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구스 인도네시아
-좋은 나라 인도네시아-
1. 자카르타 도착까지
3월30일, 친구 연태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카르타에서 경희를 만났는데 너무 외로워 보인다고. 홀아비 생활하는데다 4월이면 인도네시아 회사하고 계약도 끝나니까, 마음이 찹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자카르타를 방문하겠다는 경희와의 약속도 있고, 인도네시아 친구 마할시도 보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경희와 나는 계획도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곤 했고,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었었다.
우선 4월2일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네장 예약해 놓고, 아내부터 꼬드겼다. 바빠서 못가겠단다. 명식 부부도 노우다. 경희 집사람도 바쁘단다. 시간 있는 몇 친구에게도 전화를 했는데, 전부 계획이 있다고 했다. 약이 바짝 올라 나 혼자라도 간다고 선언을 하고는 한 좌석 남겨놓고 비행기 예약을 취소했다. 만우절 날 명식에게서 가겠다는 전화가 왔다. 부인인 기선생한테 설득을 당했나보다. 셋이 가면 어떠냐고. 어차피 자카르타에 홀아비가 하나 더 있지 않느냐고. 부랴부랴 여행사에 표를 부탁하고 있는데, 마나님이 샘이 났는지 자기도 가겠다고 한다. 코리아 트러블 한지혜양에게 사정사정하였더니, 군말 않고 수속해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경희한테서 일정을 어떻게 잡으면 좋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모처럼 마나님들 모시는데 이박 정도의 발리 여행은 필수가 아니겠냐고 주문을 하였다. 4월2일 출발하여 4월8일 귀국하는 일정이니까 5일간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행들이 처음 가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인도네시아에 뭐 볼 것이 있겠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또 간간이 보도되는 불안정한 인도네시아 정국 소식들도 한몫 거든 것 같고. 특히 가본 경험이 있는 명식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원숭이 같은 인도네시아 사람들, 지저분한 자카르타 거리들하며 악평을 했다.
어쨌든 김포 공항에서 출국절차를 밟을 때는 모두들 기분이 좋았다. 떠나기 전날 경희한테서 이메일도 왔다. “홀아비 염장 지를 일 있냐? 부부들이 다정히 오게. 공항에서 꼼작 말고 기다려라.” 일년 전 송별식 때 마누라한테서 해방되었다고 기뻐하던 경희였다. 비행기 바로 뒷좌석에는 산업 연수생으로 왔다 귀국하는 인도네시아 두 친구가 있었는데, 자카르타 도착할 때까지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인도네시아 친구가 있다고 하면서 말을 걸었다. 고생은 안 되었냐고 , 돈은 많이 벌었냐고 , 얼마나 좋으냐고. 그들은 다시는 한국에 안 오겠다고하는데, 금방 그들의 눈이 불그레해졌다. 그들 중의 하나는 헤어질 때 내손에 입을 맞추며 몇 번이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내 몇 마디 말이 따뜻함을 주었는지.
자카르타 공항에서부터 몇 마디 공부한 인도네시아 말을 열심히 해댔는데, 정작 이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시누크 야크”, 인터넷을 뒤져서 공부한 말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감사하다는 말은 “시누크 야크”가 아니고 “때리 마카시”라고 했다. 맞는 말은 하려면 기억이 안 나고, 틀린 말은 금방 떠올랐다. 공항에는 경희와 사촌동생 진희 내외가 나와 있었다. 진희는 삼성전자 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둘이는 한국에서부터 아는 사이이다. 밤늦게 자정이 넘어서야 경희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 이름이 이채롭다. ‘카사브랑카’ 말하자면 외국인 아파트이다. 월세가 백 오십만 원이 넘는다니, 경희 녀석 귀족이 아닌가?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젊은 경비들이 지뢰탐지기 같은 것으로 차량이 들어올 때마다 검색했다. 외부 사람이 아파트에 들어올 수 없도록 경비 씨스템이 우리나라 고급 아파트 못지않다고 한다.
