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콜로라도를 거슬러 올라12(뉴욕)

난해 2017. 8. 20. 19:42

 

 

 

12.  여행자들이 방황하고 싶은 곳,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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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뉴욕 시내관광을 나섰다. 십몇 년 동안

뉴욕이 얼마나 변화를 했나 궁금했다.

 

달인이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고,

약속한대로 후러싱 번화가에서 관광회사에서

보내는 택시를 기다렸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렸던 것 같다.

뉴욕의 교통지옥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

마음 편하게 기다릴 수밖에.

 

우리를 콜럼비아 대학교까지 데려다준

교포 택시운전사는 미국생활이

정말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애들은 공부 잘 하고 마나님은

예쁜 짓 만 하는데다, 미국에선

크게 신경을 쓸 것이 없다고.

내 생각에는 택시기사가 그리 썩 좋은

직업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임목사 말로는 소방관과 우체부가 미국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했다.

소방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의

경쟁이 치열한 직업 중의 하나라 이해가

가지만, 우체부는 좀 이해가 안 간다.

 

시골의 우체부처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 할 수 있어서나, 적응하기

어려운 미국사회에서 그들의 삶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어서 그런 것인지.

유럽에서는 노령사회가 되다보니

우체부가 노인관리의 일도맡아

노인위급시 응급조치도 한다는데.

 

우편물의 감소로 우체부의 수요도

현격히 줄어든다는데 말이다.

 

 

컬럼비아 대학교 앞에서 택시를 내려

한 시간 이상 기다렸더니,

그제야 미니버스가 나타났다. 교통체증에다

차까지 고장이 나서 다른 차량을 구하는라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대학교 구내를 여기저기 구경하다 화장실을

찾았더니, 웬 도서관은 그리 많은지.

대학시절 데모 등으로 도서관과는 거리가

멀었던 우리에겐 낯선 일이다.

도서관 출입문에는 직원이 ID를 체크하고 있어

들어갈 수는 없고, 한참 구내를 기웃거리다,

결국은 큰 길 건너편에 있는

법과대학에서 소원을 풀었다.

 

컬럼비아대학교는 아이비리그에 속한다

2009년까지 7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학교이고, 1983년 여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오바마,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워런 버핏, 샐린저 등을 배출한

명문인데, 30대 초반에 미국 초대 재무

장관이 되어 미국의 경제시스템을 구축한

알렉산더 해밀턴이 역사 속 가장 유명한

졸업생이다. 그는 3대 부통령이었던

아론 버(Aaron Burr)와의 권총

결투에서 사망했다. 월스트리트가 시작되는

트리니티 교회에는 해밀턴이 누워있는데,

월스트리트(Wall Street)는 아메리칸

원주민과 영국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가 세운 벽이다.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가 세운

언론대학원은 해마다 퓰리처상의 선정과

집행을 하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기 전

컬럼비아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했으며,

시어도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둘 다, 이 학교 학생이었지만

학위를 취득하지는 못 했다고.

 

뉴욕에는 뉴욕대학교가 세 개가 있다.

3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중심의

학교는 등록금이 63백만 원이나 되는

사립 대학교이고, 그 외 등록금이 비교적

저렴한 주립 대학교와 시립 대학교가 있다.

 

 

관광버스가 처음 지나간 곳은 맨해튼 중심가를

비껴간 110번 스트리트에 있는 뉴욕 성 요한

대성당(Cathedral Church of St. John the Devine).

1892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050년 완공예정인

미국 성공회 교회.

 

성공회는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된 영국교회,

우리나라에는 정동에 대성당이 있다.

이 교회는 하도 커서 자유여신상이 통째로

들어갈 수 있으며, 모든 걸 다 녹여내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 스타일의 건물. 교회의 디자인 속에는

뉴욕의 근현대사가 잘 녹아 있다.

 

유럽에도 성 요한 대성당 같은 큰 교회들이 많고,

건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미완의 상태인

교회도 있다. 독일의 쾰른 성당의 경우는

13세기 중간에 공사를 시작 19세기에 완공했다.

의례 성당은 그렇게 짓는 것인지.

또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수도원 생활은

어떠한 것인지 항상 궁금했었다.

 

큰 교회들을 짓는 데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또 유명한 장인들의 손을 거치다보니까

오랜 세월이 필요하리라 추측이 된다.

