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도 안계십니까?
여행의 즐거움은 경험하지 못한 곳을 찾아, 그곳의 자연과 삶 등을 맛보는 것이지만, 중간 중간 낯익은 곳과 사람들을 찾는 기쁨 또한 적지 않다. 이번 여행은, 지난 여름 삼척의 응봉산 용소골에 이어, 정선의 옛길을 찾아보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두 옛길은 연극평론가 안치운이 그리움으로 걸었던 길이다.
10월 30일, 우리들의 강원도 여행은 늘 그렇듯이, 횡성 새말을 들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오후 일곱 시였지만, 벌써 어둠은 짙게 깔려 있었고, ‘새말묵집’ 앞은 전등불만 훤히 켜져 있을 뿐, 주인은 없었다. J가 아무도 안계시냐고 몇 번이나 큰소리로 부른 뒤에야 어디선가 주인아주머니가 나타났다. Z의 농장에서 딴 오디로 K가 빗은 오디술에 메밀묵밥은 별미였다. 이번 여행의 동행자 세 명은 모두 오디수확과 용소골 여행 시 함께 했었다. 항상, 같이 하면, 마음 편해지는 친구들이다. 이집 메밀묵 맛은, 어렸을 때 겨울밤 늦게 먹던 고향의 메밀묵을 생각나게 했고, 아주머니 또한 고향 분 같이 성품이 푸근했다.
고속도로를 다시 달리다, 밤 아홉 시, 옛 대관령 휴게실에 들려, 농장일로 피곤한 Z를 차에 남겨놓고, 산골의 찬 공기를 쐰 후 차로 돌아오니, Z가 나와 있었다. 왜 자지 나왔냐고 우리들은 말하며 웃었다. 그날도 장거리를 두 번이나 뛰었다는데,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했다. 이제는 애들한테 일을 맡겨도 될 터인데, 그도 벌써 노인이 되어 안심이 안 되는가 보았다.
주문진에서 광어, 오징어 회를 떠가지고, 하조대 Z의 별장, 신미아파트에 도착하니, 벌써 밤 열한시가 되었다. K가 가져온 홍주에 회를 들었다. 피곤하여서인지 홍주는 독하기만 했고, 회 맛도 별로였다. 열두 시가 한참 지나 잠자리에 들려고 일어섰더니, 달력에는 유종호의 시가 써져 있었다.
‘시골에선 별들이 보이고 / 도시에선 시간이 보인다. / 벗이여, 우리도 쉬었다 가자.’
도시에선 왜 시간이 보일까하다, 달력위의 시계를 떨어트려, 시계유리를 박살내었다.
2. 나목(裸木)이 뒹구는 신기리에서 구절리 가는 길
시월의 마지막 날, 진부 신기리에서 정선 구절리로 가는 비포장 길로 차가 들어섰을 때는 아홉시 반이 되었다. 마을 곳곳에 수해 입은 비닐하우스들이 흉측했다. 발왕산(1458m)과 박지산(1391m)사이를 지나는 육십 리의 이 옛길은 진부, 정선, 강릉을 잇는 비포장 산길이다.
우리는 비경의 옛길을 맛보려 이 길을 들어섰지만, 길은 끝나기까지 올여름 수해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시신이 된 통나무들이 계곡에 처참히 널려있고, 침수되었던 계곡과 도로를 복구하고 있는 인부와 장비들이 간혹 보였다. 또 허물어진 농가도 눈에 뜨였다. 자연의 재해에 비해 복구하려는 사람의 노력은 너무 허약해 보였다.
내신기를 지나, 구백 미터 이상 되는 봉산재를 가파르게 넘어 봉산리에 도착했다. 봉산분교는 완전히 물살에 휩쓸려, 담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자갈밭이 되어 있었고, 피해를 면한 농가 근처 숲에는 벌통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옛날 이곳에서 벌을 치고 있었던 촌부가 우연히도 이성계와 같은 사주를 타고났다하여 그로부터 봉두군이란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길옆의 서낭당과 오래된 전나무 서낭목은 신의 가호를 받았는지 멀쩡한 것이 신기했다.
지칠지를 지나, 정선의 거문골, 자개골을 흐르는 냇가 주변 또한 수해는 마찬가지였다. 계곡 주변 길은 흔적도 없이 떠내려 간 곳이 많았고, 대신 넓은 냇가 가운데로 임시 도로가 나 있었다.
열한시 이십분 구절역을 지나, 구절리에서 강릉 대기리로 가는 비포장 길을 달렸다. 이곳도 수해가 심했는지 아직도 도로 포장공사 중이었고, 도로 옆을 흐르는 송천은 흙탕물이었다. 도암 양수발전소가 제구실을 못하고, 오히려 저수된 물이 이끼 낀 썩은 물이 되다보니, 송천은 물론 그 밑의 조양강과 동강까지 녹회색 물을 흘리고 있다.
