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북유럽 가을여행(상트페테르부르크2)

난해 2017. 11. 27.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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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길의

인공으로 조림된 자작나무.

자연산 자작의 자유분망함이 없었다.

 

 상트페트로부르크는 도시의 창설자

표트르대제의 이름을 땄기도 했고.

성베드로의 도시라는 뜻도 되고.

 

표트르는 페트로(베드로, 영어로 Peter)의

러시아 발음.

 

1914년 독일식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했다가, 1924년 레닌그라드로,

1991년 다시 상트페트로부르크로 환원.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트로부르크는

 인구 5.3백만의 러시아연방 직할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네바강 하구에 세운 요새에서 시작,

1712 수도가 되었고  2세기동안 러시아의수도.

 

 

백여개 섬을 삼백여개 다리로 연결했고,

건설과정에서 군인 4만, 민간인 7만이 희생됐다.

 

18세기중엽, 러시아바로크양식의 겨울궁전 등이

들어섰고, 1861년 노예해방으로 공업도시화.

 

1905년 전제왕조에 항거한 피의 일요일이 있었고

1917년 2월 볼셰비키혁명으로 왕조는 종말을

맞았으며,1918년 수도가 모스크바로 이전되었다.

 

 

 

바다는 발트해의 일부인 핀란드만.

좌측 페테르고프에 여름궁전이 있다.

 

우리는 여름궁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으로 이동을 완료했다.

 

 

네바강이 흐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경치는

 고풍스러웠다. 네바강은 74키로 길이인데,

32키로 구간이 도심을 통과한다.

 

네바는 핀란드어로 늪지대라는 뜻.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산이 없는 평지이라

네바강의 홍수는 대재난이었다.

 

1777, 1824, 1924년 대홍수는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1999년 홍수도 대단했다.

 

점심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현지식으로.

그리고 본격적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관광

 

 

 

예카테리나2세가 세운 표트르대제의 기마상.

 

총신들은 그녀의 기념비를 세울 것을 권했으나

표트르대제의 동상을 세우게 함으로

독일출신이라는 민중들의 거부감을

누그러뜨리고, 귀족들의 환심을 샀다.

 

동상은 제까브리스뜨광장(종무원광장)에 서있다.

이곳은 1825년 귀족출신 엘리트장교들이

농노제 폐지와 전제군주 견제를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킨 곳.

 

 

 

1710년 표트르대제를 위해 세웠던 목조 이삭교회

자리에 1808년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이삭사원. 프랑스건축가 몽페랑이 건축.

 

황금빛 쿠폴은 백키로 이상 나가는 황금을

녹여 만들었다. 러시아 고전주의 건축의 대표.

 

표트르대제가 자신의 수호자로 생각한 이삭은

달마치아(크로아티아 도시)출신 정교회 성인.

 

 

 

연분홍의 여름궁전과는 달리

연민트색으로 치장된 겨울궁전은 18세기

중반에 꽃피운 러시아 바로크건축의 대표.

 

최초의 겨울궁전은 1711 세워진 표트르대제의

저택이었으나 예카테리나, 안나여제가 증개축.

 

궁전 건축과정에서 인부들의 희생이  많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흰 뼈들 위에 세운

도시'라는 오명이 나왔다.

 

겨울궁전이 에르미타주박물관이 된 것은

1917년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 직후.

 

 

 

궁전광장은 1905년은 피의 일요일 시위,

1917년은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이

아브로라호의 한 발 공포로 시작된 곳.

 

1861 농노해방으로 착취받는 노동자로 전락된

계급들이 레닌 주도하에 일으킨 혁명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인구 67백만명중 40백만명이 농노)

 

광장의 47.5미터의 알렉산드로프 원기둥은

181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 

원주 꼭대기는 십자가를 안은 천사의 상.

 

 

 

알렉산드르 3세(1845-1894)가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 의지당 테러리스트에게

피살된 자리에 세운 그리스도 부활 사원.

 

아버지가 좋아했던 전통적 러시아 양식의

사원을 건축. 둥근 양파 모양의

쿠폴(큐폴라)이 인상적이다.

쿠폴은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알렉산드르 2세(1818-1881)는 러시아 후진성을

탈피하고자 농노제 폐지 등 사회 전반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하여 해방자로 추앙받은 황제.

 

 

 

우리는 요르단 계단을 올라, 은자의 집,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관람. 옛날 귀족들은 이곳을 저술과 독서,

골동품을 모아놓는 은밀한 장소로 사용.

