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콜로라도 강을 거슬러 올라

난해 2020. 10. 3. 00:19

칠순맞이 미국 횡단(2015.10.5-10.23)

 

칠순이 돌아오기 전에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자고 고등학교 친구끼리 계획한 미국 횡단 여행은 떠나는 날까지 마음을 졸이게 했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준다고 역까지 쫒아온 집사람이 떠나는 순간까지 가지 말라고 말렸으니. 지난해 8월에 위를 자르는 수술을 한 이후 먹는 것이 시원찮았고, 자다가 몇 번이고 화장실을 가야하는 실정에다, 떠나기 전날까지 허리가 아프다, 왼쪽 어깨근육이 뭉쳤다 하며 한의원을 다녔으니 말이다.

 

여행은 계획 단계에서 시작하여 짐 꾸릴 때 까지도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다. 소풍가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기대에 부풀어서 말이다. RV(Recreation Vehicle, 레저차량, 캠핑 차)를 타고 미국 서부의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나이아가라까지 이곳저곳 들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기도 하며 중간 중간 트래킹을 하기로 한 여행이니까, 기대가 더 컸다.

 

여행 관련 책자를 찾다보니, 도린 오리온이 쓴 비바 라스베이거스(슈즈홀릭이 반해버린 미국 캠핑카 여행)’가 눈에 띄었다. 의사 부부인 도린과 팀이 1년가량 미국 전역을 누비며 쓴 캠핑카 여행기다. 구두 200켤레를 싣고 다니며, 나체주의자 캠핑장에서 구두는 신어도 되죠?”라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슈즈홀릭(shoesholic, 구두에 열광하는) 여인의 얘기. 차량고장으로 고생한 일, 강도를 만난 사건 등은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니까 걱정도 되었지만, 여행이 끝난 후 부부관계 뿐 아니라 생활 전반이 스릴 넘치고 신이 났다는 대목에서, 우리의 여행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사막에도 가고, 겨울에 이미 들어선 로키 산 국립공원(Rocky Mountain National Park)도 갈 터이니, 사철 옷가지와 등산용 스틱 등을 단단히 준비하라는 친구의 말을 좇다보니, 삼각대며 무거운 카메라 줌렌즈를 넣을까 말까 망설였고, 결국은 작아야 만하는 여행 가방은 빵빵해지고 말았다.

 

마나님과 이별하고, 같은 동네 사는 친구, 호텔리어와 함께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을 가려니 강화도의 멋진 모습이 차창에 스쳐 지나갔다. 섬은 서서히 아침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새벽이나 저녁에 보는 강화 섬은 볼 때마다 모습이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섬이 주는 느낌도 새롭고 이색적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철길 주변이 성급한 개발에 의해 어지러워지고 있어, 언젠가는 저 멋진 모습도 새로 지은 건축물에 가려져 볼 수 없겠지 하는 우려가 생긴다.

 

2015105일 오전 10, 드디어 델타 항공 158기는 인천공항을 떴다. 호텔리어친구가 네다섯 달 전 63만 원을 주고 싸게 구입한 왕복항공편. 일행은 어디 앉았는지도 모르고, 한 가운데 앉아 꼼짝달싹도 못 하는데다 음식은 기름져 속이 메스꺼웠다. 이 나이엔 적어도 국내항공편 비즈니스 석에 앉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국제시장영화 한 편을 보고, 옛날 미국여행 때 구입했던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를 읽으며 그럭저럭 디트로이트까지 갔지만, 그곳에서 두 세 시간 머무른 후 미국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LA로 다시 역주행할 때는 지루함이 더 했다. 디트로이트에서 LA,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

 

영국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프랑스의 작가가 쓴 미국역사는 일본인이 쓴 한국사와는 차원이 다르겠지만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고, 미국 횡단 전에 그들의 짧은 역사를 한번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LA에 도착하니 임목사님이 우리가 타고 다닐 RV, 패스화인더(Pathfinder)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밤낮으로 차를 몰고 온 패스화인더의 주인이자 길 안내자이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줄 조리사이기도 했다. 우리보다 한참 연하이지만 목사로 부르기는 좀 예의에 벗어나는 것 같다. 우리 친구들 중에 목사인 친구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에게 반말을 함부로 쓰기가 그런 것처럼.

 

임목사님 덕분에 무슨 차로 갈까, 어디를 어떻게 가며, 무엇을 보고,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신경을 써야 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우리에겐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랐다. 호텔리어가 일전에 미국 여행 갔을 때 임목사를 알게 되었고. 이번 여행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끼리의 여행이라면 물론 차량, 숙소, 공원관계를 예약하고, 필요물품을 구입하며 여행경로를 계획하는 과정에서의 자잘한 재미는 있었겠지만.

 

Pathfinder. 정이 가는 단어이다. 길을 찾아가는 사람, 개척자 또는 탐험자. 선도기(先導機, 앞서 가는 비행기)의 조종사란 뜻도 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도 쓸 수 있는 단어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닥친 70대를 헤쳐 나갈 우리 자신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IMG 2068)

우리는 서둘러 고등학교친구들과 약속이 되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운 미국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 외에, 내년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50년이 되는 해인지라 동창회의 특별전달사항이 있었다.

 

요즈음 띠 동갑 모임을 나가면, 고교 졸업 50주년 행사를 한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이 많다. “너만 졸업한지 50년 되었냐?”고 면박

을 주지만. 내년은 칠순이 되는 나이가 되는 해이기도 하니, 경사가 겹쳤다 할까. 부부동반 여행이니 특별행사들을 계획하고 있는데, 우리는 외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초청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어려운 친구들에겐 교통비를 보조한다든가, 잠자리를 제공한다든가. 어려운 친구들은 늘그막에 향수에 젖을 수도 있을 터이니.

 

친구의 집은 LA남서쪽 교외의 고급주택지, 태평양 바닷가를 끼고 있는 롤링 힐즈(Rolling Hills)에 위치해 있다. 인공폭포도 흐르는 잘 가꾸어진 집이었다. 어려서부터 늘그막까지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본인들의 노력이 우선하겠지만, 복 받은 일이다. 도착했을 때 얼듯 태평양의 멋진 석양의 해변을 엿 볼 수 있었는데, 친구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날이 어두워진데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바람에, 태평양이 맞닿아 있는 파로스 베르데스(Palos Verdes)반도의 멋진 풍광을 못 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미국 LA쪽 친구들은 우리가 온다고 너무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았고, 정원에 차려놓은 파티장의 차림새를 보니 집주인과 친구들의 정성이 그득 담겨 있었다. 좋은 술과 안주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한 명 두 명씩 도착하더니 열두 명이 되었다. 포도주로 시작한 파티가 양주로 옮아감에 따라, 우리들 방문객 여섯 명을 합한 열여덟 명의 분위기 도수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들의 고향친구들이 멀리 이곳까지 와서 이곳 미국에 있는 친구들과 신나게 어울리니, 이집의 어르신께서도 기분이 흔쾌하신지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 몇 번이고 정원에 나오셔 인사를 하셨다.

 

친구들을 보니 하도 오랜만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얼굴이 기억 안 나는 친구도 여럿이 되었다. 아무래도 축구나 핸드볼 등 운동을 했던 손사장이나 유교감이 아는 친구들도 많았고 알아보는 친구들도 많았다.

 

일반적으로 미국에 사는 친구들이 나이가 덜 들어 보인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고, 그 결과로 생활이 풍족하다면, 한국처럼 신경을 크게 쓸 일이 적으니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흰 털북숭이의 친구가 그렇다. 당시 유수한 기업의 소유주 아들로서 이집 주인과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결성하여 진주 조개잡이(Peary Shells) 60년대 당시 유행하던 곡들을 멋지게 연주했었는데 말이다. 미국생활이 만만치 않았는가보다.

 

같은 대학을 다녔던 친구와 아무래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는 학교 때 미식축구팀 주장을 했었는데, 당시 모교의 팀은 전국을 제패했었다. 그때 나보다 두 배 정도 되었던 그의 큰 주먹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고, 그와 함께 농장에서 항아리 째 땅 속에서 꺼내어 퍼마셨던 색깔 좋은 딸기 주의 맛이 아직도 내게 남아있다. 그 이야기를 꺼내니 딸기 주를 만들었던 원료딸기는 당시 새로 외국에서 도입되었던 신품종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제대하여 바로 복학한 학생이었고, 그는 군대를 안 가고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한 원생이었다. 하여튼 그의 후광으로 같이 공부했던 후배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남아있다.

 

몇 년 전 강원도 하조대에서 같이 즐거움을 나눴던 친구도 있었는데, 풍을 맞아 불편한 중에도 참석하여 우리를 반겨주었으며 시종 즐거워했다.

 

2010년의 일이었던가, 강원도 하조대에는 우리가 즐겨 찾곤 하는 친구의 별장이나 마찬가지인 아파트가 있었다. 여름 어느 날 나는 사정이 있어 친구들과는 별도로 서울에서 버스로 출발했다. 하조대에서 버스를 내려 바닷가를 지나다보니 맛있는 찰옥수수를 파는 아저씨가 있어, 한 줄 사가지고 친구의 집을 찾았는데, 집에는 친구들은 모두 어디인지 가고 없고 미국에서 온 이 친구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졸업 후 첫 만남이었다. 만나자마자 이친구들 오기 전에 빨리 먹어치우자."하며 장난스럽게 먹기를 권했고, 둘이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갓 쪄서 맛있는 옥수수를 다 해치웠던 기억이 있다.

 

모임 도중 비가 내려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기도 했었지만, 금주할 수밖에 없었던 둘 빼 놓고는 모두 혀가 잘 안돌아갈 정도로 취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미국친구 몇 명은 숙소까지 쫓아와서 여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참고사항도 말해주고 충고도 해주었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번 횡단여행은 우리 나이에는 무리라고 하며 걱정들을 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LA의 하늘은 너무 오랜만에 보는 눈부신 파란 하늘이었다. 중국의 산업화 영향으로 찌푸린 하늘만 보아보다 이런 하늘을 보니 기분이 날듯했다. 우리가 찾은 한인 타운의 북창동 순두부집 음식은 정말 맛있었고, 여종업원들은 정말 친절했다. 물론 15-20%사이 삼단계로 되어 있는 팁 제도의 영향이 크겠지만. 미국에서 팁 금액이 명시가 안 되었다면, 텍스의 두 배로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1. 자연의 평화가 깃들은 요세미티

 

 

106, 눈부신 태양과 파란 하늘 그리고 뭉게구름과 함께 미국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횡단여행을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국립공원을 찾아 가는 우리들의 발길은 콜로라도 강을 거슬러 오르는 모양이 되겠지만, 미국의 선조들이 서부로, 서부로 달렸던 길을 역방향으로 달려가는 셈이었다. 동부로 가면서 자연을 즐기는 이외 미국의 역사도 소급해 보기도 하고,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도 생각해보면 더욱 의미가 있는 길이 될 것도 같았다.

 

한인 타운은 영어와 한글간판이 뒤섞인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차분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LA에 대한 고별인사로 엘에이 한인 타운을 한 바퀴 삥 돌은 다음, 허리우드를 지나 5번과 99번 후리웨이(고속도로)를 북쪽으로 5시간 달렸고, 이어 후레스노(Fresno)에서 시내를 관통하는 41번 도로를 2시간 달려 요세미티에 도착했다. 주행거리는 485키로 미터. 이국적이고 시원스러운 도로는 우리들의 마음을 뻥 뚫리게 했다.

 

허리우드가 이곳 엘에이에 자리 잡은 데에는 사연이 있다. 1920년대 무성영화가 폭발적 인기를 얻을 때에는 조명이 가장 중요했는데, 로스앤젤레스는 강수량이 적고 맑은 날이 많아 이런 점에서 영화를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다 마침 서부영화 붐이 크게 일었고, 주변의 계곡(Canyon)들과 목장들은 촬영장소로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중 고등학교 때인 1960년대에는 서부영화가 꽤 유행했던 기억이 난다. 신대륙의 역사를 잘 몰랐던 우리들은 인디언을 적으로 생각하고 쌍권총을 찬 카우보이들을 우리 편으로 생각하며, 역마차가 인디언들에게 습격을 당할 때면 마음을 무척 졸이며 보았었다.

 

가는 도중 잘 정돈된 휴게소에서 첫 야외식사를 했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와는 달리 널찍할 뿐 아니라, 현대적 감각으로 설치해 놓은 설치물이며 청결한 화장실 등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출국 전에 식품을 취급하고 있는 친구가 준비해준 깻잎 등의 절임식품, 그리고 가든파티가 끝나고 친구 부인이 싸서 건네준 건과일, 견과류는 여행 중에 오래 동안 맛있게 먹었다. 가는 길 내내 먹을 때마다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는데, 조그만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이다.

 

식사 때 보니 며칠이 되었다고 수염을 기르기로 한 세 친구의 얼굴은 벌써 거무스레해졌다. 수염은 나이에 관계없이 세포분열을 계속하나보다.

 

전날 술 먹을 때는 아주 기분이 좋았던 주대감은, 안경을 어디에 놓아두었는지 잃어버리고 여행 내내 도수 있는 선글라스를 낄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안경다리도 완전치 못했다. 선글라스를 쓰면 낮 동안은 그렇다고 쳐도, 날이 어두울 때나 어두운 장소에선 잘 보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중학교 때 1학년 11번이었던 귀여운 도련님이었는데, 지금은 세무공무원을 한 덕인지 술과 비계, 닭 껍질을 마다하는 애주 애지가(愛脂家)이며, 그렇게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데도 건강체크 때 부정맥 말고는 이상이 없다는 친구이다.

 

이 친구는 부인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남자이다. 지금은 타계했지만,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해 유골로 만든 묵주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겉으로는 껄껄거리며 유쾌한 척하지만 마음 속엔 그녀 생각뿐이다.

 

전날 누가 술을 많이 마셨는가를 알려면 차량이동 중에 뒤쪽 침대칸에 누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었다. 하동사나이는 어제 주대감 못지않게 취했었고 제 세상 만난 양 미국 친구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들의 이름을 엄청나게 크게 불러댔었다. 덕분에 복용하는 약봉다리를 잃어버렸지만. 이 친구는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지가 10년이 되었고, 잠간 놓았던 술병을 지금도 꿰어 차고 다닌다. 하동의 터줏대감으로 과수원에서 손을 뗀지가 몇 년 되었다. 술이 과하면 해병대 기질이 나타난다.

 

해외여행을 하다 복용하던 약을 잃어버리거나 약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영문으로 된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두는 것이 좋다. 처방전이 있으면 외국에서도 필요한 약을 구입할 수 있으니까.

 

이 나이 되도록 아직까지 정신을 잃도록 술을 들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복 받은 일이다. 막상 건강관계로 술을 들지 못하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한지, 친구들이 특히 요즈음 여친들이 얼마나 재미없어해 하는지 알 것이다. 나이 들면 여자들은 왜 그렇게 술이 강해지는지.

 

요세미티공원에 도착하여 흑색 참나무(Black Oaks), 흰색 소나무(White Bark Pine), 세콰이어(Sequoia) 등으로 우거진 요세미티국립공원의 꼬불꼬불한 계곡을 지나자니, 아름드리 숲의 모습과 그 상쾌한 대기, 그리고 기분 좋은 적막감을 사진에 담지 못 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96년도 가을에 요세미티, 그랜드캐니언, 뉴욕, 시카고 등 여기저기 미국을 여행했었는데, 그랜드캐니언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런지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고, 요세미티하면 아름드리나무들만 희미하게 생각이 날뿐이다.

 

헨리 데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37-1861)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자연주의자이며 환경보전운동 선구자인 존 무어(John Muir, 1838-1914)우주로 가는 가장 분명한 길은 야생의 숲을 통과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말이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서 좋은 풍경사진 한 장 찍으려 해도, 차는 덜컹거리고 나무 가지에 가려지고 커브 길에 막히고. 신경은 있는 대로 다 써도 한 장도 못 건지느니, 차라리 기억 속에 야무지게 담아두는 것이 나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차에서 내려 공원의 서쪽 아래에 위치한 터널 뷰에서 보면, 왼쪽의 엘 케피탄(대장 바위)과 오른쪽 뒤 하프 돔의 모습이 정말로 장관이다. 사진작가 안셀 아담스가 그토록 좋아하는 바위들이다. 어떻게 보면, 요세미티 관광은 하프돔을 중심으로 해서 요세미티의 이 길 저 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라고나 할까.

 

 

캐리포니아주 중부 동쪽의 시에라네바다산맥 중간에 위치한 요세미티국립공원은 그랜드캐니언, 옐로우스톤과 함께 미국 3대 국립공원의 하나이다. 제주도의 두 배 크기이며, 요세미티는 인디언 말로 회색 곰을 뜻한다. 이곳에 봄이 와서 눈이 녹아내리는 시기이면 천개 이상의 폭포가 그 자태를 자랑하며 힘찬 물줄기를 쏟아 내린다. 그리고 이 공원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트레일이 백 개 이상이나 있다.

 

1300만 년 전에 지각변동으로 이곳에 큰 산이 솟아올랐고, 150만 년 전 빙하와 계곡을 흐르는 머세드 강(Merced River)에 의해 이곳저곳이 그림같이 조각되었다.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그 모습이 변해가고, 요세미티의 꿈은 계곡마다 구름과 함께 피어오른다.

 

머세드 강은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발원하여 샌와킨 강에 이어지며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간다. 강의 길이는 180키로 미터이며, 6월에 가장 수량이 많다. 이때는 높은 산의 눈이 녹아내리므로 비가 오지 않아도 수량이 풍부하며, 이물은 요세미티폭포 등으로 흘러내리기도 하며, 요세미티 호수 등의 원천이 된다.

 

하프돔 위의 구름들은 시시각각 정말 변화무쌍했다. 자비의 강, 머세드(Merced)에 의해 만들어진 산하는 얼마나 멋들어진지.

 

안셀 아담스(1902-1984)는 풍경사진의 원로이자 환경운동가이다. 흑과 백이라는 단순한 색감의 공간을 정밀하고 섬세한 작업으로 표현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그는 폭풍우 몰아치는 하늘과 변화무쌍한 구름 그리고 휘영청 밝은 달 등을 도전적인 주제로 택하기도 했다. 한 장의 작품을 얻기 위해 얼마 동안 인내를 하며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지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가 고향인 아담스는 일찍이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으나, 요세미티를 방문하면서 이곳의 자연과 사진에 매료되었으며, 시에라클럽에 가입하여 요세미티, 그랜드캐니언 등의 보호에 앞장을 섰었다.

 

201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딸에게 준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서울 세종예술회관에서 아담스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우리는 요번 여행의 준비단계로 단체관람을 했었다. 우리도 흉내를 낸다고 흑백으로도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그의 요세미티사진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신비함이 깃들여 있다.

 

패스화인더를 타고 계곡으로 내려오니 어둠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했고, 계곡 뷰(Valley View)에서 보니 터널 뷰에서 본 것 보다 더 크게 하프 돔(Half Dome, 2,698미터)이 다가왔다. 하프 돔은 그 옛날에 빙하의 무게와 지반의 움직이는 힘으로 북쪽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한다.

 

계곡에서 좋은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날은 어두워졌고, 우리는 서둘러 텐트를 치고 바로 저녁을 지어 먹었다. 별이 유난히도 밝은 밤이었다. 우리는 깊은 적막 속에서 맑고 싸늘한 요세미티의 공기를 깊게 들어 마셨다.

 

그 좋은 밤에 별로 좋지도 않은 사건이 세 건이나 일어났다. 하나는 하동사나이의 코골이 사건이다. 이 친구가 거나하게 술 한 잔하고 1인용 텐트에서 잠이 들어 코를 고는데, 그 옆에서 해먹을 치고 있던 독일친구가 잠을 잘 수가 없었나보다. 본인은 곯아떨어졌고 하는 수없이 우리에게 자리 좀 옮겨달라고 하소연했다. 야영장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기시하고 있는 미국국립공원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동 친구를 깨워 의사를 전달했더니, 잠에서 깬 이 친구 화를 내며 길길이 뛰었다. 술에 취한 것은 좀 그렇지만, 의도적으로 코를 고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고 식식거렸다.

 

그러던 중 옆 텐트에서 호텔리어와 같이 잠을 자려니, 무언가 툭탁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병대 출신인 하동사나이가 독일친구와 한판 붙은 줄 알고 후다닥 나가보니, 다행이도 불상사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독일친구는 어디로 갔는지 안보였다.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나보았다.

 

그 이후 텐트족이 바뀌었다. 하동사나이가 차 안에서 잤고, 대신 손사장이 텐트족이 되어 호텔리어와 한 텐트를 썼고, 나는 일인용 텐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밤에 몇 번이고 화장실을 가야하는 내 문제였다. 이곳 화장실은 유난히 멀리 떨어져 있고, 큰 길에서 벗어나 외진 데다 전등까지 없어서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식사 전,어두워지기 전에 사전 답사도 했었다. 쌀쌀한 밤공기에 몸을 움츠리며 화장실 가는 길, 어둠 속에서 늑대가 아닌가 싶은 큰 쉐퍼트가 나타나더니 내 뒤를 쫓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총총 달음질치다가 이렇게 도망가면 안 되겠다 싶어, 헤드랜턴을 들이대고 정면승부를 하였더니 그때서야 주춤하며 물러서더니 사라졌다.

 

어두운 길을 한참 지나다보니 새까만 어둠 속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캠프 화이어를 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화장실을 물어물어 허둥지둥 일을 보고나니, 화장실 입구에는 곰 늑대 등 야생동물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이 적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또 늑대 같은 친구가 나타날까 조마조마 맘 졸였는데, 다행히도 나타나지는 않았다. 화장실 왔다 가는데 삼십 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이날 밤 이 화장실을 세 번은 갔다 왔고. 갈 때마다 길을 헤맸다. 다음날 보니 이 화장실 가는 중간에 또 하나의 화장실이 있지 않은가.

 

마지막 건은 유교감이 침대에서 자다가 두 번이나 떨어진 사건이었다. RV의 운전석 윗부분에 침실이 있어 차의 앞부분이 툭 튀어나와 있다. 높이도 낮은 편은 아니라, 이곳에서 떨어진 사건 이후 그는 몸이 쑤신다고 불편해 했는데, 그 이후 잠자리를 낮은 자리의 침대로 옮겼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려니 계곡 옆에 웬 큰 뱀이 한 마리 있었다. 방울뱀이 아니가 하고 어제에 이어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보니, 장난꾸러기가 갖다놓은 장난 감 뱀이었다. 어디가나 장난꾸러기는 있는 법.

 

다음날의 첫 일정은 그래시어(Glacier)포인트로 이동하여 요세미티를 관망하는 일이었다. 차량으로 이곳까지 이동 후 20분가량 가볍게 비탈길을 오르면 해발 2199미터의 그래시어 포인트이다. 좌측 멀리에 요세미티폭포도 보였고, 아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 주위의 부드러운 요세미티의 산들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서 보면 하프돔의 옆모습이 마치 귀여운 펭귄 같아 보인다. 동쪽 아래는 자비의 강, 머세드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래시어 포인트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는 곳이라 길이 폐쇄가 된다.

 

또 이곳에 1925년 요세미티 자연역사협회에서 요세미티의 지질학적 역사를 알리려고, 조그만 오두막을 지어놓았다. 차량으로 돌아오는 길, 화장실을 들어가 보니 수세식은 아니었지만 청결하고 냄새가 전연 없었다, 이곳의 공기가 너무 청결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고, 냄새를 없애는 비결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시어 포인트를 떠나 비스타 포인트 트레일 입구에 도착하여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며 이곳의 완만한 길을 올랐다.

 

트레일의 종점에서 이공원에서 세 번째로 큰, 길이 189미터의 브라이들베일(Bridalveil)폭포의 멋진 모습을 보았다. 브라이들베일은 면사포를 뜻한다. 바람에 부딪쳐 휘날리는 물길이 신부가 쓴 면사포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양 같기도 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계속된 가뭄으로 수량은 풍부하지 않았지만.

 

요세미티에서 제일 긴 폭포는 리본(Ribbon)폭포이다. 길이는 491미터로 북미에서 최고이지만, 세계 8위의 폭포이다.

 

 

점심을 간단히 해먹고 다음으로 들린 곳은 공원 동쪽의 툴럼(Tuolumne) 옴스테드(Olmsted)포인트. 해발 2800미터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가려면 시에라산맥의 허리를 횡단하는 티오가길(Tioga Pass)을 올라타야 한다. 우리나라의 대관령 길 같다고 할까. 티오가는 이곳의 제일 높은 고개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하프 돔의 뒷면을 볼 수 있고, 둥근 화강암들의 유희와 구름이 한가로이 쉬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오른쪽에 하프 돔이 마치 공룡의 머리처럼 보였다.

 

 

툴럼고원은 요세미티, 그랜드캐니언의 국립공원 지정에 지대한 공을 세운 존 무어가 쓴 미국 생태문학의 고전 나의 첫 여름(My first Summer in the Sierra)'의 무대이다. 툴럼은 인디언이 거주했던 동굴과 돌집이 모인 마을을 뜻한다.

 

시인이며 자연주의자인 존 무어는 1869. 6. 3-9. 22 사이에 목동들과 함께 요세미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스케치도 하며 이곳에서 생활을 했었다. 2,050마리의 양을 데리고 이곳에서 목동생활을 시작했는데, 끝날 때는 2025마리의 통통하고 강한 양들이 남았다. 10마리는 곰에게, 한 마리는 방울뱀에게 그리고 9마리는 사람에게 먹히고 말았다. 곰에 의한 피해가 크다고 했지만 사람이 먹어치운 숫자나 비슷하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요세미티의 동식물의 아름다움을 스케치와 글로 기술했지만, 미국의 동식물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에겐 아쉬움이 많았다. 동식물의 특성과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텐데. 요세미티에는 90종 이상의 동물, 230종 이상의 조류, 1,400종 이상의 식물이 살고 있다.

 

자연의 평화는 태양이 나무속으로 흘러들어가듯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간다.

바람은 그들만의 상쾌함으로, 폭풍은 그들만의 힘으로

당신에게 다가선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가을 낙엽처럼 사라져버린다.

 

자연에 대한 무어의 마음이 잘 담겨져 있는 멋있는 시의 한 구절이다. 툴럼에 서있는 우리들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는 게으르고 지저분한 인디언을 싫어했으며, 천렵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자연에 대해 더 할 나위 없는 설교를 하시는 동안, 살려고 발버둥치는 물고기들의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요세미티 신전에서 못된 오락을 하다니.”하며.

 

요세미티공원에서 킹스캐니언까지 시에라네바다산맥을 종주하는 385키로 미터의 존 무어 트래일은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코스이다. 종주에는 최소 20일이 소요된다.

 

 

툴럼에서 내려오다 보면, 해발 1900미터에 위치하는 짙은 푸른색의 아름다운 테나야(Tenaya)호수를 만나게 된다. 예술을 좋아했던 빙하가 만든 호수이다. 이곳에 살았던 요세미티족의 추장의 이름, 올드 테나야(Old Tenaya)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호수는 캘리포니아, 네바다에 걸쳐 있으며 샌프란시스코 등에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을 차례로 보면, 왼쪽 아래 부분에 터널뷰(Tunnel View)가 있고 바로 아래에 벨리뷰(Valley View),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오르면 방문자센타에 이른다. 그 바로 아래 그래시어포인트(Glacier Point)가 위치하며 이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브라이들베일(Bridalveil)이 있다. 툴럼 옴스테드포인트(Tuolumne Olmsted Point)는 오른쪽 1/3윗부분에, 이곳의 오른쪽 바로 위에 테나야(Tenaya)호수가 있다.

 

미국 국립공원의 입장료는 공원마다 차이가 있으며 차량 당 20-30, 개별 입장은 1인당 10-15, 캠프를 하는 데는 하루에 12-100(아치스공원이 제일 비싸다)이며, 4-9월 사이에는 예약이 필수이다. 입장료는 일주일간 유효하고, 캠핑지는 하루 요금이며, 우리처럼 여러 곳을 방문한다면, 연간 패스 등을 구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국립공원(National Park)과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에 관한 자세한 사항, 가는 길, 요금 등에 관해서는 //www.nps.gov로 들어가서 공원이름을 찾아 검색하면 된다.

 

 

2. 형형색색(形形色色)인 사막의 골짜기, 데스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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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테나야 호수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데스벨리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 멋진 설산이 우리를 안내했다. 네바다는 스페인어로 눈이 뒤덮인 곳이라는 뜻이라니까 보이는 설산은 네바다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요세미티, 데스벨리 인근지도)

지도에는 우리가 이미 방문한 요세미티이외에 앞으로 방문할 데스벨리, 라스베가스, 그랜드캐니언, 자이언, 글랜캐니언, 캐니언랜드, 그리고 아치스가 표시되어 있다.

 

데스벨리를 가려면 요세미티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 120번 도로를 타고가다, 395번 하이웨이를 만나서 이 길을 67키로 미터 달리면 오란차(Olancha)마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190번 도로를 동쪽으로 106키로 미터 더 들어가서 타운패스(Towne Pass)를 지나면 데스벨리 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405키로 미터의 거리를, 네 시간 반 동안 달려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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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데스벨리 국립공원은 둘 다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명소이다.

 

캘리포니아 주가 미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인구는 39백만 명으로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주이고, 면적으로는 3위이며 한국의 네 배가 넘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와이, 알래스카 다음으로 늦게 미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1848년 멕시코로부터 양여를 받아 미국 땅이 되었다.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1776년 독립 당시 영토를 동부 13주로 보면, 태평양에 접해있는 캘리포니아 취득은 미국에게 얼마나 큰 복 덩어리가 굴러온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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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벨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은 캘리포니아 주 남동부에 있는 아마르고사 산맥과 페너민트 산맥 사이에 끼어있는 사막으로 캘리포니아에 위치하고 있으나, 일부는 네바다 주에 속해 있다.

