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흑돼지를 잡으러 제주도로
성익군이 제주도에 흑돼지 한 마리를 확보해 놓았으니, 9월 5일부터 사나흘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제의한 것은 8월이었다. 뒤이어 지형, 재혁군한테서 같은 내용의 전화가 왔지만, 울릉도 여행 약속이 되어 있었고, 돼지고기 먹으러 비싼 차비내고 제주도를 간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태풍 나비 때문에 계획이 9월8일(목요일)로 순연되었다. 백록담을 오른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고, 이삼일 전부터 내가 안가면 그들도 안 간다는 친구들의 거짓말에 못 이기는체하고 넘어갔다. 생전에 남한의 제1봉을 가보아야하지 않겠는가.
“지탄군의 차에 8명이 탈 예정이니 짐을 최소화하여 달라.”는 대장 재혁군의 말이 생각나, 집 떠날 때 배낭에 샌달을 넣을까 말까하고 망설이니, “이젠 여행도 우아하게 할 나이가 되었지 않아요?” 하며 제주도에 가면 제발 천병헌군에게 빌붙지 말라는 집사람의 엄명이 있었다. 성인봉의 피로가 쌓인 채로 평촌역에 밤 10시 5분 도착했을 때는 일곱 명의 반가운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탄, 수영, 수동, 학천군 등. 곧 출발하여 서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를 올라타자, 야간운전의 도사 성익군이 마나님께서 쪄주신 옥수수를 꺼내 놓았다. 맥주 한잔 마시며 떠들다보니 초가을 밤이 그냥 지나갔다. 이야기 중에 준상군의 아들 결혼식은 가보지는 못하지만 맘속으로 축하해줬다. 우리 친구들이 말이 많은 것은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여행도사 들의 철칙대로 두 시간마다 휴게소에 들렸는데, 기사 성익군을 배려하기보다는 한 대 피우기 위해서였다. 내일 모래가 회갑인 친구들이 언제 철들려는지, 8명중 5명이 꼴초이다.
목포에서 완도까지 가는 길은 오리무중이었다. 밖은 어둡고, 영암, 강진, 해남 등으로 이 길이냐, 저 길이냐 하며 헤매었는데, 큰 착오 없이 9월9일(금요일) 새벽 4시 반 완도 부둣가에 도착하였다. 우선 강태공 학천군이 노상에서 끓인 커피 한잔 씩 마시고 음식점을 찾았지만, 결국 24시 김밥천국에 자리를 잡았다. 치즈 돈가스, 해물 덮밥 등으로 이른 조반 마치고, 점심으로 김밥을 주문했다. 8시 정각,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 가는 온 바다 1호는 출발했다. 3등표를 살 때는 우아하게 여행하라는 집사람 생각에 어깨가 쳐졌었지만, 3등 객실에 등대고 누웠을 때는 한없이 편했다. 그러나 김수동 회장이 가져온 보드카 한잔 하며 성익군이 마련한 시-레이숀 등으로 여흥을 즐기는 잠깐 사이에 베게가 사라졌다. 참 우아한지고.
술기운에 한 시간 정도 눈 붙였을까? 오후 1시 30분 제주항 2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한여름 같았다. 매표소에 들려 돌아갈 배표를 사려니, 일요일 출항하는 배는 추자도 경유하는 오후3시 배 뿐이라고 했다. 밤에 완도에 도착하여 또 밤을 새며 상경할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같은 배로 돌아가면 배 삯이 할인된다하니, 백수에겐 안성맞춤 아니겠는가.
2. 문풍지와 약선(藥仙)
성익군이 차를 달려 애월읍 하귀 2리에 있는 아담한 오두막집에 우리를 부려놓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는 향기 짙은 치자 꽂을 비롯하여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고, 정원 한구석 짐차에는 조그만 흑돼지 한 마리가 넙죽 엎드려 있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알고 보니 집은 성익군의 누님이 홀로 살며, 제주산 자연약초로 만든 차 위주로 운영하는 찻집, ‘문풍지와 약선’이었다. 흑돼지가 정원의 나무에 매어 달릴 때, 성익 지형군을 제외한 여섯 명은 천제연 폭포로 내빼었다. 교장선생 지형군은 전공이 축산인지라, 일을 도와줄 요량인지 쫒아오지를 않았다.
