는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유교감이 자다가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는 곳.
차 뒷칸의 2인용 침실에는 하동사나이가 취침 중.
LA에서 과음하여 약을 잃어버려 못 먹는데다
입이 전형적 토종이라 여행 중 애로사항이
제일 많았을 것이다.
차의 오른쪽, 문 뒷부분에는 주대감이 명상 중.
마나님을 생각하나?
탁자를 접고 의자를 펴면
한 사람이 충분히 잘 수가 있다.
응접실의 반대편, 주방이 있고,
오른쪽에 소파가 있다.
이곳에서도 한사람이 잘 수 있는 충분한 공간.
주방의 왼쪽에는 옷장이 있고,
그 왼편, 뒤쪽에는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에는 여행용 큰 가방을 쌓아놓아
야간에 주로 소변 용도로만 활용되었고,
틈이 날 때마다 물로 이곳을 청소해야했다.
RV는 이동주택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이 이런 레저용 차량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생계를 위한 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미국에는 이러한 차량을 위한 휴게소,
주차장 등이 잘 구비되어 있다.
이러한 곳에서 차량에 있는 굵은 고무관을 꺼내
수도와 전기, 가스를 연결시켜 사용하며,
사용요금에는 지대도 포함이 되어 있다.
또 주위에 슈퍼, 식당 등 관련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 생활에 불편이 없다.
차량 값이 좀 비싼 것이 흠이지만.
미국에서는 기술자, 건축가, 회계사 심지어는
의사들까지 RV나 트레일러를 많이 이용한다.
오지의 주택이나 바람이 스며드는 창고 같은
집보다는 훨씬 나으며, 집에 대한 걱정거리
없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농가에서도 애들이 결혼하면 증축을 한다든가
새집을 마련하는 것보다 이러한 차량을
구비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대 간의 갈등도 줄일 수 있다.
애리조나, 페이지(Page)로 다시 돌아오는 길,
글랜캐니언 국립휴양지 한 쉼터에서 한 쌍의
여행객이 오후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붉은 세계 속의 적막강산.
푸른 콜로라도 강 건너편에는 눈에 익은 굴뚝 세 개.
나바호족 지치공원 내 애리조나 북부에는
아나사지족의 후예이며, 푸에블로 인디언의
일족인 호피족이 살고 있다.
아나사지족은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가장
발전된 인디언의 문명을 일구었었다.
나바호족과는 다르게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던
호피족은 자기들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나바호족과 토지반환 소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인디언의 사상과 전통을 지
켜오고 있는 마지막 부족으로,
1936년 정부기관(Tribal Council)을 수립하였다.
이들 정부는 미국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보호구역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호피족은 이러 저러한 사유로 미국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언어는 쇼쇼니어를 사용하고 있다.
호피족은 건강한 삶과 화목한 삶을 추구하는데
이들이 추는 뱀 춤에는 비와 농작물과
삶에 대한 기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들에겐 가족이 둘이 있다고 여긴다.
가족과 자연이 그것이다.
그만큼 자연을 중시한다는 얘기.
또 그들에게는 규율이 두 가지가 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과 만물을
이해하고 노력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에게는 문자가 없지만 전승과 예언이
구전 또는 암벽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호피족의 유산은 영혼이라고 한다.
어디나 갈 수 있고 떠돌아다니며 항상 변하고
속박에서 벗어난 영혼이 그것이다.
이들은 인류의 역사를 다섯 가지 시대로 구분한다.
불, 얼음, 물의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현재는 네 번째 시대인데 인간은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문명은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붉은 별 카치나가 출현하면
다섯 번째 시대로 들어서는데
정화의 날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세계관, 의학지식, 예술, 장인기술,
영적 수행 등은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유난히 붉은 돌들이 우리의 눈을 끌었다.
우리는 카납(Kanab)에 있는 서브웨이(Subway)에
들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리고 자이온(Zion)을 향하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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