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담사에서 읊어 보는 ‘알 수 없어요.’
초여름 설악산을 찾게 된 것은 김 재원 덕분이다. 재원은 옛날 위암 수술을 받은 일도 있고, IMF때 퇴출당한 기억도 있고 해서, 일 년에 두 번 씩은 큰 산을 찾는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한다고 한다. 김 상환과 나는 이 더위에 무슨 높은 산이냐 하며 산행을 가을로 미루려 했지만, 김 재윤 형이 재원을 적극 밀어준 결과, 6월10일 속초행 버스를 타게 되었다. 우리 넷은 모두 신내동 농협 동인회, 봉화회의 회원이다.
이른 새벽 상환과 같이 택시를 타고 상봉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재윤 형과 재원은 이미 온지 오래된 것 같았다. 재윤 형 외손의 백일 떡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는데, 맛이 꿀맛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백일 떡 챙겨주는 마나님이 아직도 있다니. 간성을 거쳐 속초로 가는 버스는 6시30분에 출발하였다. 우등고속처럼 좌석이 널찍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손님이라고는 전부해야 열 명도 안 되었다. 기사 말에 의하면 손님이 없어 보조금을 받는 형편이라고 한다. 버스는 국도를 타고 달렸다. 날씨도 좋고 주위경관을 즐길 수 있으니 이 또한 꿀맛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산중에서 2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첫날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에서 일박하고, 오세암, 공룡능선을 타고서 희운각에서 일박한 후에, 천불동 계곡을 따라 설악동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여유를 갖고 산행할 수 있는 것이 백수(白手)의 행복이 아니더냐.
친절한 기사양반이 우리를 백담사 입구에 내려주었다. 백담사행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양옆에는 벚나무가 도열해 있는데, 버찌가 새까맣게 익었다. 열매에 손을 대니, 금방 터져 손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맛도 달콤한 것이 그만이었다. 평일인데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으려니 했더니, 곧 버스가 왔고, 손님도 꽤 있었다. 버스는 곧 출발했고, 차창 왼 편으로는 백담계곡이 녹음과 대조되어 흰빛을 발했다. 물소리도 시원하고. 재원 왈, 백담(白潭)이 아니고 백담(百潭)이라고 귀띔했다.
백담사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백담사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계곡을 음미하여 감도 좋으련만 길이 멀기에, 사람들은 비경도 싫다고 하며, 버스가 백담사까지 왜 안 가는지 불평들 한다. 버스기사 말로는 곧 버스가 백담사까지 운행될 것이라고 했다. 작년 집사람과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에 올랐을 때는, 백담사까지 가는 신도들 차를 얻어 탔었다. 절을 가끔 찾는 집사람 때문에 덕을 보았다고 좋아했었는데.
버스에서 내려 몇 발자국 안 갔을 때 신도들을 태운 버스 한 대가 왔다. 우리가 손짓을 하니 지나칠듯하던 차가 끽하며 정차를 했다. 보살님들, 고맙습니다하며 중늙은이 넷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 아, 집사람의 불심이 나를 죽여주는구나. 백담사는 여전했다. 나는 고마움에 보살님들 따라 법당에 올라, 할 줄 모르는 절을 세 번했다. 교회 열심히 나가는 재원과 상환은 나를 이방인 보듯 했다. 우리는 그래도 한용운 기념관은 들려 보아야지 하며 기념관을 들어섰다. 입구 안내 석에 앉은 절 옷차림의 중년 여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우리가 나갈 때까지 책을 읽었다.
만해(卍海)선생은 동학혁명에 가담 후, 혁명이 실패하자, 오세암을 거쳐, 이곳 백담사에서 스님이 되셨다고 한다.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알 수 없어요.’하며 우리들은 한용운의 시를 낭송해 보았다.
