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시천면 덕천서원.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을 기리기 위해
1576년 제자들이 세웠죠. 당시 경상감사, 진주목사도
후원을 했고, 진주판관을 지낸 하응도(1540-1610)가
대지를 기증했죠.
서원은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으로
대학자, 선현을 제사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경의당은 학문을 위한 교육공간.
조식선생은 합천 삼가면에서 태어나
김해 산해정, 합천 뇌룡정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을 했으며, 10여차례 벼슬을 마다했죠.
61세에 천황봉을 바라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경의당 뒷편에 있는 선생을
모시는 사당, 숭덕사.
위패를 모시고 한 해 두 차례 제를 지내죠.
선생은 4대사화로 학계가 불행했던 시대를 살면서
흩어진 사류(선비의 무리)를 규합, 방황하던
유생을 교도, 사기진작을 시켰고요.
길재선생(1353-1419)으로 전수되어온
영남사림파의 명맥을 계승한 퇴계선생과 더불어
영남의 2대종사(二大宗師). 퇴계선생과 동갑.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 도의를 연마,
백성편에서 국정을 비판한 행동유학자란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남명기념관을 찾았더니 문이 닫혀있어
뒷문으로 들어가서 만난 선생의 조각상.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었죠.
선비는 인생의 꽃이요 국가의 원기(元氣)이므로
민족의 마지막 보루임을 강조하였고,
임진왜란때 곽재우 등의 명장, 학계 정계에
많은 인물을 제자로 두었습니다.
선비의 지조를 지킨 사람은 남명선생
뿐이라고 율곡선생은 말했고요.
이곳에 남명선생 시비가 있습니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지리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다음으로 덕천강가에 있는
산천재를 들렸죠.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중산, 삼장을
나누어 돌다가 양당에서 다시 만나 덕산을 이루고.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갈고 닦은 선생의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던 곳.
그의 학문은 개방적이었고 현실에
활용되는 것을 탐구했죠.
산천재 앞에는 덕천강이 흐르고
지리산 능선이 흐르고요.
'봄산 어느 곳엔들 꽃다운 풀이 없으랴
다만 천왕 가까이 살고 있어 천왕봉을 사랑하네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어찌 먹을 것을 탐하랴
맑은 물 십리는 마음껏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선생의 시입니다.
카페 산책의 여인네가 예약해준
조은날에서 산채정식.
만원짜리지만 품위도 있고
맛도 있었고요.
다음날(5/12) 5:40분, 산보길 나섰더니
상현달이 떴습니다.
예담마을 남사천을 건너
유림독립기념관을 기웃거렸습니다.
뒤쪽에는 곽종석(1846-1919)생가가 있고요.
선생은 1910년 한일합방시 은거하여
제자를 육성했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통분하여, 유림의 뜻을 모아
독립청원서를 작성, 137명의 유림의 서명을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전달했죠.
이로 인해 대구감옥에서 2년형을 살던 중
옥사 직전 풀려나왔으나, 결국 병고로 타계했죠.
남사천에도 구름이 떴네요.
찔레꽃도 이쁘게 폈고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에서
붉게 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죠.
김말봉이 지은 찔레꽃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안정순은 은행 두취, 조만호의 가정교사였죠.
조만호와 아들 모두 정순을 사랑하고-
그러던 중 조만호가 상처를 하고 그녀와
결혼하려지만, 침모의 계락이 있었고.
누명이 벗겨지긴 하지만, 그녀는 순결을
간직한채 그집을 나와버리죠.
거유문(居由門)을 지나 니사재(尼泗齋)를
들렸고요. 이곳은 조선 전기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 박호원(1527-1584)의 재실.
1587년 건립되었고,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당시 하루밤 유숙한 곳이죠.
잠을 못이루셨다 하구요.
이순신장군은 해임되어 28일 옥고를 치루고,
1597. 4.3-8.3.백의종군했죠.
임진왜란은 1592-98년 간의 전쟁을
말하지만, 1597년 강화조약을 깨고 왜는
14만의 병력으로 다시 침략합니다(정유재란).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으로 권율장군이 있는
합천으로 내려가는 중이고, 고시니 유키나가
(小西行長)는 부산을 거쳐 북상하는 중이었고.
80년된 매화나무가(박씨매) 있고
해당화가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바닷가에만 피는 줄 알았는데,
해당화는 산기슭에도 핀다네요. 그래서
배회화(排徊花)란 이름도 가졌나보군요.
어느새 동은 텄고
아침 짓는 연기가 올라오네요.
남학정에 오르니
마을도 환해지고 있었고요.
숙소의 마당에는 가죽나무 두 그루 있습니다.
아침마다 가죽나물이 상에 오르고요.
소태나무과에 속하는 가죽나무의 영어 이름은
Tree of Heaven. 자람이 빠르고 공해에 강한
나무지만 잎사마귀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죠.