 

죽음의 계곡(Death Valley)2억 년까지 바다 밑에 있었다. 여러 차례 지각의 변화를 거쳐 현재의 형태를 갖춘 것은 35백만 년 전에서 5백만 년 전이라고 한다. 계곡의 내부는 물이 고여 호수의 형태였는데, 9천 년 전부터 5천 년 전 사이에 물이 말라 메마른 땅으로 변했다. 선사시대 동물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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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다보니 길가에 마호가니로 구운 고기집이 보였다. 저녁때도 가까워오고 고급목재로 구운 고기는 얼마나 맛이 있을까 침을 흘렸는데, 이쪽에도 나무의 결이 아름다운 마호가니가 자라고 있는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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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벨리 서쪽입구를 통과한 후 계곡을 지나면서 이곳은 북미에서 제일 고도가 낮은 지역으로, -86미터 되는 곳도 있습니다.”라는 임목사의 설명을 들을 때는, 인적도 차량도 없는 황량한 어둠 속의 벌판이었는데, 훠니스 크리크(Furnace Creek)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해보니 어둠 속에 유령처럼 파킹되어있는 차량이 얼마나 많았던지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같으면 왁자지껄 했을 캠핑장이 조용하게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우리도 어둠 속에서 소근 거리며 간단한 저녁 준비를 했다.

 

훠니스 크리크는 공원의 서쪽 입구를 통과한 후, 스토브파이프 웰(Stovepipe Wells)빌리지를 지나. 이공원의 허리를 지나는 190번 도로 상의 동쪽에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곳은 붕사공장의 용광로(Furnace)가 이글거렸던 곳이고, 이로 인해 데스벨리가 국립공원으로 탈바꿈하게끔 동기를 부여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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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화장실 옆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세 사람은 늦은 저녁 식사를 허둥지둥 마치고, 사막의 별을 찍는다고 삼각대를 피는 등 수선을 피웠다. 마침 화장실을 찾아가는 주대감의 모습을 보았는데, 화장실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인지, 잠결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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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찍은 별 사진들은 밋밋해 마음에 안 들었고, 찍은 달은 초승달인지, 보름달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처음 찍어본 별 사진이라 당연한 결과였지만, 사전에 별을 찍는 요령을 습득하는 것보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캠핑을 한 것은 아득한 옛날 일이다. 중학교 일학년 때 난생처음으로 청평의 대성리로 캠핑을 떠났는데, 지금 제기역 자리에 있었던 성동역에서 간신히 기차를 잡어탈 수가 있었다. 바로 전에 구입한 꽁치 통조림을 팔에 껴안고 떨어질까 조바심하며 기차 꽁무니에 매달렸었다. 그리고 대성리에서는 그곳에 사는 우리 또래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혼 줄이 났었다. 당시는 농촌인구가 많았을 때이고, 도시이건 시골이건 고만고만한 조무래기들의 텃새가 심했던 시대였다.

 

고등학교 때는 효영이라는 친구와 둘이서 용인에서 여러 번 텐트를 쳤었다. 개구리를 잡아 짓이겨서 개울 바위틈 사이에 넣으면 큰 가재가 덥석 물고는 했었고, 텐트 주위에는 알밤이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들렸었다. 그림 그리기 좋아했던 친구는 살림이 어려워 석고로 성모상을 만들어 팔았다는데,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다.

 

대학교 때는 무거운 군용 삼각배낭과 텐트를 짊어지고 비교적 높은 산을 다녔다. 한번은 백담사 내설악으로 해서 대청을 올랐었다. 하산하여 속초항에서 얼쩡대다 고깃배에서 하역작업 중이었던 손수레와 부딪쳐 명태 세례를 받았었다. 바지엔 한동안 비린내가 진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많던 명태는 지금 다 어디로 갔는지. 그 이후로는 빡빡한 사회생활에 쫓기다보니 텐트를 치고 자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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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처음 경험하는 사막의 아침은 아름답고 상쾌했다. 하늘에는 파란 색과 연한 갈색이 제멋대로 요술을 부리고 있었다. 사막의 아침을 찍는다고 나다녔는데, 그 아름다움에 황홀할 뿐이었다.

 

데스벨리공원은 모하비사막 북쪽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사막이란 보통 305미터(1천 피트) 정도의 고지대에 연 평균 강수량이 250미리 이하이고, 산과 숲, 대초원과 모래벌판으로 이루어진 곳을 말한다. 따라서 인적이 드물고 종려나무로 둘러싸이고 온통 모래뿐인 사하라 사막 등과는 그 의미가 틀리다.

 

모하비는 사막에 살고 있는 모하비인디언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지만, 넓이는 57천 평방키로 미터, 남한의 절반 보다 크다. 캘리포니아 주 동부를 남으로 달리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로스앤젤레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샌가브리엘 산맥 그리고 샌베르나디노 산맥에 둘러싸인 산악 분지이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 주에 걸쳐 있다. 라스베이거스는 모하비사막 가운데 있는 도시이고, 지금은 폐광촌이지만 갤리코 은광 촌도 이곳에 있듯이 모하비사막은 철, , , 중석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사막 지하에는 영혼의 강, 모하비강이 흐르고 있다. 바다로 흐르지 않는 강이다.

 

당시 사막의 광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독사에 물려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막의 원주민에게는 파란색이 뱀을 쫓는 영험한 힘이 있다는 민간신앙이 있었는데, 리바이(Levi Strauss)는 이를 이용하여 누런 천막 천에 푸른색을 물들이고 청바지를 만들어 팔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청바지에 붙어 있는 가죽 라벨은 원래 천막을 지탱하는 줄이나 기둥을 고정시키기 위해 붙여놓은 가죽라벨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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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 우리는 또 하루의 아름다운 날을 기대하며 한 그릇의 해물국수를 들었다. 어떻게 보면 먹는 것이 부실하다고 볼 수 있는데도 왜 그렇게 음식이 맛있었는지. 여럿이 식사를 하다보면 그러하지만, 방문했던 곳의 매력에 푹 빠졌던 모양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길 떠난 차량이 많았고 주위는 썰렁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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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강우량은 40미리 내외에 불과하고, 여름철 평균기온이 45도를 넘지만, 봄에는 화려한 야생화 천국이고, 가을에서 봄 사이에는 기후가 쾌적하여 피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번 찾으면 그 매력에 빠져 다시 찾는 국립공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더운 여름철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말 못할 정도로 고생을 하는 모양이다. 임목사도 우리가 방문한 시기가 시월초임에도 불구하고 더운 시간대를 피하려고 방문시간, 출발시간에 대해 신경을 썼다, 다행히 더위를 겪지 않았지만. 이곳의 여름철 최고 기온은 58, 겨울 최저기온은 5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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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벨리공원의 길이는 220키로 미터. 너비는 6-25키로 미터이며, 면적은 경기도의 10분의 8이나 된다. 알래스카를 빼고는 북미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이다. 미국사람들은 데스벨리공원을 가장 덥고, 건조하며, 낮은 곳으로(Hottest, Driest, Lowest)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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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니스 크리크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는 어제 어둠 속에서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달리니 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떤 사람들은 파스텔 톤으로 표현했지만, 맑은 하늘에 어울리는 선명한 색들이 우리의 마음을 홀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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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뿐인 사막과는 달리 다양한 색들의 퍼레이드가 계속되었다.

 

요즈음도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인기가 있는 생떽쥐베리(Saint Exupery, 1900-1944)어린 왕자가 연상되었다. 높은 산에 올라 안녕, 안녕하고 어린 왕자가 인사를 하여도 대답이 없고 공허한 메아리만 되돌아오는 대지. 몹시 메마르고 소금이 버적거리는, 게다가 사람들은 상상력도 없이 남이 하는 말을 되내기나 하는. 왕자의 집에 있는 꽃은 말을 먼저 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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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한곳을 보니 새파란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파란 부분은 실제로는 빛의 조화로 생긴 음영이라고 했다. 건조한 대기에 하늘이 반사되어 환상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신비로운 곳에의 여행임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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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시원하게 뚫린 도로의 양 옆에는 짚단을 낮게 쌓아놓은 모양의 관목들이 나타났다.

악마의 옥수수 밭(Devil's Cornfield)이다. 악마의 세상도 구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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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스토브파이프 웰 빌리지(Stovepipe Wells Village)에 못 미쳐 메스퀴테 모래사막(Mesquite Sand Dunes)에 도착했다. 이곳의 일출 일몰이 무척이나 장엄하다는데, 이를 못 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데스벨리 공원에서 모래언덕이 차지하는 것은 1% 미만으로 미미하다.

모래언덕(Sand Dune)이 생성되려면 모래의 원료, 바람, 그리고 집적 장소가 있어야 되는데, 메스퀴테 사막의 원료는 사막의 남쪽에 있는 터키산(Tucki Mountain)에서 날려 온다고 한다. 이곳의 모래사막은 광활하지는 않지만 여러 면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고, 또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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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막 입구에는 죽은 메스퀴테(Mesquite)나무가 널브러져 있고, 살아있는 조그만 나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물론 사막의 이름도 이 나무에서 왔고. 이 나무들은 콩과에 속해 있는 식물로 보기와는 달리 50미터 넘게 깊게 뿌리를 내리지만, 높이는 2-3미터 정도 밖에 안 자란다. 수명은 놀랍게도 200년 이상이나 되는데, 이들은 야생의 동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 주고 있다.

 

서양 사람들이 발붙이기 전에 이곳에는 쇼숀(Timbisha Shoshone)족 인디언이 살았는데, 그들은 주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외에 메스퀴테 나무의 열매(Mesquite Beans)와 피니온 소나무(Pinyon Pine Tree)의 열매(Pine Nuts, Indian Nuts)를 채취하며 생활을 했다. 그들은 생계와 직결되는 이곳을 매우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고 한다.

 

데스벨리공원 서남쪽에는 쇼숀(Shoshone)이라는 타운이 있는데, 그곳에는 아직도 이들 인디언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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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스퀴테 사막의 모래언덕 위로는 구름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지만, 이곳은 무언가 죽음의 촉감도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욕심은 금물이다.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Sacramento)냇가에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있자, 1849년부터 골드러시가 이어졌다. 1849년 골드러시 당시, 황금을 찾아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일부는 살아 돌아가지 못했고, 일부는 고생을 하다 겨우 빠져나갔다. 이때 같이 왔던 노새의 후손들이 야생화 되어 이곳을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란 이름도 생겨났고.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노래, 영어 가사 속의 클레멘타인 아버지는 어부가 아니라 1849년에 황금을 찾아 떠났던 훠티나이너즈(Forty-niners)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의 역사를 1492년 아메리카 발견에서 1776년 미국 독립까지의 개척기, 독립에서 남북전쟁(1861-65)까지의 성장기, 합쳐진 연방국에서 20세기 강국이 되기까지의 도약기, 강국이 된 이후(1901-)로 나눈다면, 1849년은 1846년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영토가 태평양까지 확장되는 성장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모래사막의 입구에는 1900년대 이곳에서 죽은 사람의 무덤사진을 넣은 빨간 경고판이 붙어 있다. 이곳의 더위와 열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Heat Kills)는 경고 문구를 넣었고, 물은 충분히 마시고, 더위 속 하이킹은 하지 말라고 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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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촉감이 느껴지는 이곳 사막이지만, 바람이 만든 이 부드러운 언덕 한쪽에서는 사랑이 익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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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람들은 이곳에 무수한 족적과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지만, 바람은 새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이 족적들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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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스퀴테 사막에는 어린왕자의 독백이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늘 사막을 사랑했었어.

너도 모래언덕에 앉아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하지만 뭔가 빛나고 있어.

뭔가 고요함 속에서 흥얼거리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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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다시 떠나 크라우리신부 전망대(Father Crowley Vista Point)로 가는 길, 산들은 색깔 뿐 아니라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한마디로 형형색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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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어린 왕자가 길들였던 여우가 나타났다.

처음 여우가 왕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 길들여지기를 청했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내 생활은 해가 돋은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나는 어느 발소리하고도 틀린 발소리를 듣게 될 거야.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난 빵을 안 먹어. 그래서 밀밭을 보아도 내 머리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그렇지만 네가 나를 길들이면 금빛깔이 도는 밀을 보면 네 머리를 생각할 거야. 그리고 밀밭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좋아질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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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는 길들여진 여우가 어린 왕자와 작별 인사를 하는 날이 왔다.

 

내 비밀을 알려줄게.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네 장미꽃을 위해 허비한 시간 때문에

네 장미꽃이 그렇게 까지 중요하게 된 것이야. “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정찰비행 중 행방불명된 생떽쥐베리는 진정한 의미의 삶은 개개 인간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정신적 유대에 있다고 보았다.

 

데스벨리의 동식물은 극한의 자연에서도 생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포유동물 51, 조류 307, 도마뱀 36, 어류 5종 그리고 1,000종이 넘는 식물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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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이 형형색색의 산들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가을하늘과 단풍의 어울림도 아름답지만, 이곳의 색다른 조화는 잊지 못 할 것 같다. 구름의 유희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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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1,500미터 까지 이르는 타운패스(Towne Pass) 위를 달려도, 달려도 질리지가 않았다. 어제 어둠 속에 달렸던 길이었지만, 이렇게 멋진 길인지 상상도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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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계곡의 밑바닥은 두꺼운 소금 층이 깔려 있고, 이곳에서는 특수 타이어(Heavy Duty Tire)를 부착해야 차가 다닐 수 있다.

 

나를 묶었던 끈과 바닥짐은 이미 내게서 떠나갔다.

나는 산맥을 에워싸고 내 손바닥도 대륙을 덮는다.

나는 내 비전과 함께 걷고 있다.

 

롱아일랜드 출신,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2-92)의 시집 풀잎(Leaves of Grass)’에 나와 있는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의 일부분이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이다. “지구상의 어떤 시기, 어떤 나라 중에서도 미국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본질적으로 가장 위대한 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아마 이러한 넓고 멋진 대륙을 보고 그는 미국은 위대한 시라고 했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온 선구자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들로 북적대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땅, 미국의 영원한 이미지를 그는 창조했다.

 

이 장엄한 미국의 자연은 정말로 위대한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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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리(John J. Crowley, 1891-1940)신부의 이름에서 따온 전망대에서 본 황야. 두 사람은 넋을 잃고 있었다.

 

전망대 아래 계곡에는 무지개가 떠있지 않았지만, 계곡 이름은 무지개 계곡(Rainbow Canyon)이다. 윌리엄 히트문의 여행기 중에 사막에 대해 이러한 말이 나온다.

 

사막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으며

보금자리를 찾는 인간의 본능을 조롱하고

인간이 이룩한 건설을

한 없이 보잘 것 없고 덧없이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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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반문명주의자 에드워드 애비는 황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황야(Wilderness)라는 말은 향수를 일으킨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알았던 잃어버린 아메리카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만은 아니다. 황야라는 말은 과거와 미지의 세계, 우리 모두의 고향인 대지의 자궁을 암시한다. 그것은 잃어버렸으면서 아직 있는 어떤 것, 동시에 아주 가까이 있는 어떤 것, 우리 피와 신경에 묻힌 어떤 것, 우리를 초월한 어떤 것을 뜻한다. 우리가 흘려버려서는 안 될 낭만을 뜻하기도 한다. 황야에 대한 사랑은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증 이상의 것이며 지구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지구는 우리의 유일한 고향이며 필요로 하는 유일한 낙원이다. 원죄는 탐욕 때문에 우리 주위의 자연이란 낙원을 맹목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문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야생의 세계, 원시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생명과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며 문명 자체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이다.”

 

무지개 계곡은 여인의 브라자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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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여 보석 같은 색들의 바위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 색들의 원천은 광물질이다. 구리는 녹색, 철은 붉은 색, 망간은 보랏빛을 품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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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다시 동쪽으로 되돌아가는 길, 올 때의 오르막은 내리막이 되었다.

이렇게 멋진 데스벨리의 풍경을 한 번 더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행운이었다. 행운이라기보다는 임목사가 좋아하는 길이기에, 아니 밤에 왔던 길이니까 다시 올 수밖에 없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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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오는 차량들은 거의 빠짐없이 라이트를 번쩍거리며 지나갔다. 졸음 오는 운전자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에너지를 절약하려는 생각에서인지, 기본 습관이 잘못되어선지, 비 오는 날에도 라이트를 키지 않는 차량이 많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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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루 텐트를 쳤던 훠니스 크리크로 돌아오니 훠니스 크리크 인(Furnace Creek Inn)이 눈에 보였다. 태평연안 붕사회사(Pacific Coast Borax Company)1927년 개장한 숙박시설이다.

 

붕사생산의 초기였던 1880년대, 이곳 근처에 있었던 하모니붕사공장(Harmony Borax Works)에는 20마리 노새(Twenty Mule Team)가 있었다. 이 노새들은 철도 수송과 연계하기 위해 공장에서 생산된 붕사를 이곳에서 260키로 미터 떨어진 모자브까지 수송했었다.

 

1970년대 붕사가 세제의 원료로 쓰이자 붕사는 사막의 하얀 금으로 불릴 만큼 인기가 솟았다. Twenty Mule Team으로 이름 붙인 세제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관련되어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은 주변의 데스벨리 풍경에 매료되었다. 서서히 이곳이 관광단지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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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니스 크리크를 지나자면 고도가 제로인 팻말이 나온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고도가 -86미터, 길이가 855미터인 배드워터(Bad Water)가 있다. 북미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이곳에서 불과 100키로 떨어져 있는 곳에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휘트니산(4,421미터)이 있는 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곳은 아주 옛날에는 호수였는데 지각 변동으로 물이 갇히고 증발하면서 넓은 소금밭이 되었다. 이 짜디짠 배드워터에도 사는 고기가 있다고 하니, 생명은 참 대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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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니스크리크에서 조금 동남쪽으로 가면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가 있다. 태평연안 붕사회사에서 36년 근무하고 1933년에 퇴사한 자브리스키(1864-1936)의 이름이 붙은 전망대이다. 데스벨리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기 시작한 관광지인 셈이다. 이곳에는 20마리 노새 캐니언(Twenty Mule Team Canyon)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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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에 갔다 오는 길에는 멋진 미녀가 멋진 풍경을 관광하고 있었는데, 남쪽을 보면 화가가 파란 물감 등을 개어놓은 것 같은 화가의 팔레트(Artist's Pallet)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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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벨리 국립공원 지도)

 

데스벨리 공원지도에서 우리의 행적을 보면, 서쪽으로 진입하여 190번 도로를 타고 훠니스 크리크까지 와서 숙박을 하고, 다시 한 번 서쪽 끝까지 왕복한 다음, 훠니스 크리크에서 자브리스키 포인트를 거쳐 동쪽 입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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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원의 동쪽 문을 나와 데스벨리에 안녕을 고했다.

당초 계획했던 와이오밍주의 옐로스톤 대신에 이곳을 방문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말 최상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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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벨리와 관련하여 꽃과 사막을 그리는 추상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의 그림이 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 야생화가 만발한 데스벨리를 다시 찾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녀는 유명한 사진작가 스티그리츠(Stiglitz)의 아내이며 모델이었다. 생의 후기에 뉴멕시코의 산타페로 이주하여 붉은 계곡과 야생화를 주로 그렸다. 그녀가 한 말도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다.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너무 작아서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무엇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그녀의 말대로 사막의 꽃들은 너무 작아 우리가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스티그리츠의 누드모델로 서기도 하여 세간에는 그녀가 이용만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던 것 같으며 사실 그러한 사진들 중에는 남성들에게 상당히 고혹적인 것들이 많다.

 

그리고 출렁이는 바다, 우람하게 솟은 산, 조용한 사막을 비교한 에드워드 애비의 글도 흥미롭다. 장엄함, 색채, 광대함, 오래되고 원초적인 것의 힘, 인간이 완전히 파악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이런 특질을 바다, , 사막 모두 가졌다.

 

바다의 다른 쪽에 도착했을 때는 떠난 해안에 있던 것과 같은 모든 것을 발견할 뿐이다. 항해하는 동안에도 단지 단조로운 바다와 텅 빈 하늘을 볼 뿐이다. 바다의 가장 호소력이 있는 부분은 그것이 육지와 만난다는 것이다.

 

산은 오른 다음에는 다시 내려가는 일이 있을 뿐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차츰 더 우호적이고 편안하고 인간적인 환경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 낯익은 것들이 우리를 안심시켜 준다.

 

사막은 다르다. 산봉우리처럼 적대적도 아니고 대양의 표면처럼 광대하고 단조롭지도 않다. 인간이 살기에 적절치 않으나 강인하고 교활한 동물들이 간혹 살고, 식물도 끈질기고 이상한 돌연변이종들만 뿌리내리고 있다. 인간의 감성이 적응할 수 없는, 지금까지 적용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이 있다. 여러 해 동안 접한 후에도 낯설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막은 끝없이 사람을 유혹한다. 사막 어디엔가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이끌려 탐험에 나서고, 유혹에 빠져 평생 사막을 헤매게 된다. 사막은 신비의 베일을 쓰고 있다.

 

데스벨리를 떠나면서도 아쉬움이 남았던 것은 이러한 사막의 특질 때문이었던가 보다.

 

 

 

3.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장대한 그랜드캐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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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다 주에 있는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길, 또 설산이 우리를 안내했다. 네바다는 말 뜻 그대로 흰 눈이 덮인 설산이 있어야 제격.

 

오후 2시를 지나 네바다 주로 진입했다.

네바다 주의 대부분은 고원과 산지이다. 넓이는 캘리포니아의 2/3정도로, 남한의 3배나 되는데, 인구는 고작 2.8백만 명이다. 강수량 500미리 미만이지만, 겨울에는 눈이 많아 스키가 성행한다. 멕시코와의 전쟁이후 미국령이 되었고, 최대산업은 관광산업이며, 도박에 대한 세금이 정부기관의 주 수입원이다.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소, 양의 방목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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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나 처음 만난 다운타운의 맥도널드에 들려 점심으로 햄버거를 들었다. “Four hamburg, please"하며 주문할 것을 ”Hamburg four"해서 못 알아들었는지, 콧대가 세어서인지 예쁘장한 여종업원은 대꾸가 없었다. 해외에선 맥도널드가 미 대사관이라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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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길에는 잿빛 산들이 계속 나타났고, Ash Meadow ash자가 붙은 지명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잿빛은 네바다 주의 색인가 보다.

 

데스벨리를 떠난지 2시간 반,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하여 룩스호텔에 자리를 잡은 후, 뷔페식 호텔 식사를 했다. 간이식 식사에 익숙해져서인지 내 입맛이 그래선지, 호텔음식은 차에서 먹은 자장밥보다 맛이 없는 것 같았다.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들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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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밤거리로 나서기로 했는데, 호텔이 하도 커서 촌놈들이 도시에서 길을 찾듯이 호텔 안에서 헤매다보니 여섯 명이 모이는데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이곳에 오기까지는 한적한 공원으로만 돌다보니 남북으로 6.8키로나 길게 뻗은 번화가인 스트립(Strip)은 다양한 테마호텔로 눈부시게 휘황찬란했다. 누구는 죄의 도시(Sin City)라고 좋지 않은 평을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넘쳐났다. 멋쟁이, 거지, 한량, 흰둥이, 검둥이 등. 벨라지오호텔로 가는 길은 멀기도 했다, 우리가 헤매기도 했지만 지쳐있어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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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의 황제라 불리며 현재도 활약 중인 윈리조트 회장, 스티브 윈은 벨라지오호텔에서 고가 미술품을 전시하여, 이 호텔 뿐 아니라 라스베이거스 전체의 격을 높였다고 한다.

 

이 호텔 앞에서 벌어지는 분수 쇼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15분마다 쇼가 진행되고 음악과 분수의 형태도 그때마다 틀려졌다. 우리는 운집해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의 어깨 너머로 분수의 곡예를 보았다.

 

쇼는 곧 허망하게 끝났고 지친 발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와서 환타시(Fantasy) 쇼를 보았는데, 환상에 젖어보지도 못하고 1인당 65불의 입장료를 아까워했다. 옛날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쇼. 희멀건 긴 다리를 번쩍 들었다 내렸다 하는.

 

이날은 늦게 호텔방에 돌아와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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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109일 아침, 눈을 떠보니 호텔 밖에 늘어선 황금색으로 물든 야자수는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라스베이거스는 모하비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도시임에도 이름 자체는 스페인어로 초원이라는 뜻이다. 1829년 라파엘 리베라가 미국 중부에서 LA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 오아시스를 발견했고, 라스베이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주민만 살던 이 오아시스에 한때 모르몬교도들이 정착촌을 세웠으나 인디언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고, 1905년 유타 주의 주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LA로 이어지는 철도가 놓이자, 이 도시는 번성하기 시작했다.

 

1931년 주정부는 이곳의 도박을 합법화했는데, 때맞춰 1936년 후버댐이 완성되자 도박장들은 대박이 났다. 라스베이거스가 도박천국이 되도록 주춧돌을 놓은 사람은 뉴욕의 마피아였던 벅시 시걸이다. 이곳이 마피아의 소굴이 되자, 60년대에 정부가 마피아를 단속하였고, 미국의 전설적 갑부, 하워드 휴즈가 호텔을 사들여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휴양시설을 만들고부터 라스베이거스는 건전한 도시가 되었다.

 

또 이곳은 방위산업과 쉬운 이혼절차로도 이름 난 도시이다. 라스베이거스 북쪽 사막에서 50년대부터 40여 년 간 핵무기 실험을 하였다.

 

최근 경기가 침체하자 이곳도 어려워져, 다양한 행사의 유치 등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으며, 도박장의 승률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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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감과 아침 산보를 나서니 사막의 아침은 청명하고 눈부셨다.

전날은 벨라지오호텔 가는 길 안내를 잘 못 알아들어, MGM 사거리에서 엄청 헤맸었다.

파란 하늘과 선명한 거리의 색깔은 어제의 일들을 말끔히 쓸어버렸다.

 

데스벨리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는 189키로 미터. 두 시간 반의 거리이다.

엘에이에서 이곳에 오려면 모하비사막을 건너야 하는데, 교통의 요지, 바스토우(Barstow)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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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른 시각이라 거리는 한산했지만 좋은 사막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여러 번 마주쳤다. 날씬한 미녀도 지나가고, 짧은 머리의 젊은 친구도 지나가고. 사막이라지만 운동하기에도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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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가 스트립을 한 바퀴 돌고 오니 만다레이 베이(Mandalay Bay)호텔 바로 옆에는 우리가 하루 밤을 보낸 룩소르(Luxor)호텔이 있고, 그 정면에는 이집트의 스핑크스가 오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 식당 델리에서 주대감이 합세하여 간단한 조식을 들었는데, 간단한 식사 3인분에 82, 싼 편은 아니었다. 어제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아직도 방에서 쉬고 있는 친구들을 위해, 편의점에서 과일 봉지를 몇 개 사서 방마다 돌렸다. 과일 맛은 건조한 지방에서 생산되는 과일이라 그런지 달콤하고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리고는 임목사가 차를 수리하는 동안 퇴실수속을 밟았는데,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 옷차림, 몸매, 그리고 각양각색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는 것도 심심치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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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수리가 끝나고 한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운암정에서 모처럼 뚝배기 음식을 들고, 슈퍼에서 여행 도중 필요한 식품, 술꾼들은 주류를 구매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근육통 파스, 바이오후리즈(Biofreeze)를 구매했다. 미국이 약값은 싸다고 해서, 동네 한의원에서 팔고 있는 것을 안사고 일부러 이곳에서 산 것인데, 약값은 그게 그거. 국내산 파스의 서너 배 비쌌지만, 여행 도중 요긴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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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를 떠나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는 길에 들린 전망대에서는 블랙캐니언과 모하브 호수가 보였다. 이 호수의 물은 흘러 흘러 미드호(Lake Mead)로 흐르고 결국에는 후버댐에 갇히게 된다.

 

블랙캐니언은 콜로라도 주 서부의 로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콜로라도강의 지류, 거니슨 강이 흐르는 협곡이다. 길이는 80키로로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미국에서는 이 협곡만큼 폭이 좁고 양쪽 절벽이 가파른 곳이 없다고 한다. 햇빛이 잘 비치지 않아 블랙캐니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는 마호가니, 폰데로사 소나무, 향나무 등이 자라고 있고, 암벽 등반, 카약, 래프팅 전문가들의 천국이다.

 

미드호는 1937년 그랜드캐니언을 흐르는 콜로라도강 하류에 건설된 후버댐의 완공으로 태어났으며 그때의 공사감독관 엘우드 미드(Elwood Mead)에서 이름을 따왔다, 미드호는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고 있다.

 

드디어 콜로라도 강을 거꾸로 오르는 여행은 시작되었다.

콜로라도는 스페인어로 붉다는 뜻. 홍하의 계곡을 흐르는 강, 계곡도 붉고, 강물도 붉고. 그 위를 비추는 해도 붉고, 황혼도 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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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네바다에서 애리조나로 진입했다.

카우보이 애리조나 카우보이, 황야를 달려가는 애리조나 카우보이--’

 

애리조나는 인디언말로 작은 샘이라는 뜻을 가졌다. 스페인어로 건조한 지역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곳에 들어서니 풍광이 틀려졌다.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는 황량한 잿빛 산에서 보기 좋고 아담한 산들이 어우러진 풍광으로 변했다. 이곳 사람들 말로는 산 도적에서 건장하고 잘생긴 사나이로 변신했다고 한다. 주의 경계를 지날 때마다 변하는 풍광은 딴 세계로 들어선 느낌을 갖게 했다.

