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룩셈부르크 가는 길,
파리에서 4백키로,
짧은 거리는 아니다.
유럽에선 국경 통과하는 것은
경계에 표시판이 있을뿐
특별한 것이 없다.
룩셈부르크 솅겐마을에서 합의된
솅겐조약에 의해,
EU회원국 중심으로 국가간에
국경이동이 자유롭다,
비자. 여권심사, 검문없이.
중간지점에서 휴게소에 들렸는데
개별화장실에 소독제가 비치된 것은
처음 보는 일.
드넓은 평야지대를 지나
국경을 넘어서니,
굵은 굴뚝들이 보였다.
룩셈부르크는 철강산업,
스위스에서 이어 금융이 강한 나라.
국민소득이 세계1,2위를 다툰다.
그래봐야, 인구 42만명,
면적은 제주도 두배.
중국집에서 점심후
크리스마스장터로 나서니,
인산인해.
토요일이라서인지 무대 위에선
캐롤을 부르는 합창단이 한참 열연 중.
룩셈부르크 사람들은 독어, 불어,
룩셈부르크 방언을 사용하고,
95%이상이 캐도릭 신자.
기욤광장엔 기욤2세의 동상이 있다.
그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의 독립,
자유주의 법 제정에 큰 공로자이다.
10-15세기 루실리부르후스언덕에
자리잡은 이들은 주변강국에 시달리다,
1867년 대공국으로 중립을 선언했지만,
독일군의 점렴하에 들었다가
해방후, 베네룩스를 결성했고,
EC에 적극 참여,
EC의 주요기관을 유치했다.
중심가는 주말이라 썰렁하고,
시간이 없어 본래의 모습,
난공불락의 룩셈부르크의 멋있는
언덕의 성채를 못보는 것이 아쉬웠다.
룩셈부르크는 작은 성이라는 뜻.
룩셈부르크는 대공이 다스리는
입헌군주국으로 왕궁이 있다.
6.25참전국의 하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가는 길 250키로,
황혼이 졌다.
유럽은 핵발전 반대입장이라
풍력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전력이 충분하지 않아
어둠침침한 밤을 보낸다.
풍력발전기는 조류를 해친다하여
조류학회의 반대가 심하다고.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줄여 프랑크푸르트)에
늦게 도착하니 프랑크푸르트성당이
보였다, 마인강이 흐르고.
이성당에서 16세기 중반, 30년간
신성로마제국황제의 대관식이 있었다.
인구 70만의 프랑크푸르트는
제국의 정치중심지였고,
괴테의 출생지이며
독일 경제 금융의 중심지.
우리의 숙소, ACHAT호텔 주위의
아침햇살에 물들은 주택가.
독일의 역사를 보면 대단하다.
4-6세기 훈족의 침입으로 동쪽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대이동했고, 이중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왕국으로 통합하였다.
(북쪽의 게르만은 10세기 이후 이동)
9세기 동서프랑크가 분리되었고
동프랑크, 즉 독일국가는 제후들이
스스로 왕을 선립하였다.
(선거권을 가진 제후를 선제후라 함)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은 962-1806년까지 존속.
13세기부터 지방분립이 되다가
16세기 종교개혁, 17세기 신구교간의
종교전쟁을 거쳐, 18세기 종교간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오스트리아:구교).
18세기에는 나폴레옹 침입이 있었고,
19세기초 경제통합, 산업혁명을 거쳐
1871, 비스마르크총리 등의 활약으로
독일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는 1,2차대전과 통독과정을 거쳐
현재 유럽연합의 맹주로.
우리가 타고다닌 버스.
이탈리아기사 루까가 몰았다.
고속도로도 잘 만들어져 있고 차도 좋아서,
장시간을 타도 허리가 안아픈 것이 신통.
아우토반은 2차대전시
무솔리니의 이태리에서,
이태리는 로마의 도로에서,
미국은 아이젠하워가 2차대전후
아우토반에서 기초했다고.
하이델베르크 가는 길(89키로)
겨울맛이 나는 농촌풍경.
햇볕이 드문 독일 등은
피부암이 많다고 한다.
공업과 어울어진 농업.
아름다운 도시, 사색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들어섰다.
하이델베르크는 인구 15만으로
복숭아가 많은 산이라는 뜻을 가졌다.
네카강이 흐른다.
우리는 하이델베르크성을 오르는
후니쿨라(Bergbahn)를 탔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4세기말
선제후 루프레흐트가 세웠고,
인류학, 철학이 강하다.
7명의 노벨수상자를 배출했고
과거 종교개혁의 보루였으며,
19세기 독일 대표대학.