우리는 대기리에서 다시 정선 임계로 되돌아 나와, 골지천을 따라 아우라지로 향하다가, 오후 한시 되어 구미정을 들렸다. 앞 계곡의 아름다움보다는, 파괴된 옛길과 오염된 냇가에 실망한 나머지, 삶은 계란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태백산맥의 등줄기에 여기저기 구멍을 뚫으며, 물길도 고려하지 않고 도로를 놓은 것이 큰 수해가 나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오후 두시 다되어 아우라지에 도착하여 합수지점을 바라보자니, 처음 이곳에 와 감명 받았던 그 물살의 깊음과 속삭임은 없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원 입구는 주거지를 발굴한다고 야단법석이었다. 정선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한 여인의 주거지인가?
우리는 돌연 배고픔에 못 견디어 정선읍으로 차를 몰아 동광식당을 찾았다. 산천과 인걸은 옛 그대로가 아닌데 황기족발과 콧등치기 맛은 그대로였다. 얼근해져 식당 문을 나서니 네 시가 다되었다.
3. 광대곡(廣大谷)에서 광대춤을 추고
차속에서 곤히 졸다보니, 광대곡이라고 했다. 어둠이 벌써 깔리기 시작한 계곡의 바위들은 신비하게도 흰빛이 유난했다. 이곳에서 옛날 사금을 캤다는데. J가 몸과 마음이 정결치 못한 사람은 이곳에 오를 수 없다고 하니 겁이 더럭 났다. 험한 바위 길을 오르다가는 숲을 걷고, 그러다가는 푹신한 모래밭을 걸었다. 내가 제일 취했는지, 아픈 허리 때문인지 비지땀을 흘리며 광대춤을 추었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옥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럽힐까봐 물이 씻어 흐른다. (이 병기의 계곡)
골뱅이 용소의 물이 골뱅이의 끝부분같이 파랬다. 골뱅이를 좋아하는 요즈음 젊은이가 이름을 지었는가. 바가지 용소에는 빨간 단풍잎 하나 떨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을을 처음 느껴본 것 같았다. 3키로 지점에 있는 영천폭포의 물줄기는 어둠 속에서 하얀 물길을 쏟고 있었다. 다섯 시 반 하산하여 광대사 입구로 걸어 나오니, 산 위에는 반달이 떠 있었다.
인근에 있는 몰운대(沒雲臺)를 찾아 솔밭 길을 걸으니, 벼랑 끝에 삼백년 된 죽은 소나무가 용틀임하며 유령처럼 서 있었다. 구름조차 아름다운 경관에 끌려 쉬어간다는 절경은 이미 어둠에 잠겼고, 한 쪽엔 솨하는 물결소리, 한쪽에는 줄 있는 자동차 소리가 요란했다. 황 동규 시인이 말한 ‘꽃가루 하나가 강물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벽’은 없었다.
동면 소재지에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화암약수 앞 화암장 모텔에서 여장을 풀었을 때는 여섯시였다. 우선 철분 맛이 나는 약수 한 컵 마시고 나서는 저녁 대신 과일파티를 하였다. 포도, 사과, 감. 하여튼 올해는 과일 복이 넘치는 한해이다. 숙소의 여인네들이 시월의 마지막 밤이 어쩌고 하였지만, 우리들은 일찍 잠을 청했다.
4. 민둥산을 내려와 동강을 거꾸로 오르다
화암장 표고버섯 죽은 푸짐했고, 씹히는 버섯이 감칠맛이 있었다. 주먹밥을 싸줄 수 있겠냐고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인데, 곱상하게 나이든 여주인은 미리 얘기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미안해했다. 처음 만나보는 예의 있는 여관주인이었다.
아홉시에 길 떠나, 고병골 삼내 약수 마시고, 민둥산 산행 입구를 찾았다. 한티재에 있는 보호수마을은 산 위에 있는 마을로는 보기 드물게 큰 마을이었다. 보호수들이 마을의 역사를 말하여 주었고, 주민들은 추수하느라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열시 넘어 증산초등학교 옆에 차를 세워두고, 단체로 온 노인들 뒤를 따라 민둥산을 올랐다. 4키로의 길을 한 시간 반 오르니, 1,119미터 정상이었고, 억새로 온통 뒤덮인 부드러운 산봉우리는 포근함 그 자체이었다. 정상 옆에 마련된 나무 바닥의 긴 전망대에서 산세를 보니, 지리산보다는 광활하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산봉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점심은 사과와 삶은 쌍알에 홍주를 곁들였다. 하조대에서는 독했던 술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옆자리의 사북초 여자동창생들에게 홍주병을 돌렸더니 바로 동이 나버렸다. 삼십대 여인들의 일부는 강원랜드에서 일하는지 세련미까지 보였는데, 남편들은 민둥산을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고.
