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처조카딸들이 마련한 여행

난해 2019. 10. 18.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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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일) 오후, 큰 동서의 팔순기념,

2박 3일 가족여행에 동참.


여자 삼형제 중 막내인 우리 내외와

둘째 처형이 특별 초정을 받았다.


큰 동서 가족이 5명이니,

도합 8명이 작은 처조카사위가 모는

9인승 카니발을 타고, 한강을 건너-





안성휴게소에는 이영자가 광고한

소떡소떡이 큰 인기.


소세지와 흰떡을 번갈아 꽂은 음식.

맛은 그런대로였고.





부여롯데리조트에 짐풀고

5:25분 낙화암 가는 길, 해는 저물고.

이날 일몰은 6시.


차가 출발할 때마다

처조카사위는 뒷좌석의 처형 둘의

안전띠까지 돌보고.


이렇게 어르신 대우받는 여행은 처음.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들었는가.





부소산성 서복사지엔

모자가 부여의 쓸쓸함을 맛보는지.


부여읍 쌍북리의 부소산(扶蘇山,106m)은

솔뫼(소나무산)의 뜻을 갖은

풋소에서 이름이 왔다고.


서복사는 왕실의

기원사찰로 추측되어지고.



부여의 인구는 7만 명. 서북은 차령산맥,

남동쪽은 금강유역 평야.


삼한시대는 마한에 속했고

백제시대 이름은 사비(소부리).

그뜻은 밝다, 붉다라고.





낙화암에서 보는 백마강가.

금강이 부여를 지나는 동안

이름이 백마강으로 된다.


'백마는 가자울고 날은 저문데

거치른 타관길에 주막은 멀다'


명국환의 '백마야 울지마라',

백마강도 그러한 애조를 띠우고.


660년, 수많은 백제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





1929년에 세웠다는 백화정에

올랐지만, 시야가 넓지못했고.


큰 처형 내외, 어둠 속에 가파른 길을

쉬엄쉬엄 오르내렸다.

두딸이 부모 손잡고 부축하는

모습도 좋았고.


부여시내는 황혼과 야간조명으로

화려했다.





맛집, 백제의 집에서 연밥 먹고,

야간개장 중인 재현된 사비궁과 능사로.

(9, 10월 금, 토, 일에 야간 개장)

일요일은 썰물 후 썰렁.


롯데리조트 건너편에 자리하고

규암면 합정리에 있는 백제문화단지.

17년간 8천억 원 넘게 투자되었다.


궁전은 조선시대 양식이고, 고증되지않은

 설계와 공사로 비난이 많다.

백제의 한을 이해하기는 하겠지만.





재현된 능사 오층목탑엔 보름달 뜨고.


왕실사찰의 절터인 부여 능산리 사지의

능사(陵寺)를 재현했다고, 저승사자

해설사가 말했고.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골짜기에 위치한 능산리

사지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재현된 능사 금당의 부처는 고증이

 된 것인지, 낯설어보였다.


고려초까지 본존불을 모신 건물을

금당으로 불렀다고 추측.




다음날 아침(10/14,월) 기온이 급강하했는지

창문에 김이 서렸고.


리조트의 본디마슬 레스토랑에서

조식. 값만 비쌌지 별로였다.

본디마슬은 본래의 맛을 의미한다나.





이날의 첫방문지는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전동성당 방문.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지에 프랑스

보두네신부가 1914년 완공한 성당.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매우 아름다운 성당건물 중 하나.

전주읍성의 흙과 벽돌로 세웠다고.


성당 내부와 둘레를 한 바퀴 돌았고.





세 자매와 두 처조카딸,

그리고 큰 동서, 명섭이형님.


사진 찍기를 싫어해

이 한장 건졌다.





성당뜰의 호랑가시나무,

영어로는 holly(holy의 뜻).


크리스마스트리로 많이 쓰인다.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오를 때 로빈이란 작은 새가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빼내려고 온힘을 다했다고.