단숨에 지어버리는 우리의 대궐 같은

교회들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

뉴욕 성 요한 대성당의 경우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교회건축자금이 긴급 지원자금으로

전용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히트 문(Heat-Moon)은 조지아 주에 있는

코니어스 시토 수도원에 잠간 머물면서

신부들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수도원이 중세 암흑시대의 잔재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소란을 벗어나는 것이 올바른 수도법이냐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의 따뜻한 인사와 편한 대응,

활기찬 그들 모습과 얼굴의 평온함, 간소한

식사 등에서 선입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의 규율도

많이 완화되었고, 금욕의 땅에서 그들은

단순한 생활을 통하여 몸과 정신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비좁은 버스의 중간에 앉아 있다 보니, 가이드가

설명하고 있는 장소를 어딘가 하고 찾다보면

다음 장소가 되고, 사진을 찍으려 해도 제대로

찍을 수 없어 일그러진 건물 만 찍고.

 

 

뉴욕하면 생각나는 노래는 리자 미넬리(Liza

 Minnelli)가 부른 경쾌한 노래,

‘New York, New York'이다.

 

도시의 한부분이 되고 싶고

내 발길이 방황하고 싶은 도시.

언덕의 왕이 되고 싶은 도시.

블루스(우울한 곡조의 재즈곡)가 녹아 있고

모든 것이 당신하기에 달린 도시.

뉴욕. 뉴욕

 

 

우리는 점심을 먹고 배터리공원

(Battery Park)에서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은 허드슨 강 하류로 나왔고,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맨해튼을

앞에 두고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제 허드슨 강기슭에서 본 잿빛 하늘과는

달리 뉴욕 하늘은 더 없이 파랬고,

건물들 가운데 왼쪽에는, 길고 뾰족한 첨탑을

가진 110층짜리 초고층 복합건물, 세계무역

센타(World Trade Center)가 서 있었다.

 

20019.11테러 때 쌍둥이 건물은

박살이 났고 2,749명이 사망했던 곳.

미국 독립을 기리기 위해 건물 높이는

1,776ft(541미터)로 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

 

9.11테러 당시 없어진 세계무역센터 인근의

그리스 정교회, 도이치은행, 유니버시티

빌딩 등이 함께 무너졌지만,

세인트 폴스 채플(St. Paul's Chapel)

살아남아 당시 응급구조센터로 사용되었다.

 

이 교회는 현존하는 미국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1776년 뉴욕 대화재에서도

살아남았었다. 9.11당시 교회가 살아남았던

것은 교회 앞의 100년이 넘은 나무 때문인데,

이 나무가 무역센터 붕괴 당시 튕겨져 나온

대형 철제 빔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라고.

이교회에는 테러 당시의 기록과 관련되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배는 리버티 섬 위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근처에 머물렀다.

리버티 섬은 뉴욕 항으로 들어오는

허드슨 강 입구에 위치한다.

 

여신상은 에펠탑 설계자,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했으며, 높이는 지면에서 횃불까지

93.5미터. 미국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가 선물한 조각상으로 프랑스에서

실려와 1886년부터 이 자리에 서있다.

 

프랑스정부나 미국사를 저술한 앙드레

모로아나, 미국의 독립에 프랑스가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미국 독립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와는

적대관계였기에 미국을 도와준 것이지만.

 

 

갑판 위의 한 여인, 공주병에 걸렸는지

나르시즘에 빠졌는지 시종일관 군중과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셀카를 찍어댔다.

어쨌든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

 

 

뉴욕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스태튼 섬 쪽은

조용하기만 했고 쓸쓸해보이 기까지 했다.

 

 

그 정적을 깨고 맨해튼만한 크기의 큰 배

한 척이 쏜살 같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우리가 탄 배는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브루클린 현수교를 지나갔다. 맨해튼 남단에서

이스트 강을 건너 브루클린을 연결해주는

1,053미터 길이의 다리이다.

 

이 다리는 1869-83년 까지 15년 걸려 완성된

다리로, 공사 중 20명이 넘는 인부가 죽었다.

로블링(John A. Roebling)이 현수교를

설계했는데, 현장 감독 중에 입은 경미한

상처가 파상풍으로 이어져 죽고 말았다.

 

아버지에 이어 그의 아들인 워싱톤 로블링이

감독을 했으나, 강바닥의 토질을 시험하던 중

잠수병에 걸려 몸이 마비되었다.

 

이에 워싱턴이 다리 근처에 있는 집에서

공사현장을 망원경으로 보며 공사지시를 내려, 

워싱턴의 부인 에밀리가 공사감독을 함으로

다리의 완성을 볼 수 있었다.

