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늦봄, 지혜의 언덕을 넘어 (2006.5.29-30)

난해 2015. 9. 26. 23:40

 

 

1. 나이가 들면 꾀만 늘어


  공룡능선을 넘은 지 거의 이년 만에 우리는 지리산행을 결행하였다. 김 형이 저녁을 사면서까지 산행을 유도하여 간신히 성사가 되었는데, 그나마 일정이 1박 2일로 줄어들었다. 초등학교 동창모임까지 들추니, 다섯 명의 일정을 맞추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월 29일 새벽 다섯 시, 선잠깨어 짐을 꾸려 메어보니 허리가 휘청했다. 어제 꾸려놓은 배낭에 소주 팩 여덟 개, 쌀 5인분, 아름찬 김치 세봉을 더 넣었을 뿐인데. 김치는 소금 때문에 무겁다는 아내의 말이 딱 맞았다. 안 되겠다 싶어 김치 한 봉지를 비롯하여 소주와 쌀의 양을 줄였다. 딴 회원들은 책임 주어진 대로 가지고 오겠지 하면서.


  새벽 전철 안은 예상외로 만원이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일터로 가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졸고 있는 얼굴들은 찌들어 있어, 요즈음 경제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앞에 앉은 우리 또래 남자 분은 도시락 가방을 무릎위에 신주 모시듯 하여 양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여섯 시 이십 분,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상환 형만 빼고 전부 도착해 있었다. 장모님이 입원해 계셔, 아무래도 참석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가져온 배낭들을 들어보니, 내용물을 검사할 것도 없이 모두 함량 미달이었다. 그래도 정형의 배낭은 그런대로 묵직했지만. 재윤 형님은 멋쩍은 웃음을 띠고 미리 실토를 했다. 술을 제일 많이 드실 분이 술을 줄여 가져오다니.


  일곱 시 남원 행 버스는 출발했다. 오랜만에 타보는 우등버스는 승용차보다 여유가 있어 좋았다. 차창으로 보이는 간판들도 그럴듯했다. 어울림, 아침의 도시, 창에 대한 생각 등. 용인 IC까지는 정체가 심했다. 중부지방은 모내기가 거의 끝났으리라 생각했지만, 천안에서 논산 간에는 빈 논이 많았다. 땅값이 올라서 그런가. 어쨌든 푸르러만 가는 들과 산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여덟 시쯤 차창에 빗줄기가 뿌리더니, 날씨는 원래대로 화창해졌다. 열한 시 못미처 남원에 도착하여 바로 택시를 잡았다. 미터 요금 3만 원만 받겠다는 기사분의 말에 당초 버스 타려는 계획을 바꾸었다. 버스 요금과 큰 차이가 없고 게다가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원 뜰은 벌써 모내기가 거의 끝나 있었고, 가로수로 심은 이팝나무 흰 꽃들이 눈부셨다. 기사분의 말로는 남원은 원래 모내기를 빨리 한다고 했다. 산간지역이라 기온도 낮고, 일조량도 적기 때문이리라.



2. 품이 넓고 깊은 뱀사골을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열한 시 반, 산내면 매표소를 지나 뱀사골 입구에서 차를 내렸을 때는 온 세상이 우리 것 같았다. 첫여름의 푸른 하늘, 우거져만 가는 숲, 그 속에 덩그러니 버려져 있는 우리 네 사람. 점심을 하려고 들린 제2야영장 입구에서 자주색의 각시 붓꽃이 우리를 반겼다.


  계곡의 시원스런 물소리를 들으며, 김 형의 주도하에 식사준비를 했다. 된장찌개, 삼겹살 구이에 소주로 모두 얼근해졌지만, 재작년 설악산 수렴동 대피소에서의 점심만은 못했다. 뭔가 빠졌다 했더니, 애주가 상환 형이 없었다. 그래서 “미안해, 우리끼리만 먹어서.”하고 장모님 돌보고 있는 그에게 핸드폰을 했다.


