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마가목 빨간 열매를 밟으며 (2005.9.2-3)

난해 2015. 9. 26. 23:19

 

1. 도동항으로


  이 승부 원장내외와 신사역에 도착하여 관악산 팀들의 반가운 얼굴들을 대했을 때는 9월 2일 아침 5시40분이었다. 나 상진 부장내외는 자주 만났지만, 부 익수 선배와 진 재현 선배는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두 부인들은 초면이었고. 나부장이 울릉도 여행을 권했을 때, 부부 같이 가는 여행인데 혼자 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 망설였지만, 이제 안가면 언제 울릉도 가 볼 것이냐고 따라붙은 여행길이었다.


  소사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챙겨먹고 화장실도 갔다 오니, 아침잠도 깨는 것 같았고 여행분위기가 슬슬 익어 갔다. 부선배의 익살은 여전했다. 비록 걸음걸이가 예전 같지는 안았지만, 중풍의 어려운 고비를 이겨낸 사나이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소변보는 내 폼을 보고는, “옛날에는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볼일 보더니만, 요즈음은 별 볼일 없는 모양이지.”하며 웃어댔다. 잘 나갔던 직장생활이 건강 때문에 좌절되었던 일은 지금도 가끔 욱하고 가슴을 치받으리라.


  9시 반에 묵호항에 도착했다. 옛날 총각시절 화란에서 영국으로 배타고 건널 때 멀미하던 기억이 나서, 멀미약을 사먹었더니 속이 영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10시에 배는 출항하여 조용한 바다 위를 달렸다. 곧 남쪽에서는 태풍 나비가 북상한다는데, 아직 올 길이 멀었는지. 마나님들의 눈을 피해 소주 한잔 씩 하였더니, 그제야 속이 가라앉았다.


  예정대로 12시 반 도동항에 도착하여, 항구에서 가까운 울릉비치호텔에 짐을 풀고, 나물위주의 점심을 들었다. 경상도 아줌마의 음식솜씨가 짜다 못해 썼다. 점심 후 항구로 나와 오른쪽 해안가를 거닐다가, 다시 왼쪽 등대를 지나 해안 트래킹을 하였다. 쨍쨍한 날씨가 한여름 같았고, 주변의 바다 속은 너무 깨끗하다 못해 진한 초록색이었다. 울릉도는 200만 년 전 백두산, 제주도와 함께 화산활동의 결과로 태어난 섬이다. 그 많은 세월을 외롭게 견디고 살아남은 섬인지라, 주위가 온통 진초록 고독의 색갈인지 모르겠다. 울트라 마라톤을 한다는 이 승부원장의 걸음걸이 못지않게 나 부장과 진선배의 걸음걸이 또한 따르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트래킹 후 다음 일정까지 여유가 남아있자, 주당들은 그사이를 못 참아, 오징어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씩 돌렸다. 마나님들은 그렇게 건강을 챙기건만.


2. 울릉도, 배로 한 바퀴


  오후 4시 되어, 두 시간 반 걸려 섬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이 도동항을 떠나 시계방향으로 나아갔다. 울릉도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시점은 1882년 고종이 주민이주를 장려한 때라고 한다. 개척민들은 도동부두 오른쪽 망항봉에 올라 짙푸른 바다 건너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후박나무와 흑비들기가 있는 사동을 지나, 절벽의 향나무가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통구미를 지났다. 도동 절벽의 향나무는 2천년이 넘게 자란 것이라고 한다.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이란 뜻을 가진 통구미 마을엔 거북바위가 있다. 갑판위에 쭈그려 앉아 있으려니 바람은 세차지고, 선장의 안내하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갔다.


  곧 일몰과 몽돌해수욕장으로 이름난 남양동을 지났다. 이곳은 우산국 시대의 전설이 깃 든 곳으로 도동 이전의 항구였던 곳이다. 신라의 이사부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러 왔을 당시는, 우산국의 우해왕은 아내를 잃고 남양 뒷산 비파산에서 대마도 열두 미녀가 타는 비파소리에 묻혀 있었다. 이사부가 불을 내품는 나무사자로 위협을 하자, 우해왕은 그만 투구를 내던지고 항복을 하고 말았다. 던진 투구가 투구암이 되었고, 바다 속에 던져버린 나무사자는 사자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갑판 쪽 선실에서는 아줌마 관광객들이 벌써 바다, 바위구경에 지쳤는지 막춤을 시작하였다. 배가 서쪽의 맨 위 부분인 태하동을 지났다. 대풍감 절벽의 향나무 또한 울릉도의 천연기념물이고, 이곳 태하의 성하신당에서는 해마다 울릉군수를 비롯한 유지들이 풍어를 기원한다.

