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한여름 산사는 조용했네 (2005.8.13)

난해 2015. 9. 26. 21:27


  명식군 내외와 여행을 한다고 벼르다, 하필이면 광복절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에야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를 공주의 마곡사로만 정해놓고, 다음은 명식군이 하자는 데로 따르기로 하고, 가다가 좋으면 머무를 작정으로 아침 6시 집을 떠났다. 우리 딴에는 꽤 이르다 싶었는데, 중부고속도로와 연결되는 태릉 쪽의 순환도로는 벌써 꽉 막히어 있었다. 생각을 바꾸어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청담대교를 건너 판교를 거쳐,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영동고속도로 분기점 지나서야 차량흐름이 빨라지는 것을 보니, 역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동해안을 더 좋아하는가보다.


1. 춘 마곡 못지않은 하 마곡


  논산가는 고속도로를 들어서고 나서야 여행의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었고, 쪄 가지고온 평창 옥수수 생각이 났다. 친구와 나누어 먹는 정도 있지만, 평창에 6개월 머물렀던 정이 옥수수 씹는 맛을 더하게 했다. 정안 IC에서 나와 마곡사에 이르는 지방도로를 20분 정도 타니 여름 한가로움의 극치라고 할까?


  마곡사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충남의 제일 큰 절로, 사곡(寺谷)면 운암리에 있고, 마곡천이 경내로 흐르고 있다. 입구에서 천을 따라 절까지 한참을 걷는 맛도 있으련만, 명식군 여름철이라 그런지 옆길로 빠져서, 절 가까이 개천 옆에 주차를 하였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서로 내려고 하여, 내가 “절 앞에서 야단법석하고 있네.” 하였더니, 맘 좋게 생긴 매표소 아저씨 “그게 우정이요.”하고 고상하게 표현했다. 이렇게 한가한 여름날엔 휴가나 가 있으면 좋으련만.


  김구 선생께서 한때 이절에서 은신하셨다고 하는 설명문을 보고, 이곳이 예전엔 깊은 산중이었으리라 생각하며, 길을 휘돌아 해탈문을 지나려니 몸이 옴츠러들었다. 정말로 해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탈문에 이어 극락교를 지나야 경내로 들어설 수 있다. 극락교 밑은 잉어들 세상이었다. 자갈로 아래 부분을 막아놓아 시냇물이 작은 호수가 되어, 팔뚝만큼 큰 잉어들이 유유히 놀고 있었다. 먹이를 다리 아래로 던져주니 이놈들도 야단법석이었다. 배려 깊은 우리 보살 둘이 큰 놈들 따돌리고 먹이를 주니, 보이지 않던 조그만 새끼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극락교 건너면 바로 왼쪽에 범종루(梵鐘樓)가 왼편에 높이 서있는데, 현판의 글씨도, 누각자체도 여느 절과 달랐다. 이절은 대웅보전, 대광보전이 위아래로 서 있다. 본전(本殿)이 둘이나 되는 셈인데, 대웅보전의 현판은 김생선생이 쓰셨다고 한다. 보살 둘을 따라 대웅전에 들어서, 애들처럼 넙죽 엎드려 삼배하고 천장을 위로 보니, 2단의 우물천장으로 된 공간구성과 섬세한 나무 조각장식이 예사롭지 않았다. 먼저 대웅전을 나와, 명식군은 어디로 갔나 했더니, 바로 대웅보전 좌측 아래에 있는 마곡천 징검다리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나처럼 절 세 번만 했으면, 기선생이 얼마나 좋아 했을까?


  동심으로 돌아가 큰 개울 건넜더니, 뒤에서 “앗” 소리가 났다. 신발 벗은 두보살과 징검다리 같이 건너던 명식군, 생수병을 개울에 빠트려 버렸다. 언제나 철이 들까요, 관세음보살님. 개울 건너편은 템플스테이하는 도량이 있는 곳인데, 넓은 공간이 펼쳐 있어 절의 후정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젓한 길과 그리고 저 멀리 부드러운 산 능선이 길게 늘어져 있어, 우리 네 사람도 그 수채화 속의 일부였다.


