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마음을 따라가는 여행2(마드리드)

난해 2017. 8. 2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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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에서 마드리드까지는 6시간 가까이 소요.

8시 반쯤 마드리드에 도착하니 황혼이 물들었다.

 

스페인역사는 얘기거리가 무궁무진-

신석기말 아프리카쪽 이베로족과

유럽쪽 켈트족 선조들이 도래했고

이곳은 그리스문화로 대표되는 유럽적인 것과

아시아, 아프리카적인 것이 만나는 무대였다.

 

카르타고에 이어 로마제국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했다. (기원전 218)

반도는 로마정책에 의해 로마의 일부가 되었고,

이곳 출신황제가 네명이나 배출되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카도릭화되었고, 이후

신교의 영향이 적은 나라가 되었다.

 

409년 게르만의 일족인 서고트족이 침입,

300년 통치.

 

이어 711년에 아랍 이슬람교도들이

모로코를 통해 침입, 800년 지배.

이러는 가운데 카도릭과 이슬람 소왕국들간의

투쟁은 끝이 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해,

 카스티아왕국의 이사벨여왕과

아라곤왕국의 페르난도왕이

이슬람세력을 몰아낸후, 신대륙진출 등으로

해가 지지않는 강국이 되었으나,

 

무적함대의 패퇴이후 합스부르크왕조의

퇴조와 함께 힘을 잃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입김이 세진 부르봉왕조때는

불,영과의 경쟁에서 뒤지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진 이후,

초라하고 내분이 그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1936-39년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가 독재

통치를 하다,1975년 입헌군주국으로 복귀했으며,

후안 카를로스1세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스페인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마드리드공항에서 연결열차를 타고,

 입국수속을 밟았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역사를 공유하다,

1143년 카스티아왕국에서 독립하였고,

1580년부터 60년간 스페인과 합병이 되었었지만,

유럽 최초의 단일 민족국가를 이루었다. 

 

그 이후 스페인과 더불어 신대륙, 아시아에 진출하여

세계 2대 강국이 되었었다.

 

 

마드리드에선 이틀 홀리데이 인에 머물렀다.

주위는 교외이라서 그런지 한적했다.

 

 

아침산책을 나갔더니,

멀리 붉은 집들이 무리지어 있고.

 

어제 해가 늦게 졌는데도, 해가 늦게 떴다.

써머타임 때문인가.

 

 

첫방문지는 유수한 유럽미술관의 하나, 프라도미술관.

고야의 동상이 서있다.

 

스페인의 국토는 한반도의 2.3배, 인구는 48백만명.

이나라를 찾는 관광객수는 60백만명.

세계 2위의 관광대국(1위는 프랑스, 3위는 미국)이다.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한 역사 때문에

먹고사는 나라라고 할까.

 

 

아침 일찍 서둘렀지만, 이곳에는 벌써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 날씨는 쾌청.

 

'올라', '아디오스', '그라샤스'는 귀에 익숙한

스페인 인사말이지만, 화장실은 '아세요'이다.

그러나 막상 이말을 써먹으려면, 생각이 안난다.

맛이 갔다.

 

 

프라도미술관 입구의 인솔자 이재찬씨.

 

 

미술관 건물과

 

 

그옆에는 성당건물.

 

 

내부는 일체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세살에 스페인으로 이사왔다는 가이드,

조나단 박상주씨.

시원시원하고, 역사 예술 등 각 부분에 해박하다.

 

인솔자 이재찬씨와 더불어 총각.

둘다 쇼핑, 옵션 등에 부담을 안줄뿐 아니라,

지루한 시간엔 카사불랑카 등 관련된

영화와 음악으로 우리의 분위기를 맞추었다.

 

 

이 미술관에는 고야, 벨라스케스, 무리요의

삼대 스페인화가의 작품 등 회화만 7,800점을 소장.

중심 컬렉션은 스페인 왕실이 15세기부터 수집한 것.

