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일 돼지 4인방,
경강선을 타고 세종대왕릉으로.
지금은 경강선(京江線)이 판교-여주를 잇는 전철이지만
시흥 월곳과 강릉(경기도와 강원도) 간을 달릴 노선.
월곳-판교, 여주-서원주 사이의
철로가 계획 중이다.
이천 부발의 하이닉스공장 굴뚝에선 굵은 연기가 나고
여주 개천은 졸졸 흐르고.
추운 1월의 날씨라지만
아직 서울의 한강도 일부만 결빙된 상태.
실욕대지(悉欲貸之), 여비급가(女婢給暇), 무기인야
(無棄人也), 상형제지(象形制之) 등
세종대왕의 훌륭한 행적을 나타내는 말이 써있다.
백성을 위해 쉬운 글자를 창제하셨는데
지금의 후손들은 이렇게 어려웁게 표현하는지.
여비급가는 여자종에게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주고 그 남편에게도 30일간의 휴가를 주라고
세종대왕이 지시를 내린 일을 말함.
조심 조심하게 하셨다고.
세종대왕릉역에서 1코스를 따라 영릉으로.
4.4km.
우리가 첫 발자국을 남기기도.
새하얀 길을 따라,
포근한 날씨였고.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새들이 종종걸음 걷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윤동주, 1917-1945,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대신
'새들이 종종 걸음 걷고'를 넣어보았다.
산을 좋아하는 임대장이 새 발자국을 발견.
작년 4월 친구들(세혁친구 부부 포함)과
여강길 걸을 때 지나간 굴.
좋은 그림을 만들어 낸다.
도시의 네거리 사람들은
어디로 갈지 헤매이기 십상.
길을 잃을 염려가 없고.
옛동네나 전원마을이나
인기척이 없다.
담터 오르는 길가집과 같이
차량범퍼를 취급하고 있고.
눈풍경 찍을 때는 빛에 더 노출시키는데,
너무 노출시켰나 보다.
친구들은 여야당 대통령후보들의 건전한
선거공약이 없다고. 정견발표도 없고.
국회의원수는 100명으로.
국회의원 특권 배제.
지방자치는 도단위로 만 실시한다든지.
국가의 장기전략 등.
차라리 무소속후보들의 내용이 알차다고.
중학교시절 민관식 국회의원 정견발표시만 해도
학교운동장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찼었는데-
작년엔 절 앞에서 절의 주인과 한담도 나누었는데-
그는 허리수술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기도하는 어린이들.
잘 가꾸어져 있다.
쉼터도 있고.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안으로.
작년엔 코로나로 폐쇄되어 있었다.
상형제지(象形制之).
한글음자는 어금닛 소리 ㄱ, 혀가 잇몸에 닫는
모양 ㄴ, 입술소리 ㅁ 등
친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
세종때 황희, 맹사성과 함께 3정승의 한 분이었던
허조(1369-1439)는 장애인.
음악가, 박연은 맹인음악가를 양성하여
벼슬길을 열어주자 했고.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을 만들어
농업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과학자 장영실(-1442)은
노비출신. 아버지는 원나라출신,
어머니는 관노.
무기인야(無棄人也).
세종대왕은 장애인, 노비출신 등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정조대왕은 규장각을 설치
개혁정치의 산실로 활용했고.
1419년 대마도 정벌을 단행, 국방을 튼튼히 했다.
호란에 피폐된 민생복구와 군사력강화에 힘쓰고
대동법을 강화하고 상평통보 유통에 힘썼다.
1654년 1차 나선정벌, 1658년 2차 나선정벌을
통해 조선의 화력을 보였다.
그의 한많은 북벌정책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달성은 못했지만.
1654년 효종을 알현했고 1666년 일본으로 탈출,
암스텔담으로 귀국 후 하멜표류기를 썼다.
일찌기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좋은 기회였는데-
1674년 동구릉에서 현 위치로 천릉하는 과정을
도감으로 편찬.
1674년 인선왕후 국장에 관한 제반사항을 기록했다.
남한강 물길을 이용, 운구했다고.
1866년 병인박해 후 프랑스군이 외규장각(강화도
소재) 도서를 약탈해간지 145년만인
2011년에 외규장각의궤가 환수됨.
외규장각의궤는 왕실, 국가의 의식, 행사의 주최,
실행, 마무리 전과정을 보고형식으로 기록.
카페 앞에서 송대감 도토리묵+고구마+
임대장 오메기떡+커피.
돼지모임은 송대감 마님 덕에 항상 배 부르다.
만나자 마자 군밤+영양즙 먹었고.
송대감 왈, 아무것도 안싸주는
마님께도 감사해야 한다고?
오른쪽 아래 역사문화관- 광장- 재실-
왼쪽 세종대왕릉-왕의 숲길-효종대왕, 인선왕후릉-
재실- 역사문화관.
작년 4월 찾았을 때는 세종대왕릉은 보수중.
왕의 숲길도 못걸었고.
새로운 재실이 필요한가.
새로 지은 재실은 별 품위도 없어보이고.
열매를 잔뜩 달았다.
수명이 얼마 안남았는지.
애들 사진찍기에 열중.