 

브루클린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이스트 강

(East River)을 건너 맨해튼과 브루클린

사이를 왕복하는 나룻배가 있었고,

나룻배가 머무는 나루터가 있었다.

 

이 다리 위를 걸으며 브루클린 쪽에서

맨해튼을 바라보는 일몰과 야경이

절경이라고 한다.

 

 

배에서 내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맨해튼 거리로 들어섰다.

 

 

음악이 흐르는 도시, 뉴욕. 이곳은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가 있던 곳이고,

줄리어드 스쿨이 있는 곳이다.

이 학교 이름에는 학교재단에 유산을 기증한

목화상인 A. D. 줄리어드의 이름이 남아 있다.

 

또 뉴욕은 또한 위대한 개츠비가 사는 도시이.

개츠비는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쓴 소설의 주인공. 그는 가난 때문에 헤어진

연인 데이지를 다시 찾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고 

그녀와의 재결합을 기대하며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여는 속물이다.

 

속물한테 위대한이란 수사어구를 붙인 것은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라고.

 

또 뉴욕에는 칠팔십년 대 예술가 거리,

소호(South of Houston)가 있고,

한적한 주택가와 맛 집이 있는

노호(North of Houston)가 있다.

 

인종의 도가니, 뉴욕에는 2백만 흑인이

살고 있으며, 주택난에다 교통으로 인한

소음공해에 시달리고 있는 도시.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또 몰려드는 뉴욕이다.

 

할렘가 등 빈민 거리는 이미 재개발로

산뜻한 거리로 변신을 했으며,

2005년부터 뉴욕은 25대 도시 중

범죄율이 제일 적은 도시라고 한다.

 

과거 네덜란드인은 맨해튼 섬 남부에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정착촌을 세우고,

16키로 떨어진 곳에 할렘이라는

정착촌을 세웠다. 실제로 네덜란드에는

암스테르담과 16키로 떨어진 곳에

할렘이란 도시가 있다.

 

19세기 할렘은 부유층 유대인의 주거지였으나,

1920년부터 흑인들이 급속히 유입되었고,

흑인들만의 할렘르네상스가 일어났다.

1960년대는 킹 목사와 말콤 엑스로 대표되는

흑인인권운동의 장소이기도 했으나

심한 쇄락을 겪은 후, 90년대 중반부터

줄리아니 시장의 범죄소탕 노력으로

점점 안전한 도시가 되어갔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익히 들어온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관람했다.

 

세계가 경제공황으로 신음하던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시작한지 불과 16개월

만에 완성을 본 건물. 당시에 크라이슬러

빌딩 건축과 경쟁을 벌리다보니 공사기간도

단축되었을 뿐 아니라 비용도 많이

절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

당시 폭격기가 79층을 받고 추락했을 때

이 빌딩은 아무런 피해도 없을 만큼

견고히 지어졌다고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

뉴욕 주의 별명이라는데, 미국이 1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시작한 이후 거만한

미국제국이 슬슬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왼쪽에 세계무역센타

(WTC) 건물도 보였고,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 섬과 앨리스 섬이 조그마해 보였다.

 

 

다른 방향에서 내려다보니 오른쪽에

MACYS백화점의 큰 플래카드가 보였다.

저 플래카드를 만드는 데는 어마어마하게

큰 천이 필요했겠다. 이 백화점은

미국 내에 789개의 점포를 갖고 있다.

 

19124월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당시,

뉴욕 메이시백화점의 소유주 스트라우스

부부와 벤자민 구겐하임(1865-1912)

미담이 전해온다. 침몰 당시 관례대로

여자와 어린이에게 구명보트를 탈 수 있는

우선권을 주었는데, 스트라우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죽겠다고 하여 부부가 죽음을 같이 했다.

또 철강업자 구겐하임은 구명보트를 타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는 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벤자민

구겐하임은 전설적인 미술작품 컬랙터,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의 아버지.

 

서양사회에는 로마시대부터 전래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중요시 되어왔다.

이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의식이나 전시 등 위기상황에서의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말한다

2차 대전시 영국의 명문가의 자제들이 솔선하여

참전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도층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아들의 병역의무를 고의로

회피한다든가, 일반인과 다른 면책권을

주장한다든가, 하루만의 국회의원직으로

평생 연금을 받는 법을 슬그머니 입법하는 등

속물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사회다.

너무 갑작스레 성장한 사회의 부산물일까?

정상적인 사회로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다.

 

 

맨해튼은 그야말로 빌딩숲이다.

맨해튼은 인디언 말로 언덕의 돌섬.

그 많은 빌딩이 올라앉아도 꿈적도 않는 돌섬.

