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화성, 행궁 산책

난해 2019. 5. 24. 16:28


5/21(화) 수원에 거주하는 진실하고 충실한

입사동기의 초청을 받고 수원으로 출발.



행궁 방문과 화성 산책이 이날의 일정.

인구 122만의 수원은 마한의 모수국,

고구려(백제)의 매홀군이었다.


1789년 정조대왕(1752-1800)은 사도세자능을 

양주에서 화산(화성시 안녕동)으로 옮기고

 (융건릉), 1793-96년 화성과 행궁을 완성했다.


1896년 도의 행정중심이 되었고, 1949년

수원시 승격,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이전하여 농업, 제조업, 상업이 골고루 발달.




수원역에서 17명이 모여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에 도착한 것은 11시.


신풍의 뜻은 화성은 정조에게

새로운 고향과 같다는 의미.

한고조의 고사에서 왔다고.


정조는 행궁과  +자 신작로를 건설,

 화성을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한

상업도시로 육성하려 했다.




마침 문앞에서는 행사(무예 24기 공연) 중.


행궁 소재지는 팔달산 동쪽기슭, 팔달구

 남창동. 사도세자능이 있는 융건릉에 갈

목적으로 화성 축조와 함께 지었다.


567칸의 장방형 형태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크며 정조는 13차례나 행차했다.


신풍루 앞에서 정조는 친히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죽을 끓여 백성에게 먹였다.




신풍루를 지나, 좌익문, 중양문을 지나

봉수당(정당)이 가장 안쪽에 배치되었고,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은

오른쪽에 떨어져 있다.



조선시대 행궁은 전란을 대비한 남한산성,

요양을 목적한 온양행궁, 효원이라 불리는

화성행궁 등이 있고.


고종때까지 화성행궁은 잘 유지되었으나

수원 최초 서양식 의료기관, 자혜원이

1910년 설립되자, 일부 파손이 되고,


자혜원이 도립병원으로 바뀌는 1923년

완전히 사라진 것을

2003년 복원공사를 완공, 재현했다.




좌익문 지나 중양문(中陽門)은

내삼문(정문과 좌우 협문)으로 되어있고.


1795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 진찬례

(회갑연)가 봉수당에서 열렸을 때


봉수당 앞에는 왕실종친과 대신들,

중양문 밖에는 승지, 사관 등이

반열을 이뤘다.




봉수당(奉壽堂) 앞에서.


봉수당은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

장남헌(張南軒)이라기도 한다.


봉수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




임금의 자리.

화성행궁은 검소하게 지어졌다.




정조대왕의 처소.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


뒤의 병풍은 김홍도(1745-?)가 정조를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진상.

이에 극찬을 받았다고.




화성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란 뜻의 유여택(維與宅).


평소 화성유수가 기거하다,정조행차시

머물며 신하를 접견하는 장소.

봉수당 서북쪽 장락당(왕의 침소) 향좌측.





혜경궁 침전, 장락당(長樂堂).


전한의 도읍, 장안성의 궁전, 한나라

태후거처 장락궁에서 이름을 땄다고.

봉수당 서북쪽 위치.


정조는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장락당 편액을 직접 썼다고.


정조의 서예관은 돈실원후 졸박무교.

(惇實圓厚 拙樸無巧)

기교가 없는 두터운 서체라 할까. 


북학에 뿌리를 두었고, 한석봉(1543-

1605)의 글씨를 좋아했다고.




장락당 남쪽에 위치한 복내당.

복은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

정조가 행차시 머물던 곳.




복내당 앞 행각에서

대장금 촬영이 있었다고.




봉수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노래당(老來堂).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은 건물. 여러 행사 도중

휴식처로 사용.





훼손 안당하고 남은 유일한 건물, 낙남헌.

 후한 광무제 낙양 도읍 이후의 대궐이름,

남궁에서 따왔다.


낙남헌은 행궁 중건 이전,

신풍초교 교사로 사용되어 왔고.



1795년 잔치시, 군사들 회식과 양로연을

치룬 곳. 이곳에서 특별과거시험을 치뤄

문과 5명, 무과 56명을 선발했다고.


낙남헌 양로연도(養老宴圖)는 정조가 친히

베풀었던 노인잔치를 그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수원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행궁은 존재가 없었다.




활을 쏘기위해 세운 득중정(得中亭).


정조는 행차시마다 활쏘기를 했다고.

1790년 정조가 쏜 네 발이 모두 과녁을 맞추자

이를 기념, 득중정이라 명명.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의

운한각(雲漢閣).


영정을 옮길 사유가 생겨 임시로

모시는 이안청과 복도로 연결됨.




정조대왕 어진.


한국전쟁때 분실되어,

상상하여 그린 그림.




