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는 가을나비가 날아왔다
아, 그렇게도 빨리
기억하는가
시월의 짧은 눈짓을
서리들이 점령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의 영토가 아니다
곤충들은 딱딱한 집을 짓고
흙 가까이
나는 몸을 굽힌다
내혼은 더욱 가벼워져서
몸을 거의 누르지도 않게 되리라
(류시화, 1959-, 시월의 시)
10/7(수) 7:50분 청담대교를 건너는 길,
시월의 하늘과 구름, 그리고 강물.
지난 6/30일, 칠보산 오르는 길에 들린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박물관 방문으론
아쉬움이 남아, 다시 공주 유람길에 올랐다.
친구들 만나기로 한 압구정로데오역.
미국 Cow town에서 길들이지 않은 말을 타는데서
시작한 로데오(스페인어론 '가축을 모으는 일')경기.
한국어사전에도 옷 등 패션과 관련된 가게가
늘어서 있는 거리를 로데오거리라고 정의.
로데오경기장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드니
거리는 패션, 소비문화의 중심이 되었다고.
영우친구차로 길을 떠나,
망향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하고 다시 출발.
길도 막히지 않고
푸른 하늘에 마음도 막히지 않았고.
황금들판은 익어가고 있었다.
공주시 금성동소재. 공산성 도착, 11시부터
황색유니폼의 문화해설사 미즈 남을 모시고
공산성 한바퀴 돌기.
입구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 등을 모아놓았다.
그 중에 몇 사람이나 제대로 선정을 폈을꼬.
요즈음 머리없이 정치하는 사람들,
언론에 잘했다 떠들듯이, 비를 세웠겠지.
제민천교 영세비는 1817년(순조 17) 금강줄기,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 다리와 둑이 무너지자,
1818년 4월 제민천교를 복구했고,
사업자금 조달방법, 공 있는 관리, 자금을 지원한
일반백성이름도 적어넣은 비.
정신대희생자들을 위안한답시고 모금하여 근거도
없이 개인용도 등으로 활용하고도 국회의원 자리에
있는 사람 등은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서쪽에 설치한 문루, 금서루로 들어섰다.
공산성 4개 성문 중 하나.
웅진백제시기(475-538)를 대표하는 왕성.
고구려 장수왕(394-491)이 백제를 공격, 문주왕은
죽은 개로왕을 대신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538년(성왕 16)
사비성(부여)으로 다시 천도.
성에서 내려다본 공주시내.
개발제한이 되어있어 아담한 동네.
공산성(公山城)은 고려시대엔 공주산성,
조선 인조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
총길이 2,660m.
성벽길은 오르내림이 있어 걷기에 적격. 높은 곳이
110m이고 능선, 계곡이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
백제때는 토성, 인조 이후 석성으로 개축.
조선시대에는 감영, 중군영이 있었다. 감영은 8도에
파견된 감사(관찰사, 도지사)가 직무를 하는 관아.
중군은 군영의 최고직, 대장, 사를 보좌하는 정3품직.
1602년 (선조 35) 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
임진왜란 후 한양 방어가 목적.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깃발이 곳곳에 휘날리고.
황색은 백제시대 우주의 중심색.
동쪽 청룡, 서쪽 백호, 남쪽 주작(붉은 봉황),
북쪽 현무(다리가 긴 거북)가 사신.
사신은 동서남북 방위를 가르킬 뿐 아니라
외부의 나쁜 기운을 차단한다고.
공산정 앞 의 전망대.
공산성에는 추정왕궁지, 백제시대 연지, 통일신라
시대 건물터, 조선시대 쌍수정 등이 있다.
공산성과 송산리고분은 유네스코
백제역사 유적지구에 등재되어 있고.
좌측 다리는 백제큰다리, 오른쪽은 금강교
(공주철교). 금강교 건너는 미르(용)섬.
삼국, 조선시대 충청도 중심지, 인구 110천 명.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며
행정, 경제중심도 따라서 이동.
공주는 충남 중앙부, 차령산맥 남쪽에
위치하며 금강이 흐르는 분지상에 입지.
멀리 보이는 다리는 공주대교.
정자밑으로 만하루, 연지가 있고.
금강은 장수읍 신무산(897m)뜸봉샘에서 발원,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전, 공주, 부여,
논산을 흘러 군산 바다로 401km를 흐른다.
(남한 3위의 강)
뜸봉샘은 이성계가 산중턱에서 백일기도 중
봉황이 떴다는 샘.
배다리의 흔적.
나무다리가 홍수에 떠내려가자 나룻배
20-30척을 잇고 폭 3m,
길이 150m의 배다리를 놓았었다.
1932년 충남도청 대전 이전에 따라 대가로
금강교(공주철교)가 건설되어 공주 관문역할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여러 다리가 있지만.
북쪽 문루, 공북루.
1603년(선조 36), 옛 망북루 터에 신축했다.
조선시대 문루건축의 좋은 예.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주출입문.
조선시대 공산성 얼음창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약재, 얼음 보관창고,
후에 잠종창고로 쓰였다고.
만하루(挽河樓)와 연지(蓮池).