 

에르미타주 국립박물관은 예카테리나여제가

모은 미술품, 골동품, 귀중품을

보관하는 에르미타주 건물들을 겨울궁전과

연결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볼테르, 루소 등의 사상과 프랑스 계몽주의를

러시아에 전파한 예카테리나여제는 소장품이

 늘어나자, 에르미타주 건물들을 증축했고.

 

세계3대 박물관의 하나인 이곳은 고대, 동서양

 예술품 등 270만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등의

작품을 볼 수가 있다.

 

 

 

예카테리나2세(1729-1796)는 프로이센출신 독일인.

표트르대제의 손자이며 그녀의 남편인, 표토르3세를

몰아낸 계몽 전제군주.

 

전쟁과 외교에도 능해 영토를 남, 서쪽으로

확장하여 러시아의 기틀을 잡았고,

볼테르 등과 교류, 문학, 예술, 교육을 장려했다.

 

어떻게 보면 표트르대제의 계획을 착실히

실행한 셈.

 

남성편력도 대단하여 정부가 3백명이 넘었는데,

귀족 여부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고.

 

그녀의 손자 알렉산드르(1777-1825)는

조국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퇴했다.

 

 

미네르바와 함께 있는 표트르대제. 미네르바는 공예

직업 예술의 여신. 나중에 전쟁의 여신이 되었다.

 

 

밀리터리 갤러리. 알렉산드르1세가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을 기념, 332명의

초상화가 있다.

 

박물관 들어올 때는 외투를 벗어 맡겨야

하는데, 그것이 싫어 버스에서 벗어 놓았다가

감기들릴 뻔하였다.

 

버스에서의 거리가 만만치 않았고,

워낙 바람이 불고 추워서

박물관 들어올 때 나올 때, 미련한 나 때문에

집사람도 냅다 뛸 수 밖에. 

 

 

성조지 홀에 있는 대옥좌.

성조지는 악룡을 퇴치한 수호성인.

 

 

 

18세기 제임스 콕스가 만든 황금공작시계.

 

그레고리 포템킨 장군이 구입하여

예카테리나2세에게 선물한 것.

그는 사실상 그녀의 남편노릇을 했다고.

 

특별 행사기간이 되면 시계를 작동시킨다.

수닭과 부엉이가 울면 공작이 날개를 편다고.

 

 

 

에르미타주박물관은 4개의 건물로 되어있고

통로로 연결. 박물관 구조는 미로와 흡사.

이곳을 모두 보려면 20키로를 걸어야 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가운데 불만스러운 큰아들의 표정이 나타나있고,

아버지의 왼손이 여자 손이다.

아버지의 강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동시에 표현했다고.

 

 

 

 

렘브란트(1606-1669)의 '다나에'

 

그리스신화에서 아크리시오스왕은 외손자에게

죽는다는 신탁을 받고, 사랑하는 딸, 다나에를

청동탑에 가두나, 제우스는 공주 몸속으로

 들어가 영웅 페르시우스를 탄생시킨다.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

 

아버지 시몬이 감옥에 갇혀 굶어죽는 벌을

받자, 딸 페로가 젖을 먹였고, 그 효성에

 감복한 황제가 사면을 했다.

 

 

루벤스1577-1640)의 '십자가를 벗다'

압권은 중앙의 그리스도. 다른 인물들은

모두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다.

 

박물관에서 내려다 보는

궁전광장 입구 참모본부건물 개선문 위의

승리의 여신, 니케가 마차를 타고 있는 조각상.

러시아가 나폴레옹군대를 물리친 것을 상징.

 

참모본부 건물은 이태리건축가 로시의 설계에

 따라 1819-29년에 지은 고전주의 양식 건물.

 

 

 

프랑스작가 팔리코네(1796-1791)의

'손가락을 입에 가져대는 아무르'

 

이 국립박물관들의 소장품은 2차 대전 당시

박물관직원들과 주민들의 처절한

희생 위에 지켜졌다.

 

9백여일의 독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포위와

파상적 공격으로 67만명의 희생자를 냈지만,

끝내는 이들을 막아냈다고.

 

 

 

로댕도 놀랐다는 볼테르(1694-1778)조각상.

불란서 조각가 장 앙투안 우동(1741-1828)이

예카트리나2세의 부탁을 받고 제작.

 

프랑스 작가이며 사상가인 볼테르는 여제와

방대한 양의 서신을 교환했다.

 

 

 

러시아제국의 해군사령부였던 구해군성.

자하로프가 설계, 1806-23년 건축.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 다시 시내관광.

한 가운데 끝에 구 해군성 첨탑이 보인다.

넵스키대로는 궁전광장과 구 해군성 첨탑

사이에서 시작, 도스토예프스키가 안장된

넵스키수도원까지 이어지는 4.5키로의 대로.

