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가오슝 컨딩 타이난 자유여행 4

난해 2019. 12. 25. 18:14


4. 타이완 역사기행, 타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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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화) 가오슝의 아침은 밝아오고,

아침햇살은 건물을 아름답게 만들었고.




두번째 먹는 화위엔환디엔(華園, Holiday Garden

 Hotel) 아침식사.


음식종류는 아주 많지 않았으나

정갈하고 맛있었다.




타이난 가는 기차타러 전철 타고

가오슝기차역(高雄車站)에서 하차.


쭈오잉(左營)역에서 내려 가오슈티에루

(高速鐵路)로 가면 타이난까지 15분

걸리나, 역에서 내려 시내 진입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급행열차를 타기로 했다.




같은 플랫홈에서 일반열차와 급행을

타기 때문에 어느 열차를 탈지 헷갈렸으나


역무원의 도움과 병헌친구의 기지로 9:12

 출발, 9:48 도착하는 116급행열차를 탔다.




좌석은 편안했으나

차창 밖 풍경은 별로.




한국인 관광객이 늘었는지

타이난역에는 한국어 광고판.


타이완의 역사가 시작된 타이난(臺南).

16세기초 푸젠성(福建省)에서 건너온

한족으로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핑푸족(平埔族)이 살았고.

1623년 네델란드식민정책의 본거지였으나

1662년 정청공(鄭成功)의 등장으로

200년간 타이완의 중심도시(수도).




나라가 평안해야 사람들이 오래 살지.

요즈음 우리나라에 딱 맞는 말.


타이난 인구는 189만 명.

타이난의 외항 안핑(安平, 인구 66만)은

가오슝항보다 더 오랜 역사가 있는 항구.


안핑은 토사가 퇴적, 어항으로서의

기능만 일부 남았고. 가오슝항이 커지자

급격히 쇠퇴.


타이난은 상업도시로 농산물 주요시장이고

임업, 어업중심지며 금은세공이 유명.

염전, 관쯔링온천이 있고.




대로에는 한국요리 광고판이 있고.




이곳에서도 대입학원이 성업 중.




대로 바로 옆에 옛날 재봉틀이

놓여 있었고.




첫 방문지는 츠칸로우(赤嵌樓).


1653년 네델란드인에 의해 지어진 성,

1662년 명나라 정청공이 이들을 물리친 후

다시 짓고 청티엔후(承天府)라 했다.

19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타이완에 처음(1590) 발을 디딘 서양사람은

 포루투갈인이었는데 이들은 타이완을

 Formosa(아름다운 섬)이라 했고,


 타이완사람들은 메이리따오(美麗島 )라고

했다. 지금은 가오슝 지하철역 이름.




츠칸로우  입구를 통과하니,




타이완의 국부,

정청공 (鄭成功, 1624-62) 초상화.


네델란드인들은 명나라 군인겸 정치가인

그를 Koxinga라고 불렀음. 명황실에서

그에게 구어싱예(國姓耶)라는 이름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옛날의 흔적.


정청공은 명나라 푸젠성(福建省)에 살았던

아버지 정지룡이 일본 체류시

일본인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

당시 타이난은 왜구의 소굴이었고. 


그는 명나라 태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아버지와는 달리 청나라에 저항했다.

청나라 난징까지 군대를 이끌었으나


난징 공략에 실패하고 목표를 타이완으로

돌려, 안핑(安平) 프로방시아요새를 함락

네델란드의 통치를 종식시킴(1662).


청나라는 20년간의 정씨왕국을 멸망시킨 후

정청공일가의 충절을 인정, 예우했고

츠칸로우 성채를 건설.




당시 네델란드와의 전투도. 오른편 아래쪽

안핑구바오(安平古堡)가 주요 전투장.




하이션마오(海神廟)는 프로방시아

남서쪽 보루 위에 해신의 가호에 보은하고자

지은 사당. 입구에 츠칸로우라는 현판을 달았음.




1866년 심수경이 인문학 부흥을 위해

지은 웬창거(文昌閣).

하이션마오와 더불어 팔작지붕 건축물.




병모양의 문이 특이롭고.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




꿍쯔마오(孔子廟) 가는 길,

공립문학관에서는 대만 전후 이민

문학전이 열리고 있었고.


후젠성(福建省)출신으로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린위탕(林語堂, 1895-

1976)선생은 중국의 석학이며 문학인.




문학관 근처에서 신부는

폼을 잡고 있었고.




꿍쯔마오에 들어섰다.


타이완 첫번째의 공자사원.

푸젠성 건축양식.




예문 등 여러문이 서있고




마당에는 두과작물인 미국자귀나무

(Rain Tree)가 서있고.




팔덕문을 들어서니




우리의 성균관에도 있는 명륜당.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곳.


