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화전시장에는 꽃으로 그린
이중섭의 소도 있고.
표본화된 삼백초도 있고.
뿌리, 잎, 꽃이 모두 희다해서 삼백초. 꽃이
필 무렵, 꽃밑의 잎 2-3개가 하얗게 변한다.
송장썩는 냄새가 난다해서 송장풀.
신경계, 부인과, 소화기 질환에 좋다고.
멸종 위기의 보호식물.
양치식물원에 있는 고비.
꽃이 없는 은화(隱花)식물의 하나.
관상용, 식용, 약용으로 쓰인다.
고사리보다 연하고
씹는 식감이 좋다고.
모양도 고사리와 완연히 구분이 된다.
처녀고사리,
처녀처럼 얌전하다.
아줌마들에겐 제주고사리가 인기지만,
고사리도 많이 먹으면 안좋다고.
백이, 숙제가 고사리 먹고 요절했다는
말이 있듯이.
묘포장에서는 두 젊은 여인이
구상나무 묘목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잎을 뒤집어 봐서 흰 색이면 구상나무.
산림청에선 구상나무 살리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
일전에 지리산종주때 만난 젊은이도
구상나무를 살피러 온 산림청직원이었다.
영어 이름이 Korean Fir이며, 학명이
Abies Koreana인 구상나무는
우리나라 고유종.
따뜻한 곳을 싫어해 천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삶터가 한정되어 있다고.
금원산 생태수목원은 넓고
특화된 식물원이 많아 한바퀴
돌아보려면, 꽤 발품을 팔아야 된다.
여행 마지막날 (6/12, 수) 아침,
아래층에서 청소년축구 재방송보던
친구들 소리에 잠이 깼다.
수원친구는 에콰도르에 1:0으로 이겼다고
하더니, 옆의 아산친구 그럴리가 있겠냐고
간주를 놓아, 진줄 알았다.
휴양림사무실에 들려 이틀 잘 쉬었다
인사하고 함양으로 길을 달리니,
전형적인 전원풍경이 펼쳐있다.
금원산 줄기도 길게 늘어져 있고.
함양은 전형적 산간분지. 북쪽엔 덕유산
국립공원, 남쪽은 지리산국립공원.
대표적 산악관광지.
인구는 4만 명(거창 6.3만). 영호남을
연결하는 88고속도로가 주요 교통로.
거창과 비슷한 역사를 가졌다.
가야문화권, 백제 신라 충돌지역,
6.25전쟁 피해지 등.
우리는 금원산 남쪽에 위치한
기백산(箕白山,1331m) 군립공원으로 진입.
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위치.
금원산, 기백산, 조두산을 잇는
능선의 억새밭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고.
홀연히 차 앞에 나타난 고라니 한 마리
숲으로 사라졌다.
드디어 안의삼동의 하나인 심진동(尋眞洞)
용추폭포 도착.
진리(진경)를 찾아 나서는 계곡.
많은 선비들이 찾아 글을 남긴 곳이다.
금원산에서 발원한 지우천 상류가
폭포가 되어 쏟아진다. 높이 30m.
용소 직경 25m.
폭포 옆에 용추사로 오르는 길이 있고.
용추사는 신라 소지왕(479-500재위)때
각연대사가 창건한 장수사와 4개
부속암자중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
1959년 재건하였고, 장수사
일주문 등의 문화재를 보전하고 있다.
명부전 앞의 글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버릴 것은 오직 간택뿐
밉다곱다는 마음 없으면
탁 트이어 명백하리라'
밉다 곱다는 마음이 없으면 득도를
하는 것인지, 말씀이 어렵다.
달맞이꽃 옆에 있는 수련.
모네가 수련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광 아래서 변화하는
수련의 다양한 색과 모양 때문.
수련꽃은 자고 있는지
아니면 지고 있는지.
연산홍 옆에 핀 디기탈리스.
원산지가 동구인 귀화식물. 현삼과.
잎은 심장질환 치료제 원료로 쓰인다고.
홀로 서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멋진 모습의 목어,
조그만 이절의 명품.
용추계곡 상류에 있는 용추자연휴양림.
시설이 좀 낙후된 느낌이 들고,
타휴양림과 달리, 인터넷 예약 없이
현장에 와서 숙소를 정할 수 있다고.