지탄군이 신이 났다. 그의 사랑하는 애마에 친구들을 싣고, 활짝 펼쳐진 제주의 뜰과 산을 질러가자니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천제연 폭포는 열대림 속에 있었다. 입장권을 끊니 마니 하다가, 월남 참전용사와 또 늙어 보이는 친구 하나는 표 없이, 네 장의 표로 입장을 하였다. 폭포에서 흐르는 물은 담그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왔고, 물속에는 은어들이 뛰어 놀았다. 폭포공원을 한 바퀴 돌기도 전에 핸드폰에서 성익군의 목소리가 왕왕거렸다. 빨리 흑돼지 바비큐 먹으러 오라고.
찻집 마당에 도착하니, 병헌 상선군이 이미 합세하여 고기를 구우며 한라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반가운 얼굴 인사한 후, 생간을 참기름 찍어 소주를 겻들이니, 좀 전의 애처로운 작은 돼지 모습은 어데 갔는지. 사료 없이 자연에서 키운 방목 흑돼지 맛은 먹어본 사람만 알렸다. 조금 있으려니, 제주 영락교회 김정서 목사가 도착했다. 옛날 학생 때 얼굴은 없고, 온화한 목사님 그대로의 얼굴이었다. 또 한 차례의 반가움이 진하게 지나갔다. 정서군이 맛있게 돼지고기 뜯는 모습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저녁 식사 전에 제주 친구들은 내일 저녁 다시 만나기로 하고 떠나갔는데, 마침 대광 동문회 모임이 있는 날이란다. 우리도 같이 참석하였다면, 병헌, 상선군의 낯을 더욱 빛나게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제주의 첫날은 한라산에 취해서, 또 누님이 대접한 조릿대 술· 오가피 차 등에 취해서, 몇 친구는 고 스톱 조금 하다가, 우리들의 누님 집에서 편히 잠들었다. 성익군과 그의 누님과 옵서버 수영군은 밤이 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한참 잘 자다 잠이 깨었는데, 재혁군이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동병상련. 한얀 손들의 뒤척임이었다.
3. 백록담에서 쒱을 기다리며
아침6시에 기상하여 8명이 화장실을 이용하자니 모두들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는 노변에 볼 일 보았다고 하는데, 손님이면서 주인노릇하자니 힘들었을 것이다. 누님이 만든 황태 국, 청국장 그리고 고등어 졸임을 맛있게 먹고 부리나케 출발하여, 김밥을 주문해 놓은 서부관광슈퍼를 찾았다. 누님의 설명을 두 번이나 들은 성익군, 술이 덜 깨어서 이리저리 안내하며 조수 역할을 하였지만, 슈퍼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더니 엉뚱한 사거리에서 분대장이 대원을 풀어 수색하듯이, 성익군이 대원들에게 수색 명령을 내렸지만, 지형군 만 착실히 명에 따랐을 뿐이다. 하여튼 30분 이상을 헤매다가 슈퍼는 찾지도 못하고 성판악을 향해 출발했다.
성판악까지 가는 길도 제대로 아는 사람 하나도 없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하고 이사람 저사람 지시만 했으니, 기사 지탄군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나 9시 반까지 매표소에 도착해야 입산이 가능한데도, 누구하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백록담 못가면 더 좋은 것 아니냐’하는 식의 중턱 산악회 기질이 그대로 들어난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은 치질이 도진 대장 재혁군의 마음이 산에서 떠나 있던 것이 산만한 진행의 원인이었던 것 같았다. 산만한 중에서도 신비의 도로에서 착시현상을 확인해 보려고, 내리막처럼 보이는 길에서 시동을 껐더니 차가 거꾸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성판악에 도착하여 김밥 등을 구입한 후 매표소를 통과하였을 때는 9시18분이었다. 출발하여 ‘진달래 밭 대피소까지 7.3키로, 다시 백록담까지는 2.3키로’ 라고 써있는 안내판을 보니, 겁이 나면서도 꼭 가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흐린 날씨가 산행을 도왔고, 잘 정비되어진 등산로와 길 양측의 높은 나무들은 피로를 적게 했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걷는 것은 정말 피곤했지만, 중간 중간 바닥을 나무로 깔은 길은 편안함을 주었고, 나무 길은 진달래 밭에 가까워질수록 길고 자주 자주 나타났다.