 

애리조나 주는 48번째로 미국의 주가 되었다. 중북부는 네바다와 같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고, 남부는 이들로부터 구입하였다. 크기는 네바다와 비슷하지만, 인구는 두 배가 넘는다. 네바다보다는 살기 좋다는 이야기다. 주의 대부분이 고원과 평지이며 산림은 27%이다. 관광, 광업, 농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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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산과 황금벌판, 어디에선가 인디언의 북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저 멀리 인디언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 넘어 주막집에---’

 

명국환의 애리조나 카우보이는 외래 정서에 놀아난 노래라고 하지만, 우리가 서부영화를 즐겨볼 때 즐겨 부른 흥이 나는 노래이다. 인디언의 북소리가 서부활극에서 자주 들렸기도 하고.

 

우연히 인디언 출신 존 헐링(John Huling)의 산의 숨소리(Breath of the Mountain)란 인디언 풀룻 연주곡을 들었는데, 북소리, 풀룻 소리 그리고 바람소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 음악이었다. 인디언의 비애가 느껴지기 보다는 무언가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인디언의 북소리는 명국환의 애리조나 카우보이의 경쾌함과는 거리가 있는 소리였다.

 

요즈음의 카우보이들은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초기의 역사에서는 적수였던 그들은 마침내 길동무가 되어 서부신화의 황혼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축산업의 기계화, 자동화로 카우보이들은 실직 중이거나, 그 위험에 빠진지 오래다. 진짜 카우보이는 진짜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고 있는 반면, 가짜 카우보이들은 밥상에 꾀는 파리 떼처럼 늘고 있다 한다. 커다란 하얀 모자와 몸에 꼭 끼는 바지, 꽃무늬 셔츠, 굽이 높은 부추 차림의 가짜 카우보이, 걸들이 미시시피 서쪽 작은 도시들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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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는 인디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인디언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고상한 인디언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악한 인디언으로 다가온다. ‘16세기 유럽의 양심이라고 평가받는 라스카사스(1474-1566)는 스페인 출신 신부로, 인디언의 열악한 처우에 분노했던 사람이다. 그는 인디언을 지상낙원에서 암소들처럼 온순하게 살던 꾸밈없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또 헨리 데비드 소로우는 땅에 경계선을 긋거나 나누지 않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인디언의 지혜라고 표현했고.

 

반면에 홀름버그는 인디언을 행위의 주체가 결여된 야만인이라고 표현했고, 밴크로프트는 이들을 게으름의 결과라고 비하했다.

 

이들의 조상은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3천 년 전에 베링해협을 건너 왔다고 한다.

그리고 칠레 남부에는 12천 년 전 사람이 살았으며, 칠레에 33천 년 전의 인공물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석기 이전에 이들의 조상이 대륙에 도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인디언들의 눈에 서양인들은 어떻게 비춰졌는지를 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수족 인디언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인디언 방식으로 성장한 전사이었으나, 아버지에 의해 백인사회에 입문하여 의사이며 작가가 된 오히예사가 쓴 자서전, ‘인디언의 영혼(The Soul of Indian)'에 나오는 글이다.

 

얼굴 흰 사람들은 노예를 부린다. 하인들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그들의 몸에 검댕이 칠을 해놓은 것 같다. 그들은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따지고 끝까지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긴다. 그들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전투할 때도 졸병들만 영양 떼처럼 내몰아 전투를 벌인다. 졸병들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싸움터에 나온다. 그래서 우리 인디언들은 그들을 물리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우리 인디언들과 사뭇 다르다. 얼굴 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진리에 대해 말하고, 진리가 적혀있는 책을 늘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세상에 그들만큼 진리와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자들도 없다. 우리에게는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진 삶은 곧 죽음이다.” 글의 내용을 보니, 우리의 행동거지도 영락없는 얼굴 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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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산하에 어둠이 슬슬 밀려왔다.

우리는 7시에 애쉬 훠크(Ash Fork)근처 개인 캠핑장에 도착하여 자리를 폈다. 이날 자릿세는 50. 국립은 보통 20-25불이고, 사립은 보통 150불이라니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새벽의 땅, 뉴잉글랜드 해안에 서구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인디언을 중남미의 왜소한 사람들과는 다른 건장하고 영양상태가 좋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인디언은 신비로운 존재이면서 위험한 실재적 적이었다. 이때 신대륙의 지원자들의 지원동기를 보면 재미있다. 원시림과 아름답고 재빠른 인디언 아가씨, 출세해보려는 욕망이 지원동기였다고 하니. 1492년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 당도했지만, 1614년이 되어서야 유럽인들은 인디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620년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마사추세츠에 도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의 태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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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보기 좋게 노란색으로 물들은 애리조나의 아침이 찾아왔다.

 

애리조나 인디언들은 아나사지, 호호켐, 모골론 문명을 개발하며 살았는데, 역사는 10천년으로 본다. 특히 호호켐족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관개시스템을 건설했다고 한다. 아파치, 나바호족은 이곳의 토박이들이 아니라 1540년 스페인들이 오기 바로 전에 애리조나로 이주한 인디언들이다.

 

아파치족의 치열한 공격으로 스페인 이주자들은 애리조나 남부와 멕시코 북부를 흐르는 산타크루즈 강(River Santa Cruz)유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75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페인 군사주둔지가 진출했고 진흙에 식물섬유를 이겨 만든 어도비 벽돌로 된 요새를 지었다. 아파치족은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하고, 1846년 미국과 멕시코와의 전쟁이 끝난 후인 1886년에서야 항복을 한 대단한 인디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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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마차나 말을 타는 대신 RV를 타고 뻥 뚫린 애리조나의 하이웨이를 달렸다.

상상의 말채찍을 말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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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애리조나 주의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447키로 미터, 5시간 거리이다. 하이웨이 93번을 타고 남으로 애리조나 킹맨까지 달리고, 다시 40번을 동으로 달려 윌리암스까지, 이곳에서 하이웨이 64번을 타고 북으로 달리면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하게 된다.

 

길 찾기는 내비를 이용하면 쉬울 것 같지만, 한번 잘못하여 길을 지나치면 수십 키로 돌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지도를 보면서 계획을 세우고 꼼꼼히 도로표지판을 살피며 운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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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은 20억년 형성된 지구의 역사이다. 존 뮤어(John Muir)는 그랜드캐니언은 사람이 죽은 후에 딴 세상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며, 그 색상과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망망대해에 바닷물에 밀려온 침전물 등이 사암, 석회암으로 변하고, 해저가 솟으면서 콜로라도 고원이 만들어졌고, 또 콜로라도 강이 그 표면을 깎고 고원이 잘리는 등 오랜 동안 자연이 만든 결과물이 그랜드캐니언이다.

 

그랜드캐니언은 445키로 미터의 협곡이며 깊이는 1,500미터, 아열대부터 한대까지의 기후 권을 갖고 있다. 공원 넓이는 요세미티와 비슷하다.

 

이곳의 사우스 림(South Rim)과 노우스 림(North Rim)과의 직선거리는 16키로 미터도 안 되지만, 돌아가려면 900키로 미터도 넘는다. 그랜드캐니언은 1869년에 포웰(John Wesley Powell)소령의 탐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포웰소령은 그의 고전적 탐험기, ‘콜로라도 강과 그 협곡 탐험에서 그랜드 캐니언은 형태와 색깔과 소리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간직하고 있다. 그 형태는 산의 그것을 능가하고 색깔은 석양의 색깔에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태풍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폭포에서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샘에 이르는 온갖 음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랜드 캐니언은 한눈에 전모를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커튼을 걷어 올리면 볼 수 있는 장관이 아니다. 그 전모를 보려면 몇 달에 걸쳐 미로를 섭렵해야 한다. 이 협곡을 가로지르는 것은 알프스나 히말라야를 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지만 그럴 힘과 용기와 있다면, 1년간의 수고로 천국 못지않은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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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아버츠 다람쥐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공원에는 두 종류의 다람쥐가 있다. 아버츠 (Abert's Squirrel)다람쥐는 몸의 색이 회색과 갈색이 섞이어 있는 반면, 카이밥 다람쥐(Kaibab Squirrel)는 갈색 몸통에 꼬리가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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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돌아보자니 낭떠러지로 돌출된 바위 위에서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던 젊은 친구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우리도 그곳으로 힘들게 건너가서 차례로 사진을 찍었다.

 

(A Showery Day Grand Canyon Thomas)

자연을 사랑했던 영국태생의 미국화가, 토마스 모란(Thomas Moran, 1837-1926)의 그랜드캐니언 그림을 보면, 당시에는 강물이 풍부했었던 모양이다. 모란은 주로 그랜드캐니언과 서부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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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산맥에서 발원한 콜로라도 강은 수많은 계곡, 특히 장대한 그랜드캐니언을 침식시켜 온 힘의 대명사인 동시에 미국인들에겐 향수에 젖어 부르는 노래의 주제이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은 마음 그리워 저 하늘--’, 우리에겐 귀에 익은 노래이며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길을 홀로 걷는 나그네의 쓸쓸함을 잘 표현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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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 사이에 그랜드캐니언은 일생에 꼭 한번은 찾아보아야 하는 경이로운 세상이며,

매년 3백만 명 이상이 찾는 그랜드캐니언은 애리조나 주의 큰 수입원이며 보물이다. 이곳에는 기차, 비행기, 버스는 물론 노새, 콜로라도 강을 헤치고 나가는 고무보트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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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두 시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처음으로 트래킹다운 트래킹을 했다. 빛나는 천사 트레일(Bright Angel Trail)의 길이는 12키로 미터, 위에서 밑바닥까지의 높이는 1,360미터나 된다, 내려가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린다. 8백여 년 전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살았던 하바수파이(Havasupai)부족이 물을 찾아 강가로 내려간 것이 이 트레일의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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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만만치 않아 모두들 힘들어 했다. 올라오는 길목에서 한 무리의 앙케이트 조사자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트레킹을 하는데 얼마의 물이 필요한 지 등을 묻고 있었다. 장난삼아 응했다가, 질문이 얼마나 세밀한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문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얼떨결에 임목사에게 역할을 넘겨버렸다.

 

길 곳곳에는 나귀 똥이 군데군데 무대기로 쌓여 있었다. 짐을 나를 때나 힘들 때는 나귀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전에 중국의 차마고도(車馬高道)를 갔을 때 나귀 신세를 한번 졌었는데, 힘들어 하는 나귀한테 미안했을 뿐 아니라, 나귀를 타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엉덩이는 아팠고 몸의 균형을 잡기가 보통 어렵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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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저트 뷰를 가는 도중, 진흙 목욕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순록들을 만났다. 순록은 추운 지방에 사는 동물로 아는데 말이다. 북미에 사는 순록은 캐리부(Caribou)라 불린다. 일부 주에서는 늑대 때문에 순록 개체수가 줄어들자, 늑대 소탕 작전을 폈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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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저트 뷰에 도착하여 전망대(Desert View Watchtower)에서 내려다보니, 애리조나 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아담한 산이 보였다. 시다 산(Cedar Mountain)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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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안을 들어가니 인디언들의 작품들이 수수하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동남쪽으로 100키로 정도 가면, 우팟키 준국립공원(Wupatki National Monument) 안에 인디언의 집단거주지가 있다. 또 애리조나 북부에는 몬테주마 준공립공원(Montezuma Castle National Monument)안에 12세기 시나구아(Sinagua)인디언 주거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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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의 일정을 마치고 페이지로 향하여 가는 길, 그랜드캐니언을 흘러내리는 콜로라도 강은 비록 계속된 가뭄으로 형편없이 메말라 있었지만. 원시의 황색을 보이며 흐르고 있었다. 콜로라도의 본색, 본래의 모양을 보이며.

 

콜로라도 강의 협곡지대는 강에 가까워질수록 더 건조해지고 더 황량해져서 사람 살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모여드는 도시가 강가에 자리를 잡기 마련인데, 유타 주 모압에서 캘리포니아 주 니들스까지 1,600키로 미터 흐르는 동안 강가에 도시가 하나도 없다. 도시만 없는 것이 아니라 식물도 잘 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저지대가 고지대 보다 강우량이 적고, 많은 양의 물이 가파른 협곡을 통해 단시간에 빠른 속도로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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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곡의 황금색 단층은 너무 눈부셨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이런 장대한 황금색 홍하의 골짜기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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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자연은 황홀하기 까지 한데 그 주인들이 사는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이곳에 있는 기념품 가게를 한 군데 들렸지만, 물건은 초라하고 인사조차 없는 그들에게서 친근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일전 친구 아들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는 젊은 목사가 인디언의 아름답고 긴 시구를 읊어주었을 때 하객들과 함께 얼마나 감명 깊게 들었는지 모른다.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아서 그랬을 것이다.

 

 

4. 글랜캐니언 국립휴양지, 홀스 슈 그리고 앤티롭캐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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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을 떠나 2시간 40분을 달려 애리조나의 북쪽 끝에 있는 페이지(Page)에 도착했다. 216키로 미터의 거리이다. 그랜드캐니언에서 64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카메론(Cameron). 여기서 89번 하이웨이를 북쪽으로 달리면 페이지이다.

 

저녁 늦게 도착하여 피자헛에서 저녁을 들었다. 이렇게 밥을 해먹을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햄버거, 샌드위치 아니면 닭요리였다.

 

1011, 페이지의 캠프장 아침은 붉게 타올랐다.

여행을 떠난 지 벌써 8일 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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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 밖을 나서니 포웰(Powell)호수가 푸른빛을 띠우고 아직 어둠 속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일찍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침 공기도 상쾌할 뿐 아니라 새벽의 여명이 너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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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푸른빛에 분홍색의 아침노을이 어우러지니 한 폭의 멋진 풍경화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랄까. 아침노을이 멋지다는 것은 공기가 오염이 안 된 청청지역이라는 증표. 푸른 물 위에는 배들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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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장에만 차량들이 많은 줄 알았더니, 호숫가에서 밤을 지새운 행락차량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행락차량하면 좀 어폐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처럼 차 속에서 들고 뛰고 하는 놀이문화는 생각도 못하고 서양 관광객들은 이야기할 때는 조용히 속삭이듯 하며, 술을 들 때도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여간해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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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아침노을을 배경으로 오른쪽 끝부분에, 굴뚝 세 개가 내품는 연기도 거부감 없이 풍경의 일부분으로 녹아들었다. 나바호족이 운영하는 이곳의 유일한 공장의 굴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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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텐트를 치는 장소는 항상 옹색하고 볼품이 없었다. 그만큼 캠핑족이 많아 여유 공간이 적은 탓이다. 파란색 텐트에서는 나 혼자 자고, 큰 텐트에서는 호텔리어와 서적계의 원로, 손사장이 잤다. 나머지 다섯 명은 RV 안에서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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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완전히 밝으니 글랜캐니언 국립휴양지(Glen Canyon National Recreation Area)의 여섯 개 선착장 중의 하나인 와윕 마리나 레이크 포웰 유원지(Wahweap Marina & Lake Powell Resort)가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글랜캐니언 국립휴양지는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이 관리하는 20개 국립휴양지의 하나. 이곳 역시 수상스포츠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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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치고 글랜캐니언에 있는 홀스 슈(Horse Shoe)를 보러 나서니 애리조나 특유의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 옛날 아파치족들이 평화롭게 뛰놀던 광야이다.

 

강의 흐름이 말발굽처럼 휘어 나가는 모양이라 이들은 홀스 슈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안동 하회마을이나 정선 동강에 가면 볼 수 있는 강의 휘어 돌아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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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들은 여전히 헤드라이트를 밝게 비추고 지나가고, 나바호족 공장의 세 굴뚝은 친근감 있게 연기를 내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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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글랜캐니언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댐은 1964년 완성되었는데 애리조나 페이지(Page)에서 유타 주로 연결되는 89번 하이웨이가 그 위를 지나간다. 글랜캐니언에는 붉은 돌기둥, 아치, 첨탑 등이 수없이 많다. 댐이 생기기 전에는 강물의 유속이 빨라 원시적 흙탕물이었는데, 댐이 생겨 물이 잠기는 바람에 새파란 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댐으로 포웰(Powell)호수가 탄생했다. 댐 건설 당시 환경보호주의자들의 반대도 무척 거셌었지만, 1869년 세 개의 나무배를 타고 계곡을 탐험한 남북전쟁 참전용사, 외팔이 존 웨스리 포웰(John Wesley Powell)의 이름을 따라 호수 이름이 지어졌고, 글랜캐니언 국립휴양지도 생겨나서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고 4년 후, 상이용사가 된 포웰이 용감하게 이 거친 계곡에 도전했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이 호수는 애리조나와 유타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으며, 미국에서 미드호 다음으로 크고, 나바호인디언자치구 안에 있으며, 그 상류에는 캐니언 랜드(Canyon Land)가 자리 잡고 있다.

 

또 이 댐은 콜로라도, 와이오밍, 유타, 뉴멕시코를 위한 물 저장시설이며, 애리조나, 네바다, 캘리포니아 등에도 물과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라스베이거스의 휘황찬란함도 따지고 보면 이 댐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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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홀스 슈(Horse Shoe)로 오르는 언덕에 도착했다.

캠핑장에서 이곳까지는 25, 글랜캐니언 댐에서는 10분 남짓 걸렸다.

 

애견을 데리고 이곳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마치 집근처로 산보를 나온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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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관광객들의 발길이 무척 잦아진 이곳, 언덕을 오를 때만 해도 몰랐는데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고, 멀리서 보면 그렇게 깊은 계곡이 있어 보이질 않은 평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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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스 슈는 강물이 휘돌아가는 모양이 너무나 깊고 커서 한 눈에 잘 들어오지를 않는데다, 아침의 음영이 짙게 깔려 있어서 거대한 홀스 슈를 조그만 사진기로 표현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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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아래 홀스 슈 강바닥에는 콜로라도의 푸르고 파란 눈동자가 있었다. 바닥 색들의 조화는 말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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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붉고 푸른 강물 가운데로 한 대의 모타보트가 물살을 가르고 쏜살같이 달렸다. 콜로라도의 눈동자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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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선, 칠족령 밑으로 흐르는 동강)

우리나라 정선의 칠족령 아래를 흐르는 동강의 굽이치는 강물과 비교하면, 각기 그 아름다움이 특색이 있다. 동서양의 물 흐름은 규모와 어우러진 주변 풍경, 운치 등에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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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올랐다 내려온 홀스슈 입구의 단출한 사막의 언덕. 우리나라 같으면 시끌벅적하고,

장사꾼들도 많았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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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스 슈를 떠나 앤티롭 캐니언(Antelope Canyon) 매표소에 도착하니, 나바호(Navajo)족이 운영하는 차량들이 관광객을 싣고, 떼를 지어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홀스 슈에서 이곳까지는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이차를 타려면 표를 사고 나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독점의 횡포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골짜기의 수용능력은 한계가 있어 통제가 필요하기도 하겠다.

 

이곳에는 옛날 영양(Antelope)들이 많이 뛰놀았던 곳인가 보다.

미국민요 ‘Home on the Range'의 가사가 떠올랐다.

 

Oh, give me a home Where the Buffalo roam,

Where the deer and the antelope play,

Where seldom is heard a discouraging word.

 

들소들이 배회하고 사슴. 영양이 뛰노는 곳, 그리고 용기를 잃게 하는 말들이 들리지 않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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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투어인데 1인당 입장료는 40불이었다. 이가격도 조그만 게시판에 매직펜으로 써놓았다. 운영하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 들쑥날쑥 매일 달라진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몰리니 어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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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날씨에 한참을 기다려 순서대로 차를 탔다. 손수건 등으로 입을 막으니, 꼭 사막의 도적떼 같았다. 일본 사람들을 보면, 준비성이 많아 마스크를 미리 챙겨온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서든지 표가 나는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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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압선만 윙윙대는 사막 길을 먼지를 풀풀 날리며 앤티롭캐니언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낄낄대며 옆의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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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 도착하여 가늘고 긴 좁은 붉은색 골짜기를 이삼십 분 지나갔다. 가이드가 재촉하건 말건, 뒷사람들은 밀고 들어오건 말건, 사람들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는데 그 색깔이 여간 곱지를 않았다. 붉은 골짜기에 태양광선이 만드는 요술 같은 색들이다. 요즈음 사진가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는 골짜기다.

 

카메라 렌즈를 단렌즈로 갈아 끼워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깜빡하여, 할 수 없이 줌렌즈로 촬영을 했는데 다행이도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이 계곡은 2억 년 전 만들어진 모래언덕에 콜로라도 강이 만든 작품으로, 애리조나에서 와이오밍에 걸쳐 있는 모래층의 일부분이다.

 

이곳은 서쪽 페이지(Page)에 있는 나바호족 땅인데, 우리가 찾은 곳은 낮은 앤티롭 캐니언(Lower Antelope)이다. 높은 앤티롭 캐니언(Upper Antelope Canyon)은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골짜기로 전문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 계곡에서 갑자기 내린 폭우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빛 관계 때문에 아침 이른 시각이나 늦은 오후 시각에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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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법석을 피건 말건 도마뱀 한 마리가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바위 위에서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다. 골짜기를 철수할 때는 늦게 도착한 사람들을 위해 온 길로 다시 돌아서서 신속하게 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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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차에서 멋쟁이 호텔리어는 어느새 일본 아줌마 셋과 친구가 되어 약 팔기에 정신이 없었다. 젊어 보이는 그녀들은 놀랍게도 모두 손자를 둔 할머니였다. 미국에 주재하고 있는 남편을 둔 인텔리 여성들이라고.

 

호텔리어는 호텔신라 임원출신으로 일본 등 외국에 주재한 경험이 있어, 외국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달인이다. 호텔업종이 의식주와 관련된 종합서비스업종인지라 만사에 능통하지 않으면, 또 매너가 좋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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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떠나 카옌타(Kayenta)에 있는 킹버거에서 점심으로 버거를 들었다. 킹버거집 안에는 2차 대전 당시 통신병으로 큰 공을 세운 나바호족들의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하와이 패전은 미국의 암호가 일본에게 노출된 탓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나바호족 말을 암호화하여 노출을 피했다고 한다. 식당에는 그때의 기록과 함께 일본 부채 등 당시의 유품, 공예품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카옌타는 90%이상이 원주민이며, 인디언의 무당축제, 겨울의 열기구 타기가 유명하다. 많은 기독교 종파의 교회들이 빠짐없이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인디언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이곳의 인디언 인구 증가율은 백인보다 높다고 한다. 18651만 명이 조금 안 되던 나바호족은 10년 후에 9만 명, 요즈음은 3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나바호족 보호구역에 서양 의학이 소개된 결과이다. 이들의 산업이라곤 양, 염소, 말들에 기초한 것이고 보니, 인구증가에 따라 반 건조지대의 목초지가 지나친 가축들의 방목으로 황야로 변해가고 있고 오히려 생산성은 감소되고 있다.

 

또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나바호 보호구역을 떠나 가까운 곳의 빈민가로 이주하여, 빈민가의 노동자, 주유소 종업원, 모텔의 하녀, 복지제도의 수혜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도시에 사는 그들의 친족들처럼 알코올과 마약에서 위안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와 토착신앙을 융합한 페요테교(페요테 선인장을 종교행위에서 사용한다고 한다)가 토착 아메리카교회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경쟁능력이 없고 언어마저 생소한 인디언들은 점점 깊이 가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낮은 보수, 가정의 붕괴, 질병, 매춘, 알코올 중독, 교육의 결핍, 많은 아이들, 무관심과 사기저하,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 등 다양한 형태의 정신병 증상이 만연되고 있다. 이 비참한 빈민들은 절망에 빠져 사회사업가들의 어설픈 보살핌을 받고, 경찰관들의 발길에 채이며 선교사들의 기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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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멘트벨리 가는 도중, 언덕 위의 휘날리는 깃발들이 이색적인 나바호족의 공예품 파는 곳을 들렸다. 친구 하나가 소피가 급해 화장실을 물었더니, 천지가 화장실인데 뭘 물어보냐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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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멘트벨리 들어서기 전의 도로에는, 나바호족의 신령이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었다.

 

앤티롭캐니언에서 모뉴멘트벨리(Monument Valley) 가는 데는 3시간 정도 걸렸다. 페이지Page)에서 모뉴멘트벨리까지는 225키로 미터 거리였다. 98번 도로를 동쪽으로 달려 160번 도로를 만나고, 이 도로를 북쪽으로 가면 카옌타이다. 이곳에서 163번 도로로 유타(Utah)주로 들어서 달리다 보면 모뉴먼트벨리에 닿게 된다.

 

애리조나 주의 관광을 마치고 이제 부터는 유타 주의 관광을 시작하는 셈이다.

 

 

 

5. 나바호족의 한이 서린 모뉴멘트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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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호족자치공원 안에 있는 모뉴멘트벨리(Monument Valley)에 들어서자 외로운 독메, 벙어리 버트(Mitten Butte)가 눈에 들어왔다. 나바호족 자치구역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알코올도 허용되지 않는다. 서양인들의 도래에 따라 위스키가 들어왔고, 인디안 사회에 악영향을 주어온 까닭이다.

 

모뉴멘트벨리의 고도는 1,700미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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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입구에 놓여있는 붉은 돌은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바호족의 자화상 같은 느낌을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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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 사무실 안에 전시된 이들의 모습도 어느 하나 밝고 쾌활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모뉴멘트벨리는 나바호족자치공원의 일부이다. 자치공원은 애리조나 동북부, 유타남부, 뉴멕시코 서쪽에 걸쳐있고, 넓이는 남한의 2/3에 달한다.

 

나바호족은 1400년경 캐나다 북부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강인한 인디언이다. 남북전쟁(1861-5) 때 미국군에 의해 이들의 대부대가 붕괴되고, 85백 명이 포로가 되어 뉴멕시코의 섬너(Sumner)요새로 끌려갔던 비운의 부족으로 전락했지만, 1868년 셔먼장군이 이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비옥한 땅을 준다고 했어도 이들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 땅을 고수했었다. 나바호족의 즐겨 부르는 노래에도 이 땅에 대한 애정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앞뒤에, 옆에, 아래위에 그리고 주위의 이 모든 아름다움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라고 부르는 이곳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이다.

 

영국에서의 첫 이민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해가 1620년이니, 1492년 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한 후 128년이 되는 해이다.

 

초기에는 이들과 인디언은 평화를 유지했다고 하나, 남북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인, 1890년 까지 인디언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고 본다. 270년간의 전쟁에서 이 땅의 주인 인디언은 땅을 뺏기고 핍박받고 학살을 당했으며, 명목상 보호를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디언들은 1800년 이전에 미시시피강 동쪽에서 쫓겨나더니, 그 이후 미국의 영토가 서부로 확대됨에 따라 서양인들과의 전쟁은 서부로 확산되었고, 드디어는 영원한 패배자가 되었다. 미국정부가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인정한 것은 1920. 일부 인디언들은 나를 미국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시오. 나도 당신들한테 그렇게 강요하지 않을 테니.”라고 항의도 했다고 한다.

 

이민 초기에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아서 바론이 인디언을 표현한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인디언은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성격이 유순하며, 유럽인들 못지않게 예절을 갖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쁨과 환영의 표시로 머리와 가슴을 치고, 한 형제임을 강조하며, 스스럼없이 애정과 친밀함을 표현함으로써 영국인을 맞이했다.”

 

또한 휘트먼의 시 또한 마음에 와 닿는다. “신대륙 주민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구대륙 인간들은 기세등등하구나, 잔학무도한 구대륙 인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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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옌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선조들이 이차대전 때 큰 공을 세웠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서양인들에게 짓밟힌 그들에게는 공허한 얘기일 것이다.

 

나바호족은 B. I. A.(Bureau of Indian Affairs, 인디언관리청)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어린 인디언들은 학교에 보내지고 미국말을 배우며 기본적인 의료서비스, 복지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그나마 그들의 고향, 보호구역을 가지고 있다. 보호구역은 그들 종족의 공동재산이며, 비록 땅은 메말라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바호족의 굳건한 토대가 되고 있다.

 

이 땅에는 얼마 안 되는 석유,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등이 있고 관광에서 나오는 수입도 있다. 이 돈으로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대주고, 커뮤니티 센터를 짓고, 매년 열리는 나바호 축제의 비용을 충당하며, 축산농가에게 우물도 파줄 수 있다. 그리고 자치기구와 자체 경찰을 운영하고 있다. 자치기구의 최고 직은 대통령이다.

 

워싱턴의 권력 이동이 있을 때마다 정책은 변하고 예산은 들쑥날쑥하지만 이기관의 장기목표는 인디언을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보다 상부상조를 중시하는 전통을 가졌고 자기만 잘사는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저소득, 높은 문맹률, 빈약한 주거시설 등 너무나 개선할 것들이 많은데 돈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자치구역의 앞날은 험난하다고 하며, 장기적으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나바호의 생활방식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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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붉은 천지에 어둠의 그늘이 길어지자, 나바호족의 성지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신비롭기까지 했다. 성지라고 하지만 불행한 역사의 그늘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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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랑하는 황야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노래에서와 같이 온통 사방에 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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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저기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이 넋을 잃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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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애호가들, 특히 일본사람들이 사진기를 들고 어디선지 쏟아져 나왔다. 나도 그 틈새를 비집고 삼각대를 펴고는 한자리를 계속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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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이 썰물처럼 물러가자 나는 외로움에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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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는 나바호족 가이드들이 안내하는 차량투어가 있다. 비포장도로를 먼지 피우며 계곡에 들어가면 옛 인디언들이 거주했던 절벽주택, 현존하는 절벽중턱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큰 키트씰(Keet Seel) 등을 돌아볼 수가 있다.

