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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태풍 소용돌이 속에 성균관 산책

난해 2019. 9. 1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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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건동친구의 히말라야 무스탕계곡 사진)



9/7(토) 우리는 토요산행 대신 혜화역에

10:30분 모여 성균관을 찾았다.

류재명친구가 그곳에서 문화해설사로

봉사하고 있는 곳.


 두 걸물이 나라안을 요동치게 하고 있고,

 태풍 링링(홍콩에서 제출한 소녀의 애칭)이

3시경 서울 도착 예정.


홍콩도 요즈음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고.


성균관을 찾아 예의와 염치, 도덕성

회복, 국가의 품격 등을 생각해

보는 것도 뜻 있는 일.




류재명 친구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해설을 시작했다.


고려때는 국자감, 조선에선 성균관으로

개칭된 국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불리움.

개성에 고려 성균관이 있음.


성균(成均)은 음악의 조율을 맞춘다는 말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


태조 7년(1398) 창립, 지배이념을 보급하고,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함으로

왕조체제 유지에 기여.




(건물 배치도)


1, 명륜당  2. 대성전  3. 동무 4. 서무

5. 삼문  6. 동재 7. 서재     8. 존경각

9. 육일각 10. 향관청 11.진사식당

15. 비천당 16. 묘정비각 17. 탕평비각

18. 하연대 19. 은행나무



성균관에는 지사(知事), 부지사, 대사성 등

교수직 22인이 있었으나 후기에 38인으로 증원

되었고, 정조때부터 지사를 대사성이 겸직.


입학자격은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 진사

합격자에 한해 200명이 정원이었으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이때도 입학 예외자가 있었으니,

승보시를 통해 입학한 기재생(寄齋生),

 식량을 갖고온 기부입학생(사량생)도 있고,

양영대군, 순종 등 왕세제가 입학하기도.



조선의 과거제도는 대과(문과), 무과,

소과(사마시), 잡과가 있었고,


3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와 알성시, 춘당대시

등 비정기시가 있었다.

성균관 성적우수자에겐 대과 초시를

면제하기도. 





우리의 산책은 성균관 들어가는 입구 왼편,

하마비, 탕평비각에서 시작.






하마비는 1519년 세워졌고,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됨.


이해에는 촉망받는 청년학자

조광조(1482-1519)가 사약을 받았다.




1742년 영조가 세운 탕평비의

비문은 영조가 작성.


두루 사귀어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마음이라는 내용.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한다는

당초의 성균관 설립 목적과는 달리


성균관은 15시 후반부터 개인출세,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전락하였고,

붕당정치의 온상이 되었다.


조선왕조말에는 국가체제를 시대에 맞게

재정비한 인물이 없자 국가의 이념인

유교는 나라를 망친 이념이 되고말고.



소나무가 있는 곳은 임금이 타고온

가마를 내려놓는 하연대.


왼쪽에 임금만 드나드는 동삼문이 있고.




혼령이 드나든다는 삼문을 지나쳐

성균관 안으로.









성균관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이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뒷편에 위치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


문묘(대성전과 동무東廡, 서무)는 제사를 위한

공간. 옛날에는 오성(공자와 안자, 증자,자사,

 맹자), 공문 10철과 송나라 육현을

대성전에 모셨고,


기타 성현은 동무, 서무에 모셨으나, 지금은

 대성전에 신라, 고려, 조선의 18위 (최치원,

설총, 안향, 이황, 이이 등)를 함께 모심.

(총 39위)


동무, 서무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

건축물만 남아 있다.



5월, 9월 대성전에서 두 차례 석전제(釋奠際,

공자에게 제사지내는 의식)를 지낸다,

무형문화제.




임금이 드나들었던 동삼문과 동무.






대성전쪽에서 바라본 신삼문(神三門),


대성전의 남쪽 입구로

대성전에 모신 분들의 신이 출입하는 문.





대성전 동남쪽 모퉁이에 있는,

조선초 변계량(1369-1430)이 왕명을 받아

문묘(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의 역할을

기록한 비.


임진란때 훼손된 것을 다시 건립했다.




대성전(大成殿)에서 설명을 듣는 중

돌풍이 불기 시작. 우산은 피자마자

뒤집어졌고, 빗방울도 떨어지기 시작.


대성전 앞에는 측백나무 두 그루. 삼강오륜목.

가지가 각각 셋, 다섯.


측백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부가 원산.

생울타리, 정원수로 쓰이며 절, 분묘에

많이 심는다. 옛날 왕족묘지에 많다.


불로장생, 성인의 기를 받은 신선의 나무.

잎의 앞뒤가 같아 겉다르고 속다르지

않은 군자의 나무.


편백나무보다 키가 적고 열매는 사방에

뿔이 난다.(편백은 축구공 같고)



옛날 많이 들어왔던 삼강오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붕우유신.