2. 꿀맛 같은 수렴동 계곡의 점심
옛날의 징검다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백담사 앞개울을 시멘트다리로 건너 오세암으로 향했다. 오세암의 옛이야기, 요즈음 안시 애니페스티발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오세암,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오세암 가는 길, 수많은 보살님들과 마주쳤다. 처사님들은 드물고, 아마 봉정암에서 내려오는 분들이리라. 안녕하세요, 인사하기가 바빴다. 숲 속에는 다람쥐, 계곡에는 쉬리 등이 바삐 노닐었다. 몇 년 전 여름, 백담사 계곡에서 막걸리 한잔하고 바위에 누웠다가 혼난 일이 있다. 바위의 찬 기운이 금방 머리로 전달되어, 목이 뻣뻣해졌었다.
점심때 되어 영시암에 도착했다. 라면 정도 취사를 하면 안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였더니, 수렴동 산장에서 취사하라고 했다. 과실로 요기를 하고 또 길을 떠나, 수렴동 산장에서 취사를 시작했을 때는 한시가 넘었다. 오랜만에 하는 취사였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취사하는 것이 귀찮고, 또 필요한 것들 챙겨 짐 꾸리는 것도 보통일은 넘는다. 재원이 각자 싸올 것을 사전에 정해줬기 때문에 편했다. 햇반 둘, 라면 두 봉지, 고추장, 방울토마토 등이 내가 맡은 것이었다. 하나로 아가씨 권유로 김치는 포기, 갓, 총각김치를 샀다.
재원이 주도하여 점심을 준비하는데, 프로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재윤 형도 백수 된지 꽤 되어, 해본 솜씨이고. 된장찌개 냄새에 파리가 모여들었다. 이 산중에 그 큰 똥파리들이 어데서 오는지, 쫓는 게 만만치 않았다. 신문지에 맛있는 것들을 놓아 유인을 하고, 다람쥐용 라면도 떼어 놓았다. 점심은 성찬이었다. 가져온 소주 절반을 동내니, 시간도 넉넉하겠다, 마음들이 늘어졌다.
3. 오! 오세암 (五歲庵)!
같이 서울에서 버스타고 온 젊은이가, 말 잘하면 오세암에서 잘 수 있다고 귀띔해줬다. 1인당 만원이면 저녁, 다음날 아침까지 공양해준다고. 산장 여자주인은 영시암을 안거치고, 오세암으로 가는 지름길을 가르쳐주었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태양 볕은 찌는데, 배낭들은 왜 그렇게 무거운지. 길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이다. 술기운에 힘 드는 것인지, 술기운에 가는 것인지, 주태백이 상환은 잘 따라왔다. 몇 번을 쉬고 하다 보니 영시암에서 오는 보살님들과 합류했다.
마지막 고비인 언덕에서 바라보니 첩첩 산중이다. 재윤 형, 하모니카 꺼내어 냅다 부는데, 어데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보살님들 모여드니 더욱 신나게 불었다. 우리들은 술기운에 노래를 뻑뻑거렸다. 우리 오빠 말 타고-------------. 옆에 앉은 경상도 할머니, 우리들이 장모님, 장모님 하니, 꽤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다.
다섯 시가 넘어서 오세암에 도착했다. 주변의 기암들, 맛이 그만인 약수, 시원한 산기운, 에라 모르겠다하고 법당에 올라 삼배를 또 하였다. 그사이 세친구들은 숙소를 배정받아 내려왔다. 엉터리 불자라도 내 핑계를 대어 숙소를 받을 수 있었다는데,
진짜인지? 오세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암자로, 이곳에서 생육신의 한분인 김시습이 출가하였다. 인조 때 설정(雪淨)스님이 고아였던 형님의 아들이 성불한 것을 기리고자, 이름도 오세암으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해인사 대장경 1질이 봉인되어 있다. 법당 뒤에는 관음봉, 동자봉이 있고, 오른쪽 위로 공룡능선이 뻗쳐 있다.