절에서 참죽나무(참중나무)와 닮았지만 잎을 먹을
수 없다하여 가짜 중나무. 가중나무가 가죽나무로.
(박상진교수)
예담마을과 작별을 앞두고.
이씨문중 월포공이 후학을 가르치던 초포정사
(草浦精舍), 이씨문중 유생이 공부하던 내현재,
박씨문중 서재, 삼백헌(三百軒), 망추정 등은
들여다보지 못했죠.
망추정(望楸亭)은 송월당 박호원이 5세때 어머니
별세하여. 성묘를 하러올 때마다 쉽게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 묘소가 보이는 자리에 세운 정자.
어쨋든 명문가들의 경쟁이
예담마을을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군요.
잠시 쉬려고 산청휴게소 들렸더니
건너편에 대명사가 또 보였네요.
휴게소의 경호강가에는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거북바위가 있고요.
산청 금서면 특리, 동의보감촌에 들렸더니
넓은 면적에 우후죽순 시설들이 엉성하게
들어차 있고, 여직원도 쌀쌀맞았구요.
틈실히 짜여진 예담촌보다 못하네요.
동의보감촌 대장간에 들려 친구가
과도 하나 샀죠.
20만원도 넘는 다마스커스칼 하나
사고 싶었습니다. 마나님을 위해.
오른쪽 구석에 구형왕릉이 있네요.
허준(1539-1615)은 서자출신으로 30대에
어의가 되었고, 선조, 광해군의 총애 하에
동의보감을 편찬했죠.
예방의학과 실용의학의 철학이 담겼다네요.
동의보감 완성 후 5년 뒤 타계했는데
파주 진동면, 임진강이 보이는 민통선 안에
묘가 있습니다.
이어 산청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의 돌무덤을 찾았죠.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자락입니다.
높이 7.15m, 길이 25m. 유일한 피라미드형태의
돌무덤이고 7단의 무덤이죠.
구형왕의 재위기간은 521-532.
금서면 수철리에 구형왕이 신라에 패퇴하며
고동을 불고 넘었다는 고동재를 10년 전
지리산둘레길을 돌때 넘은 적이 있습니다.
무덤에서 내려오다 보면, 유의태약수터로
가는 길이 있고, 김유신의 활터비가 있고요.
유의태는 허준의 스승으로 시신까지
제자 허준에게 해부용으로 내놓았다는데
요즈음 왈가왈부 설이 많습니다.
김유신은 구형왕의 증손이고 신라 문무왕은
5대 외손.
왕릉을 떠나니, 꺽다리 밀밭이
넘실대며 인사를 하고요.
우리는 함양읍으로 이동,
상림(上林)을 산책했습니다.
천년의 숲, 상림은 최치원(857-)이 신라
진성여왕때 이곳 태수로 와서 홍수를
막기 위해 최초로 만든 인공림.
원래 이름은 대관림이었는데, 홍수로
상, 하림으로 나뉘어 졌고, 하림은
흔적만 남았다 하네요.
효자였던 최치원은 어머니가 뱀을 만나 놀랐다
하여 미물을 없애버려, 상림에는 뱀,
지네 등 미물이 없다 하고요.
이곳에는 최치원신도비가 있고요.
최치원은 일찌기 당나라때 문명을 떨쳤으나
신라에 돌아오니 진성여왕(887-897재위)때라
국정은 문란했고 이에 실망, 가야산에 은거했죠.
시호는 문창(文昌), 자는 고운, 해운.
경주최씨의 시조입니다.
최치원선생을 생각한다는 사운정(思雲亭)을
들리고, 화수정(花樹亭)을 둘러보았죠.
화수정은 파평윤씨 일족일가의 우의와
정담을 나누기 위해 건립했다네요.
이은리석불도 있습니다. 고려초 함양읍 이은리
망가사(望迦寺)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추정되는데, 냇가에 방치된 것을 옮겨놓았죠.
공원 안은 냇물도 흐르고
널직한 공간도 있습니다.
병인, 신미양요에서 프랑스군, 미군을
물리친 조정이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해
1871년 전국에 세웠던 척화비(斥和碑)의 하나.
이제 보면 지극히 어리석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지요.
상림 옆을 흐르는 위천 위 다리에서.
덕유산에서 발원한 위천은
거창, 함양을 흘러, 남강을 거쳐
결국은 낙동강으로 흐르겠죠.
역사인물공원은 최치원, 김종직, 정여창,
박지원 등 11명을 기리는 공원이며
선정비도 나열되어 있네요.
공원에는 쪽동백꽃이 향을 날리고, 박지원이 함양
안의현감으로 부임시 최초로 실용화했다는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고 있고요.
1.6km 둑을 따라 20-80m 너비의 숲을 이루는
상림은 120여종 활엽수가 있고,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의 대화와 사랑의 장이 되고 있죠.