쾌쾌 묵었다고?


요즈음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


서무 지붕 위에서 비들기들도

친구의 해설을 열심히 듣고 있었고.





우리는 문묘에서 명륜당쪽으로.




처음 마주친 건물은 대학당.

성균관 관리인이 거처하는 곳.


학문을 지고 있는 집.

다시 말하면 배움을 뒷받침하는 집.




명륜당 앞뜰의 회화나무, 나비모양의

연노랑꽃을 피우고 있었고.


회화나무는 콩과식물로,  꽃을 중국에서는

괴화(槐花)라 하는데, 중국식 발음이 회화.

조금씩 시차를 두고 핀다.


영어이름은 Chinese Scholar Tree.

나무가지가 멋대로 뻗어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고. 궁궐, 서원, 문묘, 양반마을에

많이 심는다.


느티, 은행, 팽나무와 함께 오래 살고

크게 자라는 나무로 잎은 아카시아와 비슷.

(박상진 교수)




두 은행나무 사이로 명륜당이 보였다.

500세 정도 되는 천연기념물.


중종때 문신 윤탁(1472-1534)이

두 그루를 심었다.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강학(講學)을

했는데,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익히는 곳을 행단(杏壇)이라 한 연유.


은행나무가 있는 마당은

과거시험장으로 쓰였다고.




윤리를 밝히는 곳, 명륜당.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


천원권 지폐 앞면에는 퇴계 이황선생과

명륜당이 나와 있다. 퇴계선생은

성균관 대사성을 세번이나 역임했다.


이곳에서 학생들에 대한 강의가 있던 곳.

사서오경(대학, 중용,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과


시(詩) 부(賦) 송(訟) 책(策) 의(義)

의(疑) 등의 과문(科文)의 제술이

교과 내용.



사서오경에 통달한 학생을 명부에 기재,

예조에 보고하고 문과 초시를 보게 했다.




주지번(1546-1624)이 전주객사에 남긴

풍패지관(豊沛之館) 현판.


전주객사는 빈객을 접대하는 기능 외에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해 예를 갖추는 곳이기도.


풍패는 한나라 유방이 태어난 곳.

이성계의 고향이라 빗대어 말함.



주지번과 송영구(1556-1620)의 얽힌 사연은

 음미할 만하다. 송영구는 청풍군수, 병조참판을

역임했는데, 풍채가 단아하고 성격이 강직하며,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할 줄 알았고.


1593년, 송영구가 정철의 종사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주지번은 시험에 낙방하고

노잣돈도 떨어져 사신숙소에서 일하던 종업원.


송영구는 그에게 답안지 작성방법을

가르치고, 돈, 필사된 서적을 주었으며,

그 결과 만난지 2년만에 고시에 수석합격,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사신으로 온 주지번은 은인을 찾았고,

익산에서 13년 만에 송영구를 만나,

귀한 책자를 선물했을 뿐 아니라


멀리서 추모한다는 뜻의 망모당 편액을

써주었으며, 묘자리를 잡아주었다.


그는 사신으로서 품위를 지켰고,

조선 곳곳에 친필을 남겼으며


사신을 맞는 접반사였던 허균을 통해

허난설헌의 시를 접하게 되고,


북경에서 난설헌집을 발간

허난설헌의 시를 북경에 소개했다.




비바람이 세어지자 우리는 명륜당 안에

자리잡고, 친구의 강의를 들었다.


유학은 인(仁)을 근본으로 한다.

인은 너와 나의 관계이며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은 사랑이다.


유학의 철학은 역(易, 바꿀역)에 뿌리를 둠.

역은 해와 달이며, 음과 양.


변역(變易, 우주는 돌고 삼라만상은 변하고),

불역(不易, 큰 줄기는 변하지 않는 것),

이간(쉽고 간단하다).


다시 말하면 우주만물이 생기고, 소멸하고

머물고 움직이는 원리. 삶이 싹트고

자라고 죽어가는 원리.

원리에 순응하면 복, 거슬리면 재앙.


역(易)의 사상은 자연과 내가 조화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



요즈음 우리 국민, 위정자들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이다.


유재명 친구는 요즈음 학생들에게 이와 관련,

태극기에 담겨있는 내용을 교육했으면 한다.





명륜당 뒤벽 위에 있는 명륜당글씨는

송나라 주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


사서오경은 고대중국(춘추전국시대)의

자연현상및 사회생활을 기록한 것.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가 낙읍으로 옮긴

때(BC 770)부터 진나라 통일(221년)

까지를 말한다.


춘추는 공자(BC551-479)가 쓴

 역사서 '춘추'에서 따왔고.


춘추시대에는 200여제국이 전국시대에

10여개국으로 줄어들었다.


제왕정치, 고대의 가요, 가정생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역사 등의 기록.