2. 자카르타 관광
눈을 뜨니 아침하늘은 우리나라 가을하늘을 보는 듯했다. 야자수가 미풍에 흔들리고, 옆방을 보니, 아직 경희는 엎디어 자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경희의 새까만 잔등이 매끄러웠다. 이 녀석이 외로운 것이 아니고, 방문한 우리가 오히려 외로운 게 아니냐? 경희의 말로는 인도네시아에 살고 싶다고 한다. 아파트 내 풀장도 야외 풀장 못지않고, 골프도 부담 없이 칠 수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좋다고 한다. 순박하지만 자존심도 있고, 또 서두르지 않으며, 동료나 상대방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꼬집는 법이 없다고 한다. 아침식사 후 나갈 차비를 하고 있으니, 파출부 우찌가 와서는 조용히 움직였다. 경희가 “우찌”하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듯 했다. 여기저기 돈이 굴려 다녀도 손댈 줄도 모르고, 무척 착하다고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자카르타 근교에 있는 따만 사파리였다. 사파리는 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더위를 못 느꼈는데, 사파리 가는 길거리에는 바나나. 당근을 파는 행상들이 줄지어 있다. 경희가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있는 기사 얀트가 큰 줄기째 수확한 바나나 뭉치와 당근을 대여섯단 사서 차에 넣었다. 당근은 깨끗하게 씻어 먹음직스러웠고 묶음도 꽤 컸다. 무엇하려고 이렇게 많이 살까 하고 내심으로 의아해 하면서 우리들은 바나나를 벗겨 먹었지만, 몇 개 못 먹어 질리고 말았다. 먹성 좋은 내가 당근을 먹었더니, 얀트가 빙긋이 웃었다. “저거 동물들 줄 것인데”하는 눈치이다.
사파리에 들어서자 우리들은 차에 달려드는 사슴, 새, 원숭이, 염소들에게 먹이주기 바빴다. 먹이를 주려고 차창을 열면 동물들이 머리를 들이미는데, 힘센 놈들만 먹고 또 먹고 하니 얄밉기까지 했다. 사자, 호랑이 우리는 차가 앞에 가면 문이 열리고, 차가 들어가면 문이 자동적으로 닫힌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치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자연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은 코끼리와의 상봉이었다. 조그마한 바나나를 하나하나 떼어선 코끼리 코에 얹어 주었는데, 코끼리 비스켓 주기였다. 길고 굵은 지팡이보다 큰 바나나 줄기를 한번에 먹어 치우는 폼을 보니, 얼마나 감질이 났었을까? 기념사진을 찍는 우리들을 뒤에서 큰 코로 밀어댔다. 여자들은 깜짝 놀라 괴성을 질러댔고.
점심은 인도네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을 택하였다. 내가 쌀과자 같은 것, 채소, 과일 등이 보기 좋게 담겨있는 메뉴를 선택하였더니, 맛있어 보이던지 전부 따라서 주문을 하였다. 이름이 가도가도라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 전부들 학질을 떼었다. 내가 공연히 죄지은 것 같아 열심히 먹어 보았지만, 절반도 못 먹었다. 경희가 맛있다고 주문한 과일 쥬스도 한 모금 마시더니 전부들 고개를 흔들었다.
오후에는 민속촌 타만 미니 인도네시아와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독립 기념탑, 모나스를 찾았다. 민속촌은 엄청난 규모에 비해 운영이 엉성했다. 인도네시아도 인도 못지않게 큰 나라로, 인종. 문화가 다양하며 주별 특성이 강한 나라이다. 따라서 주별로 고유한 건축양식, 전통의상, 문화유산 등을 엿볼 수 있었지만, 발리관을 제외하고 관광객들이 적었다. 발리관에는 젊은이들이 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타악기 연주에 맞춰 전통춤에 열중이었다. 그 진지함이 부러웠다. 모나스광장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고, 장난감 같은 조랑말마차가 손님들을 태우고 모나스 독립기념탑까지 왕복운행을 했다. 인도나 연해주에 가면 손 벌리는 아이들이 무섭기까지 한데, 이곳은 이들이 있어도 양순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자카르타 중심지를 지날 때, 명식은 옛날에 숙박했던 호텔 인도네시아를 가리키면서 향수에 젖었지만, 지금은 너무 낡은 느낌이 들었다. 빌딩들은 공간적 여유가 있고, 하나하나 건축미를 느끼게 하며, 똑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서울의 질서 없는 빌딩들과 비교하면서 우리들은 감탄을 연발했다. 자카르타의 건축규제가 말도 못하게 엄격하다고 한다.
