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봄의 길목을 추월, 문수골을 향하여 (2006.3.4-5)

난해 2015. 9. 26. 23:31

 

1.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병술의 첫 봄 나들이는 방 원익군이 특별히 마련한 자리다. 그는 세상 풍파에 시달린 우리들의 머리를 식혀주기 위해, 지리산 계곡의 1등급 고로쇠(骨利水)를 준비해 놓고, 구례 지리산 문수골(덕은내) 계곡의 그의 별장에 우리를 초대했다. 꾀돌이 산악회장 수동군은 가는 길에 담양의 추월산 산행계획을 끼워 놓았다.

 

  나들이하는 날 (3월 4일, 토) 새벽 4시 반에 일어났지만, 나이 육십이 되어서인지 시간이 부족했다. 특히 화장실의 큰일은 늘 한참 걸린다. 6시 10분 전 마나님 차에 올라타자 김 수동 회장의 독촉 전화가 왔다. 6시 조금 넘어 태릉역에 도착해보니, 용문도사, 주유천하 선생 등 세 명이 일찍 와 있었고, 조금 더 있으니 소 사또가 소걸음으로 나타났다.


  주선생은 애차를 몰아, 잠실에서 쒱군, 둔천에서 재건 본부장, 수원 톨게이트에서 재혁 대장을 태우고, 7시 5분 수원 톨게이트를 출발하였다. 일산에서 일찍 출발하여 일곱 친구들을 차례로 싣고, 말없이 차를 모는 주 천유군은 가히 주유천하 선생이라. 차내에서 끽연을 엄히 다스리는 것도 내 맘에 딱 든다. 7시 반 쯤 안성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그 와중에 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은 나 한사람. 간이 배 밖에 나왔다고.


  요번 여행 중에 재건본부장 유재건 군은 거의 시인이 다 되어있었다. 그는 정 지용 시인의 ‘호수’를 몇 번이나 읊었다.


  얼굴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그의 첫사랑 이야기는 가히 극적이고, 아직도 빨개진 얼굴로 얘기를 하는 그를 보면, 홍안의 미소년이었다. 고향의 국민 학교를 다닐 때부터 짝사랑하던 소녀가 있었다. 앞에만 서면 부끄러워지고, 안 보이면 그리운. 중학교(덕수)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자, 마음은 더 안달이었다. 방학이 되어야 그나마 볼 기회가 있었으니까. 한번은 용기를 내어 “시간 좀 내 주세요.” 하였더니, “시간 내어 무엇 하게요?”하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그러다 군 복무중일 때 여인의 집을 찾아, 장인 후보 어른에게 넙적 절하고 윤허를 받아, 양쪽 집안이 모였더니, 왜인지 그 여인은 자기가 찾던 여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직도 그 여인에 대해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고.


  재건군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다보니, 재혁군이 “너도 덕수중학교 나왔냐?” 하더니, 그 시절 선생님들의 얘기를 꺼내며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여행은 좋은 것이다. 겹 동창도 만나게 해주고. 어쨌든 첫사랑은 그리움 속에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2. 봄기운이 완연한 담양 보리암


  9시 반 정읍 IC를 빠져 내장산 입구에서 꼬불꼬불 비탈길을 타고 백양사 쪽으로 가다가, 순창 복흥을 거쳐 담양군 용면 월계리에 있는 추월산 주차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10시 20분이었다. 추월산(秋月山, 731미터)은 전남 5대 명산 중의 하나로, 임진왜란 때 격전지 이었으며, 동학농민운동 당시 마지막 항거지이였다고 한다. 인근 회문산과 더불어 난(蘭)의 자생지로 소문나 있다.


  소주와 비상식량을 구입하여 챙겨 넣고 산을 오르니, 멀리 가파른 봉우리 밑에 보리암이 제비집처럼 달려 있었다. 길은 계속 급경사였다. 어제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이수영군은 뒤 처졌다. 조용국군의 차남 결혼식 피로연 때 부러진 이(齒) 치료가 덜 끝났지만, 원익군이 막걸리 한 말 담갔다는 말에 따라 나섰다고 했다. 잠간 쉴 때마다 아래를 보니, 아름다운 담양호가 모양을 바꾸며 자태를 드러냈다. 호의 건너편 동쪽에는 강천산 군립공원이 있다.


  중간지점을 지나니 얼음길이 시작되었다. 아이젠을 하고 절벽을 오르니, 등산지팡이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다. 11시 반 보리암(菩堤庵)에 들어서니, 아래는 호수가 있는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약수 한 바가지 마시고 다시 길 떠나려니, 암자 입구에 선조 때 김덕령 장군(1567-1596)의 부인, 흥양 이씨의 비가 있었다. 그녀는 왜군을 피해 이곳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고 한다.


  12시가 지나서 우리는 보리암 뒤 봉우리(691미터)에서 다시 세를 규합하여 등정주를 들었다. 재건군이 이북에서 가져온 들쭉술을 동내려니, 그래도 원익군 몫은 남겨야 한다고 하여, 수동군의 양주 로 옮겨 그마저 바닥을 보았다.


