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정해년생들의 정해년 봄나들이 (2007.4.10)

난해 2015. 9. 26. 22:06


  사친회(농협, 서울 47년생들의 모임)에서는, 일생에 두 번 있는 해, 정해년에, 해외여행을 가느니 마느니 하더니, 주왕산을 들려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는 계획을 세웠다. 여행비용은 기금에서 전액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22명 중 16명이 참석했다.


  우리들의 해이지만 그저 착잡하기만 한 것은 왜일까? 아버님의 회갑 때는 입사 후 육 년차 되는 해였는데, 장남의 입장에서 회갑잔치를 조촐하게 해드렸었다. 그때 사진을 보면,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에 둘려 싸이신 아버님의 얼굴이 환하시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렇다 치고, 집사람은 시어머니 모신지 삼십년 가까이 되는데도, 아직도 세 아이 뒤치다꺼리에 늙는 줄도 모른다.


  4월 10일 신천역, 우리들의 출발은 아침 여덟 시에서 반시간 정도 지연되었다. 홀아비 박 군의 늦는 버릇은 여전했다. 홀아비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해야지, 별 수 있나. 그는 재작년 송년회 때, 한 여인을 동반했었다. 결혼은 언제 하느냐고 그에게 물었더니, 수신한지 얼마 안 되는 핸드폰 메시지를 보여준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만나면 늘 신경 쓰시는 것이 걸려, 연락 끊었으면 해요.” 그에겐 미혼인 여식도 있고, 걸리는 것이 많으리라.


  우리는 점심 때 주왕산에 도착하여, 학소암 시루봉 등의 진달래꽃, 회양목 등을 감상하며 제2폭포까지 갔다 온 다음, 영화 ‘봄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이 되었던 아담한 연못, 주산지(注山池)를 거닐었다. 제1폭포 천길 벼랑 위 진달래를 보며 느꼈던 노옹(신라 성덕왕 때, 수로부인에게 꽃가지를 꺾어 바쳤던)의 마음은 어느새 사랑으로 고뇌하는 젊은 스님의 마음으로 바뀌었다. 150년 된 왕버들, 능수버들이 밑동을 호수에 담그고, 세월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잔잔한 호수 위 바람결에, 우리는 착잡한 마음을 풀어 놓았다.


  청송을 떠나 후포로 가는 길, 영덕으로 이어지는 국도34번 언덕길들은 온통 복사꽃으로 물들여져, 밤으로 가는 어둠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어 후포에서 어둠에 잠기어가는 동해를 바라보면서, 대게와 회를 안주로 한잔하며, 우리도 저물어 갔다.


  다음날 아침 백암 온천에 몸을 담근 후, 우 군, 이 군과 주변동네의 벚꽃 산책을 다녀오다 임 군을 만났다. 새벽에 일어나 백암산(1004m)을 정복하고 온다고, 일부러 백암산을 찾을 수는 없고 하여 부지런을 떨었다고 했다.


  백암의 숙소를 떠나려하니 버스 옆에 싱그러운 아가씨가 서있었다. 기사양반이 우리들 분위기 맞추려고 안내양을 하루 고용했구나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차가 출발하자 그녀가 자기소개를 하고 노래 한곡을 뽑자, 점잔만 빼던 친구들의 분위기가 엎(up)되기 시작했다. 음료수 한잔 씩 돌리고, 2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달라하더니, 자기는 사실 광동제약 인턴사원인데, 회사의 임시 홍보장소에 손님을 유인해오도록 임무를 받았다며, 책임자한테 적극적인 직원이라고 꼭 말씀해 주십사고 부탁을 했다. 허, 대단한지고.


  광동제약의 표시가 있는 가건물로 안내를 받으니, 흰 가운의 사나이가 심근경색, 중풍 등 우리가 입문하게 될 성인병에 대해 설명했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지. 그러더니 그는 결국 약장사로 돌변했고, 이어 주문받는 아줌마들이 달려들었다. 제일 비싼 것은 얼마냐고 묻고는, 기념품으로 우산만 받고 버스에 오르니, 차가 떠나는 순간까지 아줌마모기떼들이 달려들었다. 환한 미소로 달려드는 그녀들이 싫기보다는 오히려 생의 열정을 가진 그녀들이 부러워졌다. 한 사람 분을 산 사람도 있었고, 부인 몫을 포함해서 구입한 애처가도 있었다. 사실 나도 망설임 끝에 사려고 하였지만, 내게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끔 엉터리 보약이나 맛없는 굴비 등을 사오시곤 하는 어머님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들에겐 우리는 효도관광 나선 늙은이들이었다.


  이어 울진 성류굴(聖留窟)을 돌고 나서는, 건어물 상점에서 선심을 써 내놓은 막걸리를 마신 후, 왕피천 가에 자리 잡은 민물고기 생태 체험관을 찾았다. 물고기의 생태를 이 녀석은 이렇고, 저 녀석은 저렇고 하며, 열심히 설명하는 아가씨는 생기(生氣)덩어리였다. 우리는 개구쟁이들처럼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짓궂은 질문도 하며 킥킥거렸다. 몰려다니는 열목어, 어름치, 초어, 황어, 가시고기, 쉬리 등은 어릴 때 고기 잡던 추억을 몰고 왔다. 막걸리 기운에 나는 그만 그녀에게 쥐포선물을 하고 말았다. 딸네미들 줄려고 산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동해 바닷가로 나와, 점심으로 소주 곁들인 시원한 곰치국을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별미였다. 네 시 가까이 되어 정동진 바닷가에 도착한 우리는 봄바람에 취했고, 곰치국 아줌마가 싸준 부추전에 겻들인 소주에 취했다. 멀리 언덕에는 배 모양의 선 쿠루즈(Sun Cruise) 호텔이 폼을 재고 있었다. 퇴직하기 전 마지막 가을, 우 군과 그곳에서 커피 한 잔하며, 망망한 동해처럼 망망(茫茫)하기만 한 우리의 앞날을 걱정했었다. 그때 우 군은 그곳에서 조합장들과 회의가 있었고, 나는 고향의 조합 전무들과 수학여행(?)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안개 속에 돛 달고 가던 배

  바람도 없는 아침 물결에

  소리도 없이 가 버린 배

  배도 가고 세월도 갔건마는

  안개 속 같은 어릴 적 꿈은

  옛날의 돛 달고 가던 배같이____________

  안개 속에 가고 오지 않는 배같이_______ (주 요한의 지금에도 못 잊는 것은)


  정동진에서 귀경하는 버스 속에는 어느새 사혈 침 아줌마가 승차하여, 먼저 온 친구들의 손을 잡고 사혈 시술을 하고 있었다. 젊은 여인의 손이 그리운지, 친구들은 서로 시술을 자청했고, 몇은 사혈침을 구입하였다. 생의 끈끈함은 동해안 도처에 깔려 있었고, 힘 빠진 우리들은 그 끈끈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여덟시 쯤 서울에 도착한 우리는, 감자탕으로 요기를 한 후, 사은품으로 받은 우산을 지팡이로 하며 각자 귀가했다. 지하철에는 야간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맹인 세 사람이 안마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요번 여행에서는 주산지 버드나무, 영덕 복사꽃의 아름다움도 좋았지만,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생의 끈끈함과 말없이 여행을 계획하고 진행한 고 영군 회장과 김 윤동 총무의 성실함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