그녀들을 따라 내려오는 길, 활기가 넘친다. 내려오는 길은 휘돌아 내려오는 길, 사람들은 적고, 우리가 당초 걷고 싶어 했던 옛길이었다. 길가에는 마가목 빨간 열매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열매를 따서 입에 넣으니, 손은 새빨갛게 핏빛이 되었다.
머언 산 굽이굽이 돌아갔기로/ 산 굽이마다 굽이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같다. (박 목월의 길처럼)
두시에 하산하여 학교 앞에서 시내 쪽을 보니, 기찻길이 둘이었다. 위는 태백선 아래는 정선선. ‘큰 뜻을 품고, 슬기롭게 자라라.’는 증산초교의 슬로건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별어곡, 신동읍, 고성리를 거쳐 동강보전지역을 거꾸로 올랐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정선 길의 정취도 그만이지만, 출렁이는 은빛 강물에 눈시려하며, 굽이굽이 흐르는 동강을 거슬러 오르자니, 강물이 우리를 따라 흘러가는 느낌은 신비하기까지 했다. 마치 우리가 동화나라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같이. 여름에는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이 길을 메우랴.
산다는 것은 흐르는 것이다./ 흐르는 것은 바라보는 것이다./
흐르는 것은 듣는 것이다./ 흐르는 것은 느끼는 것이다./
흐름이 계곡을 흐르듯/ 목숨이 흐름되어/
우리들의 살을 흐르는 것이다./ 우리들의 뼈를 흐르는 것이다.(박 재륜의 川上에 서서)
가수리 언덕 위에 있는 동강쉼터에서 커피 한잔 청해 마셨다. 조그만 가게에는 올해 홍수 때 찍은 큰 사진이 붙어 있었다. 넓은 계곡에 큰 강물이 흐르는 멋진 사진이었는데, 실은 물에 잠긴 이곳의 사진이라고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물이 찼던 기둥 눈금을 가리켰다. 가수리에서 조양강과 동남천이 만나 동강이 되어 흐르니, 해마다 물난리를 겪을 수밖에. 가수리 곳곳에는 조그만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가 많아 풍치를 더했는데, 이곳이 정선에서는 제일 따듯한 곳이라고 한다.
5. 대화 장터의 추억
아름다운 동강을 뒤로하고, 광하리를 지나, 평창의 비행기재 멧둔재 뱃재를 넘어, 우리여행의 종착지나 다름없는, 대화 장터의 경림식당을 찾았다. 주인인 박 월진 아주머니의 건강한 모습이 무척 반가웠다. 다섯 시가 되어 출출하기도 했지만, 족발구이의 맛은 여전했다. 족발을 얇게 썰어 불에 구워 먹는 족발구이는 이곳 아니면 맛볼 수가 없다.
술이 한 순배 돌자, 아주머니에게 광구의 죽음에 대하여 물었다. 장례식에는 많은 친구들이 왔고, 화환은 왜 그렇게 많은지, 차라리 돈으로나 주었다면, 남아 있는 모자의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았겠냐고 아쉬워했다. 광구는, 작년 내가 대화에 잠시 머무를 때, 형 아우하며 지내는 친구였다. 이곳 유지의 아들로 신망이 두터운 친구였지만, 부친이 타계하고, 하던 건축자재 사업이 부도나자, 생활의 리듬을 잃어버렸다.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가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이곳을 찾았던 내 친구들이나 부인들도 선한 광구를 잘 기억하고 있다. 올 여름, 물고기 잡아 놓을 테니, 형 꼭 와야 된다고 하던 그의 굵직한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려왔다.
술이 얼근해진 J가, 맘먹고 찾았던 정선가는 옛길이 그 지경이어서 미안했다고 하자, 우리는 광대곡, 민둥산 산행이며, 동강 길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그의 여행설계에 대하여 적극적인 찬사를 보냈다. 그렇지만 마음속은, 다시 걸을 수 없는 정선가는 옛길을, 진작 찾지 못한 아쉬움이 더해만 갔다. 그러나 인간재해로 볼 수 없는 절경이 그것 하나뿐이랴.
아주머니에게 당신 건강 때문에 술 한 잔 못 권했다고 이별 인사를 한 후, 경림식당 앞집에서 먹은, 즉석에서 손으로 뽑은 자장면의 맛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별미였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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