입구의 문은 프리드리히5세가
아내, 엘리자베스를 위해
하루에 지었다고.
이고성은 '황제의 첫사랑'의 촬영지로
13세기 의 성채를 14-17세기 건설한 것으로,
17세기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고,
18세기말에 화재가 났던 것을
19세기초에 복원한 것이다.
해자(성호)가 있고, 오른쪽
낡은 성채가 루프레히트궁.
오래된 굴뚝에서 연기가?
루트비히5세가 세운 52미터의 성문탑.
망루로 사용된다.
성문탑 문위의 보초들.
오른쪽은 오토하인리히궁.
1556년에 완공된 바로크식 르네상스걸작.
다윗, 삼손, 고대신, 제후들의 조각상이 있다.
왼쪽은 1607년 완공된 프리드리히궁.
지하에 어마어마한 포도주통이 있다.
선제후 16명의 입상조각이 있고.
22만 리터 술이 들어갈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 툰(Tun).
이곳은 아이스와인이 특산물.
15세기, 가장 오래된 루프레히트궁
지을 때, 쌍둥이가 떨어져 죽었는데,
이를 기리는 쌍둥이상.
한 왕비의 정부가 현장을 들키자
성에서 도망가다, 이곳을 밟고
네카강으로 풍덩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성채에서 내려다보니,
네카강 위로 카를테오도르다리가 보였다.
이다리는 산쪽으로 철학자의 길로 연결됨.
처음엔 나무다리였으나,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돌로 만들도록 지시,
1788년 완성되었다.
시내로 가는길,
이곳에도 낙서(그래피티)가.
시내의 크리스마스 조형물.
대낮 장터에서 뜨거운 포도주 한잔.
잔값을 포함해서 돈을 받는데
마신후 장터 가게에 반납하면,
잔값을 돌려준다.
잔이 너무 이뻐, 반납하는 사람이 적다.
Cenmoro카페에서 슈니첼을 점심으로.
비후가스의 원조.
돼지고기로 만들었는데
얼마나 얇은지.
점심후 로텐브르크로, 89키로 거리.
이도시는 인구 11천명의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북서부에 있는 도시로
타우어강 상류에 위치한
중세의 보석같은 도시.
거리엔 움츠리고 다니는 사람들.
운좋게 여행내내 비가 없었으나
거의 털외투를 입고 다녀야 했다.
마르크트광장에 있는 시청사.
정시가 되면 시계가 위치한 곳의
창문이 열리고, 인형이 나타난다.
종소리도 나고.
크리스마스장터가 열리는 곳까지
거리엔 기념품가게 등 즐비했다.
화려한 인형가게.
서구 대부분의 기념품가게 등은
살 마음이 들만큼
정교하고 이쁘게 만들었다.
우리도 인건비 탓하며 값싼 중국산에
의지하지말고 정성들여 만들어야.
매직아워가 되고 인파는 더했다.
뜨거운 핫도그도 사먹고.
호텔식당도 성탄장식으로 이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로만틱가도의
퓌센으로 이동하는 길,
안개가 자욱했다. 250키로의 길.
로만틱가도(Romantsche Strasse)는
옛날 로마인들이 닦아놓은 도로로
독일 중남부 뷔르츠부르크,
로텐부르크, 퓌센을 잇는 3백키로 길.
가는 길의 아담한 농가.
퓌센에 도착, 노이슈반스타인성
(백조의 성)을 걸어서 올랐다.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되었던 성.
퓌센은 인구 14천명의 도시로
알프스산맥의 동쪽끝 레흐강연안에 있다.
옛날 로마제국의 국경초소가 있던 곳.
그리고 겨울스포츠의 중심지.
이곳에서 110키로 가면
오스트리아 인스브르크.
성은 1869-86년 바이에른왕
루트비히2세가 건설했다.
이때는 소왕국이 난립했던 시대로
왕자시절 자살을 시도하는 등
루트비히2세는 정신이상이었다고.
그는 정치에는 뜻이 없고
백조를 모티브로 성짓는데 열중,
결국은 재정파탄을 맞았고,
유배되어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또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해
바그너의 활동을 적극 지원헸고,
성에는 겨우 2년반 살았다고.
성 바로 밑에서 본 성의 그림들.
성에서 내려다본 퓌센
그리고 농가들.
루트비히 2세 덕분에
퓌센거리는 관광객들로 가득.
시내에서 보면 언덕에
루트비히2세의 아버지(1811-1864),
막시밀리안2세가 지은
호엔슈반가우성이 있다.
그도 정치에는 별로였고
지적탐구에 열심이었던 바이에른 왕.
이곳은 루트비히2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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