두 사람은 찰떡 궁합.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임금은 태종, 성종 12명.
세종은 6명.
다산왕 태종은 12남 17녀를 두었고
세종은 18명.
소헌왕후심씨는 8남 2녀를 두었다.
첫째 둘째 문종과 세조는 임금이 되었고
3남 안평대군과 6남 금성대군은
세조에게 사사되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얼지 않고
아무리 더운 날에도 녹지 않는다
백 사람이 걸어가도 더럽혀지지 않고
백년이 지나도 그 모습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눈길
눈 내리는 날에나
눈 내리지 않는 날에도
우리 함께 걸어야 할 길
(양광모, 1963-, 여주출생, 눈길)
눈길이 헷갈린다.
돼지 4인방의 따뜻한 눈길이 교차한 날.
1688년 숙종, 1730년 영조,
1779년 정조가 직접 행차하였다.
효종대왕에게 먼저 참배하고
이 숲길을 통해 세종대왕에게 참배.
효종대왕릉은 1673년 동구릉에서 이전되었고
1674년 인선왕후릉 조성.
나란히 배치한 쌍릉이 아니고 상하로 배치한 능.
두 사람의 금슬보다는 풍수지리를 보는 능 배치.
세종대왕릉이나 이 능이나 옆에서 볼 수 있도록
길을 냈다. 참 잘한 일.
어렸을 때 서울 근교 금곡에 소풍 가서는
왕릉에서 뒹굴며 놀던 생각이 난다.
여자이니까 지키는 사람들이 더 든든해야겠지.
재실은 관리하는 참봉이 지내는 곳.
제관들이 머물며 제사음식을 만들고
제기를 보관하는 등 제사를 준비하는 집.
이곳에 옮겨 지었다.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고, 제방,
행랑채가 온전하게 보전됨.
대부분의 왕릉재실은 일제, 전란에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았으나
이곳 재실은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다.
공간구성과 배치가 뛰어나고.
낮게 자라고 자람이 늦은 늘푸른나무.
재질이 단단하여 인장용으로 많이 쓰여
도장나무라기도 한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2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버스.
작년에는 시청으로 또 강을 건너 신륵사로 걸었는데
겨울이라 날이 짧아 그럴 수가 없고.
여주의 인구는 11만 명.
시 중앙을 한강이 흐른다.
과거 백제의 요충지였으나 고구려, 신라로.
고려시대 황려현, 여흥.
영월루 아래 암혈에서 황마, 여마가
승천했다고 하여.
세종때 여주로 개명. 명성황후 생가,
북벌계획의 이완장군묘, 서희장군묘,
단종 어수정이 있다.
영월 가는 도중 물을 마셨다는.
여주에는 대담한 협상으로 거란대군을 물리친
서희장군(942-998), 무학대사(1327-1405)
탄생설화가 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과부가 아들을 낳아
버렸더니 학들이 보호하고 있었다고.
이 아이가 무학대사.
삼합, 게장 등에 돌솥밥.
어느새 임대장이 밥값을 지불했고.
감사.
백년탐욕일조진(百年貪慾一朝塵) 백년 탐욕은
하루 아침의 티끝.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짧은기간의
마음수양이라도 보배.
양 기둥에 써있는 말씀.
신륵사(神勒寺)는 미륵,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전설에서 왔다고.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
사대부의 풍류장소로도 이용되었고.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당호.
나홍선사(혜근, 1320-1376)는 보우와 함께
고려말 고승. 그림, 글씨, 시에 능함.
원나라에 건너가 인도승려 지공에게 배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마음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무 밑바닥이었던 정자는 홍수에 떠내려갔고
지금의 정자는 운치가 없다.
대학교때 후배들과 술에 취해
주책없이 풍월을 읊던 곳.
그때도 영릉에 갔었다.
옆의 삼층석탑은 고려말의 탑.
나옹선사를 화장한 장소.
'세월 흐른 뒤에야
가슴에 꽃으로 피어나는 것들이 있다
세월 흐른 뒤에야
가슴에 촛불을 밝히는 것들이 있다
때로는 안개로 밀려오고
때로는 낙엽으로 떨어지고
때로는 눈처럼 쌓이면서
세월 흐른 뒤에야
가슴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들이 있다
(양광모, 1963-, 가슴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들이 있다)
좁은 공간의 법당들은 수리중.
한 여당의원을 규탄하는 현수막.
종교계고 뭐고 조용한 곳이 한 곳도 없는
요즈음 우리 사회.
누구는 구한말과 같다고.
고려시대석탑이나 통일신라, 고려양식과 다르다고.
가운데가 나옹의 스승, 지공(-1363),
오른쪽이 나옹선사(1320-1376),
왼쪽이 무학대사(1327-1405).
지공과 나옹은 무학대사 스승.
지장보살이 주불이고
염라대왕은 사후 악인을 심판하고
벌을 주는 5번째 왕.
해는 늬웃뉘웃 지고.
집에 오니 7시 반.
이날 분리수거는 미안하게 마나님이 했다.
이날 걸은 거리는 20천보.
버스, 택시도 탔는데.
동갑내기 친구들 덕분에 영릉구경은
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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