 

 

우리는 워싱톤 광장(Washington Square

Park)에서 내려 잠시 휴식을 가졌다.

공원은 워싱톤 대통령의 취임 백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대리석 아치를 중심으로

한 광장. 그리니치빌리지의 중심이며

뉴욕대학교(NYU) 건물에 둘러싸여 있다.

아치는 파리 개선문의 절반 크기.

 

 

거리의 한 화가가 아치의 안쪽에 그림을

나열해 놓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 넓은 광장 한 구석에 쓸쓸히 서있는---’

이시스터즈가 부른 워싱톤 광장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이곡은 빌리지 스톰퍼스(Village Stompers)

1963년 경음악으로 발표한 것.

 

이 노래에서 나오는 벤조는 5현 악기이며,

아프리카 노예들이 사용하던 바가지 형태의

악기를 개량하여 만든 악기이다.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 중앙공원(Central Park)

에 내려서는, 공원을 들어가서 산보할 시

간은 없고, 네거리에서 주위를 왔다 갔다 하니

거리엔 관광객을 태우는 마차가 꽤 많았다.

 

뉴욕에서 하루 만에 못 끝내는 구경거리가

두 개 있는데, 센트럴파크(Central Park)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

센트럴파크의 면적은 난지도 하늘공원의 18.

150년의 역사를 가진 공원은 다람쥐,

너구리가 뛰놀고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공원에는 재클린 캐네디 오나시스 호수가 있다.

1993년 인근에 살던 재클린이 사망한 뒤

그녀의 이름이 이 저수지에 붙었다.

 

그녀는 31세에 영부인이 되었지만

그녀보다 더 일찍 21세에 영부인이 된

프랜시스가 있다. 그녀는 1886, 49
클리블랜드대통령과 결혼했는데
,

재클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재클린과 마찬가지로 클리블랜드

사후에 재혼했다고 한다.

 

어째든 맨해튼 사람들은 내륙의 센트럴파크,

육지 바깥에 조성된 친환경 수변공원,

허드슨 강 공원 덕분에 숨을 쉬고 산다고.

 

 

이층버스 정류장도 있었다. 두 시간 이상

기다리다 탄 관광버스보다는 차라리

이층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녔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시야도 좋고 정체가 되더라도 덜 지루했을 터.

 

 

거리엔 화랑도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샤갈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관광의 종점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멀지않은 한인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친절한 가이드는 후러싱에서 온 우리들에게 출발

시 너무 늦어진 것에 대한 사과로

차 한 잔을 제의했다. 차 한 잔에

응어리진 마음이 녹아 들어갔다.

 

일행들은 모두 떠나고, 맨해튼 번화가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서 홀로 앉아 코코아

한 잔을 홀짝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심심치는 않았다.

여행은 원래 여유가 있고 그곳의 사람들과

사귀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여행 스케줄은 너무 빡빡했다.

 

그곳에서 나와 거리를 좀 배회하다,

 ‘그리운 미스코리아, 라는 식당에서

이종사촌들을 만나 오랜만에 불고기로

배를 채웠다. 식당은 서양 사람들을

포함하여 꽤 많은 손님들로 붐볐고

맛도 그런대로 깔끔하고 괜찮았다.

 

 

식사가 끝나고 근처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낸시는 교포단체에서 유망한 예술가

선정이 되어 큰 상금을 받는다고 했고,

특허청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노총각 종범이는

아직도 색시를 찾는 중이라고 얼굴을 붉혔다.

유대인 며느리를 본 창재는 늦게 한의사에

도전하려는 꿈을 접고, 사업을 정리 중이라고.

 

모임이 끝나고 창재의 차로 맨해튼에서

퀸스로 오는 터널을 통과하여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길눈이 어두워 집을

찾을 수 있을까 했지만, 내비 덕인지 헤매지

않고 잘 찾아왔다.

 

밤이 너무 늦어 이층에 있는 친구를 크게

부를 수도 없고, 초인종을 눌렀더니

아래층 사는 아줌마인지 일찍 좀 다니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를 해댔다.

옛날 대학교 때 하숙집 아줌마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하는지.

 

 

다음날인 1023일 아침 일찍,

친구의 차로 JFK공항으로 나갔다.

공항이 가까워 좋았지만 친구들의

신세를 너무 많이 졌다.

 

공항이 하도 커서 그런지, 우리가 디트로이트에서

국제선으로 갈아타서인지 국내선 탑승절차는

너무 복잡하고 길었다.

 

 

올 때와는 달리 디트로이트로 가는 길은 가벼웠다.

