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3월엔 여덟 명이 서천특화시장에서
한산소곡주에 취해 흐늘거렸었다.
이날엔 한산이씨 한 명이 새로 참가했고.
거리엔 반려견유치원.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데,
강아지 세상이 되었어.
봄날 아침은 매서웠지만 날씨는 쾌청.
이틀 후면 춘분,
날이 많이 길어졌고.
운전자의 의지는 없고.
우면산터널을 지났고.
어디로 갈지 우리도 모르고,
낯선 거리를 지난다.
관악산 풍경이 보이더니
과천을 지났고.
평택항을 지나더니
서해대교도 아니고 무슨 다리이지?
온양온천역에서 아산의 사학도 등
5명을 만나니 아산친구, 이남규선생고택으로
가자고 했다.
5명 중 4명은 전철, 기차로 왔다.
한산이씨 이남규친구는 어리둥절.
나와 이름이 같네.
전형적이고 아늑한 동네,
봄날의 햇볕이 따수웠다.
이남규친구, 기념관의 여직원을
거처에서 불러냈다.
먼저 출발한 일당 5명은 오고 있는 중.
서천군 한산면이 본관인 한산이씨 족보.
고려 숙종때 호장 이윤경이 시조.
6세손 이곡의 아들이 이색.
고려말 삼은(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은 고려의 성리학자.
이색의 아들 3형제에서 문양공파, 아재공파,
양경공파가 갈렸다.
'어제 영명사 절을 지나
잠시 부벽루에 올랐더니
평양성 빈 하늘엔 조각달 하나 떠 있고
바위는 늙어 구름은 천년 세월 떠 있네
기린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니는가
바람 부는 돌다리에 의지해 읊노라니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이색, 1328-1396, 부벽루에서)
*고구려 주몽은 상상속의 말, 기린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고구려의 영화롭던 지난 날을 회상,
심회를 읊은 5언 율시.
당쟁사의 중심이며 당파의 영수였던
실리적 현실주의자, 선조때 영의정.
대술면 방산리에 신도비, 사당, 묘.
이산해 아버지는 이지번, 토정비결
이지함의 형.
경세치용학파 이익(여주 이씨)계열의 이남규선생,
실사구시학파 김정희가 있다.
4대가 현충원에 묻힘.
이남규선생은 아들, 이충구와 함께
아산시 송악면 평촌 냇가에서
일제의 칼날에 순국하였고.
이승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그 아들 이장원은 6.25때 전사.
그의 정신은 사가살불가욕(士可殺不可辱).
선비를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우리의 이남규친구는 백살 가량 위의 동학열
형님을 몰랐었는데 이 여행에서 형님을
알게 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행에선 예상치 못한 일을 마주친다.
2018년 초복맞이 충청여행에서 내비에
홍주성을 치니 중국집으로 안내했고
홍주읍성 가는 길에 홍성성결교회를
만나, 들어가게 되었다.
천병헌친구의 부친이 1945년 이교회의 반석을
놓으셨다. 교회에서 부친 사진과 교회역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병헌친구도 눈시울을 붉혔었다.
마주친 상항리석불.
온화한 미소가 우리 눈길을 끌었고.
이남규선생 고택에서 100m지점.
원래 방산저수지 안쪽에 있었으나
물에 잠길 것을 예상, 이곳으로 이전.
충남 유형문화재.
순조때 선비 이광임이 1820년경 지은 집.
ㅁ자형 목조 건축물.
아계 이산해선생 묘, 사당 등은 시간상
가보는 것을 생략.
오리떼들 화다닥 날아갔는데-
나무들 때문에 포착을 못해 아쉬웠고.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밖으로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 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도종환, 1955-, 그해 봄)
*나이가 팔십이 가까워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는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화암사를 들렸더니
개축 중.
조계종 수덕사 말사로
삼국시대 고찰.
이렇게 엉성한 보호수는 처음.
종소리, 꽤 울림이 컸다.
추사선생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별사전으로 보급된 전토에
포함되어 있어 일문에 세습된 절.
추사는 이곳 오석산 화암사에서 불교에
정심하였고 제주에서 중건을 지시함.