로빈이 좋아하는 먹이가 서양호랑

가시나무의 빨간 열매.


나무의 5-6각형 잎 모서리에 가시가

튀어나와, 호랑이가 등이 가려우면

이 잎에 문질러댄다고 호랑가시나무.

(박상진 교수)





 내가 본 중에서 제일 예쁜

팥배나무 한 그루.


장미과 마가목속. 열매는 팥, 꽃은

배꽃을 닮았지만 배나무와는 먼 사이.





우리는 완산구 풍남동에 소재한

경기전(慶基殿)으로.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

경기전 내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와 예종대왕 태실이 있다.


경기전 북편에는 전주이씨 시조를 모신

조경묘가 있고, 옆으로 어진과

어진박물관이 있고.


실록은 전주사고에 보전되었던 것이

유일하게 남아,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





태조 어진.


태조어진은 많게는 26점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어진이 유일.


큰동서, 처조카사위, 나 모두 이서방인데

전주이씨는 없고, 전의, 경주, 연안이씨.





태조어진 전주봉인 600주년 기념으로

어진박물관이 2010년 개관 되었는데,


관련된 여러자료와 왕실에서 사용한 가마,

행렬모형, 명장들이 만든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팔척의 이성계장군은 유린청이란 말을

타고 싸움터를 누볐는데,


조선이란 나라는 중국의 속국이란 말까지 듣고,

당파싸움 속에 정신 못차리고 몇 차례의 왜란과

호란을 겪고, 백성만 시달림을 받았다.


그  당파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권력있는

사람들은 백성을 우습게 여기고 있고.



중국은 비록 몽고족 나라, 원에 의해 남쪽의

수도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했지만, 많은 민족을

거느리고 점점 대국이 되어왔다.





아담한 경기전 담장길.


마한의 원산성, 백제의 비사벌,

후백제 도읍지, 전라도관찰사 소재지였던

전주의 인구는 65만 명.


전주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동북쪽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선대들이 살았던 곳.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다.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목조가 살았던

곳에서 승전을 자축한 곳이 오목대이며

(풍남동 한옥마을 인근)


이목대(완산구 교동)에는 고종황제가 친필로

쓴 비에 목조대왕 구유거지가 새겨져 있다.


목조가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이성계에게

건국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





보수중인 풍패지관(豊沛之館).

한옥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지난번 유재명친구 덕에 방문했던 성균관의

명륜당 글씨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이고

풍패지관 역시 그의 글씨인지라, 이곳을 방문.


다시 한 번, 주지번과 그를 도왔던

송영구(1556-1620)의 아름다운 인연을

다시 생각해보았고.


풍패는 한나라 유방의 고향. 풍패지관은

건국자 이성계의 고향이란 뜻에서

전주객사에 주지번이 써붙인  명판.





전주객사 인근, 풍년제과에서 차

한잔하고, 이름난 이곳의 빵을 조금 샀고,


한옥마을을 한 바퀴 드라이브하고

이름난 '한국집'에서 비빔밥+콩나물국밥.


값이 더 저렴한 국밥이

비빔밥보다 더 입맛에 맞았다.





다음은 부안으로 차를 돌려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開巖寺)로.

뒤에 보이는 바위가 우금암(울금바위).


634년(백제 무왕 35) 백제승려 묘련이

창건한 절.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지은

서쪽전각이 개암.


우금암 중심으로 주류성이 있는데

백제유민들이 풍왕자를 옹립하고

부흥을 꾀했던 사적지.





80년대 중반에 찾았었던 개암사는 단청이

 안된 대웅보전 한 채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때의 단아함과 아름다움은 간 곳 없고.


개암사도 지금은 변산반도 국립공원 안.

반도형 국립공원 안에는 관음봉(412m)을

중심으로 12여개 봉우리가 있고,


직소폭포, 채석강, 내소사 등

둘러볼만한 명소가 많다.





가을 적막 속의 사천왕문,

흰 구절초 무리지어 있었고.

사천왕은 단청이 안되어 있다.