  온 길을 다시 오려니, 시냇가의 길을 따라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눈에 띈다. 물푸레나무, 산사나무, 때죽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등, 특히 층층나무는 모양새가 특이하고 눈에 자주 띄어, 두 보살들도 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숲속의 무법자라고 불리는 층층나무는 햇볕을 독차지하려고 쑥쑥 자라, 나무가 층층 계단을 이룬다. 봄에 오면 얼마나 꽃들이 화사할까? 춘 마곡(春 麻谷), 추 갑사(秋 甲寺)라는 말을 알 것 같았다.


  주차한 곳으로 되돌아 와서, 기선생이 정성껏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어 들고, 먹을 장소를 찾았더니, 이미 자리 잡은 피서가족 들이 많았다. 우리는 젊은 남녀 두 야영객이 텐트를 친 곳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았는데, ‘애로금지’라고 쓴 흰 팻말이 있어 젊은 친구들을 보고 웃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물고기가 많은지, ‘어로금지’라는 팻말이었다. 10시 반 넘어서 우리는 아점을 마쳤다. 차에서 주전부리를 많이 했던지 남자들은 큰 밥그릇을 보고 투정했지만, 음식이 담백한 탓인지, 아름다운 마곡천 탓인지, 모두들 다 먹고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우리부부가 미안해할까 보아 그러는지 기선생은 도시락을 어제 쌌다고 하였는데 정말이었을까?


2. 베적삼 적시는 한여름의 장곡사


  마곡사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청양 장곡사를 향했다. 유구까지 나오는 지방도로는 한가했지만, 마곡천, 유구천을 따라 긴 숲속 계곡은 피서객들로 꽉 차있었다. 다만 사람만 숲에 가리어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도로변에 줄친 주차장에는 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시골 한갓진 도로에 주차장을 설치한 것이 특이했고, 이곳에서 입장료, 주차료 없이 피서를 하고 있는 서민 가족들에겐 정말 쿨한 피서지 같았다. 39번, 36번 국도를 타고 한치고개를 지나, 청양 대치면에서 다시 지방도로를 들어섰었을 때는, 한여름 땡볕 아래였지만, 그 아늑한 맛에 절로 마음이 시원해졌다. 얼마나 재가 크고 계곡이 길면 장곡사가 위치한 곳의 이름이 대치(大峙)면 장곡(長谷)리일까.


  장곡사 바로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을 올려다보니, 아담한 절은 상사화와 목 백일홍 꽃으로 현란하기 짝이 없었다. 잎과 꽃이 같이 피지를 않고, 서로 짝사랑한다는 상사화가 이렇게 무더기로 심겨진 곳도 드므리라. 이절도 본전(本殿)이 둘로, 상 하대웅전이 위아래로 위치해 있다. 예쁘장한 돌계단을 밟고 상대웅전으로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이곳에는 철조약사불좌상부석초대좌라는 복잡한 이름의 국보가 있는데, 마나님에 의하면 이곳이 유명한 약사여래기도도량이라고 한다. “다시 백수가 된 재백의 마음병을 고쳐주십시오”하고 속으로 빌며 상대웅전 옆의 약수를 떠마셨다. 다시 절 입구로 내려오니 이곳에서 북쪽으로 3키로 떨어져 있는 칠갑산 정상(561m)을 정복하고 내려온 남녀 등산객들이 여름 한낮의 더위에 떠날 줄 몰랐다. 다시 상대웅전 뒤쪽 산을 보니 새파란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멋지게 걸쳐 있다.