모두들 흘린 땀을 닦고 있으려니 6시에 공양이 있다는 전갈이 왔다. 웬 신자들이 그렇게 많은지, 줄이 길게 서 있었고, 또 식탁에는 여석이 없었다. 경상도 신자들이 단체로 와서 그런지 와글와글했고, 하모니카 연주할 때 만난 보살님들은 우리들보고 무척 낭만적이라고 하며 반가운 낯이었다. 밥 말은 미역국에 신 김치를 넣은 저녁인데, 내가 먹어본 절 음식 중에서 제일 형편없었다. 김치가 너무 쉬었다. 그러나 앞뒤로 펼쳐진 절경에, 전부들 맛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식후 소주 한잔씩 걸치고 내일을 위해 일찍 자려고 했지만, 옆방의 경상도 처사님들 목소리가 너무 컸다. 마치 싸우는 사람들 목소리였다. 그런데 억양은 재원과 비슷했다. 우리는 핑계 김에 고 스톱 한번 치자고 했지만, 재원은 이곳이 그런 장소가 아니라고 하면서 빠졌다. 셋이서 소리 죽여가면서, 옆방 처사들 잘 때 기다리며 화투짝을 돌리고 돌렸는데, 옆방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우리 방에 배정받은 점잖은 친구를 생각하여 10시 정도 판은 끝냈지만, 옆방의 소리는 여전했다. 참다못한 상환은 옆방을 방문했지만, 잠잠해진 것은 잠시뿐, 소리는 끊임이 없었다. 열난 상환은 들락날락거렸지만, 그래도 따뜻한 방과 충분한 이불이 있으니, 다 부처님 덕이 아니겠냐고.
다음날 아침, 꼼지락 거리다 6시 아침공양에 늦었다. 옆방 처사님들은 낯짝도 볼 수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 떠난 뒤였다. 미역국 닥닥 긁어서 아침 공양하고 나오니, 행자들은 마당 쓸기에 여념이 없다. 수고하십니다하니, 한 행자가 어디로 가시냐고 묻는데, 목소리가 굵고 쾌활했다.
4. 공룡능선을 넘어서
7시 넘어서야 마등령을 향해 길을 떠났다. 길은 바로 가파르게 치닫는다. 상환은 겁먹은 표정이었다. 인적은 없고, 깊은 산 계곡에서만 볼 수 있는 함박꽃나무 흰 꽃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꽃은 작약과 비슷하나 목련과 닮은 나무인데, 북한의 국화라고 한다.
두 시간 정도 걸어 산등성이에 올라탔다. 한숨 쉬고 또 올라 만남의 광장(?)에 도착했다. 좌측으로 가면 마등령 정상이 되고, 곧장 가면 공룡능선이다. 사람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는데, 차림이 산 전문가들 같았다. 재원이 더덕냄새가 난다고 하여 자세히 보니, 더덕줄기를 찾을 수 있었다. 내 코는 영 감각이 없는데? 출신 성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르락내리락 공룡능선은 장난이 아니었다. 땡 볕은 따갑고, 땀에 아래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한참 급경사를 오르면 또 그만큼 내려가야 하고, 12시경이 되어 천화대 샘터에 도착했다. 공룡능선 끝나기까지 유일하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졸졸 나오는 샘물을 받아 병 하나 채우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샘터를 먼저 떠나는 산사나이 안내대로, 샘물 위 터에 자리 잡고 점심을 준비했다.
샘터에서 보면 안 보이는데, 위로 조금 오르니, 2인용 텐트를 펼 수 있는 평평한 자리이다. 참치라면 겻들인 햇반에, 된장찌개와 갓김치 그리고 소주는 금상첨화였다. 희운각까지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여 남은 소주를 다 비워버렸다. 그리고 술 핑계대어 1
시간 정도 2차 고 스톱대회를 하였다. 우리는 신선놀음이라고 하지만, 남들은 뭐라고 할지.