저녁은 경희가 한턱 쏜다며, 대표적인 인도네시아 해산물 음식점, 폰독 라구나로 우리를 안내했다. 긴 세면대는 식전, 식후로 손을 씻는 고객들로 붐비었다. 인도네시아식으로 생선, 바닷가재 등을 요리하였는데, 향료, 조미료 등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두 손 다 버려가며 내가 제일 열심히 먹었다. 일인당 만 삼천원 정도 들었으니까 푸짐한 음식이었다. 음식가리기로 유명한 기선생은 아무 소리 없이 잘 먹었는데, 오히려 우리 집사람은 점심부터 속이 거북하다고 불평이었다.
배가 불러 숙소로 돌아오니 진희 부부가 포도주와 집에서 만든 한국요리를 싸들고 쳐들어 왔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나물들이 따로따로 은박지에 포장이 되어 있었다. 제발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못 말리는 제수씨다. 호주산 포도주는 맛이 그만이었다. 한 병은 아껴 두었다 우리 간 다음에 경희 마시라고 냉장고에 잘 보관해두었다.
3. 발리로 출발
제수씨 덕분에 아침은 된장찌개가 곁든 비빔밥으로 포식했다. 어제 저녁보다 백배 낫다고 모두들 만족했다. 여자들 정리 정돈하는 동안 남자 셋이서 아파트 뒷문을 나섰다. 경희말로는 1년 가까이 사는 동안 뒷동네를 처음 나와 본다고 했다. 마음은 있었지만 겁도 나고 해서. 이슬람 사원이 조금 떨어져 있고, 공동묘지가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서양식 묘지이다. 적은 면적의 직사각형 묘지와 조그마한 묘비, 그리고 참배객이 놓고 간 꽃들. 우리나라처럼 빈부의 격차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묘지이었다. 없는 자들의 묘는 붉은 흙이 흐트러져 있고, 사각형 틀이 무너져 있는 등 허름하긴 했지만, 꽃송이 들이 놓여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위에는 열대성 나무들과 꽃등이 무성했다. 사람 역시 자연으로부터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 고리의 일부가 아니냐. 어제 잠결에 들었던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중얼중얼거리는 예배소리는 성실한 염원들이 아니었겠느냐.
공동묘지 옆의 빈민촌 속을 걸었다. 허름한 판자 집 촌이지만 청결했고, 옛날 청계천 판자촌의 역겨운 냄새는 없었다. 사람들도 우리를 외계인 보듯 했지만,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았고, 구걸하는 애들도 없었다. 명식은 또 한번 감탄했고, 우리들은 내친 김에 재래시장 한바퀴를 돌았다. 우리나라 구시장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손질해 놓은 닭들도 있고, 꽤 사람들로 붐비었다. 우리는 예쁜 처녀아이와 어머니가 운영하는 과일가게에서 못 보던 과일들을 두세개 씩 담아달라고 했다. 두 여자는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아파트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맛보았는데, 별로였다. 경희 말로는 맛있는 과일은 비싸고 현대식 마트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경희는 인도네시아 사람이 다되었다. 피부가 까무잡잡해졌을 뿐 아니라 행동거지도 느릿느릿하다. 덕분에 시간 빠듯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뿐만 아니라 예약한 발리행 비행기가 뜨는 터미널1이 아니고, 터미널2로 향했다가 예약한 스타항공 비행기를 못타고 말았다. 돈을 절약하려고 가루다항공 대신 선택한 스타항공인데. 승무원을 붙잡고 사정하는 경희가 애처롭게 보였다. 키 크고 미남인 스타항공 직원은 영어도 유창했다. 초조하게 기다리니, 아까 그 직원이 2시간 후에 떠나는 가루다 항공 좌석을 추가비용 없이 확보해주었다. 그리고 터미널 2까지 차로 우리를 데려가서는 가루다 카운터까지 안내해 주었다. 쫓아가며 팁을 주었더니 사절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선진국에 온 느낌을 받았다. 공항 검색 시 가방에 든 수저 때문에 소리가 삑 나자, 우리는 입을 모아 “숟가락 젓가락, 숟가락 젓가락”했다. 검사원들은 눈으로 보고 왜 그런지 알았을 터인데.