 

미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다섯 개가 인디언이 건설한 유적이다. 유타, 콜로라도, 애리조나, 뉴멕시코가 맞물리는 경계지역(Four Corners)에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시작된 인디언 문명이 있었다. 아나사지(Anasazi)문명이라고 한다. 아나사지는 나바호족 인디언 말로 옛사람들, 옛 푸에블로(Pueblo) 사람들이란 뜻이다. 아나사지족은 푸에블로, 호피, 주니족의 선조다. 푸에블로는 인디언들이 집을 짓고 모여 사는 부락 또는 부족의 명칭을 말한다.

 

아나사지문명의 유적은 뉴멕시코의 차코캐니언(Chaco Canyon)국립공원과 콜로라도의 메사버드(Mesa Verde)국립공원 내에 있다. 이 유적들은 모두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차코캐니언의 대표 유적으로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의 푸에블로 보니토라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폭 10미터, 길이 100키로의 도로망을 들 수 있다. 푸에블로 보니토는 주거시설 외 종교 집회시설을 갖추었고, 이러한 유적지가 100개를 넘는다고 한다. 기원 후 800-1100년 사이에 사용되었던 시설들이다.

 

메사버드는 기원후 450-1,300년에 아나사지족이 남긴 2,600미터 고지의 절벽궁전, 기도시설 등 4천여 개의 유적이 있다. 이들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가 크리크, 체로키족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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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족들은 황홀한 이곳 풍경 속에서 자리를 잡고, 사진 찍기 등 황혼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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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곡의 삼인방, 벙어리장갑 한 켤레와 메릭버트(Merrick Butte).

벙어리장갑(Mitten Butte)은 짝짝이이고, 메릭버트는 셜록홈즈의 모자를 닮았다. 버트(Butte)는 작은 언덕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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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어질수록 지평선의 에머랄드빛 부분이 점점 커져갔다. 나바호족의 푸른 신령이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모뉴멘트벨리를 무대로 한 영화는 황야의 무법자(My Darling Clementine), 역마차, 포레스트 검프 등 한 둘이 아니다.

 

1946년에 나온 황야의 무법자 주제곡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백성들의 슬픈 감정을 위로했던 노래다. 클레멘타인은 1849년 미국에 황금 러쉬가 일어나 사람들이 금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진출했을 당시 한 광부의 딸이었다. 원래의 가사 내용을 대충 정리하면,

 

동굴에서 골짜기에서 금을 찾아 헤매던 1849년 즈음

한 광부와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았어요.

 

요정처럼 빛나고 청어상자로 된 샌들을 신은 클레멘타인은 그만 급류에 빠져,

루비 같은 그녀의 입술만 물위에 뜬 채로, 수영을 못한 그녀는 생명을 잃고 말았죠.

아버지인 광부는 여위어간 나머지 딸의 뒤를 따랐고요.

교회 묘지 언덕 위에는 클레멘타인의 시신이 비료가 되어 장미가 자라고 있죠.

 

이제 그녀의 동생과 키스까지 했으니, 그녀는 잊어야겠죠.

꿈속에 바닷물에 젖은 그녀가 보이는군요.

생전에 그녀를 안아주곤 했지만, 이젠 선을 그어야겠네요,

 

그녀를 사랑했던 한 사내의 노래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와이어트가 의사 할리데이의 애인이었던 클레멘타인을 좋아했다는 의미에서 이곡을 주제곡으로 선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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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운이 하늘을 채우도록 계속 지켜보아야 했는데, 차는 떠난다고 하고, 아쉬움 속에 삼각대를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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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뉴멘트 계곡 뒤에 텐트를 치고 난 다음, 베이콘을 굽고 인스턴트 육개장을 끓였다. 임목사 덕분에 간단한 식사라도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다고 할까. 같은 간이식 식사라 해도 자장밥, 우동, 카레밥 등 매끼가 달랐으며, 심지어는 햄버거집을 들려도 킹버거, 피자헛, 캔터키치킨 서브웨이 등 여러 집을 들려 다양한 맛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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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여행을 떠난 지 열흘 째, 여행 일정의 거의 절반을 소화했다.

캠프장의 아침은 금빛 찬란했다. 나바호족의 이곳에 대한 애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나 아름다웠던 아침이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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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에는 어둠 속에서 텐트를 치랴, 저녁지어 먹으랴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밝은 아침에 주위를 돌아보니 바위 뒤로는 낯익은 모뉴멘트벨리의 풍경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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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떠나니, 버트 등 모뉴멘트들은 우리를 앞서서 안내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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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역광의 아름다움도 감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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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았던 이들의 뒷모습을 한번 다시 쭉 훑어보고는 길을 되돌아 달렸다.

여기서도 광대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모뉴멘트벨리의 입장료는 4인까지 1인당 20, 추가 1인 당 6. RV50불이상이고 캠핑장은 20불 이상이다. 인디언 관할구역의 요금은 국립공원지역보다는 좀 비싼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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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는 공사 중이었는데, 한쪽 도로의 통행을 막고는 아스팔트를 한 층 더 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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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사장의 선도 차량을 앞세우고 신나게 달렸다. 뒤창에 ‘FALLOW ME,란 표시를 붙인 선도차는 반대편에 도착하자, 그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다시 이끌고 되돌아가는 식으로 차량들을 안내했다. 기다릴 때는 좀 답답했지만 친절한 공사장의 안내는 호감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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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한가함을 틈타 한 무리의 동구 젊은이들이 도로를 넘나들며, 또 사진도 촬영하며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잠깐 내려 시원한 공기도 들이마시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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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내리막길, 이런 풍경은 미국 서부 아니면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이 길이 코미디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길이다.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뛰어 다닌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능은 떨어지지만 열심히 사는, 그리고 제니를 끝까지 사랑하는 포레스트 검프를 젊은이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겠다. 월남전을 전후로 해서 그때의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했다는 영화이기도 한데, 월남전에 참여했었던 우리세대와도 무관하지가 않다.

 

미 대륙에 처음 길을 만든 것은 들소 떼들이었다. 이 길은 인디언의 통로가 되었으며, 유럽 상인들이 드나들게 되었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태어나자, 포장도로가 되었다. 이어 철도가 놓였다. 이와 더불어 인디언 부락, 교역시장은 요새가 되었고 서양인들이 사는 타운, 나아가 도시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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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은 주로 임목사가 했지만, 중간 중간에 손사장과 유교감이 했다. 우리 모두 사전에 경찰서에서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지만, 선뜻 나서기가 겁이 났다. 사고라도 나면 친구들한테 피해를 줄 수 있고. 그래서 운전 베테랑인 손사장과 유교감이 나섰다. 허지만 미국도로에서는 베테랑에게도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몰아본 경험이 중요하다.

 

운전석 위에는 두 사람이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유교감이 자다가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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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꽁무니에 있는 2인용 침실에는 하동사나이가 취침 중이었다. 약을 잃어버려 못 먹는데다 입이 짧아 여행 중 애로사항이 제일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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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오른쪽, 문 뒷부분에는 주대감이 명상 중이다. 탁자를 접고 의자를 펴면 한 사람이 충분히 잘 수가 있다.

 

(IMG 3503)응접실의 반대편, 주방이 있고, 오른쪽에 소파가 있다. 이곳에서도 한사람이 잘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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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의 왼쪽에는 옷장이 있고, 그 왼편, 뒤쪽에는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에는 여행용 큰 가방을 쌓아놓아 야간에 주로 소변 용도로만 활용되었고, 틈이 날 때마다 물로 이곳을 청소해야했다.

 

RV는 이동주택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이 이런 레저용 차량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생계를 위한 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미국에는 이러한 차량을 위한 휴게소, 주차장 등이 잘 구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차량에 있는 굵은 고무관을 꺼내 수도와 전기, 가스를 연결시켜 사용하며, 사용요금에는 지대도 포함이 되어 있다고 한다. 또 주위에 슈퍼, 식당 등 관련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어 생활에 불편이 없다. 차량 값이 좀 비싼 것이 흠이지만.

 

미국에서는 기술자, 건축가, 회계사 심지어는 의사들까지 RV나 트레일러를 많이 이용한다. 오지의 주택이나 바람이 스며드는 창고 같은 집보다는 훨씬 나으며, 집에 대한 걱정거리 없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농가에서도 애들이 결혼하면 증축을 한다든가 새집을 마련하는 것보다 이러한 차량을 구비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대 간의 갈등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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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 페이지(Page)로 다시 돌아오는 길, 글랜캐니언 국립휴양지 한 쉼터에서 한 쌍의 여행객이 오후의 여유를 갖고 있었다. 붉은 세계 속의 적막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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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콜로라도 강 건너편에는 눈에 익은 나바호족의 굴뚝 세 개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바호족 지치공원 내 애리조나 북부에는 아나사지족의 후예이며, 푸에블로 인디언의 일족인 호피족이 살고 있다. 아나사지족은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가장 발전된 인디언의 문명을 일구었었다. 나바호족과는 다르게 이곳의 터줏대감이었던 호피족은 자기들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나바호족과 토지반환 소송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인디언의 사상과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마지막 부족으로, 1936년 정부기관(Tribal Council)을 수립하였다. 이들 정부는 미국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보호구역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호피족은 이러 저러한 사유로 미국의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언어는 쇼쇼니어를 사용하고 있다.

 

호피족은 건강한 삶과 화목한 삶을 추구하는데 이들이 추는 뱀 춤에는 비와 농작물과 삶에 대한 기원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들에겐 가족이 둘이 있다고 여긴다. 가족과 자연이 그것이다. 그만큼 자연을 중시한다는 얘기이다. 또 그들에게는 규율이 두 가지가 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과 만물을 이해하고 노력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에게는 문자가 없지만 전승과 예언이 구전 또는 암벽화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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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호수 위로 보트 하나가 물살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호피족의 유산은 영혼이라고 한다. 어디나 갈 수 있고 떠돌아다니며 항상 변하고 속박에서 벗어난 영혼이 그것이다. 이들은 인류의 역사를 다섯 가지 시대로 구분한다. , 얼음, 물의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현재는 네 번째 시대인데 인간은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문명은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붉은 별 카치나가 출현하면 다섯 번째 시대로 들어서는데 정화의 날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세계관, 의학지식, 예술, 장인기술, 영적 수행 등은 전문가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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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유난히 붉은 돌들이 우리의 눈을 끌고 있었다.

 

우리는 카납(Kanab)에 있는 서브웨이(Subway)에 들려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들었다.

미국의 햄버거집을 하나하나 섭렵하는 셈이다. 그리고 자이온(Zion)을 향하여 달렸다.

 

모뉴멘트벨리에서 163번 도로를 남으로 달리다, 카옌타에서 160번 도로를 만나 남서쪽으로 달린 다음, 98번 도로를 타고 페이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89번 도로를 서쪽으로 달리다, 카납에 들려 점심을 들고, 다시 89번 도로를 달려 카멜(Carmel)에서 9번 도로 서쪽으로 조금 달리면, 자이온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이다. 모두 5시간 걸렸다.

 

 

6. 버진강과 어울린 자이언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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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국 5대 국립공원의 하나인 자이언 국립공원(Zion National Park)을 동쪽 입구를 통해 입성했다. 여행이 무르익었는지 대원들의 얼굴이 통통하고, 웃음까지 띠우고 여유만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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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입구에 들어서자 약간 붉은 빛을 띠는 바둑판바위(Checkboard Mesa)와 상봉했다.

 

미국이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성장기에, 모르몬교도들도 국토 확장에 상당히 기여했다.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라고 불리는 모르몬교는 1830, 죠셉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에 의해 기독교 교회의 권위와 조직을 회복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창건되었다.

 

그는 신에게 신권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모르몬경을 펴내며 종교공동체를 세워 교세를 확장하려 했으나 기존 교회와 갈등을 빚었고, 미주리에서 오하이오 그리고 일리노이로 쫓겨 다니다 살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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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절벽과 흰색, 황색 등의 화성암들이 우리에게 닥아 왔고, 쨍한 날씨에 여러 색깔을 가진 산들은 우리를 눈부시게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홀스 슈, 글랜캐니언, 앤티롭캐니언, 모뉴멘트벨리 등이 붉은 색 일변도였는데 반하여.

 

모르몬교도들은 브리검 영(Brigham Young)을 후계자로 삼아 3천대의 포장마차를 타고, 1847년 로키산맥 너머 지금의 유타 주에 신천지를 개척하며 교세를 확장했다. 그 결과 브리검 영은 유타 주의 초대 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27명의 아내와 결혼하여 56명의 자녀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험한 로키산맥을 넘어 자유의 땅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모르몬교가 일부다처제를 인정한 것도 이 여정에서 많은 남자들이 죽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멕시코의 영토였던 유타 주는 1896년 미국의 주로 정식 편입되었고, 요즈음도 유타주 주민의 60%정도가 모르몬 교인이라고 한다. 유타 주가 연방에 가입할 수 없게 되자, 1890년에 교단에서 말이 많았던 일부다처제를 인정치 않게 되었으며, 2011년 현재 모르몬교는 교도 6백만 명으로 네 번째로 큰 교파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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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돌을 하늘로 던지면 쨍하고 깨질 것 같은 푸른 하늘과 황금색 산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번 더 했다. 여행 중 시종 맑은 하늘 아래서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그랜드 써클 지도)

자이언은 사람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자연의 성역이다. 이곳은 유타 주의 서남쪽 끝이며,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곳에 위치한다. 또 콜로라도 고원(Colorado Plateau)의 서쪽 끝으로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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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의 주위환경 때문에 도로도 황색으로 물들었는지, 환경에 어울리게 도로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려다보는 도로는 환상적이었다.

 

자이온은 모르몬교도에게 약속된 땅이라고 할까. 모르몬교도에게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산의 형세가 성당, 타워와 같다고 자이온(Zion)으로 불리어 지기 시작했다. 자이온은 미국식 발음이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의 옛 명칭이며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상징적 용어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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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에이브러햄 피크(2,101미터), 이삭 피크(2,081미터), 모로니 산(1,734미터) 이다.

봉우리 이름도 야곱, 에이브러햄, 이삭 등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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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흰색, 주황색, 노란색 등의 화려한 빛깔은 퇴적된 모래의 질,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이 멋진 풍경을 동양화로 그린다면 제대로 맛이 날 것 같지가 않다. 미국의 풍경화는 역시 서양화로 그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다.

 

(토마스 모란의 그림)

토마스 모란(Thomas Moran)의 그림이 자이온의 절경을 잘 표현했다. 몽유도원도 같이 꿈에나 보는 환상적인 세계 같고, 햇빛이 비치는 곳과 안 비치는 곳과의 대조가 잘 이루어진 것 같다.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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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은 모르몬교도들이 신의 성전이라고 한 것과 같이 신성한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공원을 생성된 역사로 보면 그랜드, 자이언, 브라이스 순이다. 그랜드캐니언 정상부의 지질층이 자이언의 맨 밑의 층과 같고, 자이언의 최상층이 브라이스캐니언의 최하층과 같다고 한다. 자이언은 6천만 년 전 바다 밑 퇴적 수성암이 융기한 것이다.

 

자이언과 브라이스캐니언을 비교할 때, 자이언은 남성적, 브라이스캐니언은 여성적이라고 표현한다. 생성된 역사로 보아도 자이언이 연상일 뿐 아니라 남성일 것이다. 아담의 갈비로 이브를 빚었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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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동쪽으로 들어와 자이언의 카멜 하이웨이를 타고, 터널을 통해 고객센타(Visitor Center)에 도착한 우리는 센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고 공원의 버스를 타고, 버스의 종점인 시나와바 템플(Temple of Sinawava)에서 내렸다.

 

템플로 가는 도중 버스 천장의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 또한 환상적이었다. 버스기사는 위핑 록(Weeping Rock)이 이러고저러고 하며 설명을 해댔지만, 만원 버스에서 서서가는 나에겐 창밖 풍경을 잘 보이지 않았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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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이 인기가 있는 것은 남성적인 산세와 산의 다양한 빛깔 때문이기도 하지만, 버진강(Virgin River)을 따라가는 트레일 때문이다. 다른 계곡의 강들은 보면 아찔한 절벽 밑으로 흐르지만, 버진강은 공원의 평지로 흐른다. 버진강은 모하비(Mojave) 사막을 거쳐 미드 호에서 콜로라도강과 합쳐진다.

 

우리는 시나와바 템플에서 강을 따라서 정말 평평하고 편한 오솔길을 한 시간쯤 걸었다. 도중에 긴 트래킹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온통 옷이 젖어 있었지만 지친 기색은 없고 신이 나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버진강을 따라 걷는 물길 트래킹은 미국에서 톱 텐(Top Ten) 안에 드는 만큼 잘 알려져 있고 또 인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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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킹을 끝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원점 회귀하였을 때는 이미 주위는 어둑어둑해져서 있었고, 우리는 정말 재수 좋게도 캠핑장의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자리는 B53C였고 그곳에 텐트를 친 후 어둠 속에서 고기를 구웠다. 다행이도 여기 화장실도 숙소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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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일 자이언의 아침, 아침햇살에 물든 황금빛 산을 감상하며 캠핑장을 한 바퀴 도는 도중, 아침을 달리는 키 큰 여인을 만났는데 카메라로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의 적막감(Wild Calm) 그리고 음악 같은 물소리(Music of Waters). 공원관리국이 자이온을 표현한 말이지만, 두 마디로 공원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것 같다.

 

이 적막강산에 사슴이 먹을 것을 찾아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였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면 어느새 튀는지 도무지 찍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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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을 떠날 때도 터널을 지나, 온 길로 뒤돌아 나왔다. 터널 길이는 1.8키로 미터. 터널 안에는 창문을 뚫어놓아 차 안에서 밖의 풍경을 볼 수가 있다. 터널을 오가는 차량이 10분 씩 교대로 통과하는 일방통행이었는데, 터널 앞을 지키는 여직원이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차량에 통과 패스 판을 주면, 반대편에 있는 직원에게 전달하고, 그러면 반대편 차량이 통과하는 식으로 차량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터널 통과비는 차량 입장료 30불외에 별도로 15불을 지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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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언덕길을 쉴 사이 없이 오르고 내리고 하자니, 차량엔진이 쉽게 열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차가 열을 식히는 동안, 우리는 차에서 내려 암벽을 타고 오르는 험한 트레일을 잠깐 동안이나마 맛보고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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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공원 지도)

우리는 오른쪽에 있는 동문을 지나 터널을 통과하여 방문자센타를 돌아보고, 공원버스를 타고 북쪽에 있는 시나와바템플에서 내려 강변길을 걸었고, 다시 방문자센타로 되돌아 와서 1박 한 후 동문으로 나왔다.

 

 

7. 고원지대의 홍보석 만화경, 브라이스캐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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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캐니언으로 향하는 길, 창밖을 보니 저 멀리 우리가 올라야 할 길이 보였다. 그길 위를 자동차 두 대가 오르고 있었고, 장대한 자연 속에서 하얀 길들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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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거리에는 가을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 나타났다.

고국에는 가을이 한참 익어갈 터인데. 사람이란 어쩔 수 없는가보다. 오감과 기억 속에 남겨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느끼면 금방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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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의 목장이 지나갔다. 유타는 인디언 말로 산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유타는 미국의 45번째 주. 면적은 네바다의 3/4이고 남북한과 비슷하지만, 인구는 네바다와 비슷하여 삼백 만 명이 좀 안 된다. 멕시코에서 미국영토가 된 후, 서부로 쫓긴 인디언과 미국군과의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주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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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레드캐니언에 들어섰다.

이곳은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Bryce Canyon National Park)의 관문이라고 할까? 이곳에서 14키로 미터를 더 가면 브라이스캐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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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캐니언은 군인으로 치면 사라져 가는 노병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스캐니언도 세월이 가면 레드캐니언처럼 퇴색이 되고 모양도 점차 뭉그러질 것이다.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자니 섭섭하기도 해서 사진 한 장 찍고서 지나가는 곳이지만, 이곳은 딕시국유림(Dixie National Forest)의 일부이다.

 

이 산림지대는 남 유타에 260키로 미터 길이로 걸쳐 있고, 그 면적은 8천 제곱키로 미터에 달하며, 이들 산림은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을 감싸 안고 있다. 높이는 850미터에서 3,451미터.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은 추운 지대로 크로스칸트리 스키, 승마, 트래킹 등의 스포츠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자이온을 흐르는 버진 강은 딕시국유림에 있는 나바호저수지에서 발원하여, 네바다 남부로 흐르고, 이어 미드호로 흘러든다.

 

(IMG 3685) 우리의 패스화인더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조금 손을 본 이후에는 말썽 없이 잘 달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레드캐니언의 터널 근처에서 잠간 내려 사라져가는 노병, 레드캐니언의 언덕을 오르는 등 늙은 캐니언의 모습을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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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출발하여 브라이스캐니언(Bryce Canyon National Park) 입구에서 기념촬영을 하면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노병의 여유를 부렸다.

 

공원은 동서로는 좁고, 남북으로 길쭉하다. 브라이스캐니언의 넓이는 145제곱키로 미터, 자이온공원의 1/4정도의 크기로 아담한 편이다. 공원의 길이는 34키로 미터이며 50년 간격으로 30센티미터 씩 뒤로 후퇴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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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캐니언은 400개가 넘는 미국 국립공원에 하나이며, 자이언보다는 여성적이라는 사전지식을 갖고 방문했을 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에는 죽은 나무와 산 나무가 한 그루 씩 좌우에 벋쳐있었고 파란 하늘을 뒤의 배경으로 한 첫 풍경부터 마음에 쏙 들어왔다. 죽어서도 나무는 산 나무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 까. 브라이스는 콜로라도 고원지대의 만화경이며, 가장 공기가 좋은 공원, 밤에는 유난히 별이 반짝이는 곳이다.

 

이곳도 인근 공원들과 마찬가지로 바다 속 암석이 솟은 후, 물의 힘에 의해 아름답게 조각된 곳이다.

 

우리는 자이언에서 9번 도로로 나와 동쪽으로 간 후, 캬멜(Carmel)에서 89번 도로를 북쪽으로 향하다가, 햇취(Hatch)를 지나고 12번 도로를 동쪽으로 달려 레드캐니언을 지난 후 브라이스캐니언 북쪽에 도착했다. 자이언에서 130키로 미터, 두 시간이 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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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없이 파란 하늘로 뻗쳐 있는 고사목은 운치를 더하여 주었다. 수명이 긴 나무들은 죽어서도 한 동안 제 역할을 다한다. 이 좋은 날에 한 친구는 골치 아픈 일이 있는지 머리를 기우뚱하고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너무 공기가 맑아 골치 아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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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는 첨탑을 가진 반원형 극장은 화려한 바위로 둘러싸인 성전이다.

 

누구 말마따나 중국 시안에 있는 진시왕릉의 병마용 같기도 했다. 이 붉은 첨탑들은 대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 놓은 조각들이지만, 시안의 병마용을 빚기 위해선 수많은 평민들의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자연의 선물이 아니고 인디언으로부터 노획한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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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조각들을 다 모아 놓은 만물상의 절경과 규모에, 우리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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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아래 황금색 언덕들 너머에는 초록색이 겻 들어진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측에는 조그만 저수지가 있고. 185018세 청년 브라이스(Ebenezer Bryce)는 모르몬교로 개종한 후, 유타 주에 있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메리(Mary)와 결혼도 하고 올망졸망 열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앞장서서 교회도 짓는 등 마을을 가꾸는데 큰 역할을 했고, 사람들은 그의 공을 기려 이 계곡을 브라이스캐니언이라 불렀다

 

모르몬교도들에 의하면, 기원전 600년경 이스라엘의 한 무리가 아메리카로 이주할 때, 이를 이끈 선지자가 모르몬이라고 해서 이들은 종파의 이름을 모르몬교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단적인 교리를 가졌다고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들은 보존할 만한 생활양식을 이룩했다. 놀라운 용기와 특출한 인내심으로 서부에서 가장 거칠고 어려운 지형에 정착했다는 사실만으로 본받을 만하다. 이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공동체가 합심해서 문제점을 해결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농장이나 목장을 세우는 대신, 함께 살 수 있는 조그맣고 아름다운 마을을 세우고 그 한복판에 교회를 세웠다. 다시 말하면 활기찬 공동생활을 하며 부의 편차가 심하지 않은 일사불란하고 자족적인 공동체를 구축했다.

에드워드 애비도 이들을 격찬했지만, 독실한 신도 레슬리 맥키의 아내로부터 애비의 영혼을 자기 영혼에 붙들어 맸다고 하는 말에, 늙은 그녀와 함께 이삼십년 빨리 죽는 것이 아니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었다.

 

이랬든 저랬든 유타의 자이언, 브라이스캐니언 모두 개척 당시 모르몬교도들이 발견하고 가꾸고 한 공이 지대하다. 기독교인들은 이들이 일부다처제를 이루고 있는 이단이라고 그들을 쫓아냈지만, 이들은 서부를 개척하며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엄청난 시련을 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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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운 좋게도 우리가 걸었던 길 중 가장 예쁘고 편했던 황색의 보석 길, 햇 숍 트레일(Hat Shop Trail)을 걷게 되었다. 입구에는 애완동물은 데려오지 말라고 쓰여 있는 예쁜 팻말이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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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길에는 여러 모양의 주홍색 또는 황갈색의 바위 봉우리 또는 이상한 돌기둥, 영어로는 후두스(Hoodoos)를 볼 수 있었다. 후두스(Hoodoos)는 불길한 사람들, 재수 없는 사람들이란 뜻인데, 트레일 이름을 햇 숍으로 한 것으로 보아, 후드를 모자로 본 것 같다.

 

인디언 전설에 의하면 장난꾸러기 코요테신이 행실이 나쁜 사람들을 모두 이런 바위로 만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나쁜 사람들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친근감이 가는 후두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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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후두스들이 나열해 보초를 서고 있는 가운데 동굴을 통과하자니,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기도 했고, 천국의 문을 통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동굴은 음양이 교차하는 지점이었고, 동굴을 통과하는 우리들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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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의한 빛깔의 조화가 특히 신비로웠다. 특히 햇빛의 반사로 진해지거나 투명해진 주홍색 바위 색깔은 흉내 낼 수 없는 고운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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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해 보이는 밝은 홍보석의 세상, 누군가는 브라이스캐니언의 이러한 형상을 살구 빛 속살이라고 표현했다. 밝은 주홍색과 엷은 자주색의 바위들은 바위의 딱딱한 속성에서 초탈해버린 부드러움 그 자체라고 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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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諸行無常)이 딱 맞는 표현이었다. 우주의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서, 하나하나의 모습이 같은 것이 하나 없었고, 그 아름다움도 갖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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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쪽에서는 두 친구들이 브라이스의 아름다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는 듯싶었고, 왼쪽의 붉은 기둥에는 무거운 짐을 진 한 쌍이 조각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여인은 임신을 하였는지 배가 불룩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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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석으로 만든 부처와 나한들에게 둘러싸인 우리 모두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특히 왼쪽 위의 부처님의 조그만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도 같고, 희열에 싸인 것 같기도 하고. 부처님의 품안은 엄청 커서 중생들을 다 받아들일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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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간 살구 빛 속살에는 실핏줄이 보이는 듯하며, 후두스들은 쑥덕공론 중인 것 같고.

아마 속살이 다 들어나 있는 세상은 거짓이 없는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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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배기를 쳐다보니, 손사장은 덥석 입이 내려닫히면 어떻게 하려고 악어의 큰 입 한 가운데서 겁도 없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정말 만족한다는 뜻이겠지.

 

이날 이 황홀한 계곡을 꿈을 꾸듯 누비고 다녔든 사람들은 우리뿐이었다니, 호젓한 것은 둘째로 치고 정말 행운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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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길, 쓰러져 있는 커다란 고목에서는 귀엽고 가냘픈 싹들이 돋아 나오고 있었고, 그 중에는 고목의 싹도 있는 것 같았다. 나무들의 생명은 얼마나 끈질기고 강인한가. 우리들 노구에도 이러한 생명의 싹이 돋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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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커다란 고목에 드리워 있는 자화상은 이것저것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이공원의 높이 2,100미터 안되는 곳에는 시다(Cedar, 유타 Juniper)나무가 자라고 있고, 2,400미터 이내에는 폰데로사 소나무가, 그리고 2,700미터 이내에는 더글러스 전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러니까 전나무가 소나무보다는 훨씬 높은 곳에서 자란다는 얘기다. 폰데로사 소나무는 수명이 보통 800년 정도 되며 높이는 60미터 정도까지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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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다 높은 레인보우 포인트(2,778미터)로 자리를 옮겨 광활한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맨 밑에서 큰 무리를 지으며 자라고 있는 나무는 시다나무일 것이다.

 

인디언들은 시다나무의 열매로 염주를 만드는 등, 시다나무를 많은 공예품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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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계곡의 풍경은 근경이나 원경이나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묘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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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포인트를 떠나 내려오는 길, 2009년에 발생했던 화재의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번갯불에서 옮겨 붙은 산불은 산림 1,926ha를 한 달 넘게 태우고, 하늘에서 내린 비로 자연스럽게 진화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처럼 애써서 진화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리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산불이 나면 번식을 하는 나무도 있는데, 메타세콰이아 나무 열매는 섭씨 200도 이상이 되어야 열매가 솔방울에서 튀어져 나와 발아를 한다고 한다.

 

 

8.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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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스캐니언에서 다음 목적지 아치스 국립공원(Arches National Park)까지는 430키로 미터, 5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산길이라기보다는 평탄한 길이었다.

