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겐 옛거리 뒷골목의 대구
대구는 맛이 담백할 뿐 아니라,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면 보관이 용이한 생선.
10세기 바이킹과 중세의 바스크인들이
대구를 유럽에 소개, 유럽의 역사와
지도를 바꾸었다.
대구는 유럽의 주요 무역상품으로 부상,
황금, 노예, 와인 등과 교환되었으며,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카나다,
뉴펀들랜드)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듬.
목조건물로 둘러쌓인 뒷골목을
한바퀴 돌며 중세발굴품 등을 구경하고.
깔끔한 베르겐항.
해발 320미터의 플로왼산 전망대 가는
후니쿨라를 타고 올라,
베르겐을 조망했다.
비가 왔다, 개였다, 강수량이 많은
도시라는 것을 실감하며.
보트 한 척, 오슬로를 휘젓고 달렸다.
노르웨이 숲도 산책해보고.
베르겐은 그리그(1843-1907)의 고향.
그의 부친은 베르겐주재 영국영사를 했다.
음악을 하는 사촌누이 니나와 결혼, 반려자를
맞이했으나, 딸이 죽자 결별했다가
베르겐에서 재결합, 이곳에서 여생을 보냄.
그는 민속전통에 뿌리를 둔 섬세한 서정,
감각으로 작곡을 했다.
베르겐을 떠난 우리는 노르웨이 3대
피요르드의 하나인 하당에르피요르드를
냅다 달렸다.
하당에르고원 끝자락부터 대서양까지
179키로나 되는 두번째 큰 피요르드.
하당에르피요르드를 다리로 건너고,
요트들도 보였고.
우리도 피요르드에 지칠 때가 되었다.
베르겐 아래 위치한 하당에르 피요르드를
보면 노르웨이 3대 피요르드를 다 본셈.
4대 피요르드, 뤼세피요르드의 깍아지른
듯한 절경은 못보았지만.
피요르드를 계속 달리다,
하당에르빗다국립공원(하당에르고원)을 급히
오르는1.4키로의 산속 나선형터널을 지났다.
한 번 통과하는데 10만원의 통행료.
4개터널로 되어있는데, 꽈베기식
터널에 지렁이식 터널이 혼합된 터널.
평원엘 오르니 비구름으로 아무것도
안보이더니, 서서히 걷히기 시작,
호수가 나타났다.
고도 1,400미터, 충청북도 크기의
빙하 고원지대의 대평원.
바람 쌩쌩부는 평원에서
연어회+백포도주 한잔씩.
인솔자는 어느새 베르겐어시장에서
회를 떠 가져왔다.
북구일을 맡은지 십여년이 되었다는
정말 훌륭한 인솔자다.
진행계획을 세심히 알리고,
역사 문화에 도통하고, 버스안에서의
그리그음악을 튼다든가 물흐르는듯한 진행.
돌발사태에 임기웅변도 강했고.
보물섬투어의 보물가이드, 모현.
우리는 해발 800미터에 위치한 스키
리조트지역(아일로)에 있는 Ustedalen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 일어나니, 숙소 건너는 스키장.
고원에 먼동이 터오고,
크뢰단 호수의 물도 색씨 볼처럼
불그레졌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사타구니에 위치한
오슬로 가는길.
초록색은 언제 보아도 좋다.
노르웨이는 모든것이 작다는데,
새로 지은 휴게소, 화장실이 무척 컸다.
자작나무 숲 또 지나가고-
노르웨이사람들은 휴가의 절반을
집에서 지낸다고 한다.
정원도 손질하고, 집안내 수리할 곳을
찾아 고치기도 하고.
넓은 경작지도 지나갔다.
드디어 오슬로 거리에 섰다.
베르겐에서 4백키로.
인구 66만의 오슬로는 노르웨이 남동쪽
오슬로피요르드의 안쪽에 위치.
11세기 바이킹왕 하랄드가 건설했고
13백년경 호콘5세가 수도로 지정, 성채건설.
1624년 화재 등으로 폐허된 도시를 신도시로
만든 이는 크리스티안4세.
19세기 가장 영향력 있던 이도시의 이름은
크리스티아니아.
1925년 오슬로로 개명되었고, 무역 등
산업의 허브역할을 해왔다.
오슬로에서 처음 들린 곳은 국립미술관.
뭉크의 방을 중점적으로 보았고.
뭉크가 사랑한 여인, 마돈나.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기혼자였던
첫번째 여인으로 받은 상처가 컸으며
두번째 여인은 딴 남자와 결혼하는 등
여인관계가 순탄치 않았나보다.
Dance of Life.
두 여자는 파트너를 기다린다.
뭉크의 애인은 딴 남자와 춤을 추고.
병실의 죽음.
그는 유년시절 경험한 질병, 광기, 죽음의
형상들을 왜곡된 행태와 격렬한 색채로 표현.
5세때 어머니 사망, 9년 후 누나 역시 같은
병으로 사망. 여동생도 우울증을 치료받고,
군의관이었던 아버지도 우울증에 시달리다
사망했고, 남동생도 35세로 사망.
그자신도 조울증, 알콜중독이었고.
그래서 인간 내면의 심리적 감성적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표현주의 작가.
2차대전때 나치정부가 작품을 압수했는데
그는 작품을 모두 오슬로시에 기증했다고.
유명한 절규는 네점을 그렸다는데,
일부가 도난되기도 했었다.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석양이 깔렸고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곤 멜랑콜리한 기분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멈춰 섰다.
검푸른 색 위에서 죽을 정도로 피곤했다.
피요르드와 도시는 피와 불 사이에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난 뒤에 남았다.
극도의 불안 속에 떨면서...
그순간 자연의 위대한 절규를 느꼈다.'
(1892년 어느날의 그의 일기)
우리 모두 불안 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The Day After
내일이 어쩔지 나도 모르겠다?
다리 위의 소녀들
첫번째 여인인 유부녀한테 동정을 상실하고
괴로워 하는 뭉크.
병든 누이와 이모
사춘기
뭉크방 이외에는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국립극장 우측에는 비외른손의 동상.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 극작가며 언론인.
'우리는 이 조국을 사랑하리'라는 시를 씀.
극장 좌측에는 인형의 집, 입센의 동상.
항구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시청사.
내외벽에는 조각, 그림 등
노르웨이 대표적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다.
항구쪽에도 많은 조각들이 있고.
항구의 돛단배들.
시청사로 들어가니, 많은
그림들이 붙어있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바마부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평화상수상자를
결정하고, 이곳 시청에서 수여식을 한다.
노벨이 노르웨이에 빚진 것이 많은지.
비겔란 조각공원을 찾았더니,
가을이 한창이었고.
공원입구에는 구스타브 비겔란(1869-1943)의
동상이 서있다.
그는 로댕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 사실주의를
추구했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어린 아이를 앉고 있는 모자상.
고뇌하는 남녀상.
누워있어도 고뇌를 하고 있고.
넓은 조각공원을 거니는데도
한참 걸린다.
이공원은 시자금으로 1915년 건설을 시작
했으나, 비겔란은 공원완성 전에 사망.
테마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희로애락.
무게 270톤짜리 화강암 덩어리 하나로 만든
모놀리트(Monolith), 높이 17.3미터.
121명 남녀노소가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며
안간힘을 쓰는 모습들.
인생이란 원래 그러한 것.
세부적인 모습.
또 하나의 역동적인 조각상을 향해-
조각공원을 나와 노르웨이에 아듀하고,
오후 4:30 출발하는 펄 씨웨이즈에 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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