지탄군과 나는 선두를 지키다, 후진이 따라오기 까지 쉬고는 하였는데, 다행스럽게 재혁군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정상까지 가기로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산행을 자주 안했던 학천군은 조금 오르다 먼저 하산하기로 되어 있었고, 성익과 수영군은 어제 술 탓인지 뒤처지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진달래 밭과의 중간 지점인 사라악 약수터부터 후진에 신경 쓰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진달래 밭 휴게소에서는 12시30분 이후부터 백록담 오르는 길을 통제하기 시작하고, 7명 모두 정상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산의 낮은 곳에서는 중부지방에서 볼 수 없는 붉가시나무, 굴거리나무 등 상록 활엽수가 많더니, 여기를 좀 지나니 침엽수들이 섞이고, 좀 더 가니 신갈나무 숲이 나타났다. 시간에 쫒기다보니, 높은 나무를 쳐다 볼 시간은 없었고, 바닥의 조릿대와 굵은 나무줄기만 보고 가는 셈이었는데, 가끔 떨어진 산딸나무 열매가 발에 밟히었다.
사라악 약수터를 한참 지나 속도가 붙을 시점, 흰색 셔츠의 아가씨가 하얀 사슴처럼 산을 뛰어올랐다. 뒤떨어질 수 있나하며 따라붙었더니, 내걸음도 가벼워지고 신이 났다. 한참 신이 올랐는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뒤돌아 갔더니, 청년 지탄군이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젊음이 넘치다보니 만용을 부렸는가보다. 배낭에서 네오스포린을 꺼내 바르고 지탄군의 손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주고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청년은 “고우”한다, 고우 스톱은 모르는 청년인데도. 잘 가다가는 진달래 밭 대피소 가까운 지점에서 지탄군이 다리에 쥐가 난다고, 배낭에서 부황뜨는 침을 꺼내더니 넓적다리를 찔러댔다. 피는 나고, 예쁜 마나님 생각하니, 다리도 경련이 났던가보다.
출발하여 2시간 20분지나 11시 40분, 진달래 밭 산장에 도착하니 넓은 대피소 뜰이 시야를 시원스럽게 했다. 곳곳에는 젊은 그룹들이 끼리끼리 모여 점심 또는 음료수를 들며 담소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울긋불긋한 옷들이 진달래 꽃 그 자체이었다. 우리들은 바로 매점에 가서 소독약과 붕대를 찾았다. 상처를 다시 소독하고 압박붕대를 감아 돌린 후에 한숨 놓으며 커피 한잔 마셨다. “아-! 꿀맛!” 붕대와 약값은 받지 않으니, “아-! 감사!” 도착한지 15분정도 지나 백록담 오르는 입구로 갔더니, 반가운 얼굴, 재혁 지형군이 도착하여 있었다. 근황을 들으니, 수동군은 곧 도착할 것 같지만, 의리의 사나이 수영군은 성익군을 돌보느라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오이 귤로 목을 축이고 있는 사이, 수동군이 묘령의 여인들과 함께 도착했다. 중턱 산악회원들도 하면 한다고 하면서.
12시15분 수영 성익군을 포기하고, 백록담 가는 2.3키로의 산행을 시작했다. 구상나무들이 많아지고 서서히 관목지대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지친 나머지 500미터마다 쉬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청년 지탄군 보소, 등에는 자기 배낭, 가슴에는 힘들어하는 여인네 배낭을 안고 가는 게 아니었겠소? 머리의 상처는 다 잊고. 그런데 두 번째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인가 보다. “30년간의 경험으로 보면_” 하는 수동군의 목소리가 나는데, 여인그룹과 수동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래, 어떻다는 거야?”하며 우리가 웃어댔더니, 그렇게 얘기하면서 와야 힘이 안 든다고.