시간은 남고 배는 고프던 참인데, 경희가 공항 내 VIP 레스토랑을 찾아 주접을 떨었다. 아멕스 골드카드 소지자는 무료 써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 이었다. 써먹지도 않는 일반카드를 보여주니 돈을 내면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디스카운트 노우?” 능글맞게 경희가 물었더니 얼마간 가격을 할인해 주었다. 다섯명은 배낭을 둘러메고 입장을 하였는데, 온통 귀티가 나는 손님들뿐이다.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뷔페식으로 차려진 음식을 굶주린 쥐 떼처럼 들락날락거리며 포식했다. 체면이 밥 먹여 주냐고.
먼저 레스토랑을 나온 내가 레스토랑 앞에서 차를 팔고 있는 아가씨들과 말을 걸고 있는데, 뒤쫓아 온 경희가 나를 가리키며 “디다 바구스” 했다. 바구스는 좋다라는 말이고, 디다를 붙이면 안좋다는 말이다.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는 때에, 늦게 나온 명식이 처녀들보고 “찐따”했더니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잔띡(이쁘다)”이라고 하려든 말이 얼떨결에 “찐따(사랑해)”라고 말했는데 물론 알고 한 말은 아니었다. 뜻을 안 처녀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뒤 따라온 아줌마들 “그사이 한눈팔고 있네.”했다.
여하튼 비행기 놓친 덕분에 유유자적하며, 스타보다 한급 위인 가루다 비행기를 타고 발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다섯시가 다 되었다. 호텔까지 갈 택시를 잡는데, 이곳은 택시 티켓을 우선 귾은 다음에 순서대로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타게 되어 있다. 바가지요금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인 것 같았다. 우리가 “디스카운트 노우?”하니까 매표소 직원들 빙글빙글 웃기만 한다.
발리시간은 서울보다 한시간이 늦다. 자카르타가 서울보다 두시간 늦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동쪽으로 왔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묵은 닛코 리조트는 최상급 호텔에 속해 있는데, 해안을 내려다보며 숙소가 경사면에 가파르게 층층이 자리 잡고 있다. 경희가 무슨 수단으로 이곳을 공짜로 예약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우리들의 경비 부담을 줄이려고 일부러 한 말인지 모르겠다. 여장을 풀자마자 수영복 갈아입고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경희만 빼놓고 높은 파도에 겁들만 먹었지만, 그래도 신들이 났다. 집사람은 해변 옆에 자리 잡은 야외풀장에서 수영하면서 우리를 부르는 폼을 보니 오기는 잘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자카르타에서 가져온 전기밥솥과 못 말리는 제수씨가 준비한 반찬으로 해결했다. 아침에 이어 비빔밥으로 하여 먹었는데 꿀맛이었다. 87년도에 뉴델리 소피아설야호텔에 머물 때 큰 전기밥솥으로 밥해먹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당시 인도 축구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기업은행 축구팀도 같은 호텔에 있어, 이들을 응원한 결과 커다란 전기밥솥을 얻었었다. 인도음식은 잘 안 맞고, 얼마나 요긴하게 써먹었는지 모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식후 해변으로 나섰더니 보름달이었다. 소주 한잔 걸치니 부러운 것이 없고, 파도소리 그리고 바닷바람의 감미로움이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집사람의 손가락을 따라 모두 북두칠성을 찾아 별을 세는데,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만 사악한 인간이 아닐까?
4. 발리관광
뷔페식 호텔 아침은 먹을 만했다. 굶은 사람들처럼 많이도 갖다 먹었다. 아침에는 소낙비가 꽤 내렸다. 어제 경희가 물안경하고 시계를 잃었다고 하여 한바탕 찾는라고 수선을 피웠다. 해변 풀장에서 비를 맞으니 소름이 돋는다. 어린이용 소형 풀에는 따뜻한 물이 나왔다. 여기서 노는 것도 싫증이 나자, 봅스레일 스타일의 긴 미끄럼틀을 탔다. 제어가 잘 안되니까 고속으로 질주하다가는 풀장으로 푹 낙하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겁 많은 집사람은 한번 맛들이니까, 몇 번이고 계속했다. 에버랜드 가면 10만원 짜리라고, 큰돈 벌었다고 놀려댔다. 덩치가 작은 산만한 서양 아줌마가 겁먹고 올라갔는데, 낙하하니 물 튀김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손 흔들어주니 신이 나서 두꺼비 손을 흔들어댔다.