인구 56천명의 부안은 마한의 지반국,

백제때는 개화현이었고

보안현과 부령현이 합쳐져 부안군이 됨.


조기잡이 중심지이며 개화간척지 조성으로

미곡농업 중심지이기도 하고.


산, 바다,평야가 잘 어우러진

살기좋은 고장.





사천왕문에서 본 개암사,

불당이 많이 신축되어 큰 절이 되었다.


이절의 스님들이 죽염제조비법을 마을에

전수, 마을은 이름난 죽염의 고장이 되었고,

덕분에 절도 커졌고.



큰 도로에서 개암사로 진압하는 길은

도로 양쪽에 벗나무가 도열한 멋진

드라이브 길. 그 옆에는 큰 저수지가 있고.


옛날에는 멋진 길도 저수지도 없었다.





언제 걸어도 좋은 전나무 숲길을 걸어

내소사로.

이길은 우리만의 소유였고.


집사람은 오랜만 언니들과의

여행이라 신나해 했다.


매일 어디가 아프고, 어디에

종기가 나고 하더니

여행 중엔 이런 말 한 마디 없었고.


이런 여행 자주 해야 할 텐데-





종각의 목단, 매화꽃.


종각 안의 고려 동종은 대웅보전,

영산회괘불탱과 더불어 보물.


내소사는 무왕 34년 혜구가 창건했고

진서면 석포리 변산반도 남단에 위치.


원래는 소래사, 소정방이

절을 찾아 시주했다는 설도 있고.





못 하나 쓰지않고 나무로만 끼워맞춘

대웅보전은 조선중기 대표적 건물양식.

단청이 퇴색되어 더욱 고풍스럽다.


화려하지만 고풍스럽지 않은

장중함보다는 다정함을 느끼는.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이나

신라탑 양식으로 날렵한 느낌.





대웅보전은 문신이며 서화가였던 조선후기학자

이광사(1705-1777)글씨.


중국서체에서 벗어난 동국진체.

특이하고 더 아름답고.


이광사는 영조때 소론이 세력을 잃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유배지 완도 신지도에서 사망.

묘역도 DMZ 안에 있다고.


꽃살문의 연꽃, 국화 등의 꽃무늬는

정교하고, 문마다 다른 무늬,

아름다움이 정평이 나있다.





지장암(서래선림)가는 길의

대나무숲과 감나무.





바위산 밑에

아늑히 자라잡은 지장암.


스님거처에는 이미 겨울준비가 끝나

장작이 가즈런히 쌓여있었고.





초입의 스님들 거처가 1980년대 중반엔

지장암의 유일한 건물이었는데-

빨간 감이 익어가고 있었고.


감나무 키가 작아 더욱 정이 가고.





호젓한 길을 걷는

여인은 누구냐?





내소사 입구에서 커피 한 잔하고

진서면 진서리에 있는 곰소항으로.


쓸쓸하고 허전한 곰소항,

주위는 젓갈 파는 가게들로 어지럽고.


곰소는 원래 곰섬 앞바다의 깊은 소.

칠산바다의 할머니 수호신이

이곳을 건너다가 무릎까지 빠졌다는 전설.


고려말 왜구 50척이 침입, 보안현과

부령현을 점령한 일도 있고.


인근 줄포항이 토사로 수심이 낮아지자

일제는 제방을 축조, 곰소항을 만들어

수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했다.





섬을 막아 내륙이 된 곰소항,

하루 130척 어선이 드나들고, 칠산어장의

조기잡이배들로 장관을 이루던 곳.


위도 파시와 함께 수산물집산지였는데

이젠 고기가 안잡힌다고.


90년대 초반만 해도 주말에 마나님과 함께

이곳에서 조기, 풀치 등을 사서

자취하는 아파트 냉장고에 쟁였는데.


칠산어장은 영광 안마도와 군산 비안도

사이, 위도를 중심으로 한 조기잡이 어장.