영 넘어 구름이 가고

먼 마을 호박잎에

지나가는 빗소리

나비는 빈 마당 한구석 조는 꽃에

울 넘어 바다를 잊어

흐르는 천년이

환한 그늘 속 한낮 이었다. ( 이철균 한낮에)


  이절 입구의 목련 나무와 상대웅전에서 내려오는 비탈길의 느티나무에는 특이하게 여자가슴처럼 생긴 혹이 부드럽게 두세 개 솟아나와 있다. 이것을 쓰다듬다가 마곡사에서 명식군이 혼나듯이 나 또한 두보살한테 혼나고 말았다. 장곡사와의 잠시 동안의 만남을 또 아쉬워하며 다시 길을 떠났을 때는 한 시 되었을까? 한낮에 세 번째 목적지를 향했다는 것이 일찍 서두르는 여행의 즐거움이라 하겠다. 부여의 무량사를 목표로 출발한 우리는 장곡사입구 큰 느티나무 두 그루 앞에서 차를 세웠다. 한 나무는 수령이 600살이 넘었다는 설명문이 있었고, 나무 밑동의 나무주름이 대단하여 징그러울 정도였다. 나무 아래 쉬고 있는 노인은 자기 어렸을 때의 나무나이도 600이었다고 하며 허허 웃었다. 우리들 가까운 곳에도 이런 시원한 나무쉼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3. 물소리, 매미소리만 요란한 부여 무량사


  장곡에서 온직, 금정으로 해서 다시 한적한 지방도로를 타고, 청양의 남양을 거쳐 부여 외산면 만수리에 위치한 무량사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부여의 서쪽 맨 끝자락이었다. 만수산(433m) 기슭이다 라기 보다는 동네 한가운데 절이 위치해 있는 기분이었다. 초입의 다리를 건너니 소나무 숲 울창하고 물소리 요란한데, 냇물바닥은 시커멓다. 석탄지대인가보다. 경내 들어서기 전, 담 밖의 큰 당간지주는 옛적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했다.


  이층 목조인 극락전은 이절의 본전(本殿)으로 소박했고, 마곡사 장곡사와는 달리 찾는 나그네들이 적어서인지 정적인 분위기에 쌓여 있었다. 고려 때 만들어진 백제양식의 오층석탑 또한 외로워 보였다. 한쪽 약수 옆에는 목백일홍 나무 한 그루 꽃 피우고 있었는데, 분위기 모르고 몸단장한 새 색시가 어색하게 서 있는 것 같았다. 영산전에는 김시습 선생의 초상화가 어둡게 모셔져 있었다. 선생은 다섯 살에 궁궐에 불려갈 정도의 신동이었는데, 설악산 오세암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하여, 말년을 이곳에서 지내시다 59세에 입적하셨다고 한다. 영산전 옆의 계곡 물은 선생의 시름을 아는 양, 더욱 크고 요란하게 흘렀다. 도솔암을 거쳐 태조암에 이르는 1.5키로의 숲길은 걸을만하다는데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산이 출렁이고

물이 초록으로 아우르는 그곳에 가면

젊은 날 초상화는 어디 가고

만년(滿年)의 나그네 한 분

액자 속에 계신다.

(조종래 무량사에서)


  그러고 보니 오늘 방문한 세절은 나름대로 개성이 있고, 서울 근교 새롭게 단장한 절들보다 옛 모습들을 지니고 있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4. 보령댐, 춘장대 그리고 동백정(冬栢亭)


  다시 길을 떠나 무량사에서 40번 국도를 타다가는 도화담 삼거리에서, 보령 웅천천을 따라 남하하는 지방도로를 바꾸어 탔다. 이어서 98년에 준공된 보령호수를 왼쪽으로 반 바퀴 돌아, 발전소 옆 휴게소에서 한 그릇에 오천 원하는 비싼 팥빙수 두 그릇 시켜놓고, 여행 마무리에 대해 논의했다. “여름철에 집을 떠나면 끈적거림이 싫으니, 요번 여행은 제부도의 노을을 보며 조개구이 먹는 것으로 마무리하자”는 명식군의 제안에 따라, 이곳을 떠나 무창포 IC를 올라탔다. 그러나 바로 ‘목포, 춘장대’라고 씌어져 있는 도로 표지판이 나타나자, 우리 모두는 여행이 일찍 끝나는 것이 아쉬운지, ‘목표, 춘장대’로 고쳐 읽으며, 방향을 돌리고 말았다. 우리는 춘장대를 하조대와 같이 옛날 선비들이 노닐던 정자로 알고 춘장대를 찾았지만, 춘장대 해수욕장(서천군 서면 위치) 만 있을 뿐 이었다.