오후는 저녁식사가 포함되어 있는 반나절 발리 관광코스를 가기로 하였다. 시간이 되니 한국어 가이드 뿌찌가 기사 딸린 차를 대기시켰다. 그녀는 28세 노처녀인데, 일본 가이드로도 뛴다고 한다. 한국어는 서툴렀지만 쎈스가 있고 예의가 바르다. 만남 등 한국어 노래도 몇 곡 불렀는데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인도네시아 가이드를 쓰도록 하는 모양이다.
원숭이 숲(Monkey Forest)을 먼저 들리고, 타나 롯이라는 힌두교 사원을 구경했다. 원숭이들은 사나웠고 먹이를 달라고 야단이었다. 큰 나무위에는 덩치가 큰 과일박쥐(Fruit Bat)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과일을 먹고 사는 박쥐도 있는가보다. 해변의 사원은 절경이었다. 인도에서도 힌두교 사원을 수없이 보았지만, 이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사원은 처음이었다. 오가며 보는 발리 농촌 마을은 우리 농촌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마침 의원 선거일이라 마을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평화롭게 모여 있었다. 논은 농사를 짓는지 마는지 잡초가 절반이었다. 인도네시아가 쌀을 수입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이어서 일몰을 보려고 쿠다비치를 찾았다. 3년 전 폭발사건이 있었던 곳인데, 사건이후 발리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는 했지만 아직 예전만 못 하다고 한다. 백사장이 상당히 길게 뻗쳐 있고, 보기에도 큰 해수욕장이다. 아직까지는 보통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제일 즐겨 찾는 해수욕장이라고 한다. 경희와 나는 내일 아침거리를 준비하려고 시내에 있는 까르프 매장을 찾았는데, 번화가는 명동 못지않았다. 먹어보지 못하고 맛있는 과일위주로 쇼핑을 했다.
저녁은 아비안보가라는 식당에서 먹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자들이 감보자라는 하얀 꽃을 머리에 꽂아줬다. 오후에는 더위에 시달렸으니 시원한 맥주부터 시켰다. 식단은 우리 입맛에 맞는 것만 일부러 고른 것 같았다. 나시고랭(볶음밥), 아얌사체(닭고기 고치구이)등 입맛에 맞았다. 옆자리 일본인들의 식탁을 보니, 전형적인 일본 식단이었다. 식사 중에는 발리 전통 무용 네가지를 보여주었다. 환영의 춤, 새 춤, 무사의 춤, 벌 춤 등. 손가락 놀림은 많이 보아 오던 것이고, 댄서의 눈동자 돌리는 양태가 이채로웠다. 춤이 끝나고, 댄서들과 사진을 촬영하였다. 태국 같으면 돈을 달라고 요구를 할 텐데 그렇지도 않다. 택시를 탈 때부터 죽 느껴왔지만 관광업소들이 관광객들을 편하게 했다. 호텔 로비에서 비용 지불 때는 모두들 만족하여 팁을 후하게 주었다. 생각해보니 예약 시 1인당 30불 요금을 25불로 할인했었는데, 그마저 깜빡하고 다 지불했다. 멍청이들.
발리의 마지막 밤은 소주로 죽여주었다. 인적도 없는 호텔의 바닷가는 쓸쓸하기 그지없고, 쿠다비치에서 사온 아주까리 닮은 과일을 까먹는 맛도 괜찮았다.