친필 무량수각, 시경 두 편액은 수덕사
성보박물관 보관.
오석산 암벽에 친필, 각자한 시경,
천축고선생댁, 소불래 등의 유적이 있음.
천축고선생은 추사선생의 호.
인도의 부처라는 뜻.
시경은 시의 경계 또는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풍취의 뜻. 추사가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탁본 글씨.
(송나라 시인 육유의 글씨)
추사의 친필이란 견해도 있다고.
친구들 눈이 부셨다.
친구들의 학구열, 대단.
스승 옹방강 집 앞 석순에 봉래가 쓰여진
것을 보고 자신을 소봉래라 새겨 놓음.
추사는 소봉래가 들어가는 호를 사용하기도.
담계 옹방강(1733-1818)은 탁월한 감식력을
갖은 청말, 최대의 금석학자이며 대학자.
소동파(1036-1101)를 존경했던 옹방강,
소동파, 옹방강을 존경했던 추사.
천축고선생댁, 시경, 소봉래는 옹방강을 상징.
추사는 이것들을 오석산에 남겨두어 자신의
학문의 뿌리, 이상향으로 삼으려 했다고.
세한도, 그리고 수선화 노랑물결.
세한도에는 그의 쓸쓸한 삶이 들어나 있음.
수선화가 만발하겠지.
추사의 수선화부(水仙花賦)에도 수선화
그림이 있고 그의 수선화 시도 있고.
추사는 수선화를 좋아했다.
육지에선 귀한 수선화가 제주에서 지천으로
널려있어 농부들이 잡초 보듯 하는 것을
보면서, 사물이 장소를 잘못 만나면 천한
꼴을 당할 수 있다고 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하기도.
'날씨는 점점 겨울로 접어드는데
늘어진 꽃봉우리들은 동글동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품은
냉철하고도 준수하구나
매화가 고상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김정희, 1786-1856, 수선화)
고택은 추사가 여덟 살까지 머물던 곳.
장성했어도 내려와 책을 읽던 곳.
고택 밖에 그의 묘소,
증조부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고.
그는 멋보다 실리를 좇았고
정도를 지켰다.
증조부 김한신이 죽자, 화순옹주는
슬퍼하여 목숨을 끊었고 정조대에
열녀로 봉해지고 열녀문이 세워졌다.
김정희선생의 체취를 느껴보기 시작.
돌기둥은 해시계 역할.
내 매실밭 청매실은 4/20일에야
몇 송이 활짝 피었는데-
선생의 글씨는 참말로 특이하고 아름답다.
차를 끓이는 죽로,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
관람을 중지하고 있다.
밖이 훤히 보였고.
중국에서 백송씨를 붓뚜껑에 담아
오셨다는데, 그 나무일까?
윤희수산은 여전히 성업중.
막내네에 안착.
막내는 여전히 생글거렸고.
어딜 가느냐!
처음은 서산막걸리로 건배.
주꾸미, 새조개 샤브샤브.
100살 위인 형님을 만났던
이남규친구가 패를 잡았다.
1인당 비용은 5만원 정도.
2년전은 33천원.
서산시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무척 싼
느낌이었는데, 갈수록 아닌 느낌.
배가 꽉 찼다 생각해도
안먹을 수 없는 할머니 호떡.
할머니 건강하시고,
사투리 구수하고.
3개에 2천 원. 정말 싸고 맛있다.
남규친구가 맛있는 호떡을 샀다.
인도가 고향인 소나무과 상록침엽교목.
인도지역의 히말라야지역은 아열대.
우리나라에선 천안 이남에서만 생육.
올 때와는 달리,
세 사람은 지탄친구차로 온양온천역으로.
다섯 사람은 흥구친구차로 상경.
우리는 서해대교를 지났다.
당진 신포와 평택 포승을 연결하는
7,310m 다리.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이번 봄나들이도 괜찮았다.
지탄친구, 방문지도 잘 선택했고
주꾸미, 새조개 샤브샤브도 좋았고.
지탄, 흥구친구를 비롯
모든 친구들 수고했소.
내년 봄, 서해안 어디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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