한라산 정상 거의 다 와서는 시야가 훤하게 뚫리었다. 눈향나무(누운 향나무란 뜻에서 나옴)들이 누워있고, 자주색 바늘엉겅퀴 꽃이 환하게 깔려 있다. 간혹 구름송이풀, 들국화들이 피어 있고. 주위는 등산객들의 환호하는 즐거운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후 2시 다섯 명은 한라산 정상에서 백록담을 내려다보았는데, 한구석만 물이 괴어 있었고, 흰 사슴들이 노니는 대신 세상 떠난 노루 한 마리 물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정상 밑 나무계단 한구석에서 점심 보따리 풀고, 정상주 한잔씩 하면서 즐거움을 나누었다. 수동군은 대목산악회가 중턱산악회가 아님을 강조했고, 재혁군은 마지막 와보는 백록담이라고 약한 소리를 몇 번이나 했다. 지형군은 평상시와 같이 눈만 꿈벅꿈벅하며 소주잔을 기우렸고, 지탄군은 다시 원기를 회복해, 다리에 쥐난 두 젊은 여자에게 침 시술을 베풀었다. 허벅지 가까이 침을 찔러댔는데도 환자 둘은 헤어질 때 지탄군에게 스승을 대하듯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
백록담을 일찍 떠나기도 싫었고 성익군은 몰라도 수영군은 꼭 올 것만 같아, 그리고 와서는 사진 몇 장 찍어줄 것만 같아 정상에서 좀 더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오후 3시 수영군을 포기하고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여자팀들에게 사진 한 장 어렵게 부탁했다. 한 여인이 매몰차게 거절하여 “이제 우리는 완전히 한 물 갔구나. 수동이가 그렇게 얼짱을 자랑했어도, 그렇게 아끼던 귤 나누어 줬어도 다 헛것이구나.”하며 실의에 빠졌을 때, 그중의 제일가는 미인이 나서 우리를 구조해주었다. 나중에 사진이 전송되어 오면 지탄군이 제일 폼 나는 브라자 하나 선물하기로 했다.
4. 의사의 남편 과연 다르구나.
3시5분 하산을 시작했을 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관음사 쪽으로 내려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길이 험할 뿐 아니라 일행이 중도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온 길로 하산하기로 했다. 내려오는 중도에 지형군도 다리에 쥐가 올라, 지탄군 또 희색이 만면해졌다. 재혁군이 쥐 잡는 숍을 하나 산중에 차리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새빨간 입술 치장을 원하는 여인네들도 많이 달려들까?”
3시55분 진달래 밭 대피소에 다다르니, 수영군의 목소리 뿐 아니라, 성익군의 목소리도 들렸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이들의 말로 학천군은 기다리다 화가 나서 비행기 타고 떠났다고 하여 깜빡 넘어 갔는데, 하산하여 보니 뻥이었다. 수영군은 맛있는 서귀포 귤은 자기들 배낭에만 안 넣어줬다고 툴툴거리며, 배낭에는 김밥만 많이 있어 사실은 우리들 배 고플까봐 걱정했단다. 그리고 대피소 안내요원이 머리가 깨진 친구가 어리버리 키 만 크고 안경 쓴 친구가 아니라고 해서 의아했다고 했다. 청년 지탄군이 다칠 줄은 몰랐다는 얘기다. 아무튼 산행은 조그마한 산이라도 조심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고 해야 할 것이다. 지탄군의 풀어진 머리붕대를 다시 감고 있으니 수영군이 답답했던지 붕대를 뺐었다. 그리고 붕대를 세련되게 다시 감는데, 과연 의사의 남편은 달랐다.
다시 하산을 시작하여 사라악 약수터에서 약수 퍼마실 때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중 지탄군을 다치게 했던 흰 셔츠의 아가씨를 만나, “어차피 우리보다 하산이 빠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빠르게 산을 올라 우리 친구를 다치게 했지요?”하고 엉뚱한 질문을 했더니 일행이 늦어 하산이 늦어지는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우비 쓰고 내려오는 돌밭 길은 끔직스러웠다. 그렇지만 나무로 된 길을 걸을 때는 이 나무 길을 만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나무 길의 끝이나, 계단이 있는 곳에는 노란 페인트칠을 하여 발을 헛딛지 않게 하였다. 내려오면서 여러 이야기는 못하였지만, 성익군이 진달래 밭까지 올라온 것은 차기 산악회장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고 했다. 5시20분 성판악 대피소에 다다르니 우리의 멋진 친구 병헌군이 바나나와 귤 한 보따리 갖고 마중 나와 있었다. 배고픈 길에 바나나를 아귀처럼 먹었다. 어째든 8시간의 한라산 산행은 무사히 끝났다.