 

브라이스에서 아치스로 가려면, 12번 도로를 북쪽으로 160키로 달리다, 토리(Torrey)에서 24번 도로로 갈아타고 동쪽으로 80키로 간 다음, 95번 도로 교차점에서 동북쪽으로 70번 고속도로가 나올 때까지 24번 도로를 90키로 정도 계속 달린다. 그리고 70번 고속도로를 동쪽으로 50키로 가다가 191번 도로를 만나, 남쪽으로 50키로 정도 내려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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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는 목장의 소떼도 보이고, 나무들에 둘러싼 유타의 전형적인 농가와 초지도 보였다. 초지에 둥그런 줄이 난 것은 스프링클러가 낸 자국들이었다. 농가 옆에는 보통 나무 몇 그루가 서있다. 그늘과 나무가 불어주는 바람이 필요할 테니.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달려, 그린 강(Green River)지역의 모텔에 자리를 폈고, 저녁은 근처에 있는 KFC에서 닭요리를 들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샤워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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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버짓(Budget)모텔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니, 거리 한 모퉁이 어디선가 총잡이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모텔의 간판 밑에는 아침은 공짜(Free Breakfast)'라는 작은 간판도 달려 있었다. 그래서 모텔이름이 버짓인 모양이다.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고.

 

여행 중에 아침식사가 제공되었던 유일한 모텔이었다. 오랜만에 샤워를 할 수 있어 좋았지만, 카우보이모자를 쓴 사장님은 꽤나 잔소리가 많았다. 말라비틀어진 빵에 버터와 잼을 바르고, 우유 한 잔에 콘 후레이크를 타서 먹었는데, 한 숟가락으로 여기저기 쑤시지 말고 음식그릇 옆에 있는 숟가락들을 각기 사용하라고 잔소리 하더니, 몇 번이나 잔소리를 해도 못 알아듣는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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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스를 향해 출발하니 그린 강이 자주 스쳐갔다.

 

그린 강은 1,175키로 미터나 되며, 와이오밍 주 윈드리버산맥에서 발원하여 유타 주 남동부에 있는 캐니언랜즈에서 콜로라도 강의 본류와 합류한다. 그린 강은 본류와 함께 콜로라도 강의 2대 원류를 구성하는 길고 긴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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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일 아치스 국립공원에 진입했다. 유타 주 모압(Moab)에는 아치스, 캐니언랜즈가 있고, 이 작은 도시는 지프로 암벽타기, 산악 오토바이, MTB, 콜로라도 강 급류타기 등 어드벤처 스포츠의 메카이다. 모압 역시 모르몬의 도시이며, 따라서 이곳에서는 독한 술은 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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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스는 3억 년 전 바다가 융기해서 밑에 있던 모래바닥이 올라 온 사암층이다. 1억년 넘게 침식된 사암 아치들이 즐비하다. 이 아치들은 광활한 공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이들을 찾아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공원의 면적은 브라이스캐니언의 두 배가 넘지만, 자이온의 절반 정도인 309제곱키로 미터이다. 콜로라도 대 고원 위에 놓여있다.

 

모래바닥의 소금성분이 바위를 부식시켜 연어빛깔, 담황색을 띠우고 있고 여름에는 40도까지 오르지만 겨울은 영하 10도 안팎이다. 일만 년 전부터 이곳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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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바위에는 복잡한 사연이 쓰이어 있는 것 같았다.

 

시인이며 자연주의자였던 헨리 소로아는 돌로 된 최고의 작품은 구리나 철로 된 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간의 너그러운 용인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딱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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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고층건물을 연상시키는 파크 애비뉴 포인트(Park Avenue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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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라살산맥이 보이는 코트하우스타워 뷰포인트(Court House Tower Viewpoint)를 두루 둘러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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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서있는 균형을 이룬 바위(Balanced Rock)는 왠지 균형이 맞아 보이지 않고 불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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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근처 바위에서는 젊은이들이 아슬아슬하게 바위를 타고 있어 관광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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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윈도우 트레일을 걷기 시작하여 10분 정도 언덕길을 올라서, 도자기 창문(Pothole)을 아래에서 바로 위로 쳐다보았더니 아름다운 황금색 아치의 속살이 눈부셨다. 크기도 어마어마했지만. 자연의 풍화작용은 대단하다. 올라온 바다 밑의 사암층에서 저 큰 아치만을 남겨놓았으니.

 

에드워드 애비는 많은 사람들은 절대자가 손으로 빚은 조각, 또는 모래를 머금은 바람에 의해 빚어진 조각품이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 아치들은 빗물이나 녹은 눈, 서리, 얼음 등이 쐐기와 같은 작용을 하고 거기에 중력이 힘을 보태어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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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를 옆으로 누인 모양의 도자기 창문(Pothole)은 왼쪽 바위의 주황색과 하늘의 파란색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도자기 속에서 친구는 양손을 번쩍 올리고 환호의 몸짓을 보였다.

 

사진에서는 타인을 들여다보는 창문과 내 모양을 비춰보는 거울이 중요하다는데, 도자기는 눈이 시리도록 파란 창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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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의 오른쪽, 골리앗의 팔뚝과 같이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 나왔다. 아니 골리앗의 오른쪽 다리이지. 사람은 더욱 왜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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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릿(Turret, 작은 탑, 망루의 뜻) 아치로 가는 길에는 물개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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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릿(Turret)아치는 보는 각도에 따라 창문의 개수도 모양도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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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두 개 있는 아치는 흉측했고, 앞에는 죽은 시다(Cedar)나무가 뒹굴고 있었다.

북쪽 창과 남쪽 창(North Window & South Window) 두 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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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아치(Double Arches)의 모양도 볼만 했다.

아치스의 하늘은 어쩌면 그렇게 파란지.

 

여행 중 내내 맑은 날씨는 우리를 도와주었고, 우리가 국립공원을 주로 방문해서인지 모르지만, 미국은 공해와는 거리가 있는, 복 받은 나라였다.

 

중국의 영향으로 파란 하늘을 보기 힘든 우리나라, 옛날의 우리 가을하늘도 저랬는데.

지구가 반대로 회전한다면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와 공해물질 대신에 태평양의 바닷바람이 불어올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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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되돌아가는 길 숲 속에는 솜꼬리토끼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토끼는 시다(Cedar)나무의 열매나 잎을 먹는지, 이들 나무가 번식하는데 큰 공로자로 되어 있다.

 

겁을 먹고 있는 토끼는 감정을 갖고 있을까? 동물들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슬렘이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생각이다. 코요테가 달을 보고 울부짖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 돌고래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 단세포동물이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에드워드 애비의 생각이지만, 내 생각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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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속에서 간단한 식사를 한 후, 우리는 공원의 북쪽에 있는 악마의 정원(Devil's Garden)에서 시작하는 3시간짜리 트래킹에 나섰다. 에드워드 애비같이 지팡이를 짚고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출발했다.

 

아치스공원하면 에드워드 애비(Edward Abbey, 1927-1989)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신문기자, 사회복지사, 바텐더, 작가, 애리조나대 교수,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

 

대자연을 일터로 삶의 터전으로 살다, 자연을 사랑하는 병에 빠진 사나이, 애비. 그는 아치스를 발가벗은 나를 맡길 낙원이라 표현했으며, 이곳 어디에 묻혀 있다고 한다. 묘비에는 노 코멘트(No Comment)’라고 써 달라 했고, 관 대신 침낭에 싸서 코요테가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바위의 틈에 묻어달라고 한 괴짜사나이였다.

 

그는 선비와는 거리가 있는 에너지 충만형인 사람으로 주위에 항상 여자들이 많았으며 에코타지의 정신적인 보루였다. 에코타지(Ecotage)는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회사나 주택가 등을 상대로 벌이는 환경보호단체들의 파괴행위, 환경오염을 유발하거나 가속시키는 시설물 등을 상대로 벌이는 환경보호단체의 파괴행위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그는 항상 총기도 소지하고 다녔으며, 성차별적 발언도 서슴없이 내쏟았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사막의 은둔자이다. 서부의 헨리 소로우로 불리는 그는,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에서 아치스공원의 레인저(지킴이)로서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서술했고, 반문명자로서의 분노에 찬 절규를 쏟아냈다.

 

(jpg Edward Abbey)

(에드워드 애비의 모습)

 

(20151014-182019)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마주친, 아치스공원에서 규모가 제일 큰 랜즈케이프 아치(Landscape Arch)는 길이가 88.4미터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은 자연아치이다. 자연에 의해 만들어졌다가 자연에 의해 부식되어 가면서, 아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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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 피치를 올려 바위 위에 난 좁은 길을 올라,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섰다.

 

에드워드 애비는 그곳에 서서 그 괴상하고 기이한 이국적인 바위와, 구름과, 하늘과, 공간의 장엄한 경관을 바라보노라니 우스꽝스런 욕심과 소유욕이 나를 사로잡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소유하고 싶었다. 또한 한 남자가 한 여름다운 여인을 욕망하듯이 그 모든 경치를 깊고, 완벽하고, 친밀하게 포옹하고 싶었다. 정신 나간 소망일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와 소유권을 다툴 사람이나 그 무엇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라고 했다. 그는 형이상학은 개에게나 던져 주어라.”라고 말했듯이 자연을 아니 자연의 일부인 여인을 포옹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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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멋진 풍경의 일부가 되어 노란 고양이(Yellow Cat)라는 이름의 드넓은 광야를 보며, ‘역시 잘 왔다하면서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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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악마의 정원 건너편에 있는 라살(La Sal)산맥에게 윙크를 던지기도 하였다. 항시 눈이 덮여 있는 라살은 콜로라도와 유타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을 여행하다 보면, 라살은 항상 여행자를 뒤쫓아 온다.

 

라살산맥은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32키로 미터 떨어져 있으며, 높이 3,600-3,900미터의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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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 트래킹의 목적지인 더블 오(Double O)에 도착하여, 위쪽에 있는 커다란 원에 오르려고 했지만, 위험하기도 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애비는 1956년 봄부터 아치스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공원 본부에서 살면서 근무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공원 안으로 32키로 미터 들어가 있는 1인용 초소와 정부 소유의 주택형 트레일러에서 삶을 꾸려나갔다. 그때의 미국은 지금과 비교할 때 놀기 좋고 유쾌하고 양지바른 땅이었다. 토종 야생동물의 서식지였고, 원시의 오지였으며 원초적 공간과 정적, 깨끗한 공기가 그대로 보존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변화와 발전이 아치스 국립공원에도 찾아와, 공원의 자연을 가만 놔두지 않고 그 희생물로 만들었다.

 

그는 아치스에서의 경험과 그가 쓴 일기를 바탕으로, 19681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원제목:Desert Solitaire)'를 출판하였다. Solitaire는 반지에 한 개 박혀진 보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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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칸막이 아치(Partition Arch)에 들려, 아치를 통해 이쪽에서 저쪽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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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세상 끝에는 악마의 정원의 악마들이 눈 덮인 라살산맥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산이 아름답구나, 저곳에 언제나 가볼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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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이 짙어지니 악마의 정원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아치스공원 관광을 마치고 모압(Moab) 시내에 나가보니 생각보다 도시는 훨씬 크고 번화했다. 큰 마켓 두 곳을 들려 소고기, 과일 등을 쇼핑했다. 식료품 값, 특히 고기 값은 정말 쌌다. 그리고는 모압의 개인 캠프장, 강변의 오아시스(Riverside Oasis)에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굽는 등 오랜만에 푸짐한 저녁을 들었다. 모압에서 구입한 소고기의 맛은 흔한 말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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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캠프장 언덕에 오르니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아침 햇살에 붉어진 산은 강물에 그 몸체를 드리우고 있었다. 맑은 아침 공기로 충만하고 섬세한 아침빛이 비추는 아름다운 산하를 즐길 수 있는 행복감, 건강하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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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화인더 옆에는 부모를 따라 캠핑을 온 어린이 서너 명이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르내리다, 싫증이 나면 잔디 위에서 축구도 하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 일어날 시간도 안 되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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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있는 차량 하나를 보니, 차 뒤에 자전거 두 대가 야무지게 묶여 있었다. 자동차의 후면 창에는 해골도 붙여져 있었고. 주인은 보나마나 야무진 친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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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후 아치스로 다시 돌아가니, 큰 광장에는 붉은 석탑들의 아침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불타는 용광로 (Fiery Furnac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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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나들이 나선 한 여인은 주변 산세에 압도당한 듯 멍하니 서있었다.

멀리 밋밋하게 이어진 산맥이 있고, 메사(솟아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중첩되어 있었다. 저들이 책 절벽(Book Cliff), 강도들의 둥지(Robbers' Roost)인지 모르겠다.

 

사막에서는 다른 곳처럼 생명체들이 붐비지 않고 띄엄띄엄 흩어져 있기 때문에 풀, 나무 모두 넉넉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살아있는 유기체들은 에드워드 애비의 말처럼 생명이 없는 모래와 황량한 바위들을 배경으로 대담하고, 용감하고, 생기 있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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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여인은 용광로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걸음아 나살려라 하며 자리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불타는 용광로(Fiery Furnace)는 석탑이 촘촘히 밀집된 곳으로, 위치로 보아서는 아치스공원의 한 가운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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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800년대 말, 남북전쟁 상이용사 죤 웨슬리 월후가 살았던 목장(Wolfe Ranch)에서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로 가는 트레킹을 시작했다. 2시간 정도 걸리는 좋은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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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슨 언덕으로 명명된 붉은 큰 바위 언덕에는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오르고 있었다.

길의 진행방향으로 군데군데 작은 돌들을 탑 모양으로 쌓아놓아 가는 길을 쉽게 알 수 있게 해놓았다. 공원 직원들이 했다기보다는 동양의 불교신자들이 해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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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앞에서는 인간은 정말 왜소하다. 이런 느낌을 가질 때면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질 테고, 선한 마음을 갖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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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 바위 길을 가면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적셨다. 가족을 따라나선 서양 어린이들은 바위 비탈을 겁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우리들 부모 같으면 나무라기 일수 일 터인데. 서양인들은 자유롭게 놓아두는 편이었다. 사실 어린이들의 몸은 유연하고, 순발력이 어른보다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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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미터 높이의 절벽 가장자리에 차려진 원형극장을 지나, 목적지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에 도착하니 온통 주변이 황금색으로 눈부신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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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스의 최고 명물. 델리킷아치의 거대한 두 다리는 벌써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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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치는 아치스공원의 간판스타이다. 자연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사암을 멋지게 조각해 놓았다.

 

델리킷 아치와 같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자연물은 바위, 햇빛, 바람, 황야나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저 밖의우리의 세계보다 훨씬 오래되고 더 크고 더 심오한 다른 세상, 인간의 작은 세계를 둘러싸고 떠받쳐 주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어린아이처럼 경이로움의 세계를 보며, 우리의 여행이야말로 신기하고 대담한 모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에드워드 애비가 델리킷 아치를 극찬한 말이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은 오른쪽에서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아치의 폭은 15미터, 높이는 20미터. 아치를 통해서 드라이 메사의 가장자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라살(La Sal)산맥의 봉우리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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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오른쪽에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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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큰 바위에는 인디언들이 남겨놓은 그림도 남아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수백 수천 년 전 누군가가 쪼아내어 날카롭게 날을 세운 돌조각들, 아나사지족 인디언들이 만든 돌연장이 발견된다고 한다. 드물게는 온전한 화살촉이나 아파치의 눈물이란 별명을 가진 반투명의 흑요석으로 만든 도구들도 눈에 뜨인 적도 있고, 협곡지대에는 석화된 나무들도 흔하다고 한다. 나무의 모양, 결 등이 세세하게 보전된 돌은 무지개가 박힌 사막의 보석, 귀하고 비싼 보물이다.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 사람들의 눈빛이 변한다고 한다.

 

암벽에 남겨진 그림은 돌을 쪼아 새긴 암각화(petrograph)와 물감을 사용해 그린 암벽화(pictograph)가 있다. 그림들은 새와 뱀, 사슴 등의 짐승, 인간, 반 인간, 초인의 형상, 그리고 추상적이거나 상징적인 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암각화와 암벽화들은 오랜 시간에 걸친 서로 다른 문화의 소산이다. 사진의 그림에는 말을 탄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남서아메리카에 스페인들이 도착하고 난 이후의 그림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메리카에는 말이 없었으니까. 하여튼 이 그림들은 에드워드 애비의 말마따나 세계 최초의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소리 없는 목소리이다.

 

아치스의 인디언들은 700년 전에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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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뱀처럼 길게 늘어진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려고 일찍들 올라왔다 가서인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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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집, 패스화인더(Pathfinder)는 우리를 이곳저곳으로 데려다주고 잠자리가 되어줄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에게 시원한 쉼터를 제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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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치스를 뒤로 하고 또 길을 떠났다.

 

아치스 국립공원의 입장료는 차량 당 25, 개인 입장은 10불이고 캠핑장은 25불에서 100불 사이다. 이곳의 캠핑장 사용료는 물이 귀해서 그런지 좀 비싼 편이다.

 

국립공원 개발에 대하여 에드워드 애비는 상당한 불만을 토로했다. 1916년 설립된 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공원을 미래 세대들이 즐길 수 있도록 보전하면서 일반시민들이 이용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공원관리청은 산업적 관광의 압력에 밀려, 국립공원의 오지까지도 도로를 포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찾아와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자연은 훼손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은 공원의 진짜 보물들을 발견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더 이상 자동차를 공원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큰 주차장까지는 자동차로 오되, 다음부터는 자전거, 승마, 도보로 공원을 즐겨야 하며, 하이킹, 탐험, 오지 배낭여행 등을 장려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공원과 관련된 도로건설도 그만두자는 얘기다.

 

그리고 공원관리자들을 사무실에서 끌어내서 일을 시키자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현장을 누비며 도시인들을 안전하게 안내하고 공원 내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의 탈출관리법을 인지시키는 등 공원 내의 리더로 육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른 비용은 도로건설 등에서 절약되는 비용으로 충당하자고 첨언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나라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국립공원, 산림청의 휴양림 등에서 생각해볼 사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치스의 에드워드 애비(1927-89)와 요세미티의 존 무어(1838-1914)를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두 사람 모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와 함께 거론되는 자연주의자, 환경운동가이며, 이들이 살았던 시기가 90년 정도의 차가 있기는 하지만, 각기 아치스와 요세미티에서 보낸 여름을 주제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곳의 동식물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글을 썼다. 무어는 인디언을 싫어하고, 천렵을 가증스러워한 반면, 애비는 인디언과의 생활과 천렵을 즐겼다. 그만큼 무어는 순수파라고 한다면 애비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괴팍한 본능의 소유자이고, 자연운동의 방법에 있어 적극적인 에코타지 선도자였다. 무어는 시에라클럽을 결성하여 죽을 때까지 회장 직을 맡으며 환경운동을 펴나간 반면, 애비는 다양한 사회생활을 거친 전문 작가로 볼 수 있겠다.

 

관련 작품들을 읽어보아도 무어의 나의 첫여름은 잔잔한 글인 반면, 애비의 태양이 머무는 곳, 아치스는 그의 개성이 톡톡 튀는 글이며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글이다. 아치스 레인저로서의 일상적인 생활 외에, 콜로라도 강을 보트로 탐험한 경험, 캐니언랜즈 메이즈지역 탐사, 하바수파이, 투쿠니키바츠 등 야영 등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애비는 친절한 공원지킴이는 아니었다. 바보 같은 선글라스를 벗어 버려라, 빌어먹을 카메라를 내던져버려라, 브래지어를 벗어버리고 쭈글쭈글해진 그 젖통에 햇볕을 쬐라, 어린애들을 답답한 관 속 같은 자동차에서 내보내라는 등 그의 머리 속에는 항상 이러한 말들로 들끓고 있었다.

 

코카콜라 어디서 팔지요?”하면

물 한잔 마시겠습니까?”하고,

도로는 도대체 언제 포장하지요?”하면

제가 이곳을 떠나기 전날 할 겁니다.”하고,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죠?”하면

방금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오신 길로 나가야 합니다.”하고.

 

 

9. 원시의 골짜기, 캐니언랜즈 국립공원과 콜로라도 준공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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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운전하는 임목사, 장거리 운전에 연상의 식구들 식사 챙기랴 보통일은 아닐 게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도 벌여놓은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교회에 대한 이슬람의 도전과 교회의 대책이란 세미나를 진행 중이었다. 종교관련 신문 방송의 일 만도 벅찰 터인데.

 

아치스공원을 빠져나올 때, 일전에 이 공원에서 불법체류자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는 공원에 왔던 관광객들이 하객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정말 어려웠다고 했다. 부인이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중절을 하려고 했었지만, 병원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났고 말았더니, 다행히 아이는 잘 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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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세트에서 담소하는 친구들을 보니 수염이 제법 자랐다. 예상 외로 많은 친구들이 수염을 기르면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까, 남성미가 좀 돋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갖고 있는가보다. 세 사람은 모처럼 그 기회를 맞아 시도를 하고 있지만, 마나님들이 산 도적으로 변한 친구들을 좋아할지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이날이 1015일이니, 여행을 시작한지 열하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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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할 즈음 캐니언랜즈 국립공원(Canyonlands National Park)에 입성했다. 아치스 국립공원에서 191번 도로를 남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바로 캐니언랜즈이다. 아치스에서 30분 거리, 42키로 미터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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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를 지났는데도 공원의 길은 강원도 길 못지않게 돌고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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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뷰 포인트(Grand View Point)에서 보는 캐니언랜즈의 전경은 광활하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랜드캐니언은 두 번째 방문이어선지 큰 감흥은 없었는데, 캐니언랜즈는 가식 없는 원시의 자연이랄까 앞으로 펼쳐 있는 드넓은 광야는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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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의 높이는 1,850미터.

 

콜로라도주 북부의 로키산맥에서 발원한 콜로라도강과 와이오밍주 서부 윈드리버산맥에서 발원한 그린강이 오른쪽 위에서 합류한다.

 

좌측에는 라살산맥(La Sal Mountain), 가운데는 아바호산맥(Abajo Mountains)이 멀리 보였다. 하얀 사암으로 된 가장자리(White Rim Sandstone)가 둘레를 이루고 있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White Rim Road)이 있고, 자연의 침식작용에 의해 움푹 파진 분지(큰 웅덩이)가 모뉴먼트 베이신(Monument Basin)이다.

 

오른쪽 중간 흰 부분이 옛날 우라늄을 실어 나르던 길이다.

콜로라도 강과 주변에는 은, , 아연, 납 등의 광산들이 산재했었는데, 상업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 암석은 카노타이트이었다. 녹황색의 광석인 카노타이트는 라돈가스, 바나듐, 우라늄을 함유하고 있는 광석이다. 냉전으로 수요가 높아지자, 탐사작업은 이곳에 집중되었다. 떼돈이 왔다 갔다 했고 이것과 관련된 일화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는 채광이 아니라 광산권과 광산회사의 주식을 매매하는데서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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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주 동남부에 있는 이 공원은 유타 주에서 제일 큰 공원으로 천하일품의 경치를 자랑하지만, 여름은 덥고 겨울에는 추운 황무지 중의 황무지이다. 길 만들기가 쉽지 않고, 식수 공급이 어려워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여준다. 넓이는 1,366제곱키로, 서울의 두 배가 넘는다.

 

강들이 조각한 환상적인 수많은 계곡과 산들, 그 사이에는 황량함 만 떠돌았다.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사람은 이곳에서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되어보면 어떨까 모르겠다.

 

(캐니언랜즈 지도)

오른쪽에는 콜로라도 강이 왼쪽에는 그린 강이 흐른다. 지도의 밑 부분에서 그린 강은 콜로라도에게 자기 이름을 내어주고 숨어버린다. 공원은 세 지역으로 나뉘는데 Y자형의 위가 하늘의 섬(Island in the Sky), 바른쪽이 뾰족한 봉우리들(The Needles), 왼쪽이 미로(Maze)이다.

 

세 지역을 모두 구경하려면 몇 백 키로 미터를 달려야 하고, 메이즈(미로, 迷路)지역은 이름 그대로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하이킹 코스의 하나이다. 물론 도로포장도 안 되어 있고.

 

남쪽 입구 가까이에 그랜드 뷰 포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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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된 절벽들 어디엔가 인디언들의 집이 있고, 인디언들이 괴성을 치며 말을 타고 달려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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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곳에 직선과 곡선을 그어 놓았다. 그러나 이곳의 그린 강과 콜로라도 강을 건너는 도로라던가, 캐니언 구역 간을 연결시키는 도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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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세상 너머 왼쪽에는 라살산맥이 조그마하게 자태를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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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강 주위에는 남북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은 외팔이 포웰(John Wesley Powell)소령의 발자취가 안 미치는 곳이 없다. 그는 1869년 나무보트를 타고 그린 강에서 시작하여 캐니언랜즈, 글랜캐니언을 흘러 그랜드캐니언까지 무려 3개월 동안 탐험을 하였다. 여행 도중 하도 고생이 극심해, 탐험대 일부가 탐험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인디언에게 쫓겨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포웰은 진정한 모험과 탐험의 세계를 열었고, 에드워드 애비 등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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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1,800미터의 그린 강 전망대(Green River Overlook)에서 내려다보니, 그린 강과 그가 과거에 만들었던 발자취가 깊게 패여 있었다. 지금은 오랜 가뭄으로 나약해 보였지만.

 

뒤쪽 가운데 봉우리가 에커(Ekker Butte), 그 왼쪽 희미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이라테라이 버트(Elaterite Butte). 오른쪽 산등성이의 끝부분에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의자가 있다는데,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다.

 

그린 강이 메이즈(Maze)지역으로 흐르는 것을 보니, 그린 강이 콜로라도 강 보다는 더 와일드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강의 길이로 보면 콜로라도 강은 그린 강의 1.3배인 2,330키로 미터나 되며, 그랜드캐니언을 지나 캘리포니아 만에 다다른다. 세계 4대 강의 하나인 미시시피강의 길이, 6,210키로 미터의 4/10도 안되지만.

 

캐니언랜즈는 태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기원전 12세기부터 서부에 살았던 아나사지(Anasazi)족의 후손들인 프에브로인의 손자국(Handprints)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곳은 서부 국립공원의 종합선물세트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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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떠나 다음 목적지 콜로라도 준국립공원(Colorado National Monument)으로 가는 길, 황혼이 붉게 타올랐다.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은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에서 관리하는 공원으로, 국립공원(National Park)보다는 한 단계 낮은 등급의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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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타와 콜로라도 경계에 있는 레스트 에리어(Rest Area), 콜로라도 웰컴센타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하루 유하기로 했다. 정부는 고속도로 상에 차량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차들이 하루 밤 쉬어갈 수 있게 했다. 미국 내륙수송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화물차량들이 많이 이용한다. 방범시설, 화장실 등이 잘 구비되어 있고, 경찰들이 순찰도 돌고 있다.

 

우리는 요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일곱 명 전원이 차 안에서 자게 되었다. 차숙(車宿)인 셈이다. 나이들 먹어 대부분 코를 심하게 골았고, 나처럼 자다가 화장실을 자주 가는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불편을 주게 되었다. 텐트 안에서 자면 없을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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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질수록 차량의 수는 늘어났지만, 아침이면 언제들 떠나버리는지 공간이 텅 비어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여자 형제만 열두 분이셨다. 외할아버지는 한의사이셨다는데, 정력은 세셨는지 모르겠지만, 재주는 없으셨던 것 같다. 끝에서 두 번째 이모님은 대학교 때까지 영어콘사이스 만 끼고 사셨는데, 미국에 오셔는 큰 트럭을 모셨다. 보수는 좋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모님의 성격을 보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허지만 일본사람과 결혼해 잘 사셨던 것 같다. 슬하에 아이들은 없었으나 두 분의 금슬이 너무 좋았다하고, 이모님이 돌아가시자 바로 이모부님도 돌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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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웰컴센타 안은 완연히 가을이었다. 비록 시 한 구절 볼 수 없는 센타였지만, 잘 가꾸어진 풍경 자체가 멋진 시 한편이었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중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휴게소나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불안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 편안함이나 습관 또는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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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안에는 월남참전을 기념하는 공간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월남전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망신살이 뻗친 일이었는데-- 이들의 국기 사랑은 알아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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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일 오전, 우리는 콜로라도 주에 있는 콜로라도 내셔날 모뉴먼트에 안착했다.

이곳은 아치스공원에서 80키로 미터 동쪽에 위치해 있다.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와 콜로라도 주 덴버를 연결하는 70번 후리웨이를 타고 후루이타(Fruita)주변 19번 출구나 28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 캐니언랜즈에서 2시간 거리, 178키로 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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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내려다보면, 가느다란 콜로라도 강의 줄기가 보였다. 상류는 상류인가 보다, 물줄기가 가는 것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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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아래로는 이곳과 연결되어 있는 잘 포장된 길이 보였다. 이곳의 도로도 주위의 색깔에 동화가 되었는지 붉게 물들었다. 설명을 안 들어도 이 도로를 건설하는데 얼마마한 힘이 들었고, 적지 않은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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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 갑자기 나타난 산양도 우리를 즐겁게 했다. 선한 눈동자를 보면 그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산양들은 바위투성이 깊은 산에 살며, 번식시기를 빼고는 암 수가 따로 무리를 지어 산다는데, 무리를 이탈한 놈인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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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공원의 한 가운데, 대표 명물인 인디펜던트 모뉴멘트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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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처음으로 등반했던 유명인사는 존 오토(John Otto)였다. 이곳 풍광에 반했던 그는 1907년부터 이곳이 국립공원이 지정되도록 꾸준히 노력했으며, 그 결과 콜로라도 내셔날 모뉴멘트가 탄생되었다.