만하루는 연못과 금강 사이 멋진 휴식공간.
연지는 계단으로 접근하게 되어있고.
연지는 백제시대에 영은사 앞쪽에 있던 연못을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옮겼다.
좁은 굴을 지나 이곳으로 갔더니
그림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설명도 좋고.
공사 중으로 못간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어
덕분에 명국삼장비, 임류각, 광복루,
영동루(동쪽 문)는 못감.
명국삼장비는 정유재란때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푼 명나라장수 3인에
대한 사은송덕비.
1458년(세조 4)에 지은 사찰, 영은사.
임진왜란때는 승병합숙소로 사용.
처음 들어본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
죽은 후 극락세계로 가기위해 생전에 부처에게
공덕을 쌓는 불교의례. 천도재가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것임에 반해.
영은사 담을 끼고 언덕을 오르니,
쌍수정으로 가는 다리, 쌍수교가 있고.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 진남루.
조선시대 삼남의 관문. 1971년 다시 세운 것.
황새바위에서 1784-1879년 충청도 감영에
체포된 이존창 등 164인이 처형됨.
1911년 공주 순교지를 방문한 독일의 노르베르트
베버신부(1870-1956)는 공산성의
아름다움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우리도 공산성 방문에서 예상치 않은
즐거움을 맛보았다.
공산성 백제 연못.
인공연못이고, 이곳에서 토기,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고.
웅진시대 초기 왕궁터.
발굴조사때 큰 건물터, 연못터, 목곽 저장시설
등 유적이 확인되었고, 연꽃무늬
수막새 등 유물이 출토됨.
1624년 이괄의 난때 등극하지 1년이 안되어
인조는 공산성으로 피신.
두 그루 큰 나무에 기대어 시름을 달랬던
인조는 이 두 나무에 정3품 벼슬을 내리고
쌍수정을 짓게 했다.
이때 인조와 관련된 인절미설화가 있고.
임씨성을 가진 사람이 인조에게 떡을 올려
맛있게 먹고 떡이름을 물었더니,
아무도 몰랐고, 이에 임씨가 준 맛있는
절미라 해서 임절미, 임절미가
인절미로 변했다고.
입구로 원위치해서 한장.
서문에서 바라보면 황새바위, 뒤편에
송산리고분군, 오른쪽에는 제사유적,
정지산유적, 고마나루(웅진)터가 있다.
연미산의 암곰이 나뭇군을 납치, 남편으로
삼았는데, 한참 후 나뭇군이 도망치자
아내곰은 자식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이설화는 백제민족이 곰토템의 북방민족
후예라는 것임을 시사.
웅진, 웅천, 웅주 등의 지명이 고려초
공주로 바뀌어졌고.
12:40분 공산성 앞, 식당골목의 맛집,
시장정육점식당에서 한우육회비빔밥(12천원),
밤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모두 만족해했다.
밥을 비비는데, 내가 숫갈로 버벅거리니
주인 어르신, 친절하게 젓갈로 잘 비벼주었다.
이런 친절은 처음 경험.
공산성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송산리고분군(공주시 금성동) 방문.
동쪽에 1-4호분, 서쪽에 무영왕릉, 5-6호분이
있다. 1-5호는 굴모양의 돌로 만든 무덤.
무령왕릉, 6호분은 벽돌로 쌓았으며(중국 영향),
무령왕, 왕비의 관은 일본금송.
중국, 일본과 교류를 했다는 실증.
6호분 입구.
반구형 형태 무덤방.
동전무늬 벽돌로 쌓았는데, 중국 양나라영향.
벽면에 등잔을 올려놓는 등감장치,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있다.
무령왕릉 앞.
황색 유니폼의 해설사 미즈 윤.
1971년 배수공사를 하던 중 1500년전 모습
그대로의 능을 발굴, 4,600여점 유물 출토.
입구에서 진묘수, 지석이 발견됨. 연꽃무늬
벽돌이 사용되었고, 등감, 창문시설이 있었다.
국보 12점 등 유물은 대부분 공주박물관 보관.
해설사의 조부가 사진사로 발굴작업에 참여,
어머니는 유물의 서울이송 반대시위에 참여.
공산성의 해설사도 열심이었지만
이렇게 열성을 갖고 해설하는 사람은 처음.
공주인의 얼과 자존심을 갖었다.
무령왕릉 입구.
무령왕(462-523, 501-523재위)과 왕비의
합장 무덤. 무령왕은 동성왕 둘째 아들로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했고, 말갈 침입에 대비 성을 쌓고
중국 남조 양나라에 사신을 보냄.
남북조시대(386-589)를 수나라가 통일했지만,
겨우 39년간 지속되었고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깝게 위치한 공주박물관 가는 길의
SERI PARK.
박세리(1977-)는 공주 금성여고 출신.
박찬호(1973-)는 공주에서 출생했고
이곳 명문 공주고 출신, 공주의 영웅.
무령왕릉 묘지석(국보).
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발굴 유물 위주,
발굴된 백제의 유물, 유적이 적기는 하지만.
무령왕릉을 지켰던 상징의 동물,
진묘수(鎭墓獸, 국보), 머리에 뿔, 몸에 날개.