송나라 유학자 주자(1130-1200)의

주석을 중심으로 했는데, 공자의

제자 중 맹자를 중요시했다.


주역은 3경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유교

경전으로 오경의 으뜸이나 난해하고.


주나라왕실의 관직제도와 전국시대

각국 제도를 기록한 주레(周禮)는

우리나라, 중국 관직제도의 기준이 됨.




명륜당 월대 위의 비석.


마모가 심해 내용을 잘 알 수 없지만,

대원군때 서원철폐의 당위성을 썼다고.




명륜당 좌우에는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 서재가 있고.


학생들의 자치적 조직인 제회가 있었으며

국정에 관해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고,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집단행위도 함.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 국상 조문시

청나라사신은 청나라 황제등극에

동의하라는 국서를 내밀자


성균관은 분노와 울분에 싸였었지만

결국은 강경외교로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성종때 유생이었던 권주가 13명의

성균관 동학들과 우의를 다지기 위해

시를 쓴 서첩, 동방록.


장안에 화제가 되어 다투어 베껴가는

바람에 한양의 종이값이 올랐다고.


'벼슬길 나가도 학창시절의 우정을 잊지말도록

시문집을 책상에 놓고 친구 본듯하자.'


'도가 같고 뜻이 같고 시대가

같아야 친구로 사귈 수 있다.'


'군자의 사귐은 물처럼 담담하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다' 등의

글도 들어 있고.




동재 협문 근처에 있는 식고(食鼓).


북을 한 번 치면 기상, 세번이면 식사.

하루에 두끼 식사라니.


동 서재에서 대표 장의(掌議) 한 사람씩

뽑았는데, 여러가지 메리트가

있었으며, 권위도 있었다고.





서쪽 협문으로 나가면, 별당으로 된

비천당이 있고.


학생들의 학습장소이기도 했고,

임금이 친림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하던 곳.


1946년 성균관대학교

대학본부로 사용하기도.


수백년 원형을 유지하던 건물이었는데

6.25때 소실되어, 다시 건축.




명륜당 뒤에 있는 존경각.

 1475년 성종때 건립된 대학도서관의 효시.


장서는 일제하에서 경성제국대학

(서울대 전신)으로 이관되었고,

일부는 성균관대 도서관으로.



고종은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교육은 개편된 경학과(역사, 지리, 수학 등

과목 추가)가 전담케 하였고,


1910년 일본은  성균관과 학교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중지.


해방후 1946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어

유교교육의 바톤을 받았으나,

현재는 성균관대학과 성균관은 별개 기관.


독립운동에 헌신한 실천적 유학자,

김창숙(1879-1962)은 1946년 초대

성균관장이 되었고, 성균관대를 설립,

초대 총장이 되었다.


오늘의 성균관은 234개 향교,

800여 서원을 거느린다.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향교는 국립교육기관.

이곳들에도 대성전, 명륜당이 있다.




존경각 옆에 있는 육일각.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여섯가지 기예 중의 하나인

활쏘기에 사용되던 용구를 보관하는 전각.




성균관 뜰에서 만난 백일홍,

서울 도심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고.




정갈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정록청.

전형적 관아건물.


관직이름 학정(學正), 학록(學錄)에서

따온 이름, 正錄.


유생들의 생활공간 동재 주변에는

식당을 비롯, 여러 건물이 있고

관헌들이 동재 안쪽 공간에서 근무.


유생들을 감독하기 좋은 자리에

정록청이 있다.




제일 안쪽에 있는 건물, 향관청(享官廳).

문묘 향사(享祀)때 감찰과 집사들이

거처하는 곳.





성균관 주변 성균관 노비들이 살았던

반촌(泮村).


성균관을 반궁(주나라 제후의 학궁)이라

한데서 온 말, 반촌.


성균관은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며

공자를 배향하는 곳이라

이곳 노비들은 거드럭거리며 살었다고.


이곳 사람들을 반인, 관인, 재인이라

했는데, 비번일 때 생업에 종사했다.


특히 성균관 제사용 가축을 도살한

재인들은 푸줏간 독점권을 가졌었다고.




2시 반 일정을 마치고,

성균관 인근 명륜진사갈비에서

무한 리필 갈비+소주+맥주.


모두 성균관 방문, 친구의 해설에

만족해하며 입맛을 다셨다.


류재명친구, 그리고 참여해준 친구들,

정말 고맙소.




지하철 타러 가는 길,

태풍에 입간판 쓰러지는 것은 보통,

어디서 날라온 뚜껑인지.


허나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던지.

낙산산보는 결국 취소하고 모두들 귀가.




태풍이 불던말던

젊은이들은 무엇엔가 열중이다.


아차하면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테니

우리라도 정신 차리고

유학의 철학을 다시 살펴보고

기본에 충실해보자.


너와 나부터 신뢰를 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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