 

1911, 그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뉴햄프셔 출신의 베아드리체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던 날, 인디펜던트 모뉴멘트에 올라 성조기를 꽂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두 달 만에 이곳을 떠났고, 그의 순애보는 그침이 없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거들떠보지를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30년 이곳의 공원지기를 은퇴하고는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베아드리체라는 이름은 자고로 사나이 가슴을 울리는 가보다.

 

결혼식 날 성조기를 꽂았다고 하니, 결혼기념일이면 집 앞에 태극기를 게양하여 주위의 찬사를 받는다는 선배 한 분이 생각나 공연히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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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마나 모뉴멘트들은 그의 애달픈 순애보를 아는지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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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이 있는 풍경은 그림자마저 길게 늘어트려져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존 오토의 마음이 이곳에 떠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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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난장이들 집 같기도 하고 인디언들 집 같아 보이는 붉은 기둥들이 있는데, 코크 오븐스(Coke Ovens)라 불려진다. 햇빛이 비추인 모양이 꼭 코크스를 태워 오븐을 덥히는 화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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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티스츠 포인트(Artists Point)로 이동하여 절경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베아트리체가 그림을 그렸던 곳일까? 아마 다양한 바위들의 색, 그 색과 조화된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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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은 이집트 분위기였고, 왼쪽 상단에는 미라가 누워 있었다. 이곳은 박쥐의 집단서식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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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광을 마치고 큰 뱀 길(Serpents Trail) 트래킹에 나섰다. 1950년대까지 사람들이 애용했던 몹시 길고 꼬부라진 길(Crookedest Road)이다. 이 길 위에서 경치를 즐기는 사람, 건각을 자랑하며 뛰는 육체파 여자 등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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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아래편에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후루이타(Fruita)마을이 잠자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마을이었다. 후루이타는 기후가 좋아 과수원이 많고, 산악자전거, 트래킹 등 아웃도어의 천국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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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빠져나오는 길, 주위의 바위들 모양과 잿빛의 느낌이 좋았다. 허지만 기막히게 좋은 공원들만 보아온지라, 이곳을 둘러보는 데는 너무 소홀했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이제 웬만하면 보는 것들이 모두 시시해보이고 마음도 덤덤해졌다.

 

콜로라도 모뉴먼트의 입장료는 차량 당 10, 도보 입장은 5불이고 캠핑하는 데는 하루에 10불로 좀 헐한 편이었다. 준공립공원이라 국립공원과는 차별화된 것 같았다.

 

여태까지 보아온 대로 건조한 사막지대 풍경이 많았다. 그 넓은 대지가 개발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미국은 잠재력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다. 네바다, 애리조나, 유타 만보면, 남한의 8배 넓이에 인구는 겨우 12백만 명, 인구밀도를 보면 1제곱키로 미터 당 15(미국 평균 34)으로 우리나라 513명의 1/34이다.

 

에드워드 애비는 사막은 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주 적당하게 있을 뿐이라고 했다. 물과 바위와 모래가 적당하게 유지됨으로 식물과 동물, 집과 마을, 도시의 간격이 충분하게 유지된다. 그럼으로써 건조한 사막이 미국의 다른 지역과 아주 다른 곳이 될 수 있다. 이곳에 도시를 세우지 않는 한 물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이곳은 도시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막의 웅덩이에는 많은 동식물이 사는데, 포유동물 간에 물을 두고 다툼이 없다고 한다. 사슴, 스라소니, 코요테, 여우, 토끼, 큰뿔양, 야생마 등 찾는 순서가 있고 이들 간에 휴전이 잘 지켜지고 있고, 그들은 물을 마시러 오는 것이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과 같이 큰 나라에서는 애비 같은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이 잘 먹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서부가 없다면, 산업화에서 도피처를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구하겠냐는 생각도 든다.

 

 

10. 콜로라도 강의 발원지, 로키산맥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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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모뉴먼트를 벗어나니, 이제야 겨우 사막을 벗어난 기분. 수채화 같은 풍경들이 차창을 스쳤다. 우리가 마지막 방문할 국립공원, 로키산맥국립공원(Rocky Mountain National Park)을 향하여 달렸다.

 

우리의 여행도 13일째, 절반을 넘어 성숙기를 지났나보다.

 

미국의 역사적 성숙기는 남북전쟁이 끝나고부터 1900년까지라 할 수 있다. 성숙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독립이후 90년 정도 되는 시기이다.

 

1865년 전쟁이 끝나자 링컨대통령은 피살되었고 미국은 극도의 혼란기로 빠져들었다. 북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랜트장군(Ulysses Simpson Grant, 1822-1885)1869년 대통령이 되어 8년간 나라를 이끌어 갔으나,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혔다. 뇌물, 권모술수, 부패와 무질서가 횡횡하던 시대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독립된 지 70년 쯤 되는 요즈음이나 비슷하다 할까.

 

1873-76년 경제파산을 겪은 미국은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고, 풍부한 자원과 유럽으로 부터의 우수한 노동력 유입에 더하여 에디슨 등의 우수한 발명가들의 공헌에 힘입어, 미국의 공업생산은 전 유럽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시기에 록펠러, 카네기, 모건 등 대재벌이 태어났으나, 농민, 노동자의 불만이 가득한 시기였고, 어쨌든 미국은 세계 최대 강국으로 성장했다.

 

월트 휘트먼은 민주주주의 전망(Democratic Vistas)’이라는 수필에서 19세기 말의 미국의 고삐 풀린 물질시대의 부()와 산업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했었다.

 

(로키산맥국립공원 가기)

지도로 보면 우리는 좌측 하단 그랑융타운쪽 후루이타에서 70번 도로를 탔었다. 70번 후리웨이를 달리다 아이다호 스프링즈(Idaho Springs)마을을 지나, 40번 도로로 바꿔 타고 북쪽으로 향하여 최고점 3,450미터를 찍었다. 그리고는 비탈을 내리 달리다 그랜비(Granby)마을에서 34번 도로로 죽 가면 로키산맥국립공원이다. 콜로라도 모뉴먼트에서 6시간 거리, 거리는 475키로 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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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모뉴먼트를 떠난 지 네 시간, 본격적으로 산림들이 이어졌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풍경들이 나타났다. 벌써 겨울의 냄새를 풍기며 자작나무 숲이 파란 하늘과 어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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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침엽수림군락이 나타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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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키산맥의 준령들이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고, 더불어 높은 산악지대의 특징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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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우리는 그랜비(Granby)타운에 들어섰다. 그랜비는 고도 2,380미터에 위치해 있고, 국유림에 둘러싸여있어 기막힌 경치를 자랑한다. 그리고 서부 특유의 사람을 환대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산골 마을이다. 주위에 그림자 산(Shadow Mountain), 그랜비 호수 그리고 그랑레이크(Grand)호수가 있다.

 

그랜비는 스포츠의 천국이다. 하이킹, 골프, 산악자전거, 보트타기, 래프팅, 승마, 사냥 등을 즐길 수 있으며, 겨울에는 다운힐 스키(Down Hill Ski), 크로스칸트리 스키(Cross Country Ski), 얼음낚시, 개썰매 등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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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소떼들 뒤의 건물들은 소들의 아파트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주택가에 있으면 이들의 냄새가 심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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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대 마을은 차분하면서 확 트여 있었고, 우리나라 스키촌과 같이 숙박시설, 스키용품점 등이 줄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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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늦가을 냄새가 풍기는 산길을 달렸는데, 그랑레이크 등 프랑스 냄새가 나는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초기에 프랑스인들이 정착했나보다.

 

단풍이 져가는 큰키나무 뒤에는 큰 키 침엽수림, 다음에는 작은 키의 침엽수들이 높은 곳까지 진출해 있었고, 맨 위는 툰드라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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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설립 100주년을 자축하고 있었다. 공원입구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완연히 여행에 지쳐버려 몸조차 간수하기 힘들어 보이는 노인네 여섯이 있었다. 기후도 초겨울로 바뀌었고 여행도 13일째로 들어섰으니 지칠 때도 되었다. 그나마 안락한 여행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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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장에 자리를 잡고 식수시설을 찾아 인근에 있는 공원사무실을 찾았더니, 직원들은 이미 퇴근을 한 후였고 9월말부터 단수한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9월부터 겨울이라니.

인근의 화장실에 들려 패스화인더로 가는 지름길을 익혀두려니, 겨울바람이 어둠 속을 뚫고 쌩쌩 울며 지나갔다.

 

로키산맥은 캐나다, 미국, 멕시코를 잇는 대륙의 등뼈이다. 산맥의 중간 부문을 떼어 공원화했는데 넓이는 캐니언랜즈 국립공원과 비슷하다. 고도는 2,300미터에서 4,345미터(Longs Peak)이다. 3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98개나 된다. 관광객은 연 3백만 명이 넘고, 콜로라도 주 수도인 덴버에서 100키로 서북쪽에 위치한다.

 

이곳도 20억 년 전에는 바다 밑이었다. 15억 년 전 바닥이 솟아서 로키산맥의 토대가 이루어졌고, 이곳에서는 4천만 년 전의 빙하의 잔재를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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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둘러 무인 판매기로 장작을 구해 와서 불을 지폈다. 추위 속에서 몸은 오그라들었고, 몸을 녹이려고 불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해보는 캠프 화이어. 그동안 시간적으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새빨간 숯불을 만들어 고기를 구우니, 주대감이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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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텐트 속에서 밤을 지낸 사람은 손사장과 호텔리어. 호텔리어는 그 추운 밤에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삼각대도 없이 별을 멋지게 찍었다.

 

로키산맥과 인연이 깊은 동물학자이며 작가, 그리고 화가였던 사람이 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Earnest Thomson Seton, 1860-1946)이 그이다. 어려서 대자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박물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화가가 되길 원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가가 되었다. 화가로서의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로키산맥에 들어가, 야영생활을 하며 야생동물의 관찰에 힘을 써 동물기를 씀으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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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의 동물이야기 중 샌드힐의 수사슴을 보면, 한 겨울 깊은 산 속에서 벌어지는 쫓기는 사슴과 쫓는 사냥꾼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냥꾼 얀은 눈 속에서 잠을 청하지만, 개처럼 되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개처럼 얼굴에 털이 나고 털북숭이 꼬리가 있어 얼음장 같은 손과 발을 감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숲에서 보내는 밤은 진저리나게 추웠다. 겨울의 정령이 눈 위로 다가오고, 하늘의 별도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고, 나무며 땅이 모두 혹독한 추위에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오랜 추격 끝에 그와 사슴이 얼굴을 마주 했을 때, 멋진 사슴은 이미 탈진 상태에 있었지만, 사슴은 조금도 움찔하지 않고 그 커다란 귀와 슬픔이 가득차고 진실된 눈으로 얀을 바라보았다. “, , 지금이라구!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고생한 거잖아,”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져 갔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동안 얀은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를 느끼고 녀석의 생명을 빼앗을 자신이 없어졌다. “네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 준다면, 그래서 오늘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야수 같은 마음을 내 가슴 속에서 모조리 몰아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면 마음의 창이 조금이나마 열리고, 현자들이 갈구하던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거야. 나는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았어.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겠지. 안녕!”하고 얀은 사슴과 결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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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침엽수림 위로 예쁜 분홍색 구름 띠들이 광휘를 발휘하고 있었다. 사막지대와는 전연 다른 풍경이었다. , 자연의 신비로움이여. 기온은 물론 영하로 한참 내려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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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하도 추우니 아침부터 불을 지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아침에 캠프 화이어를 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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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볕이 들자 로키산맥의 품안은 따뜻해져왔다.

어디서 슬림 휘트맨(Slim Whitman, 1924-2013)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로키산맥에 봄이 오면(When it's springtime in the Rockies ), 나는 그대 품에 돌아가리(I am coming back to you)--

그러나 봄은 멀기 만했고.

 

10월 중순부터 5월 하순까지 우리가 가는 길, 트레일 릿지 로드(Trail Ridge Road)는 폐쇄된다. 이 길은 높이가 3,350미터 이상이나 되고 길이는 18키로 미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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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없는 산(Never Summer Mountains) 앞에서 주대감이 포즈를 취했다. 여름이 없는 산은 공원의 북서쪽 경계에 있는 로키산맥의 7개 산줄기를 말한다. 로키산맥국립공원은 여름철에 특히 인기가 있어, 그때는 캠핑장이 항상 만원이라고 한다. 여름이 없어 여름에 인기가 있는 산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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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니 Poudre호수 한쪽에서 오리 세 마리가 잔물결을 일으키며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예술가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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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높이 3,695미터에 위치하고 있는 썰렁한 알파인 방문자센터에 도착했다. 센타 지붕의 위로는 흰 구름들이 멋진 유희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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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타는 문이 굳게 닫혔고, 'CLOSED FOR SEASON'이라고 쓴 팻말이 썰렁하게 걸려 있었다. 센타의 이곳저곳에는 눈이 왔을 때 적설량을 알 수 있는 긴 장대들만 멀대들 마냥 뻗쳐 있었는데, 눈이 오면 지붕이 안 보이는 수가 다반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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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강원도의 민둥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센타의 뒷동산을 올랐다. 입에서는 입김을 내면서 적막하고 차디찬 공기를 헤치며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적막강산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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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수목이 없는 툰드라지대, 이를 보호하자는 팻말이 꽂혀 있었다. 툰드라지대 밑은 아한대성 수목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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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을 내려다보니 우리가 타고 온 패스화인더 그리고 승용차 두 대가 호젓하게 센타를 지키고 있었고, 부드러운 능선들 위로는 따뜻한 햇볕이 비추고 있어 로키산맥은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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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에서는 일착으로 12천 피트(3,659미터) 정상을 훔쳤다. 콧등이 얼마나 시려 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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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 승용차 두 대는 언제 떠났는지 안 보이고 하동에서 온 겨울 나그네가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주차장의 패스화인더나 사나이나 무척이나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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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타의 아래 곳곳은 단단하게 결빙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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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트레일 릿지 로드(Trail Ridge Road)를 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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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이 흰 눈 쌓인 바위투성이 로키산맥 풍경을 감상하였다.

 

고산지대는 5월이 봄이라는데, 11월부터 4월까지는 기나긴 겨울밤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곳의 자연은 혹독한 여섯 달 동안 자신의 기쁨을 아껴두었다가, 마침내 자신이 빚을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갚는다고 한다. 잃어버린 여섯 달 동안 자라났어야할 온갖 꽃들이 한 번에 빛을 뿜어내어 그동안 밀린 기쁨을 보상한다고.

 

그리고 봄이 되면, 로키산맥의 동쪽에서 부는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 치누크(Chinook)는 봄의 소나기와 겨울의 눈을 몰고 온다고 한다. 그 바람은 이 넓은 고지대에 풀을 자라게 하고, 그 풀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자라게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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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는 3,700미터의 최고지점을 통과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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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양지 바른 곳에 차를 세우고는 거인 같은 그림자를 늘어트리며, 로키산맥의 채색화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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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빽빽한 침엽수림이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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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는 설산을, 가까이는 햇빛에 붉어진 구릉을 둘러보다가, 10월 중순이면 통제되는 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음에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달려 Estes Park쪽 입구 쪽으로 나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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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느새 겨울에서 다시 노란 가을 속으로 와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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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주말이라 입구에는 공원으로 들어오려는 차량행렬이 끝이 없이 줄을 잇고 있었다.

 

로키산맥(Rocky Mountains)은 우리에겐 행운의 산맥(Lucky Mountains)이었다.

눈이 내리지 않아 통행에 지장이 없었고, 긴 차량행렬에 지친 일도 없었으니까.

 

임목사와 미국인들의 참을성 있는 줄서기, 공직자들의 내려다보는 위압적 자세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진 우리의 질서의식과 일제 경찰에서 민주경찰로 강등된 경찰들의 요즈음 처지를 보면, 일방적으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서양사회, 지금의 안정된 미국사회의 원류는 귀족주의이다. 농민 노동자 계급은 항상 줄서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고, 상류사회, 자본가에게 순응해온 것이 사실이 아니겠냐고. 흑백의 갈등, 돈 있는 자의 편이 되는 경찰, 상하의원의 귀족화 등 등. 너무 부정적인 것들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죤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보면,

그는 정부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갖은 것 같다.

 

정부는 사람을 너무도 미미하고 천한 존재로 만들어서,

자존심을 도로 찾으려면 무엇인가 애를 써야만 한다.

 

존 스타인벡은 찰리라는 애견을 데리고, 19609월에 시작하여 4개월간 30여개 주를 돌아 16천키로 이상의 자동차 여행을 했다.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미국과 현재의 미국은 갭이 있으니, 직접 나서서 미국사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자연을 알아내려고 한 여행이었는데, 무엇을 알아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20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

 

(로키국립공원지도)

로키국립공원의 지도를 보면, 우리는 좌측 최 하단에 있는 그랑레이크(Grand Lake)쪽으로 입장하여, 3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트래일 리지 로드(Trail Ridge Road)를 통과하여 다시 34번 도로로 해서 우측 상단에 있는 Estes Park쪽으로 빠졌다.

 

콜로라도 강의 발원지(Trail Head)는 좌측 상단의 34번 도로상에 위치해 있다. 우리는 그냥 모르고 지나쳐버린 셈이다. 미국사람들은 우리처럼 한강의 발원지가 어디냐 하고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는 모양이다.

 

 

11. 나이야 가라 외치며 나이아가라로

-미국 동부로 2,531키로 미터를 계속 달리는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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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순례를 마치고, 나이아가라까지의 횡단의 길을 나섰다. 대충 LA에서 콜로라도 주까지 우리가 온 거리의 두 배를 계속 달려야할 터인데,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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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풍경을 보면 콜로라도 주는 이웃 네브라스카 주에 비해 황무지가 많아 보였다.

 

이제까지의 여행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우리가 들린 공원마다 각기 특색이 있고 좋았지만, 데스벨리, 브라이스캐니언, 캐니언랜즈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멋진 사막의 색깔, 우아한 계곡의 손짓, 광활한 원시의 땅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곳들을 더 걷고 더 느껴보고 싶어진다. 자이언의 버진 강 트래킹도 해보고 싶고.

 

그리고 Canyon, Valley 모두 우리말로는 골짜기이지만 둘의 차이를 요번 여행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Canyon은 천 길 낭떠러지, Valley는 아담한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는 완만하고 정감 있는 계곡이라 표현하면 될까? 나에겐 Valley라는 단어가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중학교 때인가 애창했던 노래 ‘Down in the Valley'가 생각이 난다. 미츠밀러 합창단의 바람소리 같은 노래가 마음을 은은히 적셔온다.

 

깊은 계곡에서 바람이 전해주는 소식을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장미꽃이 태양을 사랑하듯

제비꽃이 이슬을 사모하듯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음을

하늘의 천사도 알고 있어요.

 

내게 편지를 써서

버밍험 교도소로 보내주세요.

 

그대가 편지를 쓰는 모습 볼 수 있도록

높은 성을 쌓고 있어요.

 

아마 이 가사를 지은 사람은 교도소에 복역하고 있는 죄수였던 것 같다. 그녀도 그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었는지 모르지만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얼마 전 타계했지만 친구의 동생은 뇌출혈로 입원했었다. 마침 같은 병실에는 예쁘장한 약사 아줌마가 입원해 있어, 그가 졸졸 따라다녔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걸음도 걸을 수 있는 등 한동안 상태가 좋아졌었다고 한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받아들이는지 여부를 떠나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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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의 여행을 다른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캘리포니아 만에서 부터 여행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콜로라도 강을 따라 오르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이란 노래의 내용도 와 닿는다.

 

걸어 걸어 걸어 가다보면

뜨겁게 날 위해 부서진 햇살을 보겠지

 

걸어 걸어 걸어 가다보면

어느 날 그 모든 일들을 감사해 하겠지

 

우리가 지나온 길의 햇살은 얼마나 눈부셨으며,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심오했던가. 지도를 보면 그린 강, 샌환(San Juan) , 리틀 콜로라도 강이 합쳐지는 콜로라도 강은 콜로라도 주 로키산맥에서 발원하여 유타, 애리조나, 네바다, 캘리포니아를 거쳐 캘리포니아 만까지 2,330키로 미터를 흘러간다. 그리고 로키산맥은 동서의 분수령이 되어, 서로 흐르면 콜로라도 강으로, 동으로 흐르면 옐로스톤 강, 플랫 강, 아칸소 강으로 흘러 미시시피 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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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주의 동쪽은 대평원(Great Plains)으로, 끝없는 평원에는 너른 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콜로라도 주의 넓이는 유타의 1.2, 한국의 2.7배나 된다. 인구는 유타의 1.9배인 5.4백만 명이다. 이곳을 지나는 로키산맥은 대륙의 분수계를 이룬다.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공업이 주산업이며, 육류 낙농관계 식품가공도 활발하다. 농축산업 규모도 적지 않으며, 관광업 또한 활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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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따라 초원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여행 중 미국이 더없이 부러웠던 것은 끝없이 넓은 땅 덩어리다. 그리고 어느 주를 가더라도 공업과 농업이 잘 어울러져 있다는 것이다. 질 좋은 식품을 값 싸게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일단 잘사는 나라의 요건이기도 하지만, 여러 점에서 상공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여건이 되기도 한다. 또 농업지역이 있음으로 좋은 자연환경도 유지할 수도 있고. 물론 농업의 문제는 공업에 비해 구조적으로 불리한 점이 많은 산업이라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윌리엄 히트문이 쓴 여행기, ‘시골길로 가는 미국 여행, 블루 하이웨이에서 어느 촌부는 지미 카터 대통령은 흙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걸 당당히 보여줌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했다. 미국인들에겐 땅은 옹골참, 착함, 희망을 뜻한다고 한다. 초기부터 미국역사에서 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옛날 미국 지도책에선 한가한 시골도로는 푸른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서양인과 인디언의 피를 받은 히트문(Heat-Moon)은 직장을 잃은 후, 1978년 봄부터 미국 전국일주 여행을 시작했다. 히트문은 수족 인디언 말로 ‘7월의 달을 상징한다. 그는 블루 하이웨이, 말하자면 우리나라 옛날 국도를 따라 전국의 변방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을 했다.

 

시골의 촌부, 옛 전쟁격전지의 사람들, 흑인 차별이 심한 남부지방의 흑 백인, 수도원의 신부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펼치는 대화의 내용이 흥미진진하다. 미국인의 피와 역사 속에는 먼 곳을 향해 떠나는 탐험가의 기질이 있다며, 한편으로는 여행자체를 즐기며, 또 한편으로는 인생의 답을 찾아 그는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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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벌판 한편에 검은 소들이 보였다. 초지와 목장은 끝없는 미국 풍경의 하나이다. 미국의 암소 아홉 마리 중 한 마리는 맥도널드 햄버거 점에서 생을 마친다는 기사가 있었다는데 그만큼 햄버거가 식생활에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

 

요즈음 미국의 소 값이 하락세라 우리나라 한우농가들이 걱정이 많다고 한다. 아무리 우리나라 한우고기가 맛이 있다지만,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된 소고기와 경쟁이 되겠냐는 것이다. 실제 여행 중 값싸고 맛있는 미국소고기를 많이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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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산맥국립공원을 출발하여 4시간, 네브라스카 주에 진입하였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인데, 그만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타이어가 두 개씩 붙어있는 큰 차라 다행이기는 했지만, 달릴 때는 차체가 불안하고 심하게 흔들렸다. 인근 조그만 읍의 수리점을 찾았지만, 운이 없게도 주말이라(1017) 문이 닫혀 있었다. 물어물어 고속도로 상에 있는 큰 휴게소의 타이어점을 찾았다. 점포는 커다란데 타이어를 교체하는 모양새는 영 답답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바로 해치웠을 터인데. 미국에서 차량 고장이 나면 히스패닉이 운영하는 수리점을 찾는 것이 제일 낫다고 한다. 교포들은 고치기는 잘 하지만 바가지가 세다고 하고.

 

장거리 여행에선 역시 차량고장이 제일 큰 문제이다. 타이어를 바꾸는 동안 인근에 있는 트럭운전사 휴게소를 찾았더니, 샤워장, 티비 시청방 등 각종 시설이 잘 되어 있었고, 쉬고 있는 트럭 기사들은 미식축구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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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네브라스카(Nebraska) 휴게소(Rest Area)에서 하루 밤 신세를 졌다

 

네브라스카는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두 번째 부자, 워런 버핏의 고향이다. 그는 뉴욕 월스트리트를 외면한 채 이곳 오마하를 떠나지 않고 있다 한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한 반면에 순박하고 소박한 사람들로 정평이 나 있다.

 

네브라스카 주는 콜로라도 주 동부와 마찬가지로 미국 대평원(Great Plains)위에 있다. 네브라스카는 원주민 말로 플랫 강(Flat River, 평탄한 강)을 뜻한다. 대평원지대라 역시 농축업이 번창하고 있고, 관련된 식품가공업, 농기계업 등이 강하다. 그런 만큼 우리 남북한과 비슷한 면적에 인구는 2백만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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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동서를 가르는 간단하고 명백한 구분법 중 하나는 미네소타, 아이오와, 미주리, 아칸소, 루이지애나 주가 연결되는 왼쪽 경계선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서 분기점 네브라스카와 아이오와 경계선 가까이에 와있는 셈이었다.

 

우리가 거쳐 온 곳들을 다시 한 번 더 복습해보자면, 히트문의 말대로 진정한 서부는 동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위대하고 충만하며 영향력이 크며 대단히 장엄하다. 원인은 바로 땅 때문이다. 광활한 대지는 도로와 도시, 집들과 농장,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사고방식까지 갈라놓았다. 경계선을 중심으로 서부는 확연히 눈에 띄는데, 특히 대지가 텅 비어 보일 때면 더욱 그러하고, 그때의 텅 빈 대지는 외로운 유배지처럼 인간세상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듯싶다. 그토록 광활한 벌판에 서있으면 인간은 자신이 참으로 왜소하고 우주란 실로 광대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무한한 공간은 자아를 돌아보게 한다. 광활한 대지는 인간을 하찮게 보이게도 하지만, 하찮은 미물이라도 쉽게 눈에 띄게 한다. 여행객이 쾌속 질주를 한다고 해도 이곳을 벗어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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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8시쯤 되어 아이오와(Iowa)주에 들어서니 풍경이 틀려졌다. 평지에서 완만한 구릉지대로 들어섰다.

 

사진 속에는 80번 도로는 인터스테이트(INTERSTATE)도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미국의 도로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Highway), 지방도로로 구분된다. 인터스테이트는 국가가 관리하는 고속도로이고, 하이웨이는 주가 관리한다. 인터스테이트는 대체로 도로가 널찍하고 중앙분리대 대신 잔디밭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시대(1953-61)에 고속도로가 구상되었고, 1950년대에는 하이웨이가 고작이었다. 아이젠하워는 2차 대전 참전 당시 독일 아우토반을 보고 이를 부러워했으며, 대통령이 되자 1956년에 고속도로법을 제정하여, 68천키로 미터의 인터스테이트 건설에 초석을 놓았다. 이도로의 건설에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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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Iowa)란 말은 이곳에 살던 이오와이즈(Ioways) 인디언족의 말로 졸린 사람들이라는 뜻. 이런 완만하고 부드러운 구릉지대를 운전하며 통과하려면 사람들은 무척 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평화로워서.

 

아이오와 주의 면적은 남한의 1.5배이나, 요번 여행에서 인디아나 주를 빼고는 가장 작은 주이다. 그렇지만 인구는 3.1백만으로 이웃 네브라스카 주의 1.6. 콘 벨트의 목축지대로 유색인종이 적은 주의 하나이다. 아이오와는 1803년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땅이며, 대평원(Great Plains)의 중앙에 위치한다. 동쪽에는 미시시피 강의 본류와, 서쪽에는 미시시피 강의 지류인 미주리 강에 접해 있다.

 

아이오와 주 사람들은 소박하다고 정평이 나 있고, 그래서 달걀, 돼지고기, 이곳 사람들의 인심이 주를 대표하는 상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선거 때만 되면 미 대통령을 만드는 곳으로 떠들썩하다. 민주 공화 양당의 경선이 시작되는 곳이라 이곳에서 승리를 하면 기선을 잡을 수 있어 그렇다는데, 기선을 잡는 것이 인간사에서 중요하기는 중요한 모양이다. 선거인단 538명 중 아이오와 주의 비중은 1% 정도가 되는 6명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곳 사람들은 졸린 사람들이 아니라, 눈동자가 또릿또릿하고 선거에는 달인이 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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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휴게소에 있는 러브스(Love's) 체인점에서 점심으로 막대기 샌드위치를 먹었다.

 

우리는 로키산맥공원에서 36번 도로로 빠져나와 76번 도로를 타다가, 네브라스카에서 80번 도로를 갈아타고 오하이오 주에 있는 이리호수를 만날 때까지 계속 직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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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캠핑차 여행은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책을 보기에는 눈이 너무 늙었고, 카드놀이 하기엔 이국의 정취를 느낄 기회를 잃어버리고, 진퇴양난이었다. 블루 하이웨이(Blue Highway)를 지은 히트문은 고속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지만 지루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또 지루함은 여행자의 한정된 인식 능력과 깊게 탐색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여행자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계획단계부터 횡단여행이란 목표가 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여행일자를 늘려 느긋하게 여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고. 디트로이트에서 친구를 만나 주변 구경을 하다가, 바로 디트로이트에서 예약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대륙을 횡단하겠다는 친구들 의견을 따르기로 했었다.

 

차는 일리노이 주에 들어섰다. 이제부터 뉴욕 주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는 오대호가 자리 잡고 있다. 일리노이 북동부 미시간호 연안에 있는 시카고는 뉴욕,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 큰 도시이다.