 

 

고야(1746-1828)의 벌거벗은 마하

 

 

옷입은 마하는 우리의 눈에 익숙하고,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크로노스신을 그린 고야의 검은 그림.

그는 죽기전 치매에 걸렸었다.

 

 

벨라스케스(1599-1660)의 시녀들.

마르가리타공주, 왼쪽의 화가자신, 거울 속에는

마리아나왕비와 펠리페4세가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의 못박힌 예수

 

 

무리요(1617-1682)의 과일파는 소녀.

그는 성당이 주문한 그림을 주로 그려 돈을 벌었다.

그림이 심플하고 느낌이 부드럽다.

 

 

엘 그레코(1541-1614,그리스출신 스페인화가)의

못박힌 예수

 

 

엘 그레코의 성모승천

 

 

티치아노(1488-1576, 이태리)의 카를5세의 기마상.

카를로스5세는 해가 지지않는 스페인을 일구었다.

 

운명의 창에는 예수님의 피가 묻었고,

이것은 나폴레옹, 히틀러, 미국으로 이어졌다고.

 

 

루벤스(1577-1640, 벨기에)의 파리스의 심판.

 

트로이 프리아모스왕의 아들, 파리스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를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 중 아프로디테에게 주어,

 

그에게 스파르타의 헬레네가 주어졌으나,

그녀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의 아내.

그녀를 찾기위해 스파르타는 트로이를 쳤다.

 

 

그외에도 렘브란트의 부인, 고야의 카를 4세 가족,

고야의 5월2일 등을 보고, 거리에 나서니,

무개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로마의 개선문을 본따 만든,

알깔라문을 지나고,

 

 

마드리드의 중심지를 지나,

 

 

훼숀의 거리를 거쳐

 

 

마드리드의 대표상업지구 까야오(Callao)에 들어섰다.

스페인어에서는 'll'을 '야'로 발음한다.

 

 

우리는 마드리드 스페인광장에서 하차.

이광장은 세르반테스 사후 3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졌다.

 

 

세르반테스의 상이 있는 중앙기념비 앞에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동상이 서있다.

 

 

동키호테와 산초판사

 

 

거리의 한 건물은 공사중인가?

오랜지색 포장이 화려했다.

 

 

마요르광장 근처로 식사하러 가는 길

 

 

힘든 쇼를 하고 있는 두 청년.

올 때도 같은 자세였다.

 

 

선술집식 레스토랑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을 들었다.

스페인식 셀러드에 생선요리.

 

 

실내보다는 실외를 선호하는 스페인 사람들.

 

 

마드리드 마요르광장.

크기는 90미터x109미터.

 

 

마요르(Mayor)는 영어로 major라는 뜻.

중요한, 대부분이라는 뜻.

 

이곳은 처음에는 제빵사들의 길드가 있던 곳.

1992년 카를로스 프랑코가 그리스신화의

인물 등을 그려넣음.

 

 

이광장은 펠리페 3세 때 완성이 되었고,

그의 기마상이 이곳에 있다.

 

펠리페 3세는 합스부르크왕가 출신 세번째 왕으로,

주요국가와 평화협정을 맺어 '평화의 왕'으로 불린다.

 

그러나 정치에는 무관심하였고, 30만명의 모리스코인

(카도릭으로 개종한 이슬람교도)을 추방하고,

경제적으로 실정을 하여 국운을 쇠퇴케 한 장본인.

 

그러나 이시기에 돈키호테, 바로크미술 등이

스페인의 문화황금기를 이루었다.

 

 

이곳에서는 거리의 화가, 연주가들이 쉽게 눈에 띄었고,

 

마드리드의 인구는 3.3백만명.

스페인 정치 문화의 중심이며 산업도시이고,

유럽수도 중 가장 높은 곳(6-700미터)에 위치.

 

10세기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한 무어인의

성채였으나, 1561년 펠리페2세가

수도와 궁전을 이곳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