득한문옆 담장에 있는 팔폭 병풍도 중

봉수당 진찬도(進饌圖).


그밖에 화성성묘전배도, 득중정어사도,

시흥환어행렬도, 한강주교환어도,

낙남헌방방도, 낙남헌양로연도,

서장대성조도가 있다.


혜경궁홍씨 회갑연 행차시

중요 장면을 8폭으로 나누어 그린 것.




화성성곽을 축조한 내용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내용 중

화서문 내외도.


축성시 사용한 기계 등의 내용도 있다.

정약용이 제작한 거중기(擧重機)도 그 하나.




행궁 앞의 보호수,

380세 느티나무.




행궁 근처 한봉석할머니 순두부에서

점심 후 왼쪽 남포루에서 출발, 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돌아 동남각루로.

성벽 전체는 5.7km.


화성은 팔달구, 장안구에 걸쳐 있다.

정조는 1789년 수원도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고을명칭을 화성으로 했다.


화성 건설은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공간을 마련한 것.


채제공 주관 하에 정약용 등의 실학을

바탕으로 근대적 건축공사를 실시,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을 만들었고,


1997년 창덕궁과 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팔달산(128m)은 서쪽이 높고

동쪽은 나지막한 구릉이며, 그 사이로

 북에서 남으로 수원천이 흐르고.


중앙행궁을 중심으로 4개의 성문,

암문 5개, 수문이 둘 있다.


성의 높이는 4-6미터이며,

자연지세를 이용한

불규칙한 형태의 성.


남쪽은 붉은색(주작), 서쪽 하얀색(백호),

북쪽은 검은색(현무), 동쪽 파란색(청룡),

중앙에는 황색깃발이 나부낀다,

음양오행의 오방색에 근거하여.




서남암문과 서남포사.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암문)를 내서 사람, 가축,

물건의 통로로 사용.


5개암문 중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가

기거하는 포사(鋪舍)를 설치, 성밖의

위험을 깃발, 대포로 알리도록 했다.




용도(勇道, 좁고 긴 성곽)를 따라

서남각루로.


100m간격으로 대, 돈, 루, 치(치성), 포사,

옹성 등의 방어시설을 설치했다.


성벽은 화강암 이외, 벽돌을 신소재로

하여 쌓고,  화포 충격에 견딜 수 있게

벽돌 사이에 석회를 발랐고.




용도(勇道) 양쪽에 용도서치, 용도동치

를 쌓았다. 치는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방어시설.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는데

성벽 가까이에서 적군을 쉽게 공격할

수 있어 성벽 방어에 용이하다.

 

치는 꿩을 말하는데, 꿩은 몸을 잘

숨기고 엿보기를 잘한다.




서남암문에서 용도를 따라가면 맨끝에

최남단 방어시설, 화양루(서남각루)가 있고.


각루는 4개가 있으며 성곽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 주변 감시가 용이하고 휴식도

취할 수 있는 시설. 비상시 군사지휘소.


남한산성 교훈은 지형상 우뚝 솟은 곳을

공략당하면 적의 진입이 쉽다는 것.

이에 용도를 설치하여 화양루를 두었다.


동북공심돈 밖에 있는 선암산 정상이

성곽보다 높은 위치에 있기에

선암산 정상까지도 용도설치.




깃발이 흰색으로 변했다.

성의 서쪽으로 왔다는 뜻.




성곽길에서 오랜만에 만난 꽃,

 작은 크기의 불두화.


둥근 형태의 꽃모양이 부처님 머리모양.

백당나무에서 유성화를 없애버린 품종.

무성화라고 절에서 많이 심는다.


백당나무는 우리산 어디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자그만한 나무.


황록색의 자잘한 진짜꽃 수십개를

큰 동전만한 하얀 가짜꽃들이 에워싼다.




우리는 네사람씩 짝을 지어

효성심을 심어주고 가족의 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효원의종을 쳤다.


이종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만든 종으로

팔달산 정상에 있다.




다음에는 팔달산 정상에 우뚝 솟은 

서장대에서 기념사진 한 장.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은

군사들 지휘소, 이곳에 다섯번 올랐던

정조가 화성장대 편액을 썼다고 한다.


장용외영은 정조때 설치된 금군조직.

금군은 국왕의 친위군.




이곳에서 찍은 파노라마.




용인과의 경계, 광교산이 보였고.




입사동기들을 위해

열심히 애쓰는 한 친구.




서북각루(西北角樓)를 지나 화서문.

보물로 지정된 화성의 서쪽대문이다.

남양만, 서해안의 통로였고.


채제공(1720-1799)이 화서문

편액을 썼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면에 성문공사를

 담당했던 사람, 책임자 이름이 있고.


