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서호 그리고 서둔캠퍼스

난해 2023. 4. 18. 12:33

화서역 화장실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

기차를 타고 화서역을 지날 때마다 스치는
서호, 농진청 너른 들이 향수를 일으킨다.
1966-67, 71-72년 내 청춘이 머물렀던 곳.
 
벌써 50년이 흘렀다.
캠퍼스와 수목원은 잘 있겠지.
아파트단지로 변하진 않았겠지.
 
4/16(일) 마음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화서역에서 하차.
1974년 화서역이 영업을 시작했으니
처음 내려본 정거장.
 
대학본부가 관악으로 이전하고
단과대학들이 이전을 시작한 것이 1975년.
빈번한 학생데모로 취해진 조처. 그러고 보면
우리세대는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셈.
요즈음 학생들은 왜 조용할까.
나라는 위기 속에 표류하고 있는데.
 
 
 
 

화서역 구름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내려서니

마음에 드는 공원이 펼쳐지고.
이름도 서호꽃뫼공원.
 
 
 
 

이어 수원성감리교회를 지나고

화성이 아니고 수원성?
1952년 첫 예배를 드렸다고.
 
 
 
 

서호로 유입되는 서호천

서호천은 장안구 파장동 광교산 파장저수지에서
발원, 권선구 고색동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하기
까지 11.5km를 흐른다.
황구지천은 진위천, 평택호를 통해 아산만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길섶에는 현란한 자주빛 현호색

양귀비목 현호색과의 여러해살이풀.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꽃을 피운다.
서양인의 눈에는 종달새모양의 꽃,
 
 
 
 

삼남대로와 삼남길

삼남길은 처음 들어보는 길.
허기야 길은 만들면 되지.
 
 
 
 

1973년에 준공된 새싹교를 건너니

건너편은 노송이 드리워진 서호(西湖)의 뚝이 
보였고, 다리 밑에는 팔뚝만한 잉어가 노닐고.
 
 
 
 

신록의 멋진길이 펼쳐지고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입구.
(서둔동 소재)
1947년 농사개량원으로 시작하여
1949년 농업기술원,
1962년 농촌진흥청 직제 확립.
2015년 본청이 전주로 이전.
 
옛날 학교에서 진흥청으로 가는  숲길,
음대를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농대 여학생이
불렀던 멋진 가곡과 샹송, 지금도 들리는듯.
 
 
 
 

이곳에 웬 선거연수원, 선거체험관?

선거가 민주주의인지 아는 나라,
웬 선거는 그리 많고. 
조그만 나라에 기초단체장, 의원, 교육감까지
선거하는 나라.
 
이곳에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거에 이기는
것이 민주라고 가르치지는 않겠지.
 
건전한 정책보다는 인신공격 위주의 선거운동.
거짓말 하기에 솔선수범하는 정치인들.
선거관리위원회가 꼭 상설기관이어야 하는지.
그러자니 협동조합선거까지 관리하고.
 
 
 
 

축만제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 항미정(抗眉亭)으로

1799년 정조대왕은 축만제(祝萬堤, 서호)와
서둔을 조성. 서둔(西屯)은 어떻게 보면 국영농장.
이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화성유지비용에 썼다.
 
항미정은 축만제에 있는 정자.
1831년(순조 3) 화성유수 박기수가 건립.
항미정 이름은 중국미인 서시의 눈썹에서 유래.
송의 대문호 소동파(1036-1101)가  항주를 대표하는
절경, 서호가 서시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말했다고.
 
서시는 춘추전국시대(BC770-221), 월나라 미인.
월나라 왕, 구천의 신하, 범려가 오나라왕, 부차에게
서시를 바쳤고. 부차가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결과, 월나라는 오나라를 정복했다.
 
1908년 순종황제가 기차를 타고 수원 능행시
서호 임시정거장에 도착한 후,  향미정에서
차 한잔을 들었다 한다.
 
 
 
 

자전거길과 인도가 있는

축만교를 지나  서호의 제방으로 들어섰고.
 
 
 
 

서호 제방길을 산보하는 사람들

한가로운 휴일을 보내고 있었고
 
 
 
 

1799년(정조 23) 여기산 아래 조성된 서호(축만제)

당시 최대 크기로 조성된 저수지.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에서
축만제(祝萬堤)라 명명.
화성 서쪽에 있어 서호(西湖).
 