태하를 돌아서자 북쪽해안의 절경이 펼쳐졌고, 삼국시대 석장 고분이 있는 현포를 지나, 바다 가운데 코끼리 바위(공암)를 감상했다. 수력발전을 하고 있는 추산(송곳산이라는 뜻) 그리고 천부, 죽암을 지나, 서북쪽 끝의 삼선암에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다. 삼선암은 바다위에 솟아 있는

세 기둥바위로, 목욕하며 놀다가 돌아갈 시간을 놓쳐버린 세 선녀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바위가 된 것이라 한다.


  배는 삼선암 바로 아래, 옛날 해적의 은신처이었다는 관음도(깍새섬)를 지나, 남쪽으로 더 내려와 죽도 옆을 지났다. 한가구가 살고 있다는 죽도는 6만평의 넓이를 가진 평평해 보이는 섬인데, 망망대해 위에 쪽배였다. 폭풍우속의 섬을 상상해보면, 정말 바람막이 하나 없을 황량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남쪽으로 더내려오니 오징어 배들의 쉼터, 저동항구가 보였고, 그 앞바다에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그만 바다에 뛰어들어 바위가 되었다는 효녀도(촛대바위)가 나타났다. 이곳의 일출이 그만이라는데.


  울릉도 해안선은 단조롭고, 발달된 해안의 깎아지른 낭떠러지는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 큰 섬이라는데, 별로 농사 지을만한 땅은 안보이고, 그나마 나타나는 동네에 교회 십자가는 왜 그렇게 많이 보이는지.


3. 울릉도의 하루 밤


  하선하여 바로, 이곳 농협직원이 추천한 식당을 찾아, 네 여자와 다섯 남자는 오징어에 탐닉하였다. 오징어 회에 오징어 구이, 그리고 울릉도의 명물, 산 마늘잎 장아찌 맛이 그만이었다. 어려웠을 때는 산 마늘이 목숨을 연장해주었다고 이곳 사람들은 산 마늘을 명(命)이 또는 멩이라고 한다.


  소주 기운이 들어가자, 나부장이 미친 놈 씨리즈를 꺼냈다. 50대에 이력서 들고 구직하는 놈, 60대에 이민가려고 영어 배우는 놈, 70대에 골프 싱글되려고 연습하는 놈, 80대에 회춘하려고 비아그라 먹는 놈, 90대에 장수하려고 건강 진단하는 놈.


  식사 후 여자들은 해안 트래킹 나섰고, 남자들은 시내랄 것까지는 없으나 중심지를 한 바퀴 산보하였다. 군청, 세무서, 경찰서, 농협 군지부 등, 조그마한 두 길을 따라 각 기관들이 위치해 있는 모양이 소인국에 온 기분이 들게 했다. 아무튼 나이들이 들었나보았다. 벤취에 앉아있다, 해안에서 돌아오는 여자들을 맞아 숙소로 차분히 돌아 왔으니 말이다.


  이 원장, 나부장과 한방을 배정받아 샤워하고 눈을 붙였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잠이 들려니, 두 룸메이트는 해안 트랙킹한다고 나섰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좀 누워 있다 아침 식사하고, 6시 반 육상관광을 나섰다. 우리를 포함하여 미사연 산악회 일행 13명을 태우고, 경상도 사나이 관광 안내를 시작했다. 밖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오고하니, 안내하는 사람도 신이 안 나는가 보았다. 집은 부산이라는데,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냉천골, 후박나무가 있는 사동, 남양해안, 성하신당 등을 돌다, 심심하였던지 독도를 향해 차를 몰겠다고 하며 방파제 길을 냅다 달렸다. 그러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성인봉을 오르기 위하여 나리분지로 출발했다. 추산의 언덕길을 오르면서 기사양반 청룡열차를 태워드린다 하더니, 또 냅다 언덕길로 차를 모는데, 여성동지들 갑자기 젊은 여자들로 변신했는지, 괴성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역시 젊어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4. 마가목 빨간 열매를 밟으며


  9시 반이 지나서 나리분지 산마을식당에 도착하였다. 부산사나이와 이별을 하니,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산마을 식당에서 감자전에 이곳의 명물, 씨 껍데기 술 한 사발 하며, 전부들 입맛을 다셨다. 눌러 앉아 부선배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좋으련만, 잠시 이별하고 성인봉 길을 나섰다. 마나님도 같이 못가는 것이 아쉬워 낭군 곁에 남으려했다가, 부선배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움칠하여 우리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고 보니 등산길에 나선 이들은 우리들뿐인 것 같았다.


  호젓한 산길을 들어서니 신선함과 아늑함이 온몸을 감쌌다. 2키로 정도 날듯이 걸어, 신령수에서 표주박으로 약수를 벌컥 들이켜니, 마치 신령이 된 기분이었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한 해발600미터 위의 숲은 원시림으로 지정되어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데, 딴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독특한 식물들의 보고이다.