  내려갈 때는 양지 쪽 방향의 2등산로(올라올 때는 1등산로)로 하산하였다. 등산로도 비교적 완만하고, 담양호를 바라보며 내려오니, 올라올 때 허덕이던 일은 옛날이야기이었다. 순영, 용문군은 동굴 대피소 근처에서 물오른 아주머니 무리 속에 남겨놓고, 중턱의 벤취에서 수영, 재혁군과 소주 한잔 씩 들이켰다. 주위에는 흰 나목들이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녹색으로 알몸을 감싸겠지.


  14시 반 출발지에 다시 모여 담양 온천을 향했다. 담양 온천은 실외 온천, 수영장도 갖추고 있었고, 우리는 실외에서 봄날의 따뜻함을 잠시나마 만끽하였다. 순영군의 코스 선택은 그만이었다.



3. 반달곰 노는 곳에 술 빚어 놓고 기다리는 친구


  15시 40분 온천욕을 즐긴 후, 점심을 생략하고 구례로 출발하였을 때는 모두들 먹는 생각뿐이었다. 허나 어쩌랴, 방 원익군은 어제부터 내려와 막걸리, 고로쇠, 산골 돼지고기를 준비해 놓고, 줄기차게 외로움을 하소연하고 있었으니. 마침 별장지기는 입원한 부인 돌보기에 여념이 없고, 손수 음식 준비하려니, 얼마나 애썼을꼬.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눈요기하고, 곡성을 거쳐, 구례터미널에서 원익군을 만나, 산장으로 향하였다. 산장이 있는 곳은 구례군 토지면 문수리다. 운조루가 있는 오미(五美)리를 지나, 지리산에서 가장 규모가 작고 외딴 문수골 계곡에 위치해 있다.


  이 계곡은 화엄사계곡과 피아골계곡 사이에 있으며, 좌측에는 형제봉, 우측에는 왕시루봉이 있고, 밤에 골짜기를 따라 위를 보면 노고단(1507미터)의 불빛이 환하다. 여순 반란당시 남부군의 출입통로로 이용되었던 반란의 역사 흔적이 있는 계곡이다. 구례란 지명이 원수에게도 예를 베푼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요즈음은 방사된 반달곰이 출현하며, 토종꿀과 고로쇠 수액이 흐르는 오지마을로 알려져 있다.

문수사 표지가 있는 입구를 들어서서 덕은내를 따라가면 중대마을 계단 논이 보인다. 이곳을 지나 큰 삼거리에서 좌측방향으로 좀 오르면, 집채만 한 바위 우측에 산장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있다.


  17시 10분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원에서 삼겹살, 굴 파티를 시작하였다. 빚은 막걸리, 고로쇠에 삼겹살, 굴을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는 모양이 마치 아귀들 같았다. 해군 출신답게 원익군이 준비한 굴 구이는 이날의 백미였다. 얼마 안 있어 문수골의 찬 기운이 친구들을 실내로 몰았다. 페치카 불 앞에서 곰방대를 피워대더니만, 전부들 지치는 모양이었다.


  천유군과 나는 더부룩한 배를 안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 문수사를 향했다. 작년 봄 평창 청옥산을 오를 때, 우리 둘만 가시덤불을 헤치고 ‘육백마지기’를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디서 반달곰이 쑥 나타날 것만 같았지만, 덕은내 물소리는 그런대로 들을만하였다. 두 화가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수채화풍경’을 지나니, 별무리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깊은 산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천유군의 말이 우리를 동화 속으로 끌어넣었다.


  한 시간 좀 못 걸어, 문수사에 도착했더니, 수행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문이 굳게 닫히어 있었다. 빨치산시대의 관습인가? 오는 손님을 막는구먼. 중간 쯤 내려오니 별들이 어느새 사라졌고,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참 걸어서인지, 저녁때의 추위는 어디로 가고 덥기까지 했다. 실내에 들어서니, 훌라훌라 하던 용문도사가 만 원짜리로 배를 부채질하면서, 또 껄껄대면서 거실로 나왔고, 수동, 수영군이 뒤따라 나왔다. 도사가 내일 점심을 낸다고 했다.


  순영, 수동군은 잠자리에 들고, 나머지는 다시 술파티를 시작하였다. 책상에 있는 해사 동창회 명부를 보니 요절한 김 진홍군이 떠올랐는데, 원익군도 같은 예기를 했다. 사관학교 졸업생은 단 둘이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마시고 있던 적갈색의 술은 언젠가 맛 본 것 같은 향과 맛이어서 궁금해 했더니, 원익군이 병원에 있는 별장지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가목 술이라고 하였다.