  오후 한 시 반, 묵직한 배낭을 다시 걸머지고, 와운교(臥雲橋)를 건넜을 때는 저 멀리 흰 구름이 누워 있었다. 이곳에서 뱀사골 대피소까지는 8.5 Km이다. 계곡을 얼마 걷지 않아 마침 두 미녀가 탄 조그만 트럭이 지나가기에, 태워 달라 손짓하였더니 서기는 하였지만, 이 좋은 계곡을 차로 갈 수는 없지 않냐 하는 김 형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2Km 정도 걸으니, 용이 머리를 흔들고 승천하는 모습의 요룡대(搖龍臺)가 나왔고, 여기에서 우리는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이곳 계곡 아래에서 쉬고 있는 세 선녀에게 말을 건넸지만, 물소리에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곧이어 탁용소(濯龍沼), 금포교를 지나 긴 맥주병모양의 병소(甁沼)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이어 병풍교, 명선교를 지났다. 이곳에서 산행 중 처음으로 한 쌍의 하산 객을 만났다. 이어 옥류교, 대웅교를 지났을 때는 세 시가 되었다.


  5Km 걸은 시점에 제승대(해발 720M), 제승교와 무지개다리를 건너니, 숲으로 가려졌던 하늘이 훤히 열렸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해방된 아이들처럼 야호하며 함성을 질러댔다.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완만한 뱀사골을 오르면 반신선이 된다고 하는데, 재윤 형님은 요즈음 술에 찌들었는지 힘겨워하는 것 같았다.


  산길에는 쉽게 볼 수 없는 나무들이 많았고, 함박꽃나무 꽃은 여기저기 쉽게 눈에 띄었다. 사람주나무, 비목, 정금나무, 대패집나무, 피나무, 때죽나무, 지리들메나무, 개회나무, 노각나무, 고광나무, 말채나무, 거제수나무, 짝자재나무 등.


  6Km 지점에서 이름 없는 다리를 건너니 간장소다. 옛날 화개재를 향하던 보부상이 빠졌는데, 등에 진 소금이 녹아, 소(沼)의 빛깔이 간장색이라고 한다. 이어 유유교(幽幽橋)를 건너 산등을 넘자, 천둥소리 요란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둥소리인지 콸콸 흐르는 계곡물소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유령의 다리가 유유교가 아닌지.


  안영교, 연하교를 건너 7.5Km지점(뱀사골 산장 1Km전)에서는, 소나기를 피하려고 한 우산 밑에서 둘씩 한참을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환한 하늘 밑에 웬 소나기.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고 정희의 지리산의 봄)



3. 군기가 제일 센 뱀사골 산장


  선봉교, 막차를 지나, 오후 다섯 시 이십 분, 드디어 뱀사골 산장(해발 1260M)에 도착하니, 입구의 샘물 주변은 노란 양지꽃과 이름 모를 흰 야생화 천지였다. 우선 산장지기를 만나 숙박료를 지불했다. 얄팍한 매트리스, 침낭 사용료를 포함한 가격이 1인당 8천 원,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취사장으로 내려와 저녁준비를 하려는데, 백두대간을 홀로 넘고 있다는 처녀, 물에 불린 쌀을 우리의 햇반과 교환하자고 사정을 했다. 남은 찬밥을 먹었더니, 밥을 또 하면 찬밥이 또 생긴다는 얘기였다. 이를 흔쾌히 승낙하고 삼겹살을 구우면서, 산처녀와 산장지기를 초대하여 소주파티를 시작하였다. 산장지기가 사례로 가져온 지리산의 참나물에 삼겹살을 싸먹으니 천상의 진미였다.


  일곱 시 반, 저녁을 마치고 취사장 앞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재윤 형님한테 하모니카 한 곡조 어떠냐고 하였더니, 그것도 준비물에 쓰여 있지 않았다고. 어이구, 설마 가져왔더라도, 군기가 제일 세다는 이곳 산장에선 허용이 안 되었을지 몰랐다.