충, 절, 의, 효의 큰 글자 아래

의자가 놓여있다.




포인세티아 꽃도 피어있었고.

이곳에도 곧 성탄절이 오겠지.




명현, 명신에게 제를

지내는 사당.




그 안에는 신주가 모셔져 있고.




효자와 충신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




꿍즈마오 길건너편에 있는 릴리과일가게를

한참이나 헤매어 찾았다.

구글지도 이용이 서툴러서 그런가.


우리생년과 같은 1947년부터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한다.


쥬스와 빙수를 사먹었는데

유명도에 비하면 썩 맛있지는 않았고.




릴리빙수가게에서 가까운

옌핑츠왕츠(延平祠)를 찾았다.


앞에는 말달리고 있는 정청공의

조각이 있고.


옌핑츠왕츠는 정청공을 기리는 사당.

1662년에 지어졌다 하고

푸젠(福建)양식.




태비를 모시는 사당도 있고




그의 청나라 난징 북벌도도 있고.




이곳에서 제를 지내겠지.




택시 타고 타이난의 대중적 맛집,

웬장뉴로탕으로, 공자묘 때문인지

음식점 이름이 문장.


줄서서 기다리고, 미리 신청서에 원하는

메뉴를 체크하여 제출해야.




'밤이 깊었어요, 소리를 줄이세요'라는

주의문도 붙어 있었고.

그러고 보니 심야영업도 한다.


실내에서 먹으려면 한없이 기다려야했고

할수없이 뜨거운 땡볕에서 먹을 수밖에.

전부들 그 맛에 아무소리 안했고.




다시 택시 타고 안핑구바오(安平古堡)로.


이곳은 1624-1634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건립된 구축물로 가장 오래된 요새.


정청공의 공격으로 9개월만에 전쟁이 끝나,

38년간 네델란드 통치가 마무리된 곳.




이곳에도 민족영웅의

동상이 서있다.




이곳에도 반얀트리(벵갈고무나무,

 벵골보리수)가 무성. 타이난 곳곳에

이나무가 있다.


뽕나무과 무화과속에 속하는 나무로 가지에서

나온 공기뿌리가 아래로 늘어지다 땅에 닿아

뿌리를 박게되면 새로운 줄기가 된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건물을 감싸고

있는 나무와 같은 종류.




안핑 바다를 지키려고 설치되었던

청나라 대포들.




1629년 네델란드 점령 당시의 경관도.




당시 항구에는 네델란드인 220명(보루내

100명 상주), 일본인 부락의 일본인 160명,

중국인 5천명이 상주했다.


안핑은 바다가 둘러싸고 있었고.


당시 타이완 북쪽에는 류구와 일본,

남쪽에는 필리핀, 대만해협을 끼고 중국대륙,

타이완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주민 핑푸족은 대부분 사냥을 했고

대나무와 나무로 지은 집에 살았다.


한족의 농사를 위한 개간, 화란인의

요구로 핑푸족의 사냥회수가 늘자

자연은 파괴되기 시작했고


핑푸족은 한족으로부터

농사기술을 습득.




옛성곽에는 반얀트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안핑 티엔호우궁(天后宮) 도교사원.


바다의 신, 티엔호우(天后)는 중국남쪽

해안사람, 동남아에 이주한 화교들이

많이 숭배하는 여신.


중앙에 티엔후, 해변의 신, 스웨이메이와

자비의 신, 관음이 좌우로 보좌한다.


이절은 1668년 정청공이 지었는데

푸젠성에서 가져온 마주(媽祖)신상을 모심.

마주가 티엔후인 셈.


원래는 안핑시먼초등학교에 사원이 있었으나

1895년 일본군이 청나라 군인들 60여명을

죽여 사원 뒤에 묻자


이절은 폐기되었고 1966년

지금의 사원을 지었다고.




우리는 또 한차레 길을 헤맨후

안핑슈우(安平樹屋)로.


1860년 영국과의 베이징조약 후, 1865년 

안핑항이 개항이 되자 1867년 영국의

더지양항(德記洋行) 등 서양

상사들이 설립되었다.


안핑슈우는 반얀트리로 둘러싸인 더지양항

창고로 사용되던 곳.




더지양항(德記洋行)간판이

조그맣게 보인다.


1895년 일본의 타이완 점령 후, 상사들의

교역권을 회수하자, 교역량은 극감하였고

항구는 진흙이 침적, 더지양항만 영업지속.


일본인들은 이회사를 소금산업회사로

 개조했고 1979년 중화민국은

이를 박물관으로 전환했다가

도시 속 정원으로 개조했다.




1865년 즈음의 모습




이곳에는 주지우잉(朱玖螢)선생

고택이 있고.


그는 대만소금제조회사를 지휘했었고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