이 기반시설로 인하여 해방 후
농과대학, 농촌진흥청이 설립되었고
수원은 20세기 농업중심지가 되었다.
 
2016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의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뒤에 보이는 여기산(麗岐山, 104m)

한문으론 틀리게 쓰지만
기생의 자태같이 아름다워 여기산.
정상부에 머리띠 모양의 산성이 조성되어 있다.
길이 453m.
 
중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중부지방의
대표적 생활 유적지.
 
수원팔경, 서호낙조는 여기산과 서호에 비치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여기산 서호방면에 우장춘박사(1898-1959)의
묘와 석상이 있다.
 
 
 
 

뚝방길의 연로한 소나무들

지지대에 의지하여 살고 있고.
 
수원의 인구가 120만을 넘어선 지금,
수원이 농업의 중심지라는 말은 옛말.
농촌진흥청이나 서울대농대도 이전되었고.
 
 
 
 

벤치에서 쉬며 간식도 들고

대학시절엔 서호의 피라미를 잡아
튀김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맨끝의 여인

세발자전거를 타고 간다, 부끄럼 없이.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부 농장

예나 지금이나 시원스럽다.
농장이나 서호 주위는 아파트군락이
둘러싸고 있지만.
 
 
 
 

서호 안에 위치한 인공섬은

민물가마우지의 집단서식지.
그들의 흰 똥으로 나무들은 죽어가고,
주위가 울음소리로 시끄럽기 짝이 없다.
개체수를 조절해야 되지 않을까?
 
양평 흑천이나 백령도나 이렇게 집단적으로
살지는 않는데-
예전보다 개체수는 늘었지만.
 
이에 관련된 민원에 수원시청은 모르쇠라고.
 
 
 
 

서호 산책을 마치고

 
 
 
 

서둔동 옛캠퍼스로

 
 
 
 

길섶의 큰개불알꽃, 앙증맞고

현삼과 두해살이풀. 열매모양이 개불알.
봄소식을 전하는 까치같다 하여 봄까치꽃.
서양이름은 bird's eye.
 
 
 
 

진흥청 붉은 벽돌 옛건물을 지나

소나무가 있는 큰 도로로.
옛날엔 없던 길.
 
 
 
 

서둔동 옛날 동네를 지나

서둔탕은 폐업을 했나,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다.
 
 
 
 

150살 보호수와 벤치

상수리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드문 일.
 
 
 
 

서호천을 왼편에 두고 걷자니

오른쪽 담장 안, 옛캠퍼스 건물엔 복사꽃,
내마음엔 청춘이 돌아오고.
 
 
'회상의 말은 나를 태우고
살아온 시간을 거슬러
주마등走馬燈처럼 달린다
 
어둠 속을 달리던 말은
천천히 걷다가 질주하다가
오직 그곳에만 등불이 켜진듯한
그때 그자리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좋았던 날들도 많았는데
내가 빛나던 시간들도 있었는데
그곳들은 눈보라처럼 스쳐 지나가고
 
내가 가야만 했으나 가지 못한 길들과
내가 해야만 했으나 주지 못한 사랑과
잘해주고 싶었으나 어찌하지 못해서
눈물겹고 애가 타던 회한의 자리로
그 상처의 시간으로 날 데려가는 걸까'
(박노해, 1957-, 회상의 말)
 
 
 
 
 

오랜만에 보는 서호천을 건너는 농대교

다리를 건너면 수원역으로 가는 길.
뻥 뚫린 느낌.
 
 
 
 

왼쪽 문패는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오른쪽 문패는 창업지원센타.
 
1904년 대한제국 학부가 한성부 수진동에 설치한
농상공학교의 농과가 이 대학의 원조.
1906년 농과를 독립시켜 농림학교로 개편,
이듬해 수원 서둔리에 학교를 이전.
 
1922년 고등농림학교.
1946년 서울대학교 개교.
 
 
 
 

일제시대엔 한국인 학생이 1/3 정도

학생들은 1919년 독립만세에 참여했고
1920년대에는 학생들이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한 곳.
 
 
 
 

학교내 도로

우측에 주요시설이 있고
좌측엔 낡은 건물들 몇채 있다.
동문들은 아직도 기숙사가 건재한지 궁금.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지만
길의 왼쪽에 여학생 기숙사, 녹원사
오른쪽 뒷쪽에 상록사가 있었다. 
 
