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처럼 베푼 선행(善行)
11월 27일 밤 9시, 양지 아시아나 골프장 입구에 있는 ‘이다의 숲’이란 식당 앞에서 세 친구를 만나기로 했었다. 끝나지 않은 모임을 멋쩍게 빠져나와, 기다리던 친구들과 합류하여 동해안으로 향하려하니,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아 쩔쩔매는 아낙이 있었다. 모임의 일원이었던 Y신문의 박 사장이었다. 네 놈팡이는 건수 찾았다하며 갈 길을 잊은 채, 앞 식당에서 점프 케이블을 빌리는 등 한참 수선을 피웠지만, 경보장치와 관련이 된 듯 쉽게 시동이 걸리지 않아, 결국 알라딘 서비스를 요청하고 말았다.
가을비인지 겨울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가랑비를 맞으며, 구조차가 올 때까지 앉았거나 서성이며, ‘이다의 숲’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팝송을 들으려니, 왠지 센티해졌다. 그러다가 전형을 박 사장에게 소개하였더니, 갑자기 둘은 끼어 앉고 환호를 하였다. 박 사장이 신입사원시절 같은 언론사에서 근무를 하였었다고. 백발이 된 옛날 상사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나머지 두 친구도 소개하였더니, 정형보고는 많이 뵌 분 같다고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여보시게! 인연이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오.
출발이 한 시간이나 지체되었지만, 불평하는 친구는 없었다. 결과도 없는 선행을 베푼다고 하였지만, 아낙을 위해 기다려 줄줄 아는 세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넓은지 헤아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민형의 백발이 더욱 희어보였다.
2. 주민 여러분, 우리 마을 x돼 버렸시유
횡성 휴게소에서 올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는 길을 다시 달렸는데, 어는 새 비는 눈으로 변하여 휘날리기 시작했다. 평창을 지나서는 벌써 갓길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전형의 구수한 옛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눈 오는 겨울아침, 충청도의 한 이장이 눈 치우라는 방송을 했다. “눈이 x나게 오고 있시유, 빨랑 나와 눈 치워유.” 다음날 눈이 계속 오자, “어제 온 눈은 x도 아니네유.”하더니, 그다음 날도 눈이 계속 오니, “우리 마을 x돼 버렸시유.”하더라고.
한시가 지나 하조대에 도착하여 술 한 잔 하였는데, 겨울바다는 무척 성이 나서는 으르렁거렸다. 바다를 내다보니,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전형의 배도 어둠 속에서 으르렁거리는지 한 잔의 술을 마다하였다.
여치야 번지 없는 풀 섶에서 밤새우는 여치야, 기운을 내라
(하조대 신미 아파트, 거실 달력에 있는 유 종호의 시)
2. 건봉사에서 찾은 사랑하는 까닭
새벽 일출은 꿈속에서 보고, 느지막하게 건봉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쓸쓸한 화진포에 잠시 들렸다가,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금강산 남쪽 끝자락, 민간인 통제선 북방에 위치한 건봉사를 찾았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때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한때는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등을 말사로 둔 큰 사찰이었다.
입구에는 뜻밖에도 만해 선생님의 시비(詩碑)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고, 건봉사 역사를 정리하여 건봉사 및 건봉사말사 사적을 남겼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한 용운의 사랑하는 까닭)
박 사장도 백발을 사랑할까?
이절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목조건축물, 기둥이 넷인 불이문을 들어서니 건봉사의 고요가 엄습했다. 개천 오른쪽으로 올라, 호도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전형과 호두나무 밑을 뒤지다가 대웅전을 향했다. 초입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자가 수행해야하는 십바라밀을 뜻한다는 십바라밀 돌기둥이 있었다. 열 가지 문양 중 가위모양이 있었는데, 세상과 인연을 끊으라는 뜻인지, 시원찮은 남자는 잘라버리라는 뜻인지.
대웅전과 염불만일원(念佛萬日院)을 거쳐, 무지개 모양의 멋진 능파(凌坡)교를 건넜다. 신라시대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일동안 염불회를 갖은 이래, 만일염불도량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한다. 능파란 우아한 미인의 걸음걸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바세계의 고통을 불법으로 헤쳐나감을 뜻한다고 한다.
적멸보궁 가는 길에는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돌 솟대가 있었는데, 그 위에 앉아 있는 새는 봉황이라고 했지만, 살찐 암탉처럼 친근감이 갔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셨다는 아담한 느낌이 드는 적멸보궁은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민형과 둘이 입실하여 삼배하였다. 이젠 점잖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좀 되게 해달라고. 치아사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간 것을 사명대사가 되찾아 왔다한다. 임란 때 이곳은 승병들이 봉기한 곳으로 그 옛날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히 일어섰던 그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되돌아 나오는 길, 여기저기 나뒹구는 주춧돌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였지만, 전형이 가리키는 멀리에는 금강산 끝자락이 오밀조밀 뻗쳐 있었다. 언젠가는 저 산자락으로 오를 수 있는 날이 있겠지.