동중국해를 거쳐 서해로 오는 조기군은

흑산도, 홍도를 거쳐, 부안 앞바다인

칠산어장을 거쳐 연평도로 간다고.


조기들은 영광 법성포에서

영광굴비가 되고.



이곳에서 무엇 좀 사려했더니

빈손 들고 다음 행선지로.





격포가는 길, 익어가는 들판.


요번 여행 중에 본 논들은 칙칙한 느낌.

태풍피해에 일부는 쓰러져 있고,

일부는 수확이 끝났고.


요즈음 돌아가는 나라꼴에

마음이 황량해진 탓?


젊은이들 걱정 않는데

왜 늙은이들 걱정하지.


길을 잘못들어 모항, 궁항을 거쳐가는

멋있는 해안길을 놓쳐 아쉬웠지만

채석강 일몰에 맞출 수가 있었다.





격포에 도착, 닭이봉 전망대 오르는 길,

바람이 엄청 셌다.

두 처형들은 얼굴이 하야졌고.


닭이봉(86m) 아래 격포마을이 지네형상을

하고있어 재앙이 끊이지 않아, 지네와 닭이

상극이라는 것을 알아, 시루봉에 족제비


형상을 세워 닭이봉과 마주서게 했더니

재앙이 사라졌다고.






닭이봉에서 내려다본 격포항.

이곳에서 위도로 가는 정기선이 있다.


1993년 10월 위도에서 떠난 배가 돌풍을

만나 회항하다, 292명의 희생자를 냈다.

나와 같이 일하던 젊은 친구들이 희생되었고.


군산에서 건져낸 부하직원 시신을 인수

장지까지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


3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2014년 세월호 사건은

학생들은 선실에 있으라 하고, 선원들은 도망갔고.


화물과적, 평형수 감축적재 등 여러원인이

있었지만, 아직도 원인을 규명하라 떠들고.

정권인수에 빌미를 만들고.





해는 지려하고.

건너편이 위도.


닭이봉(변산면 격포리)에서 변산면

고사포에 이르는 10.4키로의

적벽노을길이 있다.





채석강에 적시에 도착하니

해는 넘어가려 하고.

파도는 거세게 몰려 오고.


이곳은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

공룡발자국 화석도 있다.


해진 후, 채석강과 모래사장이 보이는

황금횟집에서 회와 매운탕,

값만 비쌌고.


밤길을 달려 부여 롯데리조트에

돌아오니 9시.





다음날(10/15,화) 리조트 근처 맛집,

백제해장국에서 소내장(양)해장국

정말 맛있게 먹었고.


양은 소의 첫번째 밥통.


그리고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정림사지로.

정림사는 부여 천도 후 사비시대 중심사찰.


1942년 발굴조사때 출토된 기와에

정림사 절이름이 있었다고.


이절은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었다고.

(남북 일탑식)


정림사지에는 5층석탑(국보)과

석불좌상(보물)이 있다.





부여 천도 후 6세기말에 세워진 오층석탑,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1층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하고,

 그의 공적을 새겨넣었다.


중문터, 금당터, 강당터도

둘러보았고.





강당지 한복판에 있는 석불좌상,

보호각 안에 있다.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형태만

남아있어 머리부분이 후대에 만들어짐.

고려시대불상으로 비로자나불로 추정.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 중엽 창건되었고

정림사는 고려시대 이름. 백제시대 강당

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석불을 주존불로 모심.


정림사 기단은 기와를 사용하여 축조한

와적기단. 일본사찰에 영향을 주었고.





정림사지 박물관을 돌아보았고.


침류왕때 인도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파.


영광 불갑면 모악리에 있는 불갑사는

384년(침류왕 원년) 마라난타가 창건.


백제 중흥의 기수, 성왕(-554)은 사비천도,

왕권강화를 했고, 국호를 남부여로 했다.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고.


의자왕때(643년) 아비지가 장인들과

함께 황룡사 9층목탑을 만들었고.





김창희(1938-)의 '환상여인'


구드레마을 유명맛집 장원막국수에서

수육+막국수.