옹성은 항아리 같은 둥근 옹벽을 둘러

외적이 직접 성문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했고, 옹성에도 문을 내어 출입을 쉽게

하여, 남북도로망이 연결되도록 했다.



문의 왼쪽 건축물은 보물인 서북공심돈.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 화성에만 볼 수 있다.


3층 건물로, 정조도 이 시설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 했다고.

동북공심돈도 있음.





5개 포루(砲樓) 중 하나인 북서포루.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공격을 할 수 있게 햇다.


지나자니 지붕이 반쪽인 모양.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고.




다른 시야에서 본 북서포루.

치(치성)가 발전한 형태.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팔달구 장안동).


하나의 홍예문 위 2층 누각을 올렸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을 두었다.


옹성 가운데에 있는  홍예문 홍예 위에

오성지(五星池), 다섯개 구멍을 갖춘

큰 물통을 두어 적의 접근을 막고자 했다.


모양은 남대문 비슷하나 옹성과 문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은 적대(敵臺)

등 방어시설을 갖췄고.


적대는 적을 두루 살필 수 있고, 정문에

접근하는 것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


6.25전쟁때 소실되었던 장안문은

보물이 아닌 사적.




우리는 팔달구에서 장안구로 진입.


장안문에서 화홍문쪽으로 53보 되는

곳에 설치된 북동적대(장안구 영화동).


적대는 장안문(북문)과 팔달문(남문)

양쪽에만 설치되어 있다.


북동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고, 치성 밖

아래쪽에 위, 아래로 길게 구멍을 내어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하게 함.




수원천은 광교산에서 발원,

화성을 지나 황구지천으로 흐른다.

안성천 계열의 천으로 황해로 유입.




장안구 북수동 소재 사적, 화홍문.

화성의 북쪽 수문, 북수문이다.


아래에 수문이 있고, 위는 문루.

7개의 석조아치에는 쇠로 만든

살창을 설치, 적의 침입을 방지.


성벽에는 네모난 대포구멍과 소포구멍이

있고, 누각은 수문 북쪽을

감시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우리는 성에서 내려와

징검다리도 건너보았고.


성곽 밖에는 인공의 작은 연못,

용연(龍淵)이 있다.(장안구 연무동)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방화수류정.

(訪花隨柳亭, 동북각루)

우리는 팔달구 매향동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 건물.


전쟁터에서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니는.




방화수류정에서 본

용연(龍淵)의 아가씨들,

용의 승천을 기다리나.




서장대 반대편에 있는 연무대(동장대).


무예를 훈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등성이가 솟아있어 화성 동쪽에서

성안을 살피기 좋은 곳.




연무대에 있는 사정(射亭)에서

큰 활은 아니지만 약식의

국궁을 쏘아 보았다. 처음 경험.


반대편에 보이는 것은 동북공심돈.




 반달모양의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공심돈과 창룡문(동문) 중간에 위치.


성곽내 가장 특징있는 건물의 하나로

소라처럼 생긴 나선형의

벽돌계단을 통해 오름(소라각).


다연발 할인쇠뇌(활)를 쏘기 위해

높게 지었다. 서노대, 동북노대 두곳.




5개포루 중의 하나, 동일포루(東一舖樓)

팔달구 남수동에 속한다.


성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의 목조건물.

초소나 군사 대기소.

포루 중 가장 많이 돌출했다.




봉화 기능을 갖춘 봉돈(烽墩)


산정상에 만든 것이 아니라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 예술작품

처럼 정교하게 만들었다.


평상시 남쪽 첫번째 화두에 횃불,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 등으로 신호를 보냈고,

4개 화두는 긴급한 일이 아니면 안올림.




동남각루 가다가 만난 산딸나무꽃.

층층나무에 속하는 밤에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사조화(四照花). 산의 딸기나무.


행궁, 화성 산책은 여러모로 의의가 많았다.

정조대왕의 효심,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 지식과 실학의

토대 위에 세운 화성 축성과 새로운 정책들.


1800년 정조대왕이 돌아가시지 않고,

그의 손자 효명세자(1809-1830)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을 텐데.


정조 같은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요즈음이다.




산책을 마치고 팔달문 인근, 수원

영동시장 시장순대곱창타운에서

순대국 맛있게 들고


지하철로 귀가했는데,

7:30분이 넘어야 해가 넘어가니

낮이 많이 길어졌다.


이날의 세세한 계획을 세우고 3명의

해설사를 곳곳에 대동하게 하여

우리의 이해를 도왔을 뿐 아니라,


점심, 저녁 외의 활쏘기, 종치기,

중간의 아이스크림 등 모든 경비를

부담한 진실하고 충실한 우리친구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친구, 고마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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