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를 떠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가는 길, 석회암의 산은 계속되고,
169키로의 길.
간단한 국경검사를 거치니
황혼이 물들었다.
나라이름이 세계에서 제일 긴
나라, 그리고 무슬림, 세르비아
정교, 가톨릭이 어울려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전.
그나마 보스니아 남부의
가문이름 헤르체고비나는 언제
따로 살림을 차릴지 모른다.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에 위치.
네테르바 강줄기는 고향에
흘렀던 옛날 큰 냇가 같기도 하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의 그 향기 그대로
그대가 앉아 있었던 그 벤치 옆에
나무도 아직도 남아 있네요.'
차에서는 로이킴의 '봄봄봄'이 흘렀다.
복잡한 고국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겠지.
평화로운 고향의 봄이 흘렀다.
세 종교가 평화로웠던 이나라는
1992년 유고연방이 해체되고
갈라진 나라 중 하나.
위대한 지도자, 크로아티아출신,
티토가 서거하고, 세르비아출신이
지도자가 되고, 동구가 민주화하자
내전에 휩싸였다.
유고의 주세력인 세르비아의 횡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등.
모스타르에 도착하니, 성당에 불이 들어왔다.
세르비아정교에 속하는지,
가톨릭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민족 냄새가 강한 정교는
동서로마가 갈라지고
로마의 교황을 인정하는냐 하는
문제에서 파생되었지만,
가톨릭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대신,
정교는 사도신경을 고수한다고.
초기시대 정교는 이슬람같이
제단에 일체의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
결국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갈라진 것이고,
정교는 슬라브족의 종교가 되었다.
이슬람사원의 미나르도 보였다.
말없이 흐르는 네테르강.
1992년 내전에서 20만명이 사망했고,
무슬림의 피해가 많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만과 오스트리아 문화가 혼재.
남한의 절반 넓이에 인구는 460만.
동서로마의 분기점, 합스부르크 오스만의
경계였던 종교 문화의 모자이크지역.
터키 400년 지배.
무슬림이 48%, 세르비아정교 37%,
가톨릭이 14%.
이슬람사원의 빛갈이 곱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작.
터키제국시대부터 1차대전 직전까지
400년 동안, 보스니아의 소도시에 놓인
다리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들의
공존과 충돌의 역사를 그렸다.
이쪽편은 교회, 다리 건너는 회교사원.
스타리모스트 다리 초입에서.
박물관은 문은 닫혔지만,
매직아워는 계속되었다.
오래된 다리, 스타리모스트.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구혼의 표시로 옛날 이 다리에서 네테르바
강물로 뛰어내린 전설의 다이빙맨을 쫓아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뛰어내린다.
세계 다이빙대회도 이곳에서 열린다고.
1993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부대에
의해 다리가 파괴되었는데,
당시 부대 사령관은 아직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 중.
밤거리 상점들은 손님을 호객했다.
이나라는 경제는 취약하지만,
물가가 싸고, 절반의 가격할인이 관행.
가격이 크로아티아보다 훨씬 저렴하니,
아줌마들 양손이 그득했다.
화려한 디자인, 모스타르 종탑.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 인구 65천명.
모스타르는 다리를 지켰던
다리 파숫꾼.
내전전에는 세르비아인도 거주했지만,
지금은 보스니아인(무슬림),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으로 나누어진다고.
우리는 모스타르에서 남쪽으로
13키로에 있는 블라가이호텔서 1박.
서울보다 봄이 빨랐다.
그야말로 꽃핀 산동네.
블라가이는 부나강유원지,
무슬림수도원, 테키야,
로마이전 일리리안이 세운
스테판 그라드 성채가 있다.
호텔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검은 색은 가톨릭교도, 흰색은 무슬림.
호텔로비에 있는 스타리모스트 다리.
호텔 앞에는 새벽부터 건무화과 등을
팔고 있었는데, 내가 한봉지 사서 호텔로
들어갔더니, 뒤이어 아줌마들이 싹쓸이.
어려운 이곳 아줌마를 도운 결과니,
마음이 흡족했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가는 길,
돌지붕도 있었고.