5. 단결력 대단한 대목회 제주모임에 털보 최영택군이 웬일
병헌군과 함께 부림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나니, 기분이 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몸무게를 재어보니 74키로, 백수 몸무게 그대로였다. 병헌군은 지금 맡은 일이 진척이 없어 답답한 모양인데, 반대로 시간은 여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제주시내에 있는 산지 물회집으로 갔더니 어제 만났던 김상선 김정서군 외에 털보 최영택군을 만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상선군의 여동생이 영택군의 집사람이란다. 만난 날이 상선군 집안의 벌초 날이었다. 제주도에서는 벌초 날 아무리 멀리 사는 친척들도 다 온다고 하니, 그래서 영택군이 왔던 것인지?
상 차려놓고 먼저 김정서 목사님의 짤막한 기도가 있었다. 비싼 고등어회 쥐치조림에 한라산 한잔, 아니 한잔이 아니었다. 술맛은 댕기고, 옛날 얘기는 나오고. 뺀드부 얘기도 나왔다. 쉥이 제일 큰 나팔을 불어 힘이 세다고. 영국신사 병헌군은 클라리넷 불었다고. 영택은 정말 할아버지 소리 들을 만큼 늙었다, 여전히 수염은 길었고. 요즈음도 키타 치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경우에만 친다고 했다. 쥐치조림에 밥을 비벼 먹고 나니, 정서군은 내일 설교 준비를 해야겠고, 영택군은 밤9시 비행기로 가야한다고 했다. 길 잃은 양들은 내일 7시 김정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가겠다고 굳은 약속을 했다. 맛있었던 저녁을 정서군이 샀다고 해서 약속을 했던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8시 30분 영택 정서군을 보내고 2차는 맥주집 ‘키스’로 갔다. 생맥주 시켜놓고 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김수동 회장님은 제주도 초도순시에 환대를 받고 뿅 가서는 “내일은 회장 김수동이 다금바리를 살거야!”하며 큰 소리쳤다. 상선군도 취해서 얼굴을 어깨에 기댔다. 제주도는 외로운 섬인가 보다. 본토백이 상선군 역시 반항아였고, 말은 안하지만 싼 귤 값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하동의 배 농사군 안규철군 생각이 났다. 2차 술값은 상선군이 냈다고 나중에서야 들었다.
얼근히 취해 맥주집을 나와서 일부는 문풍지로 가자고 했지만, 강태공 학천군이 우리도 한잔 사야 될 것 아니냐하며 노래방으로 일행을 몰았다. 회장 수동군이 노래방 값 계산하고, 도우미 값을 포함하여 학천군이 미리 계산했다. 하여튼 노래방 가기를 잘했다. 한 곡조 씩, 두 세 곡조씩 불러나갔는데, 100점 이상 득점하여 테불 위 배추 잎을 갖고 간 사람은 없었다. 병헌군의 마눌님이 있었더라면 배추 잎을 휩쓸었을 터인데. 제주도 사나이들 이별을 고하고, 누님 집에 돌아 왔을 때는 다음날이었는데 몇시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피곤해 자야할 터인데 지형군 말문이 터져 누님과의 대화가 끝이 없었다. 지형군 마나님도 야생화 천연염색에 관심이 많다보니, 지형군이 연결고리 역할을 하느라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이불 속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성익군과 그의 누님 무슨 짐을 싸는지 잘 수가 없었다.
6.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고 어랭이 물회
새벽 누님이 끓여준 설렁탕면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배낭을 챙겨 문풍지를 나서는데 성익군 재빨리 누님께 인사하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누님과 헤어지자니 막내 녀석 눈물이 나왔을 것이다. 모두들 누님께 두세 번 인사한 후, 제주 영락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7시가 조금 안되었다. 반쯔봉 입은 수동군과 빨간 셔츠 입은 수영군을 제외하고 모두 교회의 성경책 빌려 가지고 교회당에 들어섰다. 넓고 큰 교회 한구석에서 주일학교 아동처럼 두 줄로 앉아 ‘돌아오라 내게로 오라’하는 찬송을 부르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왼쪽 지형군 점잖이 찬송 부르고, 오른쪽 재혁군도 심각한 표정으로 찬송을 불렀다. 김정서 목사님의 설교는 부드러웠다. 당회장의 입장이라지만 하루 세 번의 설교는 힘들 것 같았다. 애들은 학업관계 때문에 모두 떨어져 있다고 한다. 말없이 손잡고 이별 인사하는 목사님의 티 없는 얼굴, 또 언젠가 볼 수 있으리라.