점심때도 되고 하여, 근처에 유명하다는 산북 막국수 집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속초 동명 항에서 배를 타고, 아바이 순대 집을 찾았다. 가자미 회냉면과 순대, 그리고 겻들인 소주에 얼근해져서는 뜨끈한 척산 온천에 몸을 담그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3. 먹다 질린 대구 지리
하조대로 돌아오는 길, 속초 중앙시장 어물전을 들렸다. 입구에는 등이 녹갈색이고 큼직한 복이 있어,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하며, “작년 것 아닌가요?”했더니, “내년 것인데.”하고 아주머니는 바로 말을 받아쳤다. 지금 나오는 복은 밀복으로, 11월에서 2월 사이에 동해안에서만 잡히는 자연산 복으로, 매운탕으로는 최고라고 했다. 이제는 밀복 빼고는 양식한 복이 대부분이라고.
복요리에는 자신이 없는 우리는, 팔뚝만한 대구를 한 마리에 거금 만 구천 원을 주고 샀다. 고추와 소금을 넣고 푹 삶으면 된다고 코치하는 아줌마들에게, 고추는 네 개 있는데, 홀아비들이 요리하면 맛이 나겠냐고, 도와달라고 하였더니, 그녀들 박장대소했다.
하조대에서 전형이 끓인 복 지리는 레몬 즙까지 짜 넣어서 그런지 가히 일품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양을 다해치워야 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밥도 안 하고 달려들었지만, 곧 질리고 말았다. 소주도 배불러서인지 들어가질 않았다.
4. 내년 천렵장소를 물색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멀지 않은 기사문 항구에서 경매가 방금 끝난, 대구 열한 마리와 펄펄 뛰는 흑 돔 두 마리를 만 사천 원 주고 사서 포장을 하였다. 딴 친구들은 집에서 귀찮아한다고 구경만 하였다. 숙소에 바로 돌아와, 어제 남은 대구 지리를 해치우고는 청소를 했다. 그리고 멕시코 여행을 떠난 정군 집사람이 하명한대로, 폐기된 대형 냉장고를 14층에서 영차영차 끌어내어 하치장으로 운반했다.
귀경길에 올라, 옆 동에 사는 육십 넘은 아주머니를 태워 강릉 오일장에 내려주고, 우리도 장 구경을 하였다. 그녀 부부는 남편이 서울에 있는 금융기관에서 퇴직한 후, 하조대에 자리를 잡았는데, 갈수록 불편함을 느낀다고 했다. 사람이 그리운 탓이겠지.
강릉장이 큰 장이라고 하지만, 별로 사고 싶은 물건도 없고 하여, 우리는 아주머니말대로 배 한 무더기 씩 샀다. 작고 못난 배가 오천 원에 열 개가 넘으니, 집사람들한테 욕은 안 먹겠지 하면서.
강릉에서 양양으로, 다시 송천리로 빠져, 송천 떡을 사가지고는, 용소골 계곡에서 요기를 했다. 깊은 계곡물 소리에 전신을 적시며, 내년은 옛 어성전보다 물고기가 더 많다는 이곳으로 천렵을 오자고 했다. 마침 정형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떨어진지 오래되어선지 부부의 통화가 길었다. 하명대로 냉장고 옮겼다고 보고하는 그의 얼굴은 미소로 꽉 찼다.
다시 큰 길로 나와 양양 서면 서림마을에 이르니 제설작업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한겨울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조침령 새로 뚫린 터널을 지나 인제 기린면 진동분교에 이르니, 온 동네가 북극의 고립된 마을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마음은 점봉산(1424m)으로 향해 내달았지만, 설피가 없지 않은가.
기린면 소재지로 나오는 길, 방동약수에 찐 초란을 먹으니 춥기는 하고, 집이 그리워졌다. 우리들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홍천으로 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이천으로 냅다 달렸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이천 설렁탕집에서 탕에 소주 겻들이니, 다시 마음이 느긋해졌다. 여행길 거의 혼자 운전하다시피 하여 피곤할 터인데도, 설렁탕 한 그릇 살 줄 아는 정형의 마음 씀이 고마웠다.
돌아오는 길, 생선 상자는 무겁기 만했다. 집사람은 나의 백발을 사랑할까? 내 머리 염색할 때마다 지겨울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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