 

스웨덴,독일기사단의 침입을 막아낸 노브고로드

공국 의 공후, 알렉산드르 넵스키 이름을 땄다.

이도시의 3백년 역사를 담은 건물들이 서있고,

18-21세기까지 러시아 건축사의 흐름을 본다.

 

이 도시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형상들이 형성되어 순환되는 이 도시의동맥.

 

사실주의 작가, 고골리가 '코'와 '외투'에서

이 거리를 잘 묘사했다.

 

 

 

넵스키대로 초입의 농노출신 보로니힌이 건축한

 카잔대성당. 바티칸 베드로대성당을 본땄다고.

 안에는 카잔의 성모이콘이 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된 성모마리아 이콘이

러시아 볼가강유역 카잔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타타르 침공으로 사라졌다가 백년 후 한 소녀의

꿈으로 찾을 수 있었다 한다.

 

폴란드 침공, 스웨덴 전쟁, 나폴레옹 전쟁시

이콘을 들고나가 승리했다고.

 

넵스키대로는 관용의 거리라 불리는데 다양한

                                                          교회들이 이곳에 설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                                                           

 

 

 

1828 카를로 로시가 건축한 알렉산드린스키극장.

신고전주의 건물. 황제 니콜라이1세의 부인,

알렉산드라 페도로브나의 이름을 딴 극장.

 

황실 전용 극장의 성격을 띄고 있다.

고골리의 '검찰관'이 이 극장에서 초연됬을 때

니콜라이1세는 관리들의 부패한 모습에

몹씨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고.

 

마린스키극장과 더불어 발레 발전에 큰 공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을 관통하는 폰딴까

운하에서 유람선을 탔다. 폰딴은 샘이라는 뜻.

폰딴까는 여름정원의 샘에서 흘러나온 물을

연결한 것에서 유래.

 

폰딴까 주변의 토지는 표트르대제 측근에게

배부되어 이태리 건축가 뜨레지니에 의해 설계.

이운하에 화려한 대저택과 궁전들이 많은 까닭.

 

폰딴까운하가 시작되는 초입에는  여름정원이 있고.

이정원에서 러시아의 건축과 정원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정원은 표트르대제때부터 조성.

 

 

 

폰탄카의 샛강변에 위치한 셰레메체프궁전은

1표트르대제가 키에프 귀족출신인

셰레메체프 육군원수에게 하사한 것.

 

이도시의 대표적 바로크건축물. 키프란스키가

이곳에서 푸슈킨 초상화를 그렸다고.

국민음악파의 미하일이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의 날씨는 엄청 추워, 갑판에서

견뎌보려하다, 결국은 실내로 들어갔다.

시원한 맥주도 마셨지만, 추위 견디는데

소용이 없었고.

 

 

BTB는 스마트폰 광고물.

 

 

유람선의 출발과 함께 뛰기 시작,

지나는 다리마다 손을 흔드는 젊은이.

의도적이었지만, 유람후 먹을 것 등

한 보따리를 얻었다.

 

운동도 하고, 먹을 것도 얻고.

 

 

볼세비키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아브로라호.

1904년 러일전쟁에 참가했던 배.

 

이 배에서 쏘아올린 한 발의 신호탄으로

1917년 10월 혁명이 시작됐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삼성, 기아의 광고.

 

삼성은 러시아에서 사랑받는 브랜드 1위.

기아는 자동차 점유률1위.

 

톨스토이문학상 후원, 에르미타쥐 박물관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 진행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의 결과, 여간해서는 허가가 안되는

 광고물을 설치할 수 있었다고.

 

 

 

토끼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키(베드로와 바울)

 요새와 사원의 황금빛 첨탑(122.5미터).

이섬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창세기의 성지.

 이곳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이 시작됬다.

 

표트르대제는 이곳에 사도 안드레이의 유골을

묻었다고. 안드레이는 슬라브족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

 

러시아민중들 사이에 표트르대제는

인간말종으로 반그리스도라 불리웠는데.

 

사원은 표트르대제때 이태리건축가가 건축.

19세기에 현재 모습의 첨탑이 세워졌고.

이곳에는 표트르대제를 포함, 알렉산드르

3세까지 로마노프황족의 유해가 묻혀있다.

 

요새는 전쟁에 이용된 적은 없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정치범수용소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국립역사박물관.

 

첫번째 수용당한 사람은

표트르대제의 아들, 황태자.

 

 

 

바실리예프스키섬에 있는 꾼스까메라.

(오른쪽 푸른색과 흰색의 건물)

골동품진열실이라는 뜻.

초기 러시아 바로크양식의 대표.

 

표트르대제가 세운 최초의 박물관이며

러시아 제일 큰 인류학 민속학 박물관.