5. 다시 자카르타로
아침에 여자들은 호텔 방에서 기찬 일출을 보았다고 좋아했는데, 우린 별로 감흥이 없다. 방은 두개에 네명이 이박을 하는 것으로 예약이 되어있어, 아침 티켓을 모두 8장 받았다. 어제 5장 쓰고 3장이 남았다. 여자들하고 서로 안가겠다고 싸우다가 남자들이 패배하여, 남자 셋이 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식후에는 호텔 주위 절경을 구석구석 돌아보고 짐을 꾸렸다. 호텔 앞에 뿌찌가 와 있었다. 이왕 택시를 타느니 어제 이용한 그들의 차를 쓰기로 했었다. 공항에서 그녀를 이별하고 발리산 포도주 한병을 샀다. 달러 통용이 안 되고 루피아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스타 비행기는 가격이 저렴해서 그런지, 여석이 하나도 없었다. 기내식도 가루다와 차이가 난다.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 다시 모나스(독립기념탑)를 찾았다. 지난번에 꼭대기를 못 올랐기 때문이다. 내려다보는 자카르타 시내는 우리 서울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시야도 밝지 못하고, 내려앉는 인도네시아 경제는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다.
저녁에는 진희 초청으로 부자동네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지우, 은비 조카들 모두 잘 자라고 있었다. 게 매운탕에 포도주를 들고, 염체 없이 제수씨가 주는 음식 보따리와 선물 보따리를 갖고 아파트 카사브랑카로 귀향했다.
6. 떠나는 날
아침 인도네시아 친구, 마할시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쟈바섬 동쪽 끝부분에 있는 말랑에 살고 있는데, 딸들 다 시집보내고 두 내외만 산다고 한다. 요번에 꼭 방문하려 했는데 미안하다고 했더니, 무척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의 선한 얼굴과 콧수염이 눈에 선했다. 사실 나 혼자 더 머물면서 골프도 한번 치고, 마할시도 볼 계획이었는데, 일행들이 반대를 했다. 여행은 4-5일하면 지치는 것이 정상이고, 또 주인 경희도 피곤함이 역역했다.
오전 늦장부리다가 다운타운의 파사라야 백화점을 찾았다. 바틱은 인도네시아 고유한 염색방법을 사용한 직물인데, 여름옷으로 간편하고 시원하다고 한다. 어머님 것 하나, 진희 어머님 것 하나 사고, 폴로 셔츠 몇 개 샀다. 셔츠는 하나에 만 오천원 정도로, 색상과 디자인이 괜찮았다. 백화점 여직원들은 느릿느릿하고, 파는데 적극적이지 못하다. 맞는 크기가 없어 찾아보라고 하니 귀찮아했다. 속셈도 더디다. 예를 들면 67,500루피아의 물건을 사고, 100,000루피아와 동전 500루피아를 주니, 헷갈려 계산을 못했다.
점심은 빅맨 큰 것 하나씩 먹었는데, 이곳 점원들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날쌔고 쾌활했다. “디스카운트 오케이”하였더니 깔깔대기 만 했다. 쇼핑을 끝내고 기사 얀트를 핸드폰으로 불렀더니, 연결이 안 되었다. 알고보니 때가 졸릴 때이라 깜박 졸은 모양이었다. 30분 이상 백화점 앞에서 헤매는데, 지나가는 인도네시아 여자들 서울여자들 뺨 칠만큼 예뻤다. 아파트로 오는 길, 못 말리는 제수씨 또 쫓아 왔다.
오후는 아파트 수영장 야자수 그늘 밑에서 빈둥거리다, 저녁은 제수씨 싸준 음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모두들 제수씨 칭찬이었다. 마지막 저녁은 술 없이 지내려 했는데, 결국 맥주 한 켄 씩 하였다. 23시 10분 비행기를 타러가는 차안에서 경희와 얀트는 인도네시아 말로 뭐라고 뭐라고 정답게 말을 건넸다. 4월말이면 경희도 회사 그만두고, 얀트도 그만 둘 터인데, 속으로는 둘 다 동병상련일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면 얀트네 집을 방문하여,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생활 속을 기웃거려 보려고 했었는데 못내 아쉬웠다. 경희와 이별한 후 출국절차를 마치고 면세점을 한바퀴 돌려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경희는 딸의 졸업식도 있고 하여 5월 한달은 미국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니 피곤이 엄습했다.
바구스 인도네시아. 슬라맛 팅갈(안녕) 인도네시아, 겨울에 다시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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