 

오대호는 서에서 동으로 슈피리어(Superior), 미시간(Michigan), 휴런(Huron), 이리(Erie) 그리고 온타리오(Ontario)호가 놓여 있다. 수면 면적이 남북한의 대략 2.5배로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호이다. 슈피리어, 미시간의 물은 휴런으로 흐르고 이물은 이리, 나이아가라, 온타리오를 거쳐 세인트루이스 강에 이르며 종국에는 대서양에 다다른다. 오대호는 10억 년 전 형태를 갖추었는데 오클라호마 화산 폭발로 고지대 분지를 이룬 것이 슈피리어 호이며 대륙빙하가 전진 후퇴하며 호수가 생겨났다.

 

슈피리어 호는 이름과 같이 나머지 호수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호수이며, 미시간 호는 세계 담수호 중 가장 큰 모래언덕을 자랑하고 있다. 휴런 호는 3만 개가 넘는 섬을 갖고 있고, 이리 호는 수온이 높아 생물학적 생산성이 가장 높으며, 온타리오 호는 가장 작으며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들의 자연환경은 너무 다양해 소택지, 바위, 평원 및 초원, 삼림, 습지와 늪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풍부한 어종과 다양한 야생동물이 살고 있고, 휴양 천국이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오대호 인근은 지하자원, 농산물이 풍부하고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 등 상공업이 발전되어 있는데다, 휴양산업, 어업 등도 활성화되어 있고 세인트로렌스 운하 등 교통체계도 잘 구비되어있어 호수 주위에 3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상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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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반이 지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고향이며 버락 오바마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주, 일리노이 에 진입했다. 도로에는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고향으로 가려면 56번 출구로 나가라는 주홍색 표시판이 있었다. 미국 곳곳에 지역 또는 나라를 위해 힘쓴 인사들을 기리는 모습들이 부럽기 짝이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이 일궈놓은 성과보다는 지역, 속해 있는 그룹, 또는 개인의 관점에서 헐뜯기만 하는데 말이다. 일리노이는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부족 Illini족의 프랑스식 표기. Illini는 남성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이로쿼이족에 의해 1680년 몰살을 당했다.

 

일리노이 남서부 세인트루이스의 위성도시 카호키아의 미시시피 강가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흙 피라미드 유적지, 카호키아 언덕(Cahokia Mounds)이 있다. 이들 흙 언덕은 80개나 되며, 가장 큰 몽크스 마운드(Monks Mound)는 밑바닥이 291미터에 236미터,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이집트 피라미드와 맞먹는 크기의 언덕이다. 이곳은 12-13세기 이곳에 살던 인디언의 정치, 종교 중심지로 멕시코 이북에서 가장 큰 원주민 거주지이었다.

 

미국의 번성했던 인디언 거주지들은 15세기에 거대한 제국을 일구었던 페루의 잉카제국, 마야문명을 계승한 멕시코 중부의 아즈텍 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양인들과의 싸움보다는 서양인들이 지니고 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의해 파괴되어 유령도시화 되었다고 한다. 서양인들의 무분별한 버팔로 사냥에 의한 인디언들의 식량부족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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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노이 주는 시카고를 중심으로 한 공업과 콘벨트 지역을 중심으로 한 농업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넓이는 이웃 아이오와 주와 비슷하지만, 인구는 아이오와의 4배인 13백만 명. 전국으로 보면 다섯 번째, 중서부에선 1위로 인구가 많은 주이다.

 

지나가는 길에 월마트를 들려 맥주를 사다가 우습지도 않은 촌극을 벌렸다. 맥주 한 박스 값을 계산하던 친구들이 지나가던 나를 불러 여권을 제시해 달라고 했다. 친구들은 모두 여권을 임목사한테 맡긴 터이고, 나이 지긋한 할머니 종업원이 미성년인지를 확인하는 절차로 여권을 보여 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할머니한테는 무척이나 젊어보였나 보다. 우리에게 50대 여인들도 젊은 여인으로 다가오듯이.

 

할머니에게 내 여권을 보여주었더니, 맥주를 사서 남을 주는 것도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이웃 종업원에게 동의를 구했다. 허기야 맥주를 사서 현장에서 바로 미성년에게 주면 안 되겠지. 옥신각신하다 해결은 했지만, 미국에서 원칙은 원칙이니까. 그러니 공무의 경우는 얼마나 답답할까 이해가 갔다. 존스타인벡이 정부에 대해 말한 것도 지나친 것이 아닐 것이다.

 

이곳 월마트에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돕는 차원에서 이들을 고용한다고 하니 다소 불편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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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일은 인디아나 주에 들어서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트럭운전사들은 자기네들 주위와는 떨어져 사는 사람들로서 그네들만의 특수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동료끼리는 친절하고 조력을 아끼지 않는 것도 특색이고. 이들은 열렬한 라디오청취자이기도 해서 뉴스, 정치판 이야기에는 훤한 편이다. 또 사색(思索)을 할 여유가 많아 생각은 과거의 시간에서 미래까지를 수시로 왕래한다. 단 사색은 사색에 그치고 말지만. 그러나 이들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선원들처럼 휴게소 이외 그들이 다니는 곳과는 별로 접촉이 없다. 그러니 이곳저곳을 다니더라도 여행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윌리엄 히트문은 여행 중 여간해서는 트럭 휴게소로 들어가지 않았다. 트럭운전자들은 공공연히 고속도로의 개자식들하며 위선적으로 말을 하고, 재생타이어가 시속 70마일에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말 등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그들은 커피와 칠레고추로 잠을 떨치려고 하고 간밤에 계집 생각으로 눈이 충혈되어 있기도 하며 뭇사람들의 영웅이 되어보려고 우스운 짓거리를 하기도 한단다. 이러한 운전사들을 그가 싫어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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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나 주도 통과하는 구간이 짧았다. 인디아나는 일리노이와 마찬가지로 미시간 호수와 접해 있다.

 

통상 고속도로(highway)에서의 최저속도는 45마일(72키로)이며 최고속도는 80마일(128키로)이다. 서부 쪽은 별도로 내는 통행료가 없으나, 인디아나, 뉴저지부터 요금이 징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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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엔 유난히도 많은 갈대가 휘날려 가을의 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인디아나라는 말은 인디언 땅이라는 뜻. 이곳에 살았던 선사시대의 주민들은 미시시피 강 유역과 마차가지로 흙 피라미드를 쌓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마운드 빌더스(Mound Builders)이었다. 이곳의 원주민은 대부분 마이애미 족이었으나, 동쪽 인디언들이 서양인과의 싸움에서 밀려 이들을 밀어냈고 결국 이들도 서쪽으로 밀려 나갔다.

 

인디아나 주는 요번 여행 중 면적이 가장 작은 주이다. 면적은 남한보다 조금 적으나, 인구는 아이오와 주의 2배가 조금 넘는 6.6백만 명. 아이오와 주의 면적은 인디아나의 1.5배이다. 동부 미시간호의 남쪽에 위치하여 교통이 발달한데다, 석탄, 석유, 석회석이 풍부하여 공업화가 상당히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곳의 땅은 산지가 없는 평탄한 지역이라 전형적 콘 벨트 지역이고, 따라서 목축업도 번성하고 있다.

 

이웃 주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프랑스인들이 모피교역을 목적으로 처음 진출하였으나, 뒤를 이어 들어온 영국과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프랑스가 패퇴한 이후 영국령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인디언이 서양인들에게 밀려 쫓겼던 길을 역행하고 있는 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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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풍경이 붉은 단풍으로 바뀌었고, 우리들도 그때 서야 가을의 무드로 젖어들었다.

 

미국 하이웨이 위를 달리려면 더 한 층의 정력, 통제력, 주의력, 족력(발의 힘)이 요구된다.

앞과 뒤 그리고 옆으로 화물선만한 트럭이 쌩쌩 지나가면 온몸이 움츠러들며, 백미러, 사이드미러 특히 교통표지를 주의 있게 보면서 가노라면 어깨, 목의 근육은 굳어지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발은 쥐가 나기 십상이다. 그러니 초행자에게는 연도의 풍경을 볼 여유가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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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대통령의 고향, 오하이오(Ohio) 주에 진입했다. 고향사람들은 이곳출신인 그를 자랑스러워할까? 아마 북군의 총사령관으로의 그를 기억하겠지만, 부패한 정권의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잊어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뉴욕 리버사이드 공원에는 그의 기념관이 있고 어마어마하게 큰 돔 아래 그랜트 부부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의 이름은 그랜트장군 기념관(General Grant Memorial)이다. 미국사람들은 그의 대통령시절 잘못한 점은 생각하지 않고 장군으로서 그를 기리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독재자로서의 이대통령, 박대통령을 부각시키고, 그들의 공은 인정치 않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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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연변에는 오하이오의 아름다운 강, 마우미 강(Maumee River)이 흐르고 있었다. 이강은 오하이오와 인디아나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 이리호로 흘러들어 간다. 오하이오는 이로쿠아족의 말로 크다는 뜻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마우미 강은 오하이오 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엄청나게 수량이 많은 큰 강이었다.

 

이리호의 아래쪽에 위치한 오하이오 주는 풍부한 자원과 이리호로 연결되는 수송시설 덕분에 미국 초기에 가장 공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더불어 주의 2/3가 농경지로 농축업도 활발하다. 면적은 남한의 1.1배이지만, 인구는 중서부에서 1위인 일리노이보다 조금 못 미치는 11.6백만이지만 인구밀도는 훨씬 높다.

 

아이오와, 일리노이, 인디애나, 오하이오 주는 미국의 농업핵심지역이라 할 만큼 강우량, 토질조건이 좋은 지역이다. 또 한편으로 인디애나,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뉴욕, 매사추세츠 등의 동부지역은 제조업핵심지역이다. 양쪽이 겹쳐지는 인디애나, 오하이오는 복 받은 지역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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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로 빠지는 길 안내판이 나왔다. 저 길로 바로 빠지면 우리가 귀향할 비행기가 뜨는 곳이다. 그렇지만 횡단을 마치고 뉴욕에서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다.

 

80번 도로를 조금 더 가면 클리브랜드로 빠지는 출구가 있다.

클리브랜드는 오대호의 주요 항구이며, 오하이오 주 최대의 상공업도시이다. 오하이오가 일찍이 공업이 발달한 지역인지라, 이곳 사람들은 개방적이고 외향적이다. 최근에도 이지역의 눈부신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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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야, 저리 가라외치면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가는 길은 사람을 지치게 하는 길이었다. 타고 먹고 타고 먹고 자고, 반복되는 34일의 일정은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없이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마실 수 없는 두 사람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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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브랜드를 지나니 차량은 이상하리만큼 소강상태가 되고 길은 전형적인 시골동네의 길 이었다. 한적하고 평화롭고. 클리브랜드가 얼마나 크며 중요한 도시인 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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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의 하늘엔 양떼들로 가득 차있었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에 동화된 인디언의 시 둘을 음미해보았다.

 

(나는 천 갈래의 바람)

 

(라코다족의 시)

 

아메리카에서 전 세계로 유행병처럼 퍼져나간 담배에 관한 인디언 전설이 있다.

 

옛날 마음씨는 고우나 얼굴이 곱지 않은 인디언 소녀가 살았는데, 부모에게서 조차 따돌림을 당해 그만 자살을 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다음 생애엔 모든 남자와 키스하고 싶어요.’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져 그녀가 죽은 자리에 풀 한 포기 돋아났는데 그것이 담배라는 인디언 전설이다. 요즈음 그녀는 동성애도 마다않는지, 많은 여인들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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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양떼구름은 먹구름이 되어 몰려갔다. 오하이오의 바람은 세기로 유명이 났다. 북쪽에는 이리호, 동쪽에는 애팔래치아산맥이 자리하고 있어. 트럭이 넘어갈 정도의 강풍이 분다고 한다.

 

날씨가 거칠어야 좋은 재목과 인물이 나온다는데, 그래서 미국과는 달리 온화한 기후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에는 인물이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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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어 바로 노란색의 가을 풍경화가 펼쳐졌다.

 

세계는 대륙이동설에 의하면 지구에는 하나의 대륙인 판게아(Pan Gaia)가 있었는데 어느 시기에 각기 떨어져 나가 아메리카, 호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멀리 떨어진 유라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의 생태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콜럼버스는 판게아가 갈라진 틈을 접합시켰다고 한다. 아마존의 고무나무, 안데스의 감자, 고추, 토마토, 담배 등이 대륙으로, 아프리카 원산의 바나나, 커피, 중동의 사과 등이 아메리카로 번져 나갔다. 이때 꼭 좋은 작물들 만 교환이 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미국은 토양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칡을 도입했는데 칡은 도리어 들녘을 잠식시켜 두통거리를 만들고 말았다.

 

서양인의 아메리카 진출과 함께 말도 아메리카에 자연스럽게 퍼졌고, 이어 바퀴가 달린 운송수단도 도입이 되었다. 쥐도 청교도들이 타고 들어온 배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1492년 이후, 과부가 한번 성에 눈뜨면 통제력을 잃듯이 아메리카대륙은 생태적 재앙을 맞았다. 인간에 의한 학살을 논외로 한다고 쳐도, 천연두 등 전염병으로 인디언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인디안 멸망에 따라 그들이 일구었던 환경농업도 파괴되었다. 그들은 안정적이고 융통성 있으며 재생력을 가진 농업을 해왔었다. 그들은 버팔로도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는 지혜를 갖고 있었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마존 삼림에서도 인디안들의 화전을 통한 농법으로 인해 적절한 토양관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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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에 들어선지 5시간 20, 우리는 펜실베니아 주로 들어섰다.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표지판에는 독립의 주(STATE OF INDEPENDENCE)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1776년 펜실베니아의 최대도시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독립이 선언되었었고, 이어 이곳에서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발발했었다. 1790년부터 1800년까지 필라델피아는 뉴욕에 이어 미국의 수도였다. 또 링컨의 그 유명한 연설이 있었던 곳도 이 주 최남단에 있는 게티스버그이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미국 남북전쟁(1861-5)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다. 남북전쟁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남과 북의 경제구조의 차이에서 일어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4년 동안의 내전에서 당시 인구의 3%10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가 치열했었던 까닭은 돌격전 같은 나폴레옹 식 전술이 주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참호가 등장했는데, 이 참호전술은 1차 세계대전으로 전파되었다고도 한다. 62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 이 전쟁에서는 관을 짤 목재가 부족하여 교회에 있는 의자들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격전 끝에 패한 남부가 연방으로 복귀하는데 10여 년이 걸렸다고 하니 아직도 그 잔재가 남과 북 사이에 은연 중 지역성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히트문의 여행기 중에 그가 남부를 지날 때 기록을 보면, 흑 백인 그리고 남인 북인 간의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펜실베니아는 구릉성 지형이며 주의 한가운데로 애팔래치아 산맥이 달리고 있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중공업이 발달해왔으며, 농축업도 같이 활발하다. 면적은 오하이오와 비슷하여 남한의 1.2배이고, 인구는 12.8백만으로 오하이오보다 앞섰고, 인구 순위도 한 단계 앞선 전국 6위이다.

 

우리가 여행한 주를 뒤돌아보면, 콜로라도 네브라스카까지의 서부는 스페인이, 아이오와 일리노이 인디애나 오하이오는 프랑스가 선점했던 지역이다. 펜실베니아는 좀 복잡해서 스웨덴, 화란, 영국 순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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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에 들어서자 곧 왼쪽에 5대호 중 네 번째로 큰 호수, 이리호(Lake Erie)의 푸른 수평선이 끝없이 나타났다. 저녁 모뉴멘트벨리의 지평선 위로 나타나는 푸른색 같기도 했다. 이곳에도 인디언들의 신비한 혼령이 나타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디트로이트 강이 북서부에서 이 호수로 유입되고, 호수의 북동부 쪽으로 나이아가라 강으로 유출되어 온타리오 호로 흐른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이 이리 호 가운데로 지나며 연안 일대는 별장지가, 남쪽에는 사과 포도 등의 과수원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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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처음으로 도로에서 교통위반차량을 적발하는 경찰차를 보았다. 경찰들은 위성으로 차량들을 감시하고 있어, 위법차량이 있으면 틀림없이 나타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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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주에 들어섰을 땐 이미 어두워졌고 홀리데이(Holiday)모텔에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했다. 널찍하게 자리를 잡은 조용한 숙소였다. 34일의 차로 달리기만 하는 여행이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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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주의 도로는 참 예뻤다. 중앙분리대에 나무들을 잘 가꾸어 놓은 덕분일 것이다. 주 경계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외부로 나타나는 모양을 보고 그렇게 느끼니, 주마다의 특성이 얼마나 다를까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의 동북부에 있는 뉴욕 주는 대서양해안에서 오대호까지 걸쳐 있으며, 전반적으로 낮은 산과 구릉이 대부분이다. 온타리오 이리 호 연안과 허드슨 강 연안에 좁고 긴 평야가 전개된다. 인구는 전국 4위로 20백만 가까이 되나, 면적은 아이오와보다 조금 적고, 남한의 1.4배이다.

 

공업생산이 1위이고 근교농업도 잘 발달되어 있으며, 상업은 물론 문화의 중심지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주이다. 처음에는 네델란드 식민지였으나 1664년 영국이 점령하게 되었으며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미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1년 공정한 정치가이며 강하고 부드러운 외교를 펼쳤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부터 세계의 최강국으로 미국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중립을 취해야한다는 먼로주의의 영향으로 유럽 등 세계문제에 대하여는 방관자의 입장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 말, 1917년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이후 미국은 적극적으로 국제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계 2차 대전, 한국전쟁을 거치며 뉴욕 주를 중심으로 국방 관련 산업은 활황을 맞았고 뉴욕은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국이 여러 번의 위기를 극복하고 강국이 된 것은 위대한 평화의 법, 미국의 헌법 때문이라고 말하여진다. 이법에는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에서 출발하는데, 이 정신이 아메리카 문화를 형성시켰고, 미국 민주사회의 바탕이 되었다. 이 평등의 정신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도 영향을 주었다한다.

 

이 평등사상은 인디언 문화에서 왔다고도 한다. 인디언은 무엇보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주요 결정사항은 부족민의 결정에 따랐다. 미국 동부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호데노쇼니 인디안 연맹은 유럽인들이 이로쿼이 연맹이라고 부른다. 평등사상은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라 한다. 이들은 기원 전 1,000년 경 부터 이곳에 살아왔는데 세네카, 카유카, 오논다, 오네이다, 모호크, 투스카로라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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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고속도로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잘 해놓음으로 방문객이 도시에 대한 첫인상을 좋게 갖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버팔로(Buffalo)로 진입하는 도로 또한 말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옛날 이곳에는 인디언들과 버팔로들이 자유롭게 뛰놀던 곳이었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쓸모없는 닭 날개 부분을 소금에 절였다 장작불에 구어서는 매운 소스에 찍어 먹거나 블루치즈 드레싱을 하여 먹었다. 이것이 버팔로 윙의 원조이다. 들소에 날개가 달린 것이 아니고.

 

과거 인디언들, 특히 북아메리카 평원에 널리 퍼져 살았던 수족은 버팔로를 잡아 말려 가루를 만들었고, 이것에 골수기름, 야생딸기를 섞어 소가죽 가방에 보관하여 먹었다. 이를 페미컨이라고 하는데 저장성도 좋고 영양가는 신선한 고기의 열배나 된다고 한다. 이들은 들소가죽으로 천막, 침구, 가죽신, 정강이받이, 방패, , 물통, 그릇 등을 만들었으며, 뿔과 뼈는 큰 못, 송곳, , 도끼, 숟가락 등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갈비뼈, 턱뼈로는 아이들의 썰매를 만들었다. 들소의 발굽은 접착제로 사용했고, 심지어 들소의 영혼까지도 제사와 종교의식에 사용했다. 그러한 만큼 평원을 누빈 인디언 종족들은 들소사냥터 확보를 위해 싸움을 하였으며, 버팔로를 흉내 내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신성한 버팔로를 위해 죽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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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찰랑찰랑한 물이 보이고 나이아가라 주변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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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키산맥국립공원에서 나이아가라폭포까지 2,531키로. 34일의 자동차여행에서 해방되었다. 공원입구에서 폼들은 잡았지만, 키는 왜소해진 것 같았고, 팔을 들 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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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나들이 나온 유대인 대가족 일행과 마주쳤다.

‘15년 여름 강원도 평창에서 칩거하면서 홍익희씨가 저술한 세 종교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사이의 역사적 관계와 갈등이 깊어진 내력을 잘 얘기해주고 있다.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 자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이나, 지금에서는 모시는 신들이 다르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단지 선지자의 하나로 여길 뿐이며, 십자가나 사람의 형상 같은 것들을 숭배하지 않고, 사람들끼리의 절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돼지, 갑각류, 지느러미나 비늘 없는 생선, 조개류 등은 유대인의 금기음식이다.

 

요번 여행에서는 친구가 사는 동네가 유대인 동네였고, 친구네 집을 방문하였더니 마침 TV에서는 유대인을 교화시키고 있는 한국인 목사의 설교가 진행되고 있었다. 또 뉴욕에서 만난 이종사촌동생은 유대인 며느리를 얻었다고 했다. 대단한 민족이지만 불가사의하고 우리에겐 친근감이 잘 안가는 사람들이다.

 

미국의 유대인은 인구로는 2%, 6백여만 명이 되지만 그 중 백만 명이 뉴욕에 살고 있다. 재미 한국인이 225만 명 정도 되니까, 교포의 2.7배 정도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힘은 막강하다. 아인슈타인, 우디 앨런, 스티븐 스틸버그, 빌 게이츠, 워린 버핏, 헨리 키신저 등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50대 기업 중 17개가 유대인이 설립했고 아이비리그 교수진의 40%가 유대인이며, 미국의 파워엘리트 100인 중 절반, 고위 공직자의 15%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참고로 말하면 유대인의 총인구는 16백만 명이고 그중 이스라엘 국민은 6백만 명이다.

 

세계강국을 좌지우지하는 소수 민족과 종교 갈등, 날뛰는 IS 등 무관치 않은 단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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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두 번째 보는 북미 제일의 나이아가라폭포. 어릴 때 보았던 학교운동장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아주 커보이지는 않고, 이랬었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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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Goat)섬의 단풍이 한창이었다. 이 섬 때문에 강은 두 줄기로 나누어져 건너편 캐나다 쪽의 Horse Shoe폭포는 높이 53미터, 너비 790미터이고, 국경이 이 폭포의 중앙을 통과한다. 강물의 90% 이상이 이 폭포로 흐른다. 미국 쪽은 높이 25미터, 320미터이다. 해마다 벼랑이 0.7에서 1.1미터 씩 후퇴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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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자 탐험가였던 프레드릭 처치(1826-1900)가 그린 나이아가라폭포는 더 웅장하고 우렁찬 것 같다. 그는 나이아가라와 안데스산맥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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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위로 무지개가 떴다. 나이가라폭포는 온타리오호수로 흘러가며, 나이아가라에서 발전되는 전기는 뉴욕에 공급된다. 일전에 이 발전소의 고장으로 뉴욕이 암흑세상으로 돌변했었는데, 흑인의 세상이 되어 무법천지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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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캐나다 쪽은 건물이 많이 들어선 반면, 미국 쪽은 49개 자연유산지역(National Heritage Area)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어, 역사적 자연적 문화자원으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개발이 안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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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쪽은 세네카족 자치구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계사회를 이루고 뉴욕 주 서부와 오하이오 동부지역에 살았었는데, 이로쿼이연맹 중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부족이었다. 현재는 나이아가라 남쪽에서 펜실베니아에 이르는 뉴욕 주 서부지역 전체를 포함하는 공화국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 이로쿼이연맹과 델라웨어족 인디언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세력이 있는 인디언이었다. 특히 이로쿼이어족은 그중 가장 진보적인 인디언이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는 영국과 협력하여 미국과 싸운바가 있다.

 

이들 인사말 중의 하나, ‘당신이어서 고맙습니다.’ 정말 멋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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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개의 하녀(Maid of Mist)라는 배를 타고, 요동치는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갑판 위를 카메라를 들이대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면서 사진 찍기에 정산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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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는 거침없이 물살을 내리쏟아내고 있었다,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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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더풀을 연속으로 외치는 안개의 하녀, 여승무원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녀는 열렬한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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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와 이별하고는 다른 승객들은 모두들 밖으로 나왔지만, 우리는 물벼락을 맞으며 하선장 뒤쪽의 바위 길을 올랐다가 공원으로 나오니 물벼락 맞은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신발의 물을 쏟아내며 주위를 보니 공원은 너무 조용했고 가을은 한창 성숙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12. 여행자들이 방황하고 싶은 곳,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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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종착지, 뉴욕을 향한 675키로 미터, 7-8시간의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었다.

지나는 길은 서부에서 사막을 달리는 것하고는 너무 틀렸다. 넘칠 것 같은 강물이 흐르고,

사막에서 말랐던 우리의 감정도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기능이 정지되어 있지만 대서양과 이리호를 연결시키는 이리운하가 있다. 이 운하는 길이 584키로 미터, 깊이 12미터, 너비 12미터의 운하로, 허드슨 강 연안의 올버니에서 출발하여 허드슨 강의 지류인 모호코 강의 계곡을 통과한 다음, 버팔로 부근에서 이리 호에 이른다. 이리운하는 1827년에 완성되어 1837년까지 운하의 전성시대를 구가했었다. 대서양 연안의 뉴욕 시와 북서부, 5대호가 해운으로 연결되어 문물이 오감으로 뉴욕 시티가 대서양 제일의 항구가 되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고급 선실이 있는 정기선을 타고 운하를 건넜고, 가난한 이주자들은 값 싼 소형 기선을 탔다. 이 운하가 개통되고 10년 후 버팔로, 로체스터, 시러큐스의 인구는 3백 퍼센트나 증가했다. 10년 동안 제 몫을 다해낸 운하는 북서부 지방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1850년부터 철도가 발달되고 운영상의 문제들이 도출됨에 따라 1882년에 그 기능이 정지되고 말았다. 요즈음 이운하의 서쪽 끝은 스케이트장, 빙판 자전거 타기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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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나이아가라에서 하루 유하고 가는 것으로 되어있던 일정을 하루 앞당겼다.

임목사도 세미나관계로 바빴고, 우리도 그렇게 되면 뉴욕에서 하루를 더 머무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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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기사 유교감이 마지막 핸들을 잡았다. 우리 중에서 제일 젊은 피를 갖은 친구이다.

아들의 간을 이식받아서 그런지, 피부도 뽀얗고 이젠 완연한 젊은이가 되었다.

 

나도 이 친구가 수술하게 된 원인 행위를 조성하는데 일조를 했다. 18년 전 동창 산악회를 같이 조직하여, 술을 엄청나게 마셔댔다. 산이라는 구실을 만들어 친구들을 만났고, 토요일마다 모임을 갖았다. 식구 부양하는 라고 눈 코 뜰 새 없던 사회생활에서 여유를 갖기 시작한 때였고, 그때만 해도 각기 사회조직의 중추역할을 할 때이라 돌아가며 술을 살 여유도 있었다.

 

유교감은 여행 떠나기 전에 몇 번의 모임을 갖았었는데도 이런 험악한 여행일 줄은 생각을 못했다고 넋두리를 해댔다. 호텔에서 자고 제대로 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인 줄 알았는데, 햇반, 인스턴트 짜장밥, 카레밥, 우동, 핫도그, 샌드위치 등이 다반사고, 더군다나 차 속 침대에서 낙하훈련도 받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운전솜씨는 변함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는 핸드볼 선수로 활약했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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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 90번 인터스테이트 도로를 힘껏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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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마지막 주유를 하고는 만면에 희색을 띠우고 만세를 불렀다. 여행이 끝나간다고. 다 죽어가던 모습들이 홀리데이 모텔에서 때를 씻어내더니 말끔한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패스화인더를 타고 길을 나섰던 우리들은 어떻게 보면 개척자라 할 수 있을까? 조금 있으면 칠십의 길에 들어서겠고 새 길을 모색하여야 할 때이다. 그래서 여행을 떠난 것이니까. 어차피 인생은 탄생으로부터 죽음으로의 여행이 아니겠나. 임목사도 이차를 몰다 몰다 보면 새로운 도의 경지를 찾게 되겠지.

 

(나바호족의 시)

나바호족의 시는 우리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대로 늙는 것도 물리치고,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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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정리하는 중, 차 속 테이블 위의 술병을 보니 두 사람 빼고는 술은 이번 여행 중 실컷 들었을 것 같다. 값도 헐한 편이었고. 보드카 한 병에 7, 몬다비 포도주 9, 밀러라이트 맥주 12병에 12. 때로는 필스너우르켈 맥주 24병에 56불을 치르기도 했다. 물론 술은 실수요자 부담의 원칙을 적용해 친구들은 불만이 좀 있었겠지만. 사실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이 원칙을 적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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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뉴욕 후러싱(Flushing)에 있는 한인촌 민박집에 도착하여, 임목사님의 기도로 5,080마일, 8,128키로 미터의 캠핑차 대장정을 끝냈다. 무사히 안착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차량 안에 있었던 소지품을 정리하다 보니, 하동사나이의 약과 세면도구가 개인 사물함 한 구석에서 나왔다. 위 수술을 받은 지 10년이 넘은 친구, 그래도 술병을 놓지 않는 친구는 어이가 없는 듯 웃었지만, 다 술 탓이라. 먹는 것도 제일 시원찮았던 친구, 정말 고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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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손사장의 룸메이트였던 주대감은 왕 코골이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투덜댔다. 친구들은 저는 어떠하면서 하고 픽 웃고 말았지만, 어느 세계이던지 제1인자가 있는 법이다.