 
 
 

옛날 대학본부였던 건물

창업지원센타 건물로 사용.
 
 
 
 

창업지원센타는 대학 연구성과의 사업화를 지원하고

농업벤처 창업에 활력을 일으키고자 설립.
 
 
 
 

고풍스런 건물들

박물관, 도서실 등의 표지판이 있고.
비어있는 건물도 많다고.
 
 
 
 

연결통로와 주위건물

조경이 잘 되고있었고.
 
 
 
 

복사꽃과 사과꽃

'고마워 오늘   날 보러   와줘서'하는 입간판도.
나를 보고 하는 말이겠지.
 
 
 
 

어린이 놀이터도 있고

 
 
 
 

화사한 꽃들이 지니

귀룽나무 구름꽃이 화사함을 대신.
 
 
 
 

교내 큰도로의 왼쪽 끝부분은

캠핑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경기도가 운영하는 경기상상캠퍼스

젊었을 때의 상상은 좋은 것이지.
 
 
 
 

오솔길로 가면 서울대학교 수원수목원이 나오겠지

옛날 후배들과 달밤에 술취해 춤추면서
"곰을 잡으러 갑시다"하고 떠들던 곳.
 
수목원은 미리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주말은 안되고.
 
 
 
 

이문을 나서면 옛날 푸른지대, 왼쪽은 탑동

당시 푸른지대 딸기밭은 유명했었지만
푸른지대 골프클럽, 푸른지대 삼거리 등
이름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학시절 미팅시, 딸기를 안사주면 가지 않겠다는
철없는 여학생도 있었고.
 
탑동엔 서둔 야학 유적지가 있다.1965-83년
황건식선배가 주축이 되어 성금으로 건물도
짓고 어려운 아이들을 공부시킨 곳.
 
부평에서 배과수원을 했던 황선배,
가곡 부르기를 좋아했었다. 과동기 하나,
선배의 매제가 되었고.
 
 
 
 

되돌아 나오는 길, 박태기꽃 화사했고

대학 4년간의 시절, 짧은 기간이지만 
길다면 긴 인생의 초입길이고
그 영향은 어느 때보다 지대하다.
 
나의 경우는 고3 막바지에 지향하던
의사의 길을 접고 방황을 했고
그 영향이 대학시절까지 지속되었다.
6년간의 학비지원은 어렵다는 아버님 말씀에.
 
생물관련 학과를 찾다보니, 당시 의예과와
커트라인이 비슷한 농화학과를 지망했고
그만 2지망학과로 전락.
 
좋아하는 선배들의 농심이나, 농촌운동과는 멀었고
2년은 설렁설렁 지냈으며 군 복무 후 2년간은
고시공부, 사회진출을 위한 가치없는 공부에 열중.
 
그렇지만 옛날 캠퍼스에 왜 그리 정이 가는지.
그래도 내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모양.
 
 
 

그래도 옛캠퍼스를 찾은 일은 잘한 일이라며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팔달구 남창동에 있는 행궁으로.
 
 
 
 

점심때도 되고 행궁 큰길 건너편

약국골목에 있는 중국만두전문점 수원(壽園)에서
구운만두, 소고기만두, 우육탕.
재혁친구좋아하는 메뉴.
전에는 맛있었는데--
 
 
 
 

아직도 화교 노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집

노인 손님들이 많았고.
 
 
 
 

행궁으로 돌아오니

봄바람은 세게 불고
연 날리는 아이들 신이 났다.
 
플로어볼 경기장에는 초등학교 여학생들,
경기에 열중.
 
 
 
 

플로어볼은 하키형 뉴 스포츠

연성 플라스틱 재질의 스틱과 공을 사용.
팀당 6명의 선수들이 뛴다.
 
 
 
 
 

향궁앞 350살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

굿굿하고 나이먹은 티가 안난다.
행궁매표소의 줄은 길고 하여
수원공방거리를 걸었고.
 
 
 
 

공방거리의 그림

망우리에 묻혀있는 이인성화가(1912-1950)가
생각나는 그림.
 
 
 
 

팔달문을 지났고

화성 4개 문중 남문, 보물 402호.
화성 성문은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으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원역 가는 길의 튜립꽃

내친 김에 수원역까지 걸었고
16:19분발 무궁화로 귀경.
 
이날 16천보를 걸었다.
구경도 잘 하고
걷기도 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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