신영우친구의 고향이 함양 안의.
이곳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차 하나 지나갈 수 있는 휴양림 진입로.
더구나 일부는 포장이 안된 길.
기사 양반, 뒷좌석 손님을 골리려고
덜컹거리다, 고장을 자초.
결국은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우리의 여행관습은 이런길을 끝까지
올라야 직성이 풀린다.
기백산군립공원에서 안의 면소재지
가는 길에 있는 연암물레방아공원.
물레방아 옆에는 박지원선생 동상.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1737-1805)선생이
안의현감 재임시 (1792-97) 물레방아,
베틀, 풍구 등을 실용화했다고.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에 서방님 나를 안고 도네'
면소재지 입구에 있는 안의모터스에
들려 차를 검사해보니, 소리 나는
원인을 발견했지만, 마후라가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부품을 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하여
11시에 안의면의 유명한 갈비탕을 맛보려
면내 거리를 활보.
거리엔 할머니 취업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우뚝 선
2층 누각, 광풍루(光風樓).
조선시대 대표양식.
태종12년(1,412)에 처음 지어졌고.
성종때 정여창(1450-1504)이 다시 짓고
광풍루라 이름지었고.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학자인
정여창은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선
치자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의버스터미널,
안의면의 인구는 5천명.
고등학교도 있다.
신라때는 마리현, 이안현이었다가
영조때 안의현이 되었다.
함양 안의, 서하, 서상면과 거창의
마리, 위천, 북상면이 안의현 관하.
소론을 중심한 이인좌난이 일어나자,
안의의 정희량이 이에 동조했고
결과적으로 안의현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영조는 탕평책을 펴기 시작했다.
물어물어 안의원조갈비집을 찾아
한우갈비탕에 무학의 '딱 좋은데이'
한잔, 갈비탕은 14천원.
문, 담장이며 툇마루 등이
품위가 있는 집, 갈비탕은 별로였고.
뜰에는 화사한 석류(石榴)꽃.
석류의 원산지는 이란. 페르시아를
안석국(安石國)이라 했다. 석류를
안석류라고도 했고.
석류꽃은 고려자기 문양으로도 쓰였고,
석류꽃의 아름다움에서 홍일점이란
말이 나왔다고.
석류열매는 음낭과 같은 모양이라 다산의
의미가 있어, 비녀 향낭 등 여인들의
신변 잡품에 다양하게 쓰였다.
(박상진 교수)
친구차량의 배기통.
식후, 안의모터스에서 수리된 차를 타고
선비문화탐방로로.
우리 때문에 차가 고장난 것 같아
친구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것은
무엇보다 잘한 일.
화림계곡 탐방을 마치면
안의삼동을 마스터하는 셈.
우리는 왼쪽의 농월정, 동호정을 거쳐
오른쪽의 거연정으로.
농월정교를 지나 농월정으로
농월정(弄月亭)과 너럭바위.
안의면 월림리 화림동계곡 하류 소재.
너럭바위 월연암의 면적은 천여평.
박명부(1571-1639)는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는 부당하다고 광해군에게
직간했다가 파직당하였으며
인조반정 후 벼슬길에 다시 나와,
병자호란시 예조참판으로 청과의
강화를 반대, 벼슬을 사직하였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며
이 정자를 세웠고 후학을 양성했다.
2003년 화재가 나 소실된 농월정은
2015년 복원되었다.
농월정 앞에 있는 종담서당.
지족당(박명부)이 강학하던 곳.
서당의 담장옆에는 지족당 신도비가 있고.
신도비는 죽은이의 평생행적을 기록하여
묘앞에 세운 비석.
다음은 서하면 황산리에 있는
동호정으로 이동.
동호 장만리선생(1553-1593)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90년 지은 것이 동호정.
이곳은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낚시 등을 하며 유영하던 장소.
선생은 임진왜란, 선조의 의주 몽진시
임금을 등에 업고 길을 재촉했다.
정자 앞 너럭바위에서
잠시 일광욕도 하고.
그리고 강을 건너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를 걸었다.
거연정까지는 1.9km.
(농월정에서 동호정까지는 4km)
아직도 일광욕 즐기는 친구.
요번 여행으로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겠지.
편안한 테크길과 벤치도 있고.