함양읍을 떠나 오도재(悟道嶺)를 넘었습니다.
오도재는 함양 휴천면 월평리에 있는 높이 773m의
고개로 함양 휴천면과 마천면을 이어주죠.
광양, 하동지역의 소금, 해산물을 운송하는
주요 관문이며 가야의 마지막 왕이 은거,
피신할 때 망루지역.
임진왜란 당시 서산, 사명 등 승군이
머물렀던 곳이며, 김종직, 정여창 등 문인 묵객이
지리산 가는 길에 땀을 식히기도 한 곳이라네요.
지리산 제1문이 있고요.
앞에는 마천으로 가는 꼬불길,
뒤에는 지리산의 주능선이 보입니다.
청매선사(1548-1623)의 깨달음에 관한
시를 읽어보니 참으로 깨닫기가 어렵군요.
나자신을 깨달으려 오도재를 넘었는데.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은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청매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이며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활약했고, 고고하게 운둔
수행을 한 모범적인 선사라 하네요.
오도재란 이름도 함양 마천면 삼정리 영원사
도솔암에서 수도하던 선사로부터
유래했고요.
김종직의 문인 유호인(1445-1494)의
두류산 노래도 있군요.
천왕봉에 오르면 고금의 사물이 눈 아래 있고
한 세상 모든 것이 아늑하고,
천왕봉 아니면 우러러 볼 산이 어디 있겠냐고.
2013년 10월, 일출전 천왕봉에서 보았던 산하,
그리워지네요.
이곳에서 오르는 법화산, 삼봉산
등산 안내도가 있고요.
이곳에 복원된 산신각과 복원비가 있습니다.
오도재를 넘어서 왼쪽방향 유림면으로 가면
함양군과 산청군 생초면으로 가게 되고,
오른쪽 마천면으로 향하면 칠선계곡 입구,
면소재지, 백무동, 남원 실상사로 가게 되죠.
고개를 내려가자니 벌써 모내기를
끝낸 논이 있네요. 올해 처음 보았습니다.
마천면 소재지에 있는 월산식당,
10년만에 들린식당인데 왜 그리 반가웠던지요.
산청읍에서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고동재, 상사폭포,
추모공원, 함양 칠선계곡 입구, 벽송사를 거쳐,
월산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백무동 지리산고속으로
귀경했었죠.
추모공원에서 만난 성당여인들, 같이 동행을 하다
이식당에서 이별했고요. 친구가 말하여야
옛날 생각이 나니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군요.
두툼한 이 식당의 지리산 흑돼지고기
정말 맛있습니다. 12시반 쯤 식사를 시작했죠.
여행 내내 운전에다 잠을 못잔 아산친구
피곤해 하더니, 식사 후 원기를 회복했고요.
2009년 9월, 인월에서 시작한 둘레길,
2012년 5월 지리산 둘레를 한 바퀴돌아
다시 남원에서 끝냈었습니다.
틈날 때 마다 돌다보니 3년 가까이 걸렸네요.
같이 했던 두 친구는 이미 타계했고.
80여 마을을 거치는 285km여정,
옛길, 논둑길 등 온갖 길을 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 다시 남원으로 걸었죠.
다시 한번 그길을 걷고 싶네요.
식당에는 오도재 야경사진이 붙어 있고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이다'라는
벽암록 글귀가 붙어있지요.
오도재를 넘고서 깨달음을 하나 얻었습니다.
식당에서 나오다보니, 보일러 시공집
한 모퉁이에 예쁜 바느질집이 있네요.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빨간 옷의 여인,
재봉틀 앞에서 일어섰군요.
요새같이 어려울 때는 머리를 짜고
서로 공생을 해야 되겠죠.
이번 여행에선 함양읍 상림공원과
맨 아래의 오도재와 마천면소재지만
들린 셈이네요.
윗부분의 금원산, 기백산 공원,
중간의 화림동계곡 등 안의 삼동은
작년에 방문했고요.
상경길, 임실 오수 휴게소,
공주 이인 휴게소에서 잠간 쉬었는데
경유값이 999원, 휘발유값이 1,189원.
어떻게 보면 여행경비가 절감되는
때인 것 같습니다.
공주 유구읍 덕곡리에 있는 덕암초등학교에
들려 잠간 휴식을 취했습니다.
교정과 학교건물도 예쁘지만
오래된 벚나무, 학교의 역사를 말해주는군요.
1938년 개교했고 학생수는 유치원생 포함
41명. 교직원은 16명, 이중 교사는 교장,
교감 포함 10명.
테니스장, 골프연습장도 있고요,
교화는 벚꽃.
아산의 맛집, 신정식당에서 냉면 한 그릇 하고,
17:52분발 열차로 귀경,
8시 조금 넘어 귀가했습니다.
좋은 친구들 덕에 여행 잘 했고,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 전하고 싶구요.
1인당 여행경비가 12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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