축산농가도 보였지만,
포도재배가 대세.
국경을 통과하니
아드리아해가 나타났다.
안개 자욱한 바닷가풍경을 즐기려니,
두브로브니크(Dubrovnik)성채가 보였다.
모스타르에서 남쪽으로 138키로.
힐튼호텔의 현대식 건물이 눈에 띄고.
이곳의 45개 호텔중 절반이 4,5성급.
자다르, 스플릿트도 좋았지만,
아드리아해 최고 관광지임을 알 수 있다.
성안으로 들어서니, 제일 번화한 거리,
플로체대로 스트라둔거리가 뻗쳐있다.
이거리는 서쪽 필레게이트에서
동쪽 플로체게이트로 이어지고,
이어 항구에 닿을 수가 있다.
맨 왼쪽이 성사비오스교회.1520년
지진후 감사하는 마음에서 건설.
자다르, 성마리아교회와 비슷한 느낌.
그옆이 14세기 창설한 프란체스코수도원.
동쪽에는 도미니쿠스 수도원이 있다.
프란체스코수도원 안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있다.
교회의 앞쪽에 있는 오노프리오분수.
옛날 유일한 수도시설.
천연샘물도 있지만, 두브로브바추카
강을 수원으로 하고 있다.
광장에는 자유시인 이반 군들리치(1589-1638)
의 동상이 있다.
'오,아름다운, 오,다정한 , 오,사랑스러운 자유여,
너는 신이 준 가장 영예로운 선물이자
우리의 영광의 모든 이유이다.'
두브로브니키는 자유를 사랑한 도시.
7세기 도시를 이루기 시작한 이래,
13세기에서 14세기 중반까지 베네치아
속국이었던 것을 제외하고,
베네치아상인이자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폴로(1254-1324)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태생.
나폴레옹침입 이전까지 자유를 누렸던 도시.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루며
강대국과 타협하며 상업을 번창시켰던,
그리고 남부슬라브의 예술 문학이
번창했던 도시국가.
유태인도 수용했을 뿐 아니라
모든 종교도 허용했고.
최초로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몇명의 영웅보다는 좋은 제도를
선호했던 도시국가였다.
아름다운 건축물,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렉터궁전.
두브로브니크 행정건물이자, 지도자
거주지, 무기저장고, 감옥
등으로 사용했다.
옛 수도원이었고, 수도원장이었던
통치자를 위한 건물이었다.
해시계탑과 탑의 오른쪽은 시청사.
두브로브니크대성당.
1192년 3차 십자군 원정대 수장,
영국 리처드왕이 두브로브니크 항구 앞
로크룸 섬 근처에서 선박이 난파하였으나
무사히 구조되어, 고마움을 표시한
기부금으로 지은 성당.
1667년 대지진때 파괴되어 18세기 다시
건축한 성모마리아승천대성당.
이탈리아건축가, 버팔리니가 건축.
이성당에는 라파엘로의 마돈나와
마리아상 등 많은 보물을 보유하고있다.
16세기 극작가 마린 드르작목사의 동상.
코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고딕, 르네상스양식의 스폰자궁전.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다.
1516년 지었다.
왕이 살던 곳이 아니라,
세관, 재무, 은행활동의 중심지로
상인 사업가의 만남의 장소.
현재는 국립기록보관소.
바로크양식의 성블레이세 교회.
성블레이세는 두브로브니크의 수호성인.
그는 베네치아인들이 함대를 숨기고,
도시를 침략한다는 사실을 성직자에
알려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
국기게양대에는 검은 칼을 든 기사,
롤랑(올란도)의 조각이 있다.
검은 칼은 카를대제가 하사한 검.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롤랑은 죽을 때까지 충성, 신의를
지키는 기사의 표상.
778년 사라센의 지배를 받던 에스파냐를
정벌시, 프랑크왕국의 카를대제는
사라고사라는 도시만을 남기고
모든 도시를 함락하였다.
이때 강화조약이 성립되고,
대제의 조카이자 장군이었던 롤랑은
퇴각하던 군대 후미에서 12용사로 30만
대군과 싸우게되고,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
대제는 2차정벌로 에스파냐를 정복.