 

 

 

이섬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1724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푸틴, 레닌, 파블로프가 졸업생.

 

 

네바강이 소 네바와 대 네바로 갈라지는

겨울궁전 건너편, 바실레프스키섬 입구의 거래소

(가운데 건물, 현재 중앙해전박물관)와

붉은 색의 해전기념 원주.

 

해전 기념의 원주의 기원은 고대 로마.

해전에서 승리한 로마해군은 나포한 적의

선박 뱃머리를 잘라 기둥에 매달았다.

 

해전기념원주는 1810년 거래소와 조화를 위해

 세운 기념물. 기단에는 뱃머리와 로마의

해신상이 있다. 한때 등대로 사용하기도.

 

 

 

스웨덴에도 절절맸던 조그만 나라의 러시아

제국으로의 발전, 이에 이은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공산진영의 맹주로의 등장 등

러시아는 불가사의한 나라다.

 

허나  이들의 현실은 만만치 않은가보다.

이혼율이 70%로 세계1위.

그래서 새아빠 새엄마보다 친구가 좋다고.

 

알콜중독도 큰 문제이고, 빈부격차문제도

만만치 않다고.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설명이 잘 안돨때

 예따러시아(이것이 러시아다)고 한다는데,

자조적인 말이 아닐까.

 

 

미하일롭스키성.

러시아미술관의 분관으로 사용 중.

 

러시아사람들은 잘 웃지를 않는다고.

야슬리(유아원) 때부터 시작되는 교육환경,

기후, 감시사회, 대가없이 시키는대로 하는

작업여건 등이 원인이라는데.

 

 

아니치코프다리.

오른쪽 흰 건물은 아니치코프궁전.

 

1750년 완공당시 엘리자베타여제의 연인에게

주어졌었는데, 예카테리나2세가 매입,

자신의 연인에게 선물했다고.

 

 

왼쪽 중앙 삼각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42개 섬중 가장 큰 섬으로 네바강의 진주,

 바실리예프스키섬.

 

우리는 도심에 있는 폰딴까운하를 거쳐

네바강으로 나왔다가 바실리예프스키섬

앞에서 되돌아 왔다.

 

 

 

1년에 65일 해를 볼 수 있는 도시,

유람선 투어를 마치니 또 비가 내렸다.

 

'빛의 도시'의 저자, 이덕형교수는

'러시아작가들은 빛 속에 갇혀있던 지난 여름의

인상들, 그 파편과 흔적들을 불러모아 겨울밤

내면의 공간에 깊이 가라앉아 쓰기 시작한다.'

 

'러시아문학의 힘은 긴 겨울 책상 위의 램프

불빛과 홀로 견디며 심연 속에 가라앉는 마음의

앙금, 그와 같은 힘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화려한 대형 기념품가게에

들렸다 나오니, 벌써 어둠이 짙어졌다.

 

 

 

화려한 롯테백화점.

이곳에서 큰 인기는 끌지 못한다고.

 

 

 

이삭성당을 중심, 청동기마상 반대편 광장에

있는 니콜라이1세(1777-1825) 기념비.

 

그는 결단력과 의지력의 황제로

위기의 시대에 억압정치를 폈고, 크림전쟁에

패배했다. 그 결과 자살했다 하기도 하고.

 

 

 

저녁 미가식당에서 한식을 들고, 귀경길에.

 

누구말대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웅장한 귀족

도시이며 민중을 억압한 전제적 도시.

 

지식인, 예술가들의 고뇌가 쌓인 도시이며

혁명과 반혁명이 부딪치고, 전쟁과 파괴,

테러와 암살이 빈번했던 아름다운 도시.

 

올때와 마찬가지로 빈자석이 많았던 비행기.

다리를 빈 의자에 쭉 뻗고 자며 올 수 있었다.

영화 볼 시간도 없이.

 

 

요번 북유럽 가을여행도 뜻있는 여행이었다.

물론 늙은 티를 슬슬 내보였지만.

 

 북구 각 나라가 이웃나라에 복속당하는

경험이 있다,  많게는  8백년 넘게.

 

아직도 점령국이었던 나라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있고, 경제나 국력이 역전된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애국심은 대단한 것 같다.

 

36년은 그들에 비하면  비교도 안되고.

문제는 자꾸 과거만 뒤씹을 것인지.

 

언젠가 그들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은 팽개칠 것인지.

 

되풀이되는 민족내의 다툼을 언제까지

지속할지, 작은 내 욕심을 위해.

 

 

인천공항에 내려 강화도를

지날 때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같이 여행한 친구부부에게 감사드리고,

지루한 여행기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