 

아침은 인근 함지박에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LA를 떠나기 전에 북창동순두부집에서 식사를 한 이후 처음 제대로 먹은 한식이었다. 하동사나이의 얼굴이 오랜만에 제대로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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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편의점에서 인도친구가 파는 1불짜리 커피 한 잔씩 들고, 산보 길에 나섰는데 편안한 얼굴에 햇살마저 따뜻했다. 어제와는 얼굴들이 완전 딴판이었다. 한식 덕분인가? 역시 먹는 것은 잘 먹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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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는 조용하고 산뜻했고 오랜만에 보는 프라타나스는 키만 멀쑥하고 지저분한 것이 서울 동네의 말끔한 그 모습과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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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당 하루에 30불씩 주고 얻은 방은 이층 침대에다, 한 방에 세 사람이 쓰도록 되어있었다. 생활비가 비싸게 드는 뉴욕에서는 감지덕지 하는 수밖에. 뉴욕에서 혼자 생활하려면, 미니차를 굴리는 경우 최소 한 달에 3천불은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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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 후 근처에 사는 친구의 집을 찾았는데, 벽에는 그 옛날 이북에서 선교사 하시던 부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성경책을 끼고 계신 부친과 천방지축 뛰어노는 아이들, 세발자전거도 보였다. 그때 농촌에도 세발자전거가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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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같은 노인아파트에 살고 있는 샌드위치 달인은 서울에서 귀한 손님들 오셨다고 베이컨을 몇 겹으로 넣은 예술 같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것을 세븐레이크(7 Lakes)에서 먹기 시작하여 뉴욕을 떠날 때까지 맛있게 해치웠다. 덕분에 식비도 많이 절약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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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들린 노인들의 휴게실은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관리비가 엄청나게 싼 이 아파트에 당첨되는 것은 보통의 행운이 아니라고 친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론 소득에 따라 관리비가 다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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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레이크스로 가는 길에 친구가 봉사하고 있는 퀸즈한인교회를 들렸다. 친구부부는 두 자녀 모두 결혼시킨 후 마음을 비우고 교회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40563-0(1)) 뉴욕 주 지도

뉴욕은 섬의 도시이며 대서양을 향하여 있는 항구이다. 맨해튼, 퀸스, 브롱크스, 브루클린 그리고 스태튼 섬, 모두 다섯 개 지역으로 나눠진다. 뉴욕의 중심지 맨해튼은 기타 지역과 다리와 터널로 연결된다. 브롱크스는 대륙과 붙어 있으며, 맨해튼 사이에 할렘 강이 흐른다. 이곳에 양키스타디움과 식물원이 있다.

 

퀸스에는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 우리 교민이 많이 살고 있는 후러싱은 퀸스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JFK공항이 가깝다. 퀸스 아래지역 롱아일랜드, 긴 섬은 뉴욕이 뻗어나갈 여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 브루클린은 독립 당시 하나의 도시였었고, 스태튼 섬은 주택가와 공장지대로 되어 있으며, 이 섬은 뉴욕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은 인구가 8백만이 넘는 미국 최대의 도시이며, 1790년 이전에는 미국의 수도였다. 세계의 100대 기업 중 50개 본사가 이곳에 있고, 세계 금융, 무역, 문화의 중심지이다.

 

1626년 이곳은 화란의 식민지로 뉴암스텔담으로 불리다가, 1664년 영국함대가 이곳을 점령하여 당시의 왕의 동생 요크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개칭했다. 영국은 화란에게서 이곳을 얻는 대신 남미의 수리남을 주었다. 독립전쟁 당시의 수도였던 만큼 이곳은 최대의 격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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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브롱크스에 있는 그 유명한 양키스타디움을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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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들이 조다리라고 부르는 조지 워싱톤 브릿지(George Washington Bridge)를 건넜다. 이 다리는 허드슨 강 위를 지나 맨해튼과 뉴저지 주를 연결시키는데, 차량이 하루 평균 30만대가 지나가는 세계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다리 중의 하나이다. 길이는 1,067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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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허드슨 강기슭에서 쉬어가며 맨해튼을 바라보니, 대도시가 다 그렇듯이 옅은 회색의 실루엣을 보이고 있었다. 저 속에서 팔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무어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지만 좋다고 북적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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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Hudson River)은 뉴욕 주 북동쪽, 애디론댁(Adirondack) 산맥에 있는 마시 산(Mt. Marcy, 1629미터)에서 발원하여 뉴욕 주의 주도, 올버니를 거치고 맨해튼을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애디론댁은 이곳에 살았던 나무껍질을 먹는 인디언을 말한다. 1609년 화란 배 하프문(Half Moon)을 타고 온 사람들은 웨이브 힐(Wave Hill)근처에서 이곳의 인디언들과 처음으로 만나 모피와 유럽산 물건들을 물물교환 하였다. 사람들은 그때 당시 이배의 선장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의 이름을 따서 강 이름을 허드슨이라고 했다.

 

허드슨 선장은 업적과는 별개로 성품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2년 뒤 그는 항해 도중 배 안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사살되었는데, 폭동의 이유는 그가 부하에게 주었던 선물을 도로 뺏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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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레이크스 가는 길은 꼭 우리 금수강산의 가을 길 같은 정취를 보이고 있었다. 세븐 레이크스(Seven Lakes)는 뉴욕 주 록랜드 카운티(Rockland County)와 오렌지카운티(Orange County)에 걸쳐 있는 일곱 개 호수들이다. 해리만(Harriman)주립공원과 베어마운틴(Bear Mountain)주립공원에 속해 있다.

 

베어마운틴까지 이어지는 28키로의 Seven Lakes Drives는 뉴욕 주를 대표하는 명소이며, 특히 단풍철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베어마운틴은 허드슨 강 양쪽 기슭에 놓여 있는 오렌지카운티의 허드슨 하이랜즈에서 가장 알려진, 높이 391미터의 산봉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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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 레이크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들린 티오라티 비치 호수는 빨간 단풍 빛을 물속에 드리우고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그 정적을 뚫고 한 여인이 자전거를 타고는 우리의 눈길을 끌려는지 이 호수의 가을 속을 돌고 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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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와우크(Kanawauke), 세바고, 웰치 호수로 가는 길은 정말 한적했다. 주말이었으면 단풍놀이 온 차량으로 붐볐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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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티오라티 비치에서 몸을 풀고 샌드위치 달인이 만들어준 명품을 맛보며 가을 속을 산책하였다. 수염파의 세 사나이는 영락없는 산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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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사장은 요번 여행을 만끽하고 있었다. 유난히 수염에 애착을 가지고 여행 후에도 계속 기를 것 같았으나 여권에 결국은 눌리고 말았다. 운전, 분위기 잡기 그리고 남을 위한 배려 등 모든 부문에서 모범이다. 교보 영풍문고에서 잔뼈가 굵은 서적계의 원로이다.

 

학교 다닐 때는 짱구하면 모르는 친구가 없을 만큼 축구부의 대표선수였다. 선생님들하고 몸싸움도 하던 친구가 어떻게 책을 좋아하는 점잖은 친구가 되었는지. 친구들과 요즈음 족구를 하면 그도 헛발질 선수이고 재작년에 심장에 문제가 생겨 가슴에 스턴트를 넣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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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눈부신 황금색 가을이 한창이었다.

 

일곱 개 호수는 우리가 이미 방문한 티어라티(Tiorati)호 이외 세바고(Sebago), 카나와우크(Kanawauke), 스칸나타티(Skannatati), 아스코티(Askoti), 은광산(Silver Mine), 퀸스보로(Queensboro) 호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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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와우크 호수는 빨간 가을에 푹 담겨있었다. 이 호수는 상, , 하 세 개로 되어 있는데, 위에 있는 호수를 빼고는 인공 호수이다. 인공호수는 1915-6년 윌리암 A 웰치(William A Welch)의 감독 하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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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호수의 색색가지 단풍은 우리에게 고향의 가을을 상기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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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븐레이크스 나들이가 끝나고 후러싱에 있는 중국집 송산에서 뉴욕 친구들 다섯과 함께 뭉쳤다. 앞줄에는 남미로 이민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온 김정희 목사, 어제 학교에서 본 것만 같은 쾌활하고 젊어 보이는 원광우 친구, 이번 여행의 프로모우터 박영철 친구, 물에 빠져도 입만은 둥둥 뜰 임진구 목사가 앉아 있었다. 뒷줄의 이경구 친구, 이 나이에도 사업을 잘 운영하고 있어, 고맙게도 이 날의 스폰서가 되어주었다.

 

내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50년이라는데, 성격들은 옛날이나 변함이 없었다. 입심 좋은 임목사, 쾌활한 광우, 과묵한 김목사, 항상 친구들을 생각하는 영철, 경구 친구.

 

고등학교 때에는 김정희 친구 집이 우리 집과 같이 정릉 쪽에 있어 자주 들렸었는데, 부모님은 이미 다 세상을 뜨셨고, 여동생 하나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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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작별을 하고 민박집에 돌아와 자세히 보니 온 벽이 주의사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샤워시간, 체크아웃시간, 주방출입시간, 드라이 사용법, 조용해라, 요리 만들지 말라, 계단에서 뛰지 말라 등.

 

다리를 저는 집주인에겐 이곳에서 민박집을 하는 사연이 있겠지만, 하여튼 말로서 싫은 소리를 하기는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숙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예의가 없는지를 알 수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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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뉴욕 시내관광을 나섰다. 십몇 년 동안 뉴욕이 얼마나 변화를 했나 궁금했다. 달인이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고, 약속한대로 후러싱 번화가에서 관광회사에서 보내는 택시를 기다렸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렸던 것 같다. 뉴욕의 교통지옥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 마음 편하게 기다릴 수밖에.

 

우리를 콜럼비아 대학교까지 데려다준 교포 택시운전사는 미국생활이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애들은 공부 잘 하고 마나님은 예쁜 짓 만 하는데다, 미국에선 크게 신경을 쓸 것이 없다고. 내 생각에는 택시기사가 그리 썩 좋은 직업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임목사 말로는 소방관과 우체부가 미국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했다. 소방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의 경쟁이 치열한 직업 중의 하나라 이해가 가지만, 우체부는 좀 이해가 안 간다. 시골의 우체부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 할 수 있어서나, 적응하기 어려운 미국사회에서 그들의 삶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어서 그런 것인지. 우편물의 감소로 우체부의 수요도 현격히 줄어든다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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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대학교 앞에서 택시를 내려 한 시간 이상 기다렸더니, 그제야 미니버스가 나타났다. 교통체증에다 차까지 고장이 나서 다른 차량을 구하는 라고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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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구내를 여기저기 구경하다 화장실을 찾았더니, 웬 도서관은 그리 많은지. 대학시절 데모 등으로 도서관과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에겐 낯선 일이다. 도서관 출입문에는 직원이 ID를 체크하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고, 한참 구내를 기웃거리다, 결국은 큰 길 건너편에 있는 법과대학에서 소원을 풀었다.

 

컬럼비아대학교는 아이비리그에 속한다. 2009년까지 7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고 1983년에야 여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오바마,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워런 버핏, 샐린저 등을 배출한 명문인데, 30대 초반에 미국 초대 재무 장관이 되어 미국의 경제시스템을 구축한 알렉산더 해밀턴이 역사 속 가장 유명한 졸업생이다. 그는 3대 부통령이었던 아론 버(Aaron Burr)와의 권총 결투에서 사망했다. 월스트리트가 시작되는 트리니티 교회에는 해밀턴이 누워있는데, 월스트리트(Wall Street)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가 세운 벽이다.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가 세운 언론대학원은 해마다 퓰리처상의 선정과 집행을 하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기 전 컬럼비아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으며, 시어도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둘 다, 이 학교 학생이었지만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 했다고 한다.

 

뉴욕에는 뉴욕대학교가 세 개가 있다. 3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중심의 학교는 등록금이 63백만 원이나 되는 사립 대학교이고, 그 외 등록금이 비교적 저렴한 주립 대학교와 시립 대학교가 있다.

 

(StJohnTheDivineWilliamPorto(1))

관광버스가 처음 지나간 곳은 맨해튼 중심가를 비껴간 110번 스트리트에 있는 뉴욕 성 요한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St. John the Devine)이다. 1892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050년 완공예정인 미국 성공회 교회이다. 성공회는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된 영국교회, 우리나라에는 정동에 대성당이 있다. 이 교회는 하도 커서 자유여신상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으며, 모든 걸 다 녹여내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 스타일의 건물이다. 교회의 디자인 속에는 뉴욕의 근현대사가 잘 녹아 있다.

 

유럽에도 성 요한 대성당 같은 큰 교회들이 많고, 건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미완의 상태인 교회도 있다. 독일의 쾰른 성당의 경우는 13세기 중간에 공사를 시작 19세기에 완공했다 한다. 의례 성당은 그렇게 짓는 것인지. 또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수도원 생활은 어떠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었다.

 

큰 교회들을 짓는 데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또 유명한 장인들의 손을 거치다보니까 오랜 세월이 필요하리라 추측이 된다. 예배하는 공간이 우선 마련되면 예배를 보아가면서 그 완성도를 높여갈 수도 있겠고. 단시간에 지어버리는 우리의 대궐 같은 교회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뉴욕 성 요한 대성당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교회건축자금이 긴급 지원자금으로 전용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히트 문(Heat-Moon)은 조지아 주에 있는 코니어스 시토 수도원에 잠간 머물면서 신부들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수도원이 중세 암흑시대의 잔재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소란을 벗어나는 것이 올바른 수도법이냐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의 따뜻한 인사와 편한 대응, 활기찬 그들 모습과 얼굴의 평온함, 간소한 식사 등에서 그만 선입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의 규율도 많이 완화되었고, 금욕의 땅에서 그들은 단순한 생활을 통하여 몸과 정신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경찰관의 경력을 갖고 있는 패트릭 신부에게는 수도사가 왜 되었냐고, 여자생각이 나면 어떻게 하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신부는 수도원 안에서 전기기사, 산림 경비원의 역할을 하면서, 식물 조류에 관해서도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 영적 경험에 대한 욕구 때문에 수도원의 은둔생활을 택했고, 이를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생각 등 해로울 수 있는 욕구는 좋은 방향으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하고 있고, 무단한 노력을 통해 무지, 교만, 이기심에서의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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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버스의 중간에 앉아 있다 보니, 가이드가 설명하고 있는 장소를 어딘가 하고 찾다보면 다음 장소가 되고, 사진을 찍으려 해도 제대로 찍을 수 없어 일그러진 건물 만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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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리자 미넬리(Liza Minnelli)가 부른 경쾌한 노래, ‘New York, New York'이다.

 

도시의 한부분이 되고 싶고

내 발길이 방황하고 싶은 도시.

언덕의 왕이 되고 싶은 도시.

블루스(우울한 곡조의 재즈곡)가 녹아 있고

모든 것이 당신하기에 달린 도시.

뉴욕.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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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점심을 먹고 배터리공원(Battery Park)에서 유람선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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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은 허드슨 강 하류로 나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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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맨해튼을 앞에 두고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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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허드슨 강기슭에서 본 잿빛 하늘과는 달리 뉴욕 하늘은 더 없이 파랬고, 건물들 가운데 왼쪽에는, 길고 뾰족한 첨탑을 가진 110층짜리 초고층 복합건물, 세계무역센타(World Trade Center)가 서 있었다. 20019.11테러 때 쌍둥이 건물은 박살이 났고 2,749명이 사망했던 곳. 미국 독립을 기리기 위해 건물 높이는 1,776ft(541미터)로 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되었다.

 

9.11테러 당시 없어진 세계무역센터 인근의 그리스 정교회, 도이치은행, 유니버시티 빌딩 등이 함께 무너졌지만, 세인트 폴스 채플(St. Paul's Chapel)은 살아남아 사고 당시 응급구조센터로 사용되었다. 이 교회는 현존하는 미국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1776년 뉴욕 대화재에서도 살아남았었다. 9.11당시 교회가 살아남았던 것은 교회 앞의 100년이 넘은 나무 때문이었는데, 이 나무가 무역센터 붕괴 당시 튕겨져 나온 대형 철제 빔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교회에는 테러 당시의 기록과 관련되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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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리버티 섬 위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근처에 머물렀다. 리버티 섬은 뉴욕 항으로 들어오는 허드슨 강 입구에 위치한다. 여신상은 에펠탑 설계자,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했으며, 높이는 지면에서 횃불까지 93.5미터이다.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가 선물한 조각상으로 프랑스에서 실려와 1886년부터 이 자리에 서있다.

 

프랑스정부나 미국사를 저술한 앙드레 모로아나, 미국의 독립에 프랑스가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미국 독립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와는 적대관계였기에 미국을 도와준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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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의 한 여인, 공주병에 걸렸는지 나르시즘에 빠졌는지 시종일관 군중과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셀카를 찍어댔다. 어쨌든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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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스태튼 섬 쪽은 조용하기만 했고 쓸쓸해보이 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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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적을 깨고 맨해튼만한 크기의 큰 배 한 척이 쏜살 같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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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배는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브루클린 현수교를 지나갔다. 맨해튼 남단에서 이스트 강을 건너 브루클린을 연결해주는 1,053미터 길이의 다리이다. 이 다리는 1869-83년 까지 15년 걸려 완성된 다리로, 공사 중 20명이 넘는 인부가 죽었다. 로블링(John A. Roebling)이 현수교를 설계했는데 현장 감독 중에 발에 경미한 상처를 입었고, 이 상처가 파상풍으로 이어져 죽고 말았다. 아버지에 이어 그의 아들인 워싱톤 로블링이 감독을 했으나, 강바닥의 토질을 시험하던 중 잠수병에 걸려 몸이 마비되었다. 이에 워싱턴이 다리 근처에 있는 집에서 공사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며 공사지시를 내리면, 워싱턴의 부인 에밀리가 현장에 나가 공사감독을 하여 다리의 완성을 볼 수 있었다.

 

이 엔지니어 부부의 손자, 도널드 로블링은 허리케인이 불어올 때 구조하는 기계를 발명했는데, 이 기계는 2차 세계대전 그리고 6.25동란 당시 수륙양용 장갑차로 맹활약을 했다.

 

브루클린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이스트 강(East River)을 건너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를 왕복하는 나룻배가 있었고, 나룻배가 머무는 나루터가 있었다. 월트 휘트먼은 이곳에서 브루클린 나루터를 건너며(Crossing Brooklyn Ferry)'라는 시를 지었다.

 

(브루클린 나루터를 건너며)

 

이 다리 위를 걸으며 브루클린 쪽에서 맨해튼을 바라보는 일몰과 야경이 절경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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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내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맨해튼 거리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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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흐르는 도시, 뉴욕. 이곳은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가 있던 곳이고, 줄리어드 스쿨이 있는 곳이다. 이 학교 이름에는 학교재단에 유산을 기증한 목화상인 A. D. 줄리어드의 이름이 남아 있다. 뉴욕은 또한 위대한 개츠비가 사는 도시이다. 개츠비는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가 쓴 소설의 주인공. 그는 가난 때문에 헤어진 연인 데이지를 다시 찾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고 그리고 그녀와의 재결합을 기대하며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여는 속물이다. 속물한테 위대한이란 수사어구를 붙인 것은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뉴욕에는 칠팔십년 대 예술가 거리, 소호(South of Houston)가 있고, 한적한 주택가와 맛 집이 있는 노호(North of Houston)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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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도가니, 뉴욕에는 2백만 흑인이 살고 있으며, 주택난에다 교통으로 인한 소음공해에 시달리고 있는 도시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또 몰려드는 뉴욕이다.

 

할렘가 등 빈민 거리는 이미 재개발로 산뜻한 거리로 변신을 했으며, 2005년부터 뉴욕은 25대 도시 중 범죄율이 제일 적은 도시라고 한다.

 

과거 네덜란드인은 맨해튼 섬 남부에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정착촌을 세우고, 16키로 떨어진 곳에 할렘이라는 정착촌을 세웠다. 실제로 네덜란드에는 암스테르담과 16키로 떨어진 곳에 할렘이란 도시가 있다. 19세기 할렘은 부유층 유대인의 주거지였으나, 1920년부터 흑인들이 급속히 유입되었고, 흑인들만의 할렘르네상스가 일어났다. 1960년대는 킹 목사와 말콤 엑스로 대표되는 흑인인권운동의 장소이기도 했으나 심한 쇄락을 겪은 후, 90년대 중반부터 줄리아니 시장의 범죄소탕 노력으로 점점 안전한 도시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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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익히 들어온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관람했다.

세계가 경제공황으로 신음하던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시작한지 불과 16개월 만에 완성을 본 건물이다. 당시에 크라이슬러 빌딩 건축과 경쟁을 벌리다보니 공사기간도 단축되었을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절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 당시 폭격기가 79층을 받고 추락했을 때 이 빌딩은 아무런 피해도 없을 만큼 견고히 지어졌다고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는 뉴욕 주의 별명이라는데,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이후 거만한 미국제국이 슬슬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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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왼쪽에 세계무역센타(WTC) 건물도 보였고,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과 앨리스 섬이 조그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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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향에서 내려다보니 오른쪽에 MACYS백화점의 큰 플래카드가 보였다. 저 플래카드를 만드는 데는 어마어마하게 큰 천이 필요했겠다. 이 백화점은 미국 내에 789개의 점포를 갖고 있다.

 

19124월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당시, 뉴욕 메이시백화점의 소유주 스트라우스 부부와 벤자민 구겐하임(1865-1912)의 미담이 전해온다. 침몰 당시 관례대로 여자와 어린이에게 구명보트를 탈 수 있는 우선권을 주었는데, 스트라우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죽겠다고 하여 부부가 죽음을 같이 했다. 또 철강업자 구겐하임은 구명보트를 타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는 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벤자민 구겐하임은 전설적인 미술작품 컬랙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의 아버지다.

 

서양사회에는 로마시대부터 전래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중요시 되어왔다. 이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의식이나 전시 등 위기상황에서의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말한다. 2차 대전시 영국의 명문가의 자제들이 솔선하여 참전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도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들의 병역의무를 고의로 회피한다든가, 일반인과 다른 면책권을 주장한다든가, 하루만의 국회의원직으로 평생 연금을 받는 법을 슬그머니 입법하는 등 속물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되었다. 너무 갑작스레 성장한 사회의 부산물일까? 정상적인 사회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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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은 그야말로 빌딩숲이다. 맨해튼은 인디언 말로 언덕의 돌섬이다. 그 많은 빌딩이 올라앉아도 꿈적도 않는 돌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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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워싱톤 광장(Washington Square Park)에서 내려 잠시 휴식을 가졌다. 공원은 워싱톤 대통령의 취임 백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대리석 아치를 중심으로 한 광장이다. 그리니치빌리지의 중심이며 뉴욕대학교(NYU)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아치는 파리 개선문의 절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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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한 화가가 아치의 안쪽에 그림을 나열해 놓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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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넓은 광장 한 구석에 쓸쓸히 서있는---’

이시스터즈가 부른 워싱톤 광장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이곡은 빌리지 스톰퍼스(Village Stompers)1963년 경음악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 노래에서 나오는 벤조는 5현 악기이며, 아프리카 노예들이 사용하던 바가지 형태의 악기를 개량하여 만든 악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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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의 마지막 방문지 중앙공원(Central Park)에 내려서는, 공원을 들어가서 산보할 시간은 없고, 네거리에서 주위를 왔다 갔다 하니 거리엔 관광객을 태우는 마차가 꽤 많았다.

 

뉴욕에서 하루 만에 못 끝내는 구경거리가 두 개 있는데, 센트럴파크(Central Park)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이다. 센트럴파크의 면적은 난지도 하늘공원의 18. 150년의 역사를 가진 공원은 다람쥐, 너구리가 뛰놀고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공원에는 재클린 캐네디 오나시스 호수가 있다. 1993년 인근에 살던 재클린이 사망한 뒤 그녀의 이름이 이 저수지에 붙었다. 그녀는 31세에 영부인이 되었지만 그녀보다 더 일찍 21세에 영부인이 된 프랜시스가 있다. 그녀는 1886, 49세 클리블랜드대통령과 결혼했는데, 재클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재클린과 마찬가지로 클리블랜드 사후에 재혼했다고 한다.

 

어째든 맨해튼 사람들은 내륙의 센트럴파크, 육지 바깥에 조성된 친환경 수변공원, 허드슨 강 공원 덕분에 숨을 쉬고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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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버스 정류장도 있었다. 두 시간 이상 기다리다 탄 관광버스보다는 차라리 이층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녔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시야도 좋고 정체가 되더라도 덜 지루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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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엔 화랑도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샤갈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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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의 종점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멀지않은 한인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친절한 가이드는 후러싱에서 온 우리들에게 출발 시 너무 늦어진 것에 대한 사과로 차 한 잔을 제의했다. 차 한 잔에 응어리진 마음이 녹아 들어갔다. 일행들은 모두 떠나고, 맨해튼 번화가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서 홀로 앉아 코코아 한 잔을 홀짝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심심치는 않았다. 여행은 원래 여유가 있고 그곳의 사람들과 사귀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여행 스케줄은 너무 빡빡했다.

 

그곳에서 나와 거리를 좀 배회하다, ‘그리운 미스코리아, 라는 식당에서 이종사촌들을 만나 오랜만에 불고기로 배를 채웠다. 식당은 서양 사람들을 포함하여 꽤 많은 손님들로 붐볐고 맛도 그런대로 깔끔하고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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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나고 근처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낸시는 교포단체에서 유망한 예술가로 선정이 되어 큰 상금을 받는다고 했고, 특허청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노총각 종범이는 아직도 색시를 찾는 중이라고 얼굴을 붉혔다. 유대인 며느리를 본 창재는 늦게 한의사에 도전하려는 꿈을 접고, 사업을 정리 중이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임이 끝나고 창재의 차로 맨해튼에서 퀸스로 오는 터널을 통과하여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길눈이 어두워 집을 찾을 수 있을까 했지만, 내비 덕인지 헤매지 않고 잘 찾아왔다. 밤이 너무 늦어 이층에 있는 친구를 크게 부를 수도 없고, 초인종을 눌렀더니 아래층 사는 아줌마인지 일찍 좀 다니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를 해댔다. 옛날 대학교 때 하숙집 아줌마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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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1023일 아침 일찍, 친구의 차로 JFK공항으로 나갔다. 공항이 가까워 좋았지만 친구의 신세를 너무 많이 졌다. 공항이 하도 커서 그런지, 우리가 디트로이트에서 국제선으로 갈아타서인지 국내선 탑승절차는 너무 복잡하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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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때와는 달리 디트로이트로 가는 길은 가벼웠다. 디트로이트공항은 게이트가 78개나 되는 큰 공항이다. 승객 수송을 위해 끝과 끝을 연결하는 전철이 있다.

 

귀국 후, 디트로이트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들리지도 않고 그냥 갔냐고 섭섭함을 표시해 왔다. 요즈음 다행이도 디트로이트의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대학교 때 우리가 즐겨 불렀던 톰 존스의 ‘Detroit City,가 생각났다.

 

어제 밤 디트로이트에서 자면서 고향의 목화밭 꿈을 꾸었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그녀의 꿈도 꾸었지.

,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사람들은 내가 디트로이트에서 거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밤낮으로 차와 그 부품을 만들고 있다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업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우리나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생각을 해보아야할 텐데. 대우자동차가 쓰러졌을 때 부평역전에서 울부짖던 그들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시간도 남고해서 전문가인 호텔리어의 자문을 얻어 마나님께 드릴 백 하나 샀다. 남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매일 전송하며 연애편지를 썼는데, 미국의 통신사정이 안 좋아서인지 구닥다리 핸드폰으로는 문자조차 보낼 수가 없었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폰도 바꿔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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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 때는 비행기 타는 것이 정말 지루했다. 그나마 좌석에 있는 게임프로그램으로 포카를 할 수가 있어 시간 보내기에 도움이 되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의 형제국이라는 터키 민족에게 경탄의 말을 안 보낼 수가 없다.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유럽의 동쪽에 위치하여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근대 역사는 유럽인들의 침략사인데, 유일하게 투르크족은 일찍이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로마의 땅을 차지하고 아직도 그곳에 발붙이고 있는 민족이니,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토는 오그라들었고, 요즈음도 내부에서 서로 아귀다툼 하는 라고 정신이 없으니 말이다.

 

이번 여행은 1819일의 일정이었다. 숙박 장소를 보면 호텔과 모텔에서 4, 민박 2, 텐트에서 8, 차 속에서 3일 그리고 비행기에서 하루이다. 그리고 미국의 12개 주를 거쳤다.

 

귀국하는 날 오후, 집에 오는 전철에서 내릴 때, 짐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차량기지까지 갔다 오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기다리고 있던 마나님의 얼굴을 보니 겁은 나고, 얼른 선물을 내보일 수밖에.

 

(JPG red river valley)

존 스타인벡은 58세의 나이로, 19609월 초순에서 12월까지 미국 30여 개주를 여행하였다. 주행거리는 1만 마일, 16천키로 미터. 여행거리로 따지면 우리의 두 배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 여행은 끝나버렸는데도 두고두고 여행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본 많은 홍하의 계곡(Red River Valley)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계곡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잘 표현한 노래, 홍하의 계곡은 우리 입 속에서 맴돌고 있다.

 

당신이 떠나는 홍하의 계곡을 생각해보아요.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

당신과의 이별로 인한 나의 찢어지는 가슴과

슬픔을 생각해보세요.

 

바다를 건너 당신의 고향을 가더라도

우리가 홍하의 계곡에서 보낸

달콤했던 시간, 야생화들 속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사랑을 잊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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