우리는 성을 올랐다.
성은 13-17세기 동안 지어진 것으로
길이는 1.94키로. 최고높이는 25미터.
성벽은 도시를 감싸고 있다.
성벽은 이중벽이고 통로가 나있다.
성은 5개요새와 16개의 탑으로
둘러싸임.
가운데 보이는 것은 로브리예나쯔요새.
바닷가 37미터 암벽 위에 있다.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적들을
감시하는 요새.
성에서 본 주황색 도심.
지금 성안에는 1800명이 거주한다고.
문화도시인만큼 해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공연되고,
크로아티아전쟁중에도 계속되었던
여름음악축제가 60년 넘게 열린다.
성벽 아래 절벽카페, Buza카페.
성벽에도 봄은 피고 있었다.
화가가 그린 두브로브니크.
바이런은 이곳을 '아드리아해의 진주'
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항구가 보이는 식당에서
해물리조토.
종업원의체격이 당당하다.
크로아티아인의키는 네델란드인
보다 크단다. 잡종의 특징?
축구, 농구에서 크로아티아는 강국.
크로아티아용병이 넥타이의 원조.
스위스용병으로 전파되었다고.
식후 미니밴을 타고 시의 앞산,
412미터의 스르지산을 올랐다.
전망대에서 본, 두브로브니크
바다앞에 있는 섬, 로크룸섬.
사자왕 리처드가 인근에서 난파를
당했었다. 이섬에는 정원과
오렌지나무가 유명.
이섬은 아무도 소유할 수 없다고.
소유한다면, 재앙이 내린다 한다.
나폴레옹, 합스부르크왕조,
오스트리아, 헝가리황후도 그랬다고.
내려다 본 항구.
두브로니크공화국 선박들이 세계로
나가던 항구이자 선박수리장소.
이항구에는 1377년 세계에서 최초로
무역을 위한 검역소가 생겼다.
이도시의 동서로 나있는 스트라둔거리는
옛날에는 바다였던 것을 메꾼 것이라고.
7세기 현 크로아티아 차브타트지역에서
살다가, 이민족 침입으로 이곳 해안가로
피난온 로마식민지 피난민이 자리잡은
곳이 라구사라 불리기 시작했고,
내륙 떡갈나무가 많은 스르지산 밑에
슬라브족이 살던 곳이 두브로브니크.
이두곳이 바다가 메꾸어지어
라구사라는 도시로 발전하다가
두브로브니크로 개명이 되었다 한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배를 탔는데,
아쉽게도 돛이 없었다.
봄날씨라 얇은 셔츠로 차에서 내렸더니
바닷가라 그런지 쌀쌀맞았다.
오든 길 돌아가 성내 상점에서
두브로브니크가 표시된 반소매
하나 사서 껴입을 수밖에.
셀카에 빠진 미녀.
스르지산쪽 해안가 나체촌.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아주 벗은 친구는 없었다.
하선해서는 부두가에서
해물피자 한판.
플라차대로 스트라둔에서 북쪽으로 난
경사급한 골목들 중
한 골목을 탐사했다.
카페도 있고, 빨래도 널려져 있고,
높은 곳의 집들은 민박집으로
쓰이고 있었다.
새로 개업한 한국식당도 있었다.
베란다밑의 고풍스런 조각들.
꽃보다 누나라는 프로 때문인지
한국관광객이 엄청 많았고,
크로아티아의 물가를 배로 올렸다고.
물가가 싸고 인심이 좋다는 말은
이제 옛말.
연결된 가로골목의 끝에는
종 세개가 달린 성당이 있고,
여자들의 아카펠라 합창 소리가 있어
나그네는 소리에 홀려, 귀를 기울였더니
들어오라는 손짓.
우리는 박수를 쳐주고는,
크로아티아에서 호텔비, 물가가 싼
보스니아 네움으로 출발했다.
두브로브니크 지도.
두브로니키 인근지도.
두브로브니크는 1699년 주위에 있는
베니스식민지와 떨어지기 위해
해안 일부를 오스만터키에게 팔았다.
그결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좁지만 해안으로 진출할 수 있게되고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본토와
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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