  마가목은 삭풍이 휘몰아치는 산꼭대기로 밀려나 사는 비운의 나무이다. 초여름에 하얗게 피는 꽃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빨간 열매 또한 아름답다. 작년 8월말 울릉도 성인봉 등반시, 키다리 마가목 숲속 길 위에 수없이 떨어져 있는 열매들을 밟고 내려왔던 기억이 새로웠다. 마가목은 풍, 어혈에 효과가 있고, 늙은이의 쇠약한 것을 보하여, 허리 힘, 성기능, 다리의 맥, 검은 머리 회복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 효과를 아는 양, 그 큰 술병을 다 비우고 말았다. 원익군은 이술을 전남 도백이 달래도 안 주었던 술이라고 몇 번 강조하였다. 과연 효과가 있었던지, 천유, 수영, 용문군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재혁군과 나는 슬그머니 빠져 자리에 누우니, 방바닥은 뜨뜻했지만, 역시 산골의 웃풍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김복동 장군과 테니스 쳤던 일 등을 얘기하는 천유군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원익군이 손수 준비한 아침을 맛있게 들고, 8시에 문수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설거지를 도와주려 했더니 원익군 막무가내로 거절하였다. 너무도 완전한 훌 서비스에 다시 못 오겠다고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군에서 익힌 예절 때문일까? 하여튼 비가 곧 올 것 같은 날이어서, 왕시루봉을 오르는 것은 포기하였다.


  ‘수채화 풍경’에 도착하니 재혁, 재건, 나를 제외하고, 모두들 차 한 잔 한다며 그곳에 머물렀다. 셋은 땀 흘리며 문수사를 방문했다. 기르고 있다는 반달곰도 볼 수 없었고, 인적 조차 끊어진 빈 절터 같은 느낌이었다. 해발 800미터에 위치한 문수사는 백제 성왕 때 창건된 사찰이라고 한다. 정사각형 탑모양의 대웅전과 삼성각 등 오래된 건물들이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려오는 길, 재건군은 절 입구의 큰 바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잠시 명상에 잠겼었다. 시험 준비 중인 딸을 위해 기도했었다고 했다.


  내려오는 길, 우리도 ‘수채화풍경’에 들려 쑥차 한잔 씩 하였다. 용문도사 등 셋은 거기서도 훌라훌라 중이었다. 전시되어 있는 풍경화 등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부 화가는 성실 그대로인 것 같았다. 원익군 소유의 넓은 땅을 휘돌아 산장에 돌아오니, 원익군은 사업관계인지 전남도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그와 헤어진 때는 10시가 좀 넘어서였다.



4. 오무가리탕 그리고 백 영서군 문상


  문수사 입구를 빠져나오니, 차창에 운조루(雲鳥樓) 안내판이 보였다. 영조 때 무관 유이주가 지었다는 99칸 전형적인 양반가옥. 이름도 도연명의 시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흐르고,

  새들은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올 줄 아네.


  섬진강가의 물안개, 석양 그리고 옛 가옥의 아름다움도 알려졌지만, 쌀뒤주에 구멍 뚫어 빈민에게 베풀었던 넉넉한 유씨 집안의 마음이 더욱 아름답다. 당시 사도세자가 갇혔던 뒤주에 숨구멍을 뚫었더라면 하는 바램과도 연관이 된다고 한다. 낡아져만 가는 가옥, 가옥을 지키는 초라한 후손들, 요즈음 사람들의 각박한 마음. 옛날 넉넉한 마음의 복구는 불가능 한 것인가 보다.


  지리산 온천에서 어제의 피로를 풀려고 하였지만, 인파로 인하여 죽림 온천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하였다. 재혁군의 제의로 산동 산수유 마을을 들렸더니, 산수유의 개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임실을 거쳐, 죽림온천에서 피로를 덜어놓고 13시 전주로 출발했다. 용문군의 제2고향, 전주에서 그가 내고, 그가 추천한 오무가리탕을 들었다. 음식점 옆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어, 옛날 이곳에서 민물고기 잡아 조리한 탕은 기가 막혔을 것 같다. 오무가리는 쏘가리와 같은 생선 종류인줄 알았더니, 뚝배기를 오무가리라고 했다. 소주를 반주로 한 오무가리탕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14시 30분 음식점을 출발하여, 호남, 논산고속도로를 타다, 경부고속도로 바꿔 타고는, 버스 전용차선을 달리는 맛, 또한 괜찮았다. 17시 30분 현대 중앙병원에 들려 문상을 하고나니, 상주 백영서군의 반가워하는 모습이 유난하였다. 어머님과 부인을 인사시키는데, 부인의 얼굴에서 맏며느리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들과 헤어져, 재건, 재혁군과 둑길을 걸어 성내역으로 향하는 길, 마음이 스산했다. 위가 고장이 나, 술 한 잔 못하였던 재혁군의 흰 머리가 더욱 희어 보였고, 그러고 보니 재작년 약수여행 할 때와 비교해보니 나를 포함하여 친구들이 그때 같지 않은 것 같았다. 코걸이 홍 성복군도 자신이 없다고 이번 여행에 참석을 안 했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