  우리는 대용으로 서천 화력발전소 옆에 있는 마량리 동백나무 숲의 동백정을 찾았다. 마음 좋은 매표소아저씨의 “50세 이상은 돈 안 받는다.”고 하는 말에 기분 좋게 땡볕 더위에 언덕을 올랐는데, 동백정 아래 그늘 밑은 시원한 여름 바닷바람과 멋진 바다 풍경 때문에 떠나기가 싫었다. 동백나무 숲에서 이곳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나 춘장대를 물었더니, 해운대에 가서 정자를 찾으라고 했다. 하여튼 이곳의 멋진 일몰을 마다하고 제부도로 다시 길을 떠났다. 서둘러도 제부도의 일몰을 보기는 어려울 터인데, 동지부터 2개월간 일출도 볼 수 있다는 마량포구, 그리고 홍원항을 들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탔다. 마나님들은 기차 간이역 같은 건물에 춘장대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하며, 이곳에 웬 역사냐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춘장대에는 한전에서 휴가철에만 사철(私鐵)을 운행하고 있다고 한다.


5. 이구개조는타불이 있는 제부도


  잘 달리던 차가 발안IC부터 엉금엉금 기기 시작하여 비봉IC에서 빠졌을 때는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래도 서쪽하늘에는 붉으스레 노을의 자국이 남아 있었고, 반대편 길은 제부도에서 빠져나오는 차량들이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오후 8시20분이 되어 제부도 가는 해안의 매표소에 도착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아직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곧 물이 들어왔다가 밤11시 50분에는 다시 바닷길이 열린다고 하여 한시름 놓았다. 마침 갔던 날이 조금(음력 8일과 23일) 때인지라 조수가 가장 낮아, 바다가 열려 있는 시간이 가장 긴 날 중의 하나였다.


  제부도는 우리 마나님처럼 제부 없는 사람은 갈 수 없는 섬이라고 내가 비아냥거렸는데, ‘옛날에 바닷물이 열릴 때는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하여 바다를 건넜다’는 뜻의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는 말에서 제부도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부도는 둘레가 8키로 되는 섬으로 화성군 서신면에 속하며 이곳의 지하수 맛이 좋다고 한다.


  섬에 도착하자 명식군은 섬 한 바퀴를 드라이브시켜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섬 밖은 어둠 뿐이었고, 비포장도로의 먼지와 왁자지껄한 젊은이들의 떠드는 소리 그리고 시끄러운 폭죽소리에 혼이 나갈 지경이어서, 산사의 고요함은 먼 옛날에 느꼈던 것 같았다. 곧 명식군의 단골 조개구이 집에 들려 조개를 주문했다. 고동, 맛살, 바지락, 키조개, 가리비, 모시조개 굴 등을 구워가면서 각 가지의 맛을 음미하며 소주잔 기울이는 것도 괜찮았다. 그리고 조개 칼국수를 양껏 들고나니 부러운 것이 없었다. 술이 얼근해져서는 1.5키로 되는 해변의 통나무 산책로를 걸어갔다 왔는데, 시원한 바닷바람에 갯바위 노래를 불러봤다.

  산책 후 바닷길이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육지로 가는 입구에는 벌써부터 차량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산책로 입구 방파제 앞 식당 앞에는 한 아가씨가 쓰레기를 큰 난로에 태우고 있었다. 옆에 붙어 부채질을 해주다보니, 일행은 방파제로 갔는지, 나를 버리고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기선생이 운전하여 돌아오는 차속에서 “보살님들, 이구개조는타불이라는 부처님을 아시오?”하니 픽 웃기들만 했다. 제부도에 가면 길이 열린다는데, 나의 길은 언제나 훤히 열릴까? (2005. 8.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