큰 처조카딸의 특별승락을 얻어 점심값 계산.


그리고 이곳의 조각공원을 한 바퀴.

작품들이 그래서인지 흥이 안났고.





한가롭고 평화스런 구드레 백마강변에서

독일에서온 한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조각공원에서 만났었고

부인은 조그만 화판에 그림을 그렸고.


 구드레는 부여읍 구교리로, 부소산 서쪽

기슭에 있는 나루터 일대.

사비성의 관문역할을 했고.


옛날 한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드리러

갔다가 백마강언덕 바위 위에서

부처님을 향해 절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나.

자온대라 불렀고, 그이름에서

구들돌, 구드래로 변했다고.


구드레나루는 왕이 이용한 나루터

라는 뜻도 있고.





나루터에서 강건너 왼쪽에 보이는

산은 부산(浮山,107m). 규암면 신리.


이산 밑 마을이 있는 곳에 백강 이경여

(1585-1657,영의정 역임)의 위패를

봉안한 부산서원이 있고,


대재각이 있다. 그안에는 효종이 이경여에게

내린 부산 각서석(刻書石)이 있다.

자연암반에 글씨를 새긴 것.


이경애가 북벌에 관해 효종에 올린 상서에

효종이 답한 글귀 중


至痛再心日暮途遠(지통재심일모도원)을

손자 이명이 바위에 새긴 것.


마음이 아프나 뜻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얘기.


그나마나 청에 대한 외교를 잘하고 있던

광해군을 신하들이 몰아낸 것도 잘못이고,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겪고도, 정신 못차린 인조는 소현세자

(1612-1645)를 못믿어 제거했고.


 소현세자가 살았다면 청과의 관계는

잘 되어가고 조선은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강국이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구드레나루에서

황포돛배 타고,


백마강하면 부여태생 신동엽시인

(1930-1969)의 시, '산에 언덕에'가 생각난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조선후기 학자, 송시열(1607-1689)이

낙화암 절벽에  쓴 '낙화암'을 보았고.

(가운데 조그만 글자)





배에서 내려 고란사을 돌아보았고.

임금이 좋아했다는 약수도 마셨다.



고란사는 백제말기에 지어졌다고 하고

이곳에 자생하는 고란초에서

이름이 왔다.


왼쪽 고란사 편액은 해강 김규진

(1868-1933)이 썼고.

김규진은 18세에 청나라에서 유학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했으며

영친왕 이은에게 서화를 가르쳤다.


고란사 편액 왼쪽에는

회고루(懷古樓)란 편액이 붙어있는

측실이 있다.


삼국통일을 회고하면, 신라보다

 고구려가 통일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이젠 삼국통일에서 시작한 경상, 전라의

다툼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있으며


일제, 정신대, 어쩌구 하는 생각보다는

미래지향적 사고가 축이 되었으면 한다.





고란초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세 곳에 표시가 되어 있고.


고란초는 고사리목 고란초과 풀.

산지 그늘진 바위틈에 자라며

자생지및 개체수가 풍부하다.


경기도 인근 산중에서

본적도 있고.





귀경길, 천안휴게소에선 둘째 처형의

호도과자 선물이 있었고.


처조카들의 마지막 배려로

하남 스타휠드 구경을 했고


이곳에 있는 풍원장에서

6시쯤 맛있는 미역국 정찬,

내생일을 미리 먹었다.


스타휠드는 신세계그룹 자회사가

 운영하는 복합쇼핑물체인.


아동체험시설, 남성 엔터테인먼트 공간을

설치하여, 고객의 체류시간을 늘려


온라인 쇼핑물에 빼앗긴 고객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노력에 정부는 규제를 시작하여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큰 처조카딸, 작은 처조카딸 내외,

너무 고마웠다.

다섯 노인 모시는데 너무 신경 많이 썼고.


큰 처형 내외, 작은 처형,

빡센 여행일정을 모두 소화하셔

기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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