  산장지기에게 식후에 할 일이 너무 없다고 하니, 일찍들 주무시라고. 취사장이 비워지면 그곳에서 고스톱 한판 하려하였더니,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숙소로 들어와 이층 밝은 곳에 짐을 옮기고 자리를 피려하니 예약이 된 자리라고 하여, 원래 배정받은 자리로 부산하게 돌아와서는 고스톱자리를 폈다. 손님이 마침 적은 날이라 여유 공간은 많았지만, 그렇더라도 금지된 오락인지라 소리 내지 말고 치자고 하여도, 재윤 형님의 습관은 어쩔 수 없었다.


  재작년 설악산에서 돌렸던 금잔으로, 이기는 사람에게만 장원주를 돌렸는데, 건너편 침상의 젊은이들이 소주 좀 여유가 없냐고 사정을 했다. 사정을 들어 주면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짐 줄이느라 우리도 여유가 없었던 것을. 재윤 형님, 이날따라 웬일인지 장원주 한 잔 못 마셨다.

그러던 중 건너편 두 젊은이가 침낭이 하나 없어졌다고 떠들었다. 이어 산장지기가 숙소에 들어와서 우리자리의 침낭 수를 세더니, 우리가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 붙여온 침낭 하나를 발견했다. 성이 잔뜩 오른 산장지기, 희희낙락하는 우리를 보고, 이곳에선 금지된 놀이라고 언성을 높이자, 우리는 소등시간 9시 전까지 틀림없이 놀이를 끝내겠다고 능청을 떨었다. 얻어먹은 한 점 삼겹살과 한 잔의 소주 때문인지 그는 얌전히 물러갔다.


  9시 5분전, 마지막 회라는 선언이 있은 후, 정형이 조카 3장을 내려놓으며 흔들었다는 의사 표시를 하자, 나머지 두 사람은 판을 뒤집었다. 원 적당히 해야지. 침낭을 피고 누우니 곧 소등이 되었으나,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4. 지혜의 언덕(반야봉)을 올라, 다시 연하천, 음정까지


  5월 30일 새벽 다섯 시에 기상하여, 조반을 얼추 먹고, 화개재에 오르니 여섯 시 반이었다. 이곳에서 전라, 경상도 사람들이 만나 소박한 장터를 열었다고. 화개재에서 30분 걸려 600개의 나무계단을 올라, 전남북과 경남의 경계인 삼도봉(1550M)에 올랐다. 어머니 젖가슴 같은 산줄기들 저쪽으로 우뚝 솟은 천황봉이 보였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고 정희의 지리산의 봄)


  반야봉 밑, 숲에 무거운 배낭을 감춰놓고 반야봉(1732M)에 올랐을 때는 여덟 시가 조금 못 되었다. 둥글고 부드럽고 깨끗한 반야봉의 자태, 그 위에 아직도 개화하지 않은 철쭉 봉우리들, 그리고 동쪽에 펼쳐진 지리산 영봉들. 남원 산내면과 구례 산동면사이에 위치한 반야봉은 천왕봉 마고할미와 결혼한 지리산 남신이다. 불교에서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지혜의 빛으로 인하여 현실의 세계를 넘어 열반의 피안으로 가는 일을 뜻한다. 네 사람 모두는 저쪽 피안의 세계에 홀로 와 있는 것이 큰 죄인 양, 집에 전화를 걸며 부산을 떨었다.