  등산로는 그런대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자생식물의 표지판이 있어 들여다보았더니, 잡초가 너무 무성해 정작 주인공은 보기가 어려웠다. 섬피나무, 섬말나리, 섬바디, 섬노루귀, 섬조릿대, 섬쑥부쟁이(이곳에서는 부지깽이나물이라고 한다), 섬백리향 등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날아온 종자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렸지만, 본래의 조상들과는 다른 형질을 나타낸다. 섬자가 붙은 이름을 가진 식물은 울릉도, 제주도에 사는 식물이 많은데, 양쪽 섬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식물은 몇 안 되는 것이 신기하다.


  늘씬한 키다리나무 숲속의 넓은 등산로를 우리들만 호젓하게 활보하자니, 오기를 잘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조금 더 올라 섬노루귀 군락을 발견하였는데, 노루의 귀같이 앙증스러운 잎들이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잎 크기와 잎 무늬 등이 육지의 노루귀와는 완연히 달랐다. 이어 4키로 지점 쯤 와서 가파른 언덕길 들어서니, 두 마나님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언덕길에는 헐떡이풀과 일색고사리(개관중)가 지천이었다. 드디어 성인봉에 도착하니, 건너편 말잔등, 나리령 등 산봉우리들이 구름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비록 맑은 날의 절경보다는 못하겠지만, 마치 신선인 된 듯한 느낌은 색다른 감흥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벌써 발갛게 단풍 들기 시작한 마가목 숲으로 시작되었다. 마가목은 새싹 돋을 때 말 이빨처럼 힘차게 솟는다고, 마아목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8월말 빨갛게 달렸던 동글동글한 열매가 비에 떨어져, 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열매를 밟고 가자니, 지압의 효과는 둘째이고, 감촉이 특이하고 신선했다. 이들 큰키나무 숲속엔 이곳에만 자라고 있는 너도밤나무도 볼 수 있었다. 이 나무는 밤, 도토리의 중간 정도 되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내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등 참나무 종류들은 눈을 씻고 보려 해도 보이지가 않았다.


  약초로 키운다는 약소의 우리를 지날 즈음, 태풍 나비 때문에 배가 3시에 뜬다고 전갈이 왔다. 원래 예정은 독도 순례하고, 다음날 3시 배로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용하게 보낸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이 후회가 되었다. 전갈을 받자, 모두들 무엇이 급한지 서둘러 내려갔고, 두 마나님과 나만 뒤쳐졌다. 대원사 인근에서 포장길로 들어서자, 길은 더욱 지루해졌으나 길옆 가꾸어놓은 화단에서 울릉도 특산 울릉국화와 해국(海菊)을 볼 수 있었던 것이 또 하나의 반가움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일찍 내려온 진선배 부부와 부선배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급해지고,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는 서둘러 샤워를 했다. 시간적으로 충분한 여유가 있었는데도, 웨 그리 마음이 급해졌는지. 늙어간다는 증거이리라. 짐을 챙기고 나왔더니, 딸내미들이 울릉도 오징어 얘기를 했다는 마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고, 서둘러 항구 앞의 농어민 후계자들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려, 오징어 한축을 샀다. 나비를 피해 허겁지겁하는 관광객들로 가게는 부산했다.


5. 떠나가는 배


  오후 3시 빗줄기가 굵어지는 가운데, 훼리는 출항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홀가분한 마음도 있었다. 성인봉의 아름다움을 느꼈으니 된 것이 아니냐고. 출항하자 얼마 안 되어 남자들은 또 소주를 한 컵 씩 했다. 진선배는 정말 애주가인 모양이다. 올 때, 갈 때 어느새 수통을 주통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파도가 높아지자, 부부장이 피칭과 롤링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배의 앞 유리창을 통해 앞을 보니, 피칭하는 배 머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옆 창을 보니 배전체가 큰 파도위에 올라갔다가는 내려가고 했다. 내 배 속에는 소주가 롤링을 하는지, 마음이 왔다갔다 요동을 치더니, 애잔한 마음으로 가라앉았다.


창망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유치환의 울릉도 중에서)


  파도가 심해지니, 멀미하는 여자승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계단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머리를 서로 기대고, 멀미를 가라앉히려고 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나이들은 부부의 경우는 대개 남편들이 정신없어해 했다. 멀미하는 것이 자기의 잘못인양 등을 두드려주고, 봉투 찾으러 가는 등 정신이 없었다.


  오후 5시30분 묵호에 안착하여, 다시 버스로 서울을 향하였다. 뒷좌석에서 의정부 성모병원에 다니는 아가씨 둘과 산악회 팀장과 이런저런 얘기하며 왔다. 미사연 (산악회 이름)은 미래사회를 연구하는 모임이라는 뜻이란다. 참 거창한 산악회이다. 그리고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보았냐고 하여 못 보았다고 하였더니, 미개인 보듯 했다.


  상경하여 며칠 후, 나비로 폐허가 된 울릉도 소식을 들으니 왠지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울릉도 일주도로 등 관광을 위한 무리한 개발이 자연피해의 한 요인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봄꽃이나, 백설, 또는 단풍으로 단장한 성인봉을 다시 한 번 찾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