디트로이트공항은 게이트가 78개나 되는 큰 공항.

승객 수송을 위해 끝과끝을 연결하는 전철이 있다.

 

귀국 후, 디트로이트에서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설의철친구는, 들리지도 않고 그냥 갔냐고

섭섭함을 표시해 왔다. 요즈음 다행이도

디트로이트의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대학교 때 우리가 즐겨 불렀던

톰 존스의 ‘Detroit City,가 생각났다.

 

어제 밤 디트로이트에서 자면서

고향의 목화밭 꿈을 꾸었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그녀의 꿈도 꾸었지.

, 고향에 가고 싶다.

 

고향사람들은 내가 디트로이트에서

거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밤낮으로 차와 그 부품을 만들고 있다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업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우리나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생각을 해보아야할 텐데.

대우자동차가 쓰러졌을 때 부평역전에서

울부짖던 그들 가족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시간도 남고해서 전문가인 병헌친구의

자문을 얻어 마나님께 드릴 백 하나 샀다.

남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매일

전송하며 연애편지를 썼는데,

미국의 통신사정이 안 좋아서인지

구닥다리 핸드폰으로는 문자조차

보낼 수가 없었다. 귀국하면

사과하는 의미에서 폰도 바꿔야겠고.

 

 

서울 올 때는 비행기 타는 것이 정말 지루했다.

그나마 좌석에 있는 게임프로그램으로 포카를

할 수가 있어 시간 보내기에 도움이 되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의 형제국이라는

터키 민족에게 경탄을 안 할 수가 없다.

 

서양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유럽의 동쪽에

위치하여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 세계의 근대 역사는

유럽인들의 침략사인데, 유일하게 투르크족은

일찍이 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진출하여

동로마의 땅을 차지하고 아직도 그곳에

발붙이고 있는 민족이니,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국토는

오그라들었고, 요즈음도 내부에서 서로

아귀다툼 하는 라고 정신이 없으니.

 

이번 여행은 1819일의 일정이었다.

숙박 장소를 보면 호텔과 모텔에서 4,

민박 2, 텐트에서 8, 차 속에서 3

그리고 비행기에서 하루이다.

그리고 미국의 12개 주를 거쳤다.

 

귀국하는 날 오후, 집에 오는 전철에서

내릴 때, 짐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차량기지까지 갔다 왔다.

기다리고 있던 마나님의 얼굴을 보니

겁은 나고, 얼른 선물을 내보일 수밖에.

 

 

존 스타인벡은 58세의 나이로,

19609월 초순에서 12월까지

미국 30여 개주를 여행하였다.

주행거리는 1만 마일, 16천키로 미터.

여행거리로 따지면 우리의 두 배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에 있어 여행은

끝나버렸는데도 두고두고 여행이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본

많은 홍하의 계곡(Red River Valley)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계곡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잘 표현한 노래,

홍하의 계곡은 우리 입 속에서 맴돌고 있다.

 

'당신이 떠나는 홍하의 계곡을 생각해보아요.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

당신과의 이별로 인한 나의 찢어지는 가슴과

슬픔을 생각해보세요.

바다를 건너 당신의 고향을 가더라도

우리가 홍하의 계곡에서 보낸

달콤했던 시간, 야생화들 속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사랑을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의 행로)

 

 

 

 

 

 

 

(P.S.)

 

 

'15년 미국횡단 이후,

작년 졸업 50주년행사도 있었고,

 

미국에서 만난 친구 중

뉴욕에서 만난 박영철, 이경구친구는

행사에 참여했었고,

방한했던 임진구친구는 한번

만나지도 못해 미안했다.

 

엘에이의 김정칠, 이대원친구는

친구들과 같이 만나 식사를 했었다.

 

그래도 눈에 선한 친구가 둘.

 

상처를 했고, 몸도  좋지 않았지만,

웃음이 가득했던 방현진친구.

당초 계획대로 행사에 초청했었으면 하는 생각.

 

그리고 유태원친구.

학교 다닐 때는 서울대미식축구부 주장으로

경희대도 이삼십대 영으로 물리쳤었다.

같이 학교 다닐 때, 주먹이 큰 친구때문에

뒤가 든든했었는데.

 

LA가든파티 때 김정칠 친구 부인과

태원의 부인도 같이 일했었는데

소개도 시켜주지 않았었다.

미국의 생활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

 

 

여러분들,

지루한 여행기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같이 여행했던 친구들에겐

여행기가 제대로 씌어졌는지

미안한 생각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