무게 48.2kg.
시간이 없는 관계로 금제관식, 금귀걸이,
송정리 출토 금동 관음보살입상 등 국보 위주 관람.
공주 수촌리 무덤군, 충남지역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기원전 3세기-기원 후 4세기의 한반도 서남부
토기, 철기류 등도 돌아보고
계룡산 분청사기도 돌아보았고.
계유가 새겨진 아미타불비상.
673년 백제유민이 만든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
초기 백제미술전통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줌.
(660년 백제 멸망)
불비상(佛碑像)은 돌을 비석처럼 다듬어
불상조각, 사람의 염원이 담긴 발원문을
새겨 넣어, 제작시기, 배경을 알 수 있다.
별실에선 백제의 계획도시 세종시 나성동 기획
전시가 21.3.1일까지 열리고 있고.
2010년 이곳에서 한성기백제의 대규모 취락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계획도시의 면모, 대규모의 무덤군
으로 보아 웅진 천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이곳에서 발굴된 토기류.
나성동 일대는 삼기(三岐)라 하여 이곳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 물이 금강으로 합류.
운송활동이 활발하고, 하천 범람이 적은 지형
으로 대규모 시설이 가능했다고.
공주국립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하늘엔 양떼구름.
공산성 앞으로 되돌아 나와
공주 특산품 밤파이 한 상자씩
식구에게 줄 선물을 샀다.
마곡사로 향하는 길, 마곡사 자락에 있는
사곡양조원(공주 사곡면 호계리소재)에서
핑클도 반한 공주알밤왕밤주, 증류주도 샀고.
이곳의 판매전략이 적극적.
마곡사 해탈문 지나고
천왕문 지나고.
시간이 없어 마곡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입구를 지나치려니, 종업원이 차를 세웠다.
"신도증을 안가지고 왔네요."하면서 하차하니,
65세 이상을 증명하는 신분증 좀 보자고.
이크, 놀랐네!
(재춘친구 사진)
마곡사의 독특한 연등이 눈에 띄었고.
마곡사는 통도, 법주, 대흥, 선암, 부석,
봉정사와 같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사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란 명칭으로.
모두 천 년이 넘게 불교문화를 계승시켰다.
대웅보전, 대광보전, 5층석탑이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 셋이 모두 보물.
석탑은 고려 후기 작품으로 상륜부가
원대의 라마식 보탑과 유사.
대광보전은 1,785년(정조 9) 개수.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동쪽을 향해 비로자나
불상을 배치했고 단청한 지 오래되었다.
비로지나불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 어느 곳에나 두루 가득 차있음을
상징하며 화엄경 교주.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자 비로자나불과 일치.
삶의 현장에서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고.
대웅보전은 1651년(효종 2)에 재건.
단청이 되어 있고.
대웅보전 현판은 김생이 썼다고.
640년(선덕여왕 9) 자장율사 창건.
자장이 완공 후 설법을 했더니 사람들이
삼(麻)과 같이 빼곡히 모여들었다고, 마곡사.
(공주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기슭에 소재)
마곡사는 전란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의
하나로 임진왜란, 한국전쟁이 피해갔다.
냇가에 김구선생 삭발터가 있고.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헌병 중위를 죽이고 이곳에 잠시 피신.
법명은 원종.
구름도 돌고.
영상전은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왔다가 허탕치고
영산전 지금의 현판을 손수 썼다 한다.
해탈문을 나오니 전에 있던 산사나무는 안보이고
열매 맺은 때죽나무만 보였고.
목화는 꽃도 피고, 열매도 맺었다.
유구로 넘어가는 길은 산골길,
깊고 한적하고 상쾌하고.
그러니 마곡사나
류흥구친구가 6.25때 피난왔던 유구나
십승지일 수 밖에.
전에 한 번 들려봐서
눈에 익은 유구농협 하나로타운.
이곳에 주차를 하고.
공주 유구읍은 공주시 서북부에 위치. 비교적
높은 산지로 둘러쌓인 100-500m 산지.
고려시대 공주목 신풍현 유구역.
인구 8천 명. 한국전쟁 이후 직물업이 발달,
지금도 100여개 공장이 있고
웅진코웨이가 있다.
전통시장 안에 있는 유구정육식당에서
당일 잡은 한우고기잔치.
도중에 샀던 알밤왕밤주도 땄고.
된장찌개, 밥값 모두 합해 7만 원.
좀 찔긴 고기였지만 실컷 맛있게 들었다.
5:20분에 식사를 시작했는데
날은 일찍 저물었고.
6:30분, 농협에서 운영하는 카페 하나로에서
커피 한 잔으로 오늘의 일정 대충 마무리.
알밤 줍기 못하고 유구읍의 벽화를 보지
못한 것 등이 아쉬웠지만.
오산행복휴게소에서 잠간 쉬었고,
차량운행도 순조로와 10시 전에 집에 도착.
모두들 행복한 하루였다고.
하루 종일 운전한 영우친구 특히 수고 많았고,
병헌, 재춘, 흥구친구 모두
열심히 역사공부해주어 고마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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