  아홉 시 넘어 다시 화개재로 내려와 토끼봉(1533M)에 도착했을 때는 열 시가 되었다. 더운 날 쉬엄쉬엄 가려니, 우리뿐 아니라 무거운 등짐 지고 가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가려/서둘지 말고/먼저 보려/재촉하지 말고/먼저 감동하려/애타지 말자//

  한 걸음/한 걸음 걷다보면/숲새에 스치는/실바람도 고맙고/이름 없이 한들거리는/

  풀꽃도 반갑고/막힌 듯 열려 있는/오솔길도 고우려니//

  한 걸음/ 한 걸음씩만 오르자//

  그렇게 올라도/한 生에 오를 길은/충분히 있고/삶이 더욱/여유로우리니//

                                (강 기욱의 지리산에서)


  젊었던 시절, 천왕봉을 오르고 나서는, 다시는 지리한 지리산은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지리산 산행을 통해, 지리산에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달라진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삼도봉에서 연하천까지 이르는 산길 곳곳에 떨어져 있는 다섯 잎의 철쭉꽃은 봄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꽃잎이여 그대/다토아 피어/비바람에 뒤설레며/가는 가냘픈 살갗이여,//

  그대 눈길의/머언 여로(旅路)에/하늘과 구름/혼자 그리워/붉어져 가노니//

  저문 산 길가에 져/뒤둥굴지라도/마냥 붉게 타다 가는/환한 목숨이여.//

                                   (신 석초의 꽃잎 絶句)


  이어 명선봉(1586M)을 거쳐 연하천(烟霞泉,1440M)에 열두 시 반에 도착하여, 서둘러 라면과 햇반을 끓여 먹고 한시에 길을 다시 떠났다. 이곳 산장지기가, 우리가 반야봉 밑에서 채취한 곰취를 보자, 벌금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엄포를 놓았다. 그래도 몰래 곰취 쌈을 해서 먹었는데, 눈치 보며 먹는 쌈이라 그런지 별맛을 못 느꼈다. 안개 연기 속에 흐른다는 이곳 연하천 물맛은 뱀사골 산장 물맛에는 훨씬 못 미쳤다.


  연하천을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좌측 길로 들어섰다. 우측 길은 형제봉, 벽소령 가는 길이다. 우리가 택한 하산 길은 지도에도 잘 안 나오는 길로, 뱀사골과 연하천 산장지기한테 재삼 확인한 길이다. 2.5Km 가파른 너덜겅은 길도 아닌 지옥 길이었다. 앞서 가던 김 형, 정 형도 길을 헤맸다고 했다. 재윤 형님과 나는 허덕대며 “48년생들아, 혼자들 가지 말고 같이 가자!”고 몇 번 외쳤는지 몰랐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너덜지대 중간의 모차르트인지 슈베르트인지 써 있는 나무 팻말이다. 나무이름이 써 있는 팻말인지 알고 접근하였는데, 엉뚱한 팻말이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 팻말이었던가? 지나가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된다고.


  두 시간가량의 지옥 수련 후, 벽소령에서 이어지는 임도에 들어섰다. 5Km의 임도를 지루하게 내려와 오후 네 시,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함양 마천면 음정마을에 안착하였다. 임도 좌측의 함박꽃나무 하얀 꽃과 마을 뒷산의 붓꽃이 고별인사를 했다.



5. 마무리


  음정마을로 내려오는 길, 소주병이 들어있는 물웅덩이에서 머리와 얼굴을 대충 씻으니, 시원함의 극치였다. 구멍가게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미지근한 맥주 한 잔 들이키는데, 내일 있을 선거의 인심이 할머니들 불러 아이스케이크를 권했다.


  함양의 남정네들 시원시원했다. 마천으로 향하던 택시기사는 길에서 차를 세우더니, 우리를 함양읍 가는 버스기사에게 인계했고, 버스기사는 핸드폰으로 터미널에 전화를 하더니, 서울행 다섯 시 고속버스를 탈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고속버스기사는 자기도 지리산을 올라야 할 터인데 하며, 없는 시간을 탓했다.


  오후 여덟 시 십오 분 동서울에 안착하여, 삼층 기사식당에서 마무리 해물탕을 들었다. 탱탱 얼은 얼음 덩어리인 낙지가 들어가고, 아줌마 서비스 엉망인 해물탕. 그래도 지리산 맛을 알게 된 우리들은 차기 지리산 산행을 계획하며, 다음다음 주 진짜 마무리 모임을 갖기로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