지천인 오디와 버찌도 따먹으며.
수양벚나무의 버찌가
더 달콤했다.
함양사과도 커가고 있었고.
함양사과는 백화점의 수요도
못채울 만큼 인기가 좋다고.
지나가는 길, 농군도 격려하고.
농약을 잘못써 죽은 모를
보식하고 있었다.
멀리 그림 같은 거연정이 보였고.
서하면 봉전리 봉전마을 소재.
남덕유에서 발원하는 남강 상류,
화림동계곡 최상단에 위치.
화림동계곡은 함양 서하면에서
안의면으로 흐른다.
다슬기 잡는 여인네도 보였고.
거창 마리면이나 이곳 슈퍼에선
잡은 다슬기를 팔고 있다.
강의 반대편으로 건너가
다리를 통해 거연정(居然亭)으로.
조선 중기에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가
억새를 엮어 세운 정자가 최초이고,
1872년 전재학 등 후손이 건립한 정자.
이곳 골짜기는 상류에 위치한 높은
산지의 골짜기인데,
골짜기 폭이 가장 넓다.
바위도 너럭바위가 아니라, 수직절리로
생긴 울퉁불퉁한 바위가 대부분.
영남의 명승중 안의삼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중 화림동이 최고이며
그중 거연정이 으뜸.
자연유산이자 문화유산.
입구의 아름드리 팽나무가
열매를 맺었다.
20미터까지 자라는 팽나무는 우리나라
고목나무의 10%를 차지. 느티나무
다음으로 많다. 전남, 경남, 제주에 많고.
열매는 대나무로 만든 팽총의 탄알로
쓰였고, 아이들의 간식거리로 이용됐고.
은행나무만큼 오래 살아,
천년을 넘긴 나무도 많다.
거연정.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해
세상일을 잊는 곳.
깊은 소가 있고,
구름이 흐르고.
정자에는 중년의 남녀 두쌍이 있어
우리에게 농을 걸었다.
정자에서 방금 만났는데, 아저씨들이
먼저 왔으면 우리의 짝이 되었을 거라고.
여우같은 여자들이 남자를 호리는
농남정(弄男亭)?
깊은 강물은 무심히 흐르고.
육십령 고개가 아니라 터널을 뚫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육십령은 남덕유산(1,507m)과 남쪽
백운산(1,279m) 사이 안부에 위치.
함양 서상면과 장수 계내면 경계.
고개의 동사면에 떨어진 비는 남강,
서사면에 떨어진 비는 금강의
최상류로 흐른다.
옛날 도둑떼를 피해 이고개를 넘으려면
60명 이상이 무리를 지어야 했고,
산굽이가 60이 넘는다고 해서 육십령.
나제국경 요새지였기에
성터와 봉화대자리가 있다.
공주를 지나다 문극겸(1122-89)을
모신 사당 사간원지를 들렸고.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소재.
선생은 고려 의종, 명종때 충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의종에게 직간하다
좌천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던중
유구역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써넣었다고.
'한 조각 붉은 정성 임금이 몰라주니
여윈 말 채찍질하며 머뭇머뭇 물러가네'
정중부난 이후 재상, 대장군 등으로
중용되어 명종때도 직언을 마다했다.
의종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고.
후손들이 이곳에 묘소와
사당을 세웠다.
고간원 뒤에 있는 선생의 묘.
주위에는 신도비, 재실 등이 있음.
남평문씨 집안에서 관리.
5시도 안되어 아산 읍내동
온양초교 인근에 있는 탕수육 맛집에서
탕수육+짜장면과 밥.
이른데도 식당이 꽉 찼다. 11시에 문을
열고, 닫는 시간은 따로 없다고.
식재료가 떨어지면, 영업끝.
지나가는 길, 온주아문을 잠간 들렸고.
안쪽에는 온주 동헌이 보였다.
신라시대 잠시 온양은 온주라고
불렸다고. 아산 읍내동 소재.
아산친구집에 잠간 들려 차 한 잔.
맡겨둔 차로 수원들려 상경.
7시 수원을 출발했는데
길은 별로 막히지 않아
9시경 집에 도착.
멋진 여행이 되도록 도와준
친구들에게 감사.
기사, 셰프역할을 즐겁게 해준
아산친구에게는 곱배기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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