8시 넘어 교회를 나온 후, 성익군은 제주도 조랑말 날뛰듯 차를 이곳저곳으로 몰았다. 성산으로 해서 섭지코지를 들렸다. 옛날 신혼여행 때는 듣지도 못한 곳이었는데 올인이라는 드라마 때문에 뜬 곳이라고 한다. 넓은 해수욕장은 흐린 날씨 때문인지 쓸쓸해 보였고, 교회당이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에는 문주란 몇 포기 시들해져 있었다. 산굼부리도 들렸지만, 입장료가 비싸니 어떠니 하다, 담배만 피워댔다. 어제산행으로 피곤도 했겠지만, 잠을 제대로 못잔 탓에 모든 것이 시큰둥한 얼굴들이었다. 조랑말 방목장 옆을 달리다가는 용두암을 찾았다. 용두암은 왜 그렇게 초라해 보였는지, 주변의 질서 없는 개발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제주항 근처에 도착하여 인근 물회집에 들어서니 전부들 활기를 띠었다. 어랭이 자리물회 그리고 해물뚝배기 시켜놓고 소주 3병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물회는 먹을 만했다. 피곤하여 소주 두세 잔 마시니 눕고 싶었다. 얼근해져서 추자도 경유 오후3시배를 타러 제주항으로 갔다. 신청사 2층은 공항처럼 깨끗하고 면세점도 갖추어져 있었다. 학천군과 같이 딸내미 줄 제주 초코렛 한 상자 샀는데 백년초 초코렛 맛은 그만이었다.
7. 우리의 황혼도 추자도 앞바다의 저 노을처럼 멋있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완도 가는 배를 타는 손님은 올 때보다도 적었다. 선실에서 한 시간 정도 눈 붙이고 나니 또 심심해졌다. 고스톱 한번 붙어 완도항에서 생선회 먹기로 했다. 안양의 실력이 역시 출중하였다. 결국 학천군이 선심 쓰고, 김수동 회장님이 어제 약속대로 완도에서 다금바리를 사게 되었다. 두 젊은 녀석이 예의 없이 판에 끼어들자, 우리들은 훌훌 털고 갑판에 나와서 지는 노을을 감상했다. 좌측 뒤쪽으로는 제주도가 어렴풋이 보이고 옆으로는 추자도가 멀어져갔다. 구름이 많이 낀 탓인지 노을은 은은하게 붉었다가 천천히 스러져갔다. 옆의 남자같이 생긴 키 큰 여학생 한사람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느라 바빴다. “지형아, 우리도 이제 황혼기에 접어들었는데 저 노을처럼 은은하게, 조용하게 그리고 멋있게 마감해야 되지 않겠어?” 지형군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올 때보다는 조금 일찍 오후 8시15분경 배는 완도항에 안착했다. 바다 속 이야기, 활어해산물 장터 안에 있는 준수 엄마네 집에 우 몰려갔다. 강태공 학천군은 값을 후리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능성어 광어 오도리 괴불을 흥정해서는 장터 밖의 긴 식탁에 앉아 판을 벌렸다. 이쁜 미아리 댁이 초장 채소 소주를 대령했다. 우리 차에 좌석이 하나 남았으니 같이 상경하자고 하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다금바리와 능성어는 농어목 바리과에 속하는 물고기인데, 어떤 사람들은 두 물고기가 똑 같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들도 그 사람들 중의 일부이다. 요번 여행의 마무리를 하는 소주잔, 더군다나 쫄깃쫄깃한 다금바리 회를 씹으며 들이키는 그 맛 죽여줬다.
올 때는 광주로 해서 호남,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여산 휴게소에서 지형군이 산 국수를 밤참으로 먹었다. 이천에서 지형군을 내려놓고, 잠실 수영군 아파트 앞에서 셋을 내려주었다. 성익군이 선사한 흑돼지 한 조각 들고 수동군과 첫 지하철을 탔을 때는 9월12일(월) 5시30분이었다. 2박5일의 일정은 우리에겐 좀 무리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제주도의 성익 누님, 병헌 상선 정서군에게 감사의 말씀 드린다. 애써준 성익 지탄군에게 감사하고 수동 학천 재혁 지형 수영군 모두에게 감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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