취사를 시작해서부터, 2시 넘어 또 고행을 시작할 때까지 샘터를 지나가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샘터에서부터 한 서양친구와 한국 젊은 처자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둘이 그늘에 앉아 삶은 계란 나누어 먹는 모습이 부러웠다. 공룡능선 마지막 단계에서는 앞에 보이는 중청, 대청의 경치보다는, 뒤돌아보는 능선의 기암절벽이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다. 또 뒤돌아보면 멀리 우측으로 울산바위가 보인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유치환의 바위 중에서)
샘터에서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산사나이를 또 만났는데, 희운각을 들리는 것보다 바로 양폭산장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줬다. 희운각으로 갈라지는 기점에서는 상환과 나는 힘들어 했다. 재원이 희운각으로 다시 올라 대청까지 갔다 오자고 했을 때, 우리 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5. 아쉬웠던 양폭산장의 밤
터덜터덜 2차 숙박지인 양폭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고, 계곡물에 발을 담갔을 때는 온몸이 시렸다. 우리의 옆방에는 늘씬한 강남 처자 셋이 묵게 되었다. 이들은 우리가 온 코스를 역으로 간다고 했다. 차는 설악동에 놓았는데, 차를 대리운전으로 백담사 쪽으로 옮기는데 3만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당초 우리처럼 희운각에 머물려 했었지만, 별도 따로 잘 수 있는 방이 없기 때문에 양폭산장에 자기로 했단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파리 떼 극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강남처자들은 쟁반으로 파리를 쫓았다. 소주도 새로 구입하고, 주인 먹으려고 준비했던 삼겹살을 우리가 다시 사서,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누룽지 숭늉에 커피까지 마시니 계곡이 우리 것이었다. 산장에서 내려다보면 좌측으로 천불동(千佛洞) 계곡이 깔려 있고, 폭포소리 냇물소리 요란하다. 재윤 형 또 하모니카 연주를 시작했다.
산은 가까이 보면 숲이요 나무다.
숲은 머리 위 별들이 내려주는 촉촉한 이슬에 지혜가 늘고
비바람과 폭풍과 번갯불의 시련에 의지가 굳는다.
(박두진의 숲 중에서)
처자들의 방을 보니, 열렸던 방문이 어느새 닫혀 있었다. 내일 일찍 길 떠나려나보다. 에라, 고 스톱이나 하자며 앉은뱅이 방에 들었더니, 처음 보았을 때는 답답해보였던 방이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었다. 재윤 형이 아끼는 금잔으로 장원 주를 돌리며, 우리들은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하며 희희낙락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10시 되니 불이 나갔다. 못내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다. 상환과 재윤 형은 냇가에 가서 한잔 더 한다고 들락거렸고, 재원은 잠이 안온다고 부스럭 거렸다. 재윤 형 얼마나 원통하랴, 처자들은 귀머거리 같았으니.
6시 눈을 뜨니, 재원은 벌써 어제 먹은 그릇 닦는 라고 바쁘고, 어쨌든 산행은 끝난 기분이었다. 방을 나와 보니 이미 산장은 텅 비었다.
6. 천불동 계곡 이후
아침밥 해먹고 산장을 떠나려니 벌써 8시가 넘었다. 비선대까지 두 시간 걸었을까? 철다리가 옛날보다 많아졌다. 비선대 철다리 위에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폼을 잡았다. 역시 절경을 렌즈에 담기에는 좋은 장소이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혔다. 비선대에는 로프 타는 친구들이 매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부모 따라온 여자 어린이 둘, 매미 보라고하니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설악동 버스 정류장까지 평탄한 길을 내려오려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날씨는 더워지고, 시내버스로 속초 시외버스 정류장에 오니, 11시 반 정도 되었다. 매표소 아가씨는 13시 25분차가 떠날지 안 떠날지 모른다고 했다. 가뜩이나 없는 손님, 노선을 폐쇄하려고 하는지, 답답했다.
동명항구를 한 바퀴 돌아 바닷가가 잘 내려다보이는 횟집을 골라잡았다. 재윤 형이 한번 들렸던 집이란다. 회는 비싼 셈이고, 맛 또한 그렇고, 날씨는 쪘다. 예정대로 13시25분발 상봉행 버스를 탔다. 올 때와는 달리 한계령을 빙글빙글 돌아, 4시간 반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 피로에 전부들 끄덕끄덕 졸았는데, 올 때와는 달리 기사 운전 솜씨가 사나웠다. 욕설도 만만치 않았고.
상봉동에서 헤어지니, 상환이 제일 좋아했다. 고전이 예상되었던 큰 산행이 큰 무리 없이 무사히 끝났으니 말이다. 역시 우리에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느릿한 여행이 맞는가보다.
재윤 형은 며칠 후 아들과 함께, 20일 예정으로 유럽 기차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내년이 회갑인데, 치과의사인 딸이 미리 여행경